< 39.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 [3] >
군대가 제 장비를 닦느라 분주했다.
창칼에 묻은 오물을 기름을 발라 광을 낸다.
기사들은 갑옷 때문에 할 일이 수 배였다. 그나마 종자들이 돕기는 했다.
소탈한 이는 종자와 함께 주저앉아 광을 내며 떠들고, 그냥 근엄하게 서서 눈을 부라리며 종자들이 하는 양을 구경하는 치도 있었다.
거기에 물 묻힌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하는 것이 전부 개선을 위해서다.
어차피 시간은 느긋했다.
왕자가 수도에 들고 이후에 승전한 군대가 깃발을 들어 찾아뵙는 그림이 좋지 않겠는가.
더는 군대를 위협할 적도 없기도 하고.
“이렇게 여유를 부려도 되겠는가?”
검위공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글쎄. 신하가 먼저 들어가 대기하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싶다만은.”
“검위공께서야 뭐어……. 왕가수호대가 단체로 야유를 나온 셈이네요. 먼저 가셔도 섭섭해하진 않을게요.”
“이제 볼 장 다 봤으니 가라 이건가? 오히려 이 늙은이가 섭섭해야지, 왜 자네가 생색을 내나?”
시엔이 간단히 농을 주고받으며 진영을 돌았다.
군대의 표정이 밝았다. 전쟁이 끝났으니까.
그리고 미약하게 풍기는 술 냄새 역시 군대가 여유롭다는 증거였다. 군율에 본디 술은 엄격하게 통제되는 것이기에.
그렇게 생각한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술을 또 풀지는 않았다.
“자네 술을 또 풀었나? 아무리 전쟁이 끝났다곤 해도, 내일 당장 수도에 들어야 할 텐데.”
“안 풀었습니다. 애초에 풀 것도 안 남았는데요.”
군대가 가진 것이라곤 싸구려 주정뿐이었다.
주정은 물과 섞으면 곧장 술이 된다.
큰 솥에 보리를 볶다 물을 쏟아부어 끓이면 그 향이 배어들고, 식힌 후에 주정을 부어 맥주 비슷한 그 무언가처럼 만들어 병사들에게 돌렸다.
그렇게 예비 몇 통을 두고 다 뿌렸다.
주정을 그대로 두면 소독이나 염 등에 쓸 수도 있었다. 그러니 몇 통을 남겨둔 것이고.
“전쟁이 끝났다고 무르게 구니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술맛을 본 것들이 정신을 차리겠나? 몰래 주정을 딴 게 아닌가? 군율이 땅에 떨어졌어. 쯧.”
“귀여운 수준이죠, 뭐. 전시도 아니고.”
“그렇게 넘어갈 일이 아닐세. 이런 때일수록 기강을 잡아야 하는 법이야.
좋은 때에 피를 보지 않더라도, 크게 혼을 내어 경각심을 주어야 하지 않겠나.”
검위공이 그렇게 말하니 그저 술 고픈 술꾼들이 사고를 쳤구나 하고 넘어가기도 그렇다.
시엔이 곧장 술내를 추적했다.
신체가 대체 어디까지 유용하게 변했는지.
그저 냄새를 잘 맡는 것. 그리고 냄새가 어디서 나는가를 알아채고 쫓는 일은 아예 다른 일이었다.
그야말로 개코, 짐승과 같은 감각이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
눈이 좋으면 매의 눈이니 하는데, 후각이 발달된 이는 왜 개가 되는가. 오감 중 하나로 둘 다 중요한 감각인데도 불구하고.
언어란 것이 본래 없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시각보다 후각을 천대하는 이유가 있다면, 가장 먼저 그 쓸모에 대해 고하를 따져볼 것이다. 생존 혹은 사냥에 있어서 시각이나 후각이…….
아. 논문 쓰고 싶다.
시엔이 잡생각을 떨치며 냄새의 근원을 찾았다.
푸른 천막. 염색한 천막 천은 그 주인이 천한 이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십 인용 큰 천막이니, 분명히 어느 기사단에게 지급된 물건이리라.
그런 것 치고는 기사단의 깃발이 서지 않았다.
‘야. 마셔! 쭉쭉 들어간다! 그래, 우리 막내!’
‘오오. 진짜 다 먹나? 그걸 다 먹는다고?’
‘내가 먹는다고 했지? 은화 한 개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주 신이 났다.
“아니, 이것들이…….”
검위공이 중얼거림이 들렸다.
깃발 없는 기사단이 하나 들어와 있지 않았던가. 동부 국경에서 탈주한 검위공과 제자들, 그러니까 전 왕가수호대였다.
시엔이 미묘한 웃음을 띠며 검위공을 바라보았다.
“군율이 땅에 떨어졌네요. 정말로.”
“크흠. 흠.”
“본래는 그냥 넘길 생각이었는데, 또 검위공께서 말씀하신 바가 있으니 크게 혼을 내야 할 텐데.”
“크흐음.”
검위공이 괜히 기침하는 척을 했다.
‘좋다! 우리 막내덕에 한 몫 챙기네!’
때를 맞춰 안쪽에서 들려오는 신난 목소리.
“내 오냐오냐 봐 줬더니만, 이것들을 아주…….”
검위공이 이를 갈았다.
시엔이 키득거렸다. 어떻게 봐줘기에 저 꼴인지는 모르겠지만, 왕가수호대에는 기사단보다는 용병대나 도적단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예전부터 들던 생각이었는데, 이제 보니 딱 그짝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이상합니다.”
“뭐가?”
“분명 왕가수호대 선배님들이 막내라고 하시면.”
베른닐이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검위공께 한 수 배우면 전부 막내라고 여기는 이들이라, 베른닐이 신나게 굴러다니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막내라고 하면 시엔의 수호 기사를 부르는 말이었는데.
그새 막내가 또 생겼나?
그 사이에 검위공이 천막의 입구를 거칠게 열며, 아니, 아예 쥐어뜯었다. 훤히 뚫린 입구로 들어가 크게 호통을 쳤다.
“이놈들! 뭣들 하는 짓들이냐!”
시엔이 천막 안을 들여다보았다.
순식간에 합죽이가 된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입을 굳게 다물고, 팔은 허리에 딱 붙였다. 다리 사이에 공간 없이 딱딱한, 교범에 나올 법한 차렷 자세가 아닌가.
그리고 그사이에 홍일점, 유일한 여인이 한 명.
“카레네?”
“음. 시엔. 그러니까. 읍.”
카레네가 입을 틀어막았다. 속에서 치미는 불미한 소리를 어찌어찌 막아내더니, 시선을 저 아래로 깔았다. 얼굴이 불콰한 것이 이미 꽤 마신 모양인데.
시엔이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본래 검위공에게 어떻게 한번 가르침을 받아보겠다고 그 주변을 기웃거리던 카레네가 아니던가.
그 열정, 혹은 집요함에 결국 몇 번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성에 차는 정도는 아니었겠지.
그러니 아예 제자들 사이에 끼어보자 전략을 바꿔본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누가 술을 풀었는지 알겠네요. 군율에 문제가 있는 바는 아니었던 것 같으니, 검위공께서 노여움을 거둬도 되겠는데요.”
귀족의 식사에는 포도주가 나온다. 아예 취하는 정도가 아니라면야 귀족이 술을 마시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귀족이 수하에게 한두잔 건네는 것도 문제는 아니었으니, 이번 일 또한 그렇게 넘어가자는 뜻이었다.
“아닐세. 보아하니 순진한 아가씨를 꼬셔 술판을 벌이자 바람을 넣었겠지.”
검위공의 말대로였다.
카레네가 술로 기사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냥 무턱대고 찾아가 대련을 하자, 그래도 몇 번은 가르침을 받았으니 후배가 됩니다,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이 정도였을 터.
물론, 너무 편하게 대한 것 같긴 하지만.
“내가 못 가르쳐 못 볼 꼴을 보였구먼, 이것들아. 당장 나가서 이 열 횡대로 대기해.”
“옙! 이 열 횡대!”
“알겠습니다!”
“이 열 횡대! 대기하겠습니다!”
왕가수호대의 곧장 복명하며 뛰쳐나갔다. 그래도 변명 한마디 없이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카레네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시선이 조금씩 내려가나 싶더니 어느새 정수리가 보일 지경이었다. 저러고 있으니 왜 측은하지.
시엔이 혀를 찼다.
대체 검술이 뭐라고 저리 열성인지.
“뭐 해? 검위공 말씀 못 들었어? 이 열 횡대.”
시엔이 한마디 보탰다.
그래도 그간 밉상은 아니지 않았던가.
“어?”
카레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네…….”
“매번 선봉으로 뛰쳐나가지 못해 안달인데, 저러다 언제고 큰일 치르게 생겼어요. 검위공께서 정신 좀 차리게 도와주세요.”
“너무 당연한 듯이 부려먹는 거 아닌가?”
“대신 이번 일은 못 본 것으로 하겠습니다.”
“에잉. 내가 제자복이 없어 말년에 고생이구먼.”
검위공이 툴툴거렸다.
그리고는 괜히 카레네를 흘겨보며 성을 냈다.
“뭐 하고 있어? 자넨 내 말 못 들었나?”
“아닙니다!”
카레네가 곧장 뛰쳐나갔다. 환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이 도대체 한 푸닥거리 받게 될 사람이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베른닐은 뭐 해?”
“제가 말입니까? 저는 아무것도…….”
왕국의 소드마스터에게 교육을 받을 기회는 흔치 않았다. 끼워 넣을 수 있을 때 끼워 넣어야지.
“그런 게 어디 있어? 선배들 뛰는데 구경만 하고 있으려고? 검위공, 제 호위 기사에게 배움을 내리셨다더니, 상태가 왜 이래요?”
“쯧.”
검위공이 혀를 차자, 베른닐이 사색이 되어 곧장 밖으로 향했다.
* * *
전날 야심한 밤까지 진영에 가쁜 숨소리가 떠나지 않았다나.
전쟁이 끝났음에도 혹독하기 그지없는 훈련으로 스스로를 단련하는 일부 기사들의 모습에, 다른 기사단들까지 합류해 진영이 온통 땀내로 가득 찰 지경이었다.
덕분에 기사들의 안색이 그리 좋지 않다는 점만 빼면, 개중에 특히 일부는 아예 다리가 떨려 어색한 걸음걸이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개선 준비는 끝이라고 할 수 있었다.
1왕자파의 명분에 따르면, 국왕이 늙고 노쇠하여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보좌하여 성심을 다해야 할 왕국의 대귀족이 그 의무를 저버렸다.
흐레이그 공작이 오히려 국왕을 겁박하고 속여 국정을 제 마음대로 휘두르니, 적법한 왕세자를 폐위하고 가문의 소생을 왕좌에 올리려 했다.
결국, 반역자는 공작을 뜻했다.
시엔이 그 공작을 사로잡았다고.
가장 큰 공훈이자 전쟁을 끝낸 영웅이었다.
그리고 영웅의 개선이란 누구보다 화려해야 했다.
좌우로 대로를 메운 인파가 손을 흔들며 함성을 질러 이름을 연호하고, 색색들이 물들인 천조각과 꽃이 연신 날아들었다.
내전으로 피폐해진 왕국에 어디서 제화가 솟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전에선 더욱이. 승리한 편이 제가 바로 정의였음을 주장하는 행사가 아닌가.
이로써 백성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아예 하루를 통째로 축제로 선포되었다.
개선한 군대가 일시 해산해 즐기도록 하고, 귀족들은 왕성에 들어 승전 연회에 참석했다.
모두 웃고 떠들며 들뜬 기색이었다.
그것도 오늘뿐, 내일부터는 논공행상을 위해 정치 싸움을 벌여야 할 테지만.
그러나 제일 수훈자는 이미 정해진 바였다.
왕자의 반응만 보아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시엔!”
왕자가 달려와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크흠, 하고 예의 우아한 예법 선생이 기침 소리를 내고서야 왕자가 움찔 손을 풀고 물러났다.
“이건 또 뭐야?”
시엔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붙어 있던 파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본래 입이 험한 편인 데에다, 인간 따위야 어차피 제 아래로 깔고 보는 어린 용이다.
어차피 둘 다 아직 덜 자란 아이로 보였다.
델피르가 아이와 청년의 어디쯤으로 훌쩍 크기는 했으나, 태도를 보면 오히려 키가 작은 파린이 더 어른스럽다고 여겨지니 결국 거기서 거기였지마는.
“넌 뭐야?”
“나? 나는 파린. 시엔의 피보호자이고.”
“나는 왕자야! 무례하게 굴면 안 돼.”
“나는 위대한 용이거든. 미개한 인간아.”
“거짓말!”
둘이 나누는 대화도 딱 그 수준이었다.
시엔이 둘 사이에 끼어들어 인사를 건넸다.
“전하. 안녕하셨습니까?”
“그대 덕분에. 그러니까. 그대의 노고를, 노고?”
“말씀 편히 하시지요.”
“어……. 그래도 될까?”
예법 선생이 고리눈을 뜨고 고개를 저었다.
시엔은 그냥 웃으며 그냥 무시했다.
과거 사라진 왕국의 왕자가 겪기로, 사실 예법이 뭐 도대체가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더라.
“그런데, 저이는 누구야? 용이라고?”
“쉿. 목소리가 큽니다.”
시엔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전하께는 특별히 말씀드리지요. 사실입니다. 천신께서 보호하라 사명을 내리셨던지라.”
“정말이라고? 농담이 아니라?”
“전하께서 어둠을 타고나신 것과 같이, 세상에는 여러 불가사의가 있는 법입니다. 그렇게 이해하시고 우리끼리의 비밀로 해 두시지요.”
델피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린이 기세가 살아 어깨가 한껏 치솟았다.
어쩐지 분한 듯 그 꼴을 보던 델피르가 말했다.
“하지만, 비밀이라며?”
비밀치고는 제 입으로 떠드냐는 소리였다.
시엔이 킬킬 웃으며 말했다.
“다른 이들에겐 정신이 나간 아이라 말합니다만.”
“그 소리 정말로 듣기 싫거든?”
“어쩔 수 없지.”
시엔이 파린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거 하지 마!”
파린이 질색을 하며 떨어지더니, 이내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 새로운 목표를 찾아 달려 나갔다.
근처에 있던 누렁이에게 덥석 안기고는, 손가락을 뻗어 음식을 가리키며 조종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전하께선 괜찮으십니까?”
“아. 저것들?”
연회장 위와 사방으로 퍼진 것들이 희뿌연 망령들이었다.
전쟁 중 죽은 이가 남긴 잔해들이 저절로 제 주인의 곁에 모여들었다.
“이젠 괜찮아.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습니까?”
“……조금 불쌍하긴 하지만.”
“훌륭하십니다.”
죽은 이를 가엽다고 여긴다면 성군이 될 자격은 충분했다. 그렇다고 거기에 휘둘리지도 않으니 더욱더 훌륭하고.
뭐. 성군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는 일이지마는.
시엔의 칭찬에 델피르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 모습에 귀족들이 부러운 낯을 했다.
차기 국왕의 총애가 보장되어 있으니 얼마나 그 속이 편하겠는가.
전쟁의 제일 수훈보다도 더 부러운 것이 저렇게 마음을 산 일이 아니던가.
“시엔. 여기 있었네요.”
“아. 공주님.”
세필리아 공주가 끼어들었다.
그녀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부르게 되어 있던가요?”
“슬슬 끝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혼삿길을 막았다 탓하실 생각이 아니시라면야.”
“하기야. 뭐.”
공식적이지 않은 연인 역할도 슬슬 끝낼 때였다.
이 자리에서 그랬다간 비공식 연인이 아니다.
당장 각 가문들이 미리미리 보내놓는 혼인 선물이 티란디스 영주성에 도착할 테니까.
“왜, 새삼 아쉽기라도 하십니까?”
“너무 잘난 것만 아니면야. 흠.”
세필리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나랑 결혼해서, 가주직 내려놓고 평생 놀고먹을 생각은 없어요? 시엔은 그냥 허수아비하고, 내가 전권을 쥐는 거지.”
“음?”
솔깃한 말이었다.
안 그래도 전후 처리부터가 골치 아프게 생겼다.
놀고먹으면서 연구나 하고, 그렇게 살면.
이거 생각보다 더 괜찮은, 아니, 이거야말로?
“어마마마처럼 왕국을 손에 쥐지는 못하더라도. 뭐. 티란디스 가문 정도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해.”
“왕국에서 일개 후작가라니. 눈을 많이 낮추시겠단 말로 들립니다만.”
“당연히 일개 후작가에는 관심이 없는데.”
세필리아가 작게 속삭여 말을 이었다.
“대공가의 실질적 주인이라면 다르지 않겠어요?”
< 39.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