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 [2] >
서부 귀족군 주력부대는 왕도 최종 방어를 공략 중이었다. 공략 속도는 더뎠으나 계속해서 소형 요새를 함락시켰다.
그러면서도 총사령관 엘와즈 백작은 북부의 소식에 촉각을 기울였다.
그리고 시엔 티란디스가 이끄는 사천여 명의 군대가 흐레이그 직할 도시 강스트프레의 영주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놀라운 일이다.
하나, 그럴 수도 있겠지.
엘와즈 백작이 그렇게 생각했다.
티란디스의 대공자에게 붙은 별명이 보통이던가.
공성 파괴자라는 거창한 수식.
별명이란 결과와 기대를 합하여 붙는 것이다.
대공자는 이미 루우트다렌 공방에서 그 진가를 보였다.
그리고 그 결과, 공성전에 있어서는 비범한 모습을 보여주리라는 기대를 담은 별칭이었기에.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그 소식을 받았으니 지금은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난 이후이리라.
아무리 빠른 전령이라도 일주일은 말을 갈아타며 달려야 닿을 거리였으니까.
북부의 주력, 삼만여 명의 군대가 북상하지 않았던가.
대공자의 병력은 사천여 명에 이르니 단순 비교만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는 숫자다.
결국, 스스로의 목숨을 건 유인 작전이었다.
흐레이그 영주성의 방어 상태는 모르겠으나, 암만 강력한 요새라도 압도적인 병력 차 앞에서는 그저 버티는 것이 최선일 테니까.
대공자는 공성 파괴자이지 수성 파괴자는 아니지 않던가.
“대공자가 잘 버텨 줘야 할 텐데.”
생각보다 왕도의 방어가 튼튼했다.
계속해서 적을 밀어내고는 있으나, 진행 속도로는 적어도 열흘은 걸리지 않겠냐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북부에서 전령이 도착했다.
“승리……? 그게 무슨 말이냐, 승리라니?”
“그 말대로입니다! 저희가 이겼습니다!”
“아니, 어떻게?”
엘와즈 백작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휘 막사의 귀족들도 알쏭달쏭한 표정이었다.
“대공자가 승리했다고?”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내전이 끝난 거 아닙니까?”
지휘 막사가 술렁였다.
엘와즈 백작이 이마를 짚었다.
이러면 원하던 그림이 아니다.
병력을 쏟아부어 왕성을 함락시키는 와중이 아니던가.
게다가 열흘, 열흘이면 왕성의 문을 부수고 진입할 예정이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이 모두 공로가 아니던가.
가장 먼저 왕성에 진입하고 델피르 왕자를 모시는 그런 일이.
“진정하고, 자세히 말해보게나.”
엘와즈 백작이 흥분한 전령을 진정시켰다.
전령 역시 정신이 확 든 상태였다.
승전의 소식이었다.
제 몸 힘든 것도 잊고 달려온 참이었다. 소식을 받아 환호하며 기뻐하리라 생각하며.
그러나 정작 그 소식을 받는 높은 분들께서 미묘한 반응이니, 급히 흥분이 식고 이성이 돌아왔다.
“총사령관님이 단신으로 적진으로 향하셨습니다.”
“티란디스의 대공자께서? 홀로 말이더냐?”
“검위공께서 함께하셨다고 합니다만.”
“음. 그럼 단신……이 맞나?”
귀족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본래 단신으로 적진에 향한다는 말에는, 그 호위 병력을 세지 않는 법이었다.
그런데 왕국의 소드 마스터가 함께했다면, 그건 한 사람으로 쳐야 하는지 아니면 호위로 쳐야 하는가.
“흠흠. 그래서, 이야기를 계속하게.”
“그 자리에서 공작의 죄를 물어 크게 꾸짖었으며, 이에 북부의 귀족 셋이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엘와즈 백작이 눈만 끔벅거렸다.
내가 지금 제대로 된 소리를 듣고 있나?
무슨 영웅 서사시도 아니고, 단신으로 적진에 가 적장을 꾸짖었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치고.
그런데 부끄러움을 느껴 귀족 셋이 이탈했다고?
그게 말이 되나?
엘와즈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겼다고 하지 않았는가.
역사는 승자가 쓴다고. 전공의 포장 역시 귀족의 소양이었다.
“그래서? 이후는 어찌 진행되었지?”
“이탈한 귀족의 일만 군대를 제외한, 이만여 명의 북부 주력군이 아침에 곧장 공성을 개시했습니다.”
“적 병력 셋 중 하나를 줄였다라.”
“아침부터 심야까지 전투가 있었습니다. 아군의 피해 오백여 명, 적군 피해 구천여 명으로 추정.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아니, 그게.”
들을수록 기관이었다.
이쯤 되면 전령이 가짜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승리했다며 방심을 유도하고, 나중에 북부군이 내려와 싹 쓸어버리려는 수작이 아닌가 하고.
“그렇다고 해도 삼천오백. 북부의 군대가 일만이 넘게 남았는데 결판이 났단 말인가?”
수성이란 상대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고 곤장 판정해 누가 이겼다 하고 결론이 나지 않았다.
공성 측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철군하거나, 아니면 수성의 군세가 밖으로 나와 적을 물리쳐야 비로소 승리했다 선언할 수 있었으므로.
“그때 중립을 선언했던 귀족 셋이 적진에 다시 합류했으나, 이는 양심을 이기지 못해 불의한 전쟁을 끝내고자 결단을 내린 것이라 합니다.”
사발디 백작 외 2인의 북부 귀족이 다시 적군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는 거짓이었으며, 이후에 곧장 사령부를 제압했다.
비열한 방식이긴 하나, 불의한 전쟁을 끝내기 위한 양심적인 결단이었다고.
흐레이그 공작을 사로잡았으며, 또한 여타 북부 귀족들도 항복의 뜻을 전했다.
“현재는 전향한 북부 귀족군과 합류, 만사천으로 증편한 군대로 남하 중입니다.”
“허어. 그렇게 되었나.”
엘와즈 백작이 감탄했다.
단신으로 적에게 일갈하였느니, 공성전의 말이 안 되는 교환비야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적의 내분을 유도해 병력을 갈랐다.
양심이 어쩌고는 순진하게 믿지 않더라도, 그들과 어떤 거래 등의 수단으로 전향을 시켜 지도부를 한 번에 제압했다는 뜻이리라.
찬사가 아깝지 않은 계략이었다.
전향이야 거의 결론이 난 전쟁 막바지에 패배자 진영에서 승리 측으로 옮겨오라 했으니 설득의 여지가 있는 일이다.
물론 여지가 있다 하나 그걸 적 사령관 몰래, 그리고 직접 시도한 일 자체가 대담하기 짝이 없다.
공작이 몰랐다면 당할 수밖에는 없었을 테고.
“수고했네. 희소식을 전달하느라 지쳤을 터이니, 가서 쉬도록. 이봐, 당번병. 이이에게 좋은 천막과 식사를 제공하도록.”
“알겠습니다.”
당번병이 전령을 이끌고 지휘 천막을 떠났다.
그리고 나니 침묵이 맴돌았다.
한참 후에야 엘와즈 백작이 입을 열었다.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대로 진군해 왕성을 함락시키는가, 아니면 전령을 보내 알리고 항복을 권유하겠느냐.
그러한 질문이었다.
“아무래도 왕성을 함락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대로라면 티란디스에게만 공로가 갈 터인데.”
“잃은 군대가 벌써 이만이 넘었습니다. 서부 측과 합산하면 근 사만에 가까운 피해가 아닙니까?”
남부 귀족들의 주장이었다.
서부와 남부의 군대가 만나 합류했으니 지휘 역시 연합해 구성한 이후였다.
이대로 전쟁을 끝내기엔 공훈이 영 아쉽다.
특히나 잃은 군대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처음부터 1왕자를 지지한 서부 귀족들과는 달리, 남부 귀족들에겐 영 맹탕인 승리가 되고 말 테니 더 진격하자 입을 모았다.
“티란디스의 대공자가 그래도 교단에 이름을 올려 무익한 피해를 혐오하는 성향이 있지 않습니까?”
“대공자는 전하의 제일 측근입니다. 분노를 사면 공훈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미 사만을 잃었는데, 왕성 공략을 계속한다면 앞으로 일만은 더 잃어야 할 겁니다. 안 그래도 가뭄에 내년을 도모하려면 사내가 모자랄 겁니다.”
귀족 셋 중 하나는 반대의 뜻을 밝혔다.
시엔의 군대가 남하 중이면서도 굳이 급히 전령을 보내 알린 뜻이 무엇이겠는가.
전쟁이 이미 끝났으니 무익한 피를 흘리지 말자.
혹은 내 공로가 제일 크니 이쯤 멈추지 그러냐.
엘와즈 백작이 고심 끝에 결론을 내렸다.
“대공자는 아직 젊습니다. 우리가 모두 은퇴하여 작위를 물려주고 나서도 대공자는 현역이겠지요.”
“크흠.”
“전하께서도 왕위에 오르셔 긴 통치를 이어가시겠지요. 그러니 차후를 생각하면 이쯤 끝내는 것이 낫겠습니다만.”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만.”
“거기에 왕성이 항복에 응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진격해야 할 겁니다.”
엘와즈 백작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총사령이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제 입장은 이렇습니다. 중요한 문제니 다수결로 진행하도록 합시다. 진격에 찬성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이에 귀족들이 손을 들어 올렸다.
얼마 후, 군대가 공세를 멈추고 물러나 재정비에 들어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물러서는 군대 사이, 비장한 표정의 전령이 홀로 앞으로 나아갔다.
* * *
왕도를 방어 중이던 동부 귀족군 수장, 뱅가 공작이 적의 전언을 받았다.
흐레이그 공작 생포. 만사천 군대가 남진 중.
즉시 항복하고 성문을 열 것.
“하하…….”
뱅가 공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나오는 것이 웃음뿐이다.
“공작님?”
“괜한 욕심에 화를 불렀군. 내 자네들에게 면목이 없어. 이 늙은이가 주책이었지. 케이트가 무사하다 했을 때 물러났어야 했는데.”
뱅가 공작이 자책했다.
“아닙니다, 각하. 남부가 델피르 왕자를 지지하고 난 후였으니 저희가 어떤 선택이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영애께 몹쓸 짓을 한 이가 누구인지 아직 명확히 밝혀진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남부 귀족들이 오히려 위로했다.
그래도 공작이 기본적으로 어진 인물이었기에.
공작위를 가졌음에도 그 가세가 오히려 후작보다 모자라다 평가를 받는 이유가 바로 어진 치세 때문이 아니던가.
어울리지 않는 욕심이 화를 불렀다.
“아닐세. 본래 집단의 결과가 그 머리의 잘못이 아니겠는가. 내 공작위를 반납하는 일이 있더라도, 자네들에게 피해가 덜 가게 막아 보겠네.”
“각하…….”
“자네들이 병력을 이끌고 폐하를 모시게나. 그나마 자네들에게 면죄부가 되어 줄 것이니. 그래야 왕실의 군을 제압할 수 있을 테고, 성문을 열어야지.”
말이야 모시라고 하지 인질로 제압해 확보하라는 뜻이었다.
적어도 항복 과정에서 그나마 패배자가 면책을 바랄 수 있는 공로였으니까.
* * *
국왕의 집무실.
난데없이 들이닥친 기사들이 호위를 제압하고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검위공과 그 제자들이 왕가 수호대를 맡아 번을 서던 때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어지간한 병력을 투입해 봐야 오히려 역공을 맞았을 테니까.
그러나 그 실력자들은 이미 쫓겨난 지 오래였다.
남은 근위대는 정예정이기는 하나 동부의 기사단장급 인사들 앞에서는 쭉정이들이나 다름없었다.
“무슨 짓들이냐! 무엄하다!”
“죄송합니다, 폐하. 저희가 호위하겠습니다.”
호위한다고? 멀쩡한 근위대를 붙잡아 꿇리고는 왜 동부의 기사들이 호위를 맡는다는 말인가.
왕의 시종들이 줄줄이 묶여 끌려나가고 나서야, 국왕이 상황을 알아차렸다.
“이 반역자들! 감히!”
“저희는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네놈들! 고얀!”
국왕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갑옷을 갖춘 기사에게 휘두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먹이 박살이 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알현실로 모시겠습니다.”
“웃기지 마라! 내가 그러한 뜻이 없거늘, 어찌 너희가 날 모시겠다고 말하느냐!”
“폐하. 소신들의 불경함을 용서하시옵소서.”
기사들이 국왕의 양팔을 붙들어 번쩍 들었다.
“놓아라! 내 발로 가겠다!”
국왕이 그제야 소리쳤다.
아무리 상황이 이렇게 되더라도, 일국의 왕이 질질 이끌려 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기사들이 순순히 내려놓았다.
국왕이 알현실로 향했다. 기사가 앞을 막았다.
“송구합니다, 폐하. 이쪽이 아닙니다.”
“뭐라?”
알현실의 입구는 둘이었다.
왕좌 뒤편으로 왕족이 출입하는 통로.
그리고 긴 대전 너머에 알현실 정문이었다.
기사가 가로막는 것이 왕족 전용 통로였다.
즉, 알현실의 정문으로 가라는 뜻이 아닌가.
“노옴! 감히 왕의 앞길을 막느냐!”
“송구합니다, 폐하.”
“빌어먹을 반역자 놈들……!”
국왕이 몸을 팩 돌렸다.
더 소리쳐 봐야 또 붙들려 질질 끌려갈 것이 분명했다.
수치스럽고 분노가 치밀어도 제 발로 가는 것이 나았으니까.
왕궁의 복도를 지나, 알현실 앞에도 동부의 기사들이 이미 자리를 차지한 이후였다.
기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여나, 국왕이 보기에는 전부 가증스러운 반역자들일 뿐이었다.
사실, 국왕의 시점뿐 아니라 실제로도 그러했지만.
그리고 알현실의 정면.
“너, 네년……!”
“어머, 반역자라니. 폐하께서 참 입이 험하시지. 충신들께서 얼마나 속이 상하실까.”
왕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여인이 대꾸했다.
알린 위피 페벨룬 타스테스테.
별궁에 유폐되었던 1왕비.
알린 왕비가 의자의 손받침을 쓰다듬었다.
“어쩜 이리도 고급스러울까. 편안하고…….”
그리곤 국왕을 바라보며 웃었다.
“폐하께서 이 좋은 자리를 독차지하고 계셨는지 알 것도 같답니다.”
“너, 네년……!”
“품위를 지키셔요, 폐하. 일국의 왕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당해야 하는 일이거늘.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실제로 왕비가 항상 하던 잔소리였다.
여기서 대꾸해 봐야 추해질 뿐.
국왕이 대답 대신 이를 갈았다.
“폐하.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왕비가 탄식을 터뜨렸다.
그러나 안타깝다는 느낌은 추호도 없는, 조롱에 불과한 말투였다.
“저희는 좋은 부부가 아니었던가요? 폐하께 강력한 왕권을 쥐여드린 이가 바로 소녀였거늘, 의리를 그렇게 저버리실 줄은 몰랐답니다.”
“그건 내가 할 말이지.”
“어머? 폐하께서요? 그러니까 소녀의 잘못이다?”
“내 왕비의 부정까지는 간섭하지 않았지. 당신의 말대로 우리는 좋은 한 쌍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부정의 결과물을 왕좌에 올리려는 만행까지 참아야 했단 말인가?”
알린 왕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불쌍한 레이알드. 당신께선 어째서 항상 그렇게 옹졸하고, 편협하고, 또 어리석은지.”
“뮛이……!”
“델피르는 폐하의 아이예요.”
“또 짐을 기만하려는가.”
“멍청한 당신.”
알린 왕비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도 소녀가 사는 이유를 알고 계시지 않았던가요? 타스테스테에서 팔아넘긴 공주, 그래서 내 자식만은 기필코 왕좌에 앉히겠다는 그 하나로 살았음을.”
“내 알았기에 언제고 이러리라 생각했지.”
“알았다면 그 터무니없는 의심부터 지우셨어야죠. 그 목적으로 사는 어미가, 자식의 태생부터 결함을 지우리라 생각하셨다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으셔.”
“그건…….”
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설마? 정말로?
그 표정에 왕비가 가엾다는 듯 딱한 표정을 했다.
“정말로, 당신께선 아직도 순진하시기도 해라.”
“너, 네년, 네년, 어억!”
국왕이 뒷목을 잡았다.
그제야 알아챈 것이다.
왕비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국왕과 왕비가 만나는 자리를 지켜보는 눈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불경한 소문이 그저 국왕의 편집적인 의심병,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이런, 폐하께서 편찮으신 모양이셔. 경들은 당장 폐하를 별궁으로 모시고 궁의를 불러들이세요.”
“예, 마마.”
기사들이 급히 국왕을 들어 별궁으로 향했다.
왕비가 유폐되었던 바로 그 장소로.
* * *
전쟁이 끝났다.
시엔이 왕도를 향하던 도중 소식을 접했다.
동부 귀족들이 국왕을 유폐하고 곧장 항복했으며, 이에 왕성이 함락되었다고.
그리하여 군대가 곧장 진군을 멈췄다.
투구들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승리의 함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승리의 환희와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가 한데 뭉친 괴성들.
군대가 무장을 풀고 옷차림을 정돈했다.
가장 가까운 도시에 들러 식량을 아낌없이 풀었다.
물을 탄 것이라곤 해도 술이 돌았다.
하루를 그 자리에서 잔치를 벌이며 쌓인 피로를 풀었다.
시엔의 입장에서야 급할 이유가 없었다.
왕성에 빨리 들어가 봐야 무엇하겠는가.
차라리 느긋하게 시간을 잡는 편이 낫다.
델피르 전하께서 먼저 왕성에 든 이후에, 입성해 곧장 알현하는 편이 그림이 좋기도 했고.
사실 무엇보다, 시엔이 그간 적지 않게 지쳤다.
혼자 돌아다니며 마음대로 때려 부수던 때가 낫지.
아래에 머리를 수천이나 달고 돌아다니려니 아주 온갖 자질구레한 보고부터 시작해 보급이니 사기니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그러나 이제 다 끝났다고 하지 않나.
일단 하루 푹 쉬며 늘어지게 잠이나 자야겠다고.
< 39.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