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00화 (196/268)

< 39.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 [4] >

대공가? 시엔이 되물었다.

“듣지 못한 소식입니다만.”

“이제 들었네요. 어때요, 괜찮지 않아요? 어머니 눈치 좀 보다가 나중에 독립해 버리고. 막 이래.”

“지금의 작위로도 대단히 만족스럽습니다만.”

“진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매력이 없어요?”

세필리아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머리는 비고 야망은 커야지. 사내가 말이에요.”

“보통 그런 걸 매력이라 합니까?”

“세상엔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매력이 있는 법 아니겠어요?”

“그건 인정하겠습니다만.”

시엔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매력을 강요해서야 되겠습니까.”

“연인이 별거겠어요? 서로에게 맞춰주고. 최소한 노력이라도 하는 거. 그런 게 연인이잖아요?”

“공주님께서도 그리하실 겁니까?”

“그야 물론.”

뭐 그리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태도였다.

“일단 배후의 지배자가 되려면 먼저 그 대상부터 사로잡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사내가 좋아하는 여인상 정도야 얼마든지 맞춰줄 수 있지.”

“호오. 사내가 좋아하는 여인상 말씀이십니까?”

“교태가 철철 넘치는 귀여운 연인. 아니면 뇌쇄적인 요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이라던가.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뭐. 문제없어요.”

“과연. 아아~주 잘 알았습니다.”

시엔이 대충 맞장구를 쳤다.

다른 이도 아니고 세필리아가 하는 말이 아닌가. 지금까지 옳은 말을 한다 싶더니 마지막에 신뢰가 팍 꺾였다.

교태가 아니라 당당함이 철철 넘치는 여장부겠지.

세필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알기는.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요.”

“전혀 상상되지 않음을 어떡하겠습니까.”

“안 믿는 모양인데. 주문만 해 봐요. 곧장 이상형으로 단숨에 변모해 줄 테니까요.”

“그럼 첫 번째였던, 교태가 철철 넘치는 귀여운 여인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쪽 취향이었어요? 좋아. 잠깐만 기다려 봐요.”

세필리아가 심호흡을 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눈을 감고 입술을 달싹거리니 일종의 자기 암시를 하는 모양인데.

시엔이 생각하기로는 벌써부터 틀려먹었다.

매번 변신을 시도할 때마다 이리 뜸을 들일 생각인가? 자신이 연기하고 있다고 주장할 셈이 아니라면야.

마침내 세피가 눈을 떴다.

당찬 인상이 어느 정도는 사라졌다 싶더니, 애교 어린 미소가 배시시 번져나간다. 그리고는.

생각보다 그럴듯한데?

“아이, 세피는요, 그, 그러니까 세, 세피는…….”

그러면 그렇지. 시엔이 굳이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게 끝입니까?”

“연습할 때는 잘 됐는데. 막상 하려니 안 되네.”

시엔이 키득거리자, 세필리아가 발끈해 말했다.

“그거 말고. 다른 거로 해요. 다른 건 자신 있으니까.”

“그럼 두 번째인, 뇌쇄적인 요부였습니까?”

“좋아요. 보고 반하지나 말아요.”

세필리아가 다시 눈을 감고 암시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게슴츠레 풀린, 그윽한 눈빛으로 유혹의 손길을 뻗어오다가.

푸흡. 제가 생각해도 웃겼는지 곧장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큭, 잠깐. 이거 아니고”

“연습을 더 하셔야겠습니다만.”

“아, 자존심 상하게.”

“세 번째도 도전해 보시겠습니까? 순진한?”

“내가 지고는 못 사는 거 알죠? 잠깐만요. 후우. 풉, 후우우우.”

웃음기가 좀체 가라앉지 않는 모양인지, 세 번째 암시는 조금 길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떠, 한껏 동그랗게 뜬 눈으로 천연덕스럽게 콧소리를 섞어서.

“그러니까 세피는 말이에요.”

“아니, 첫 번째랑 똑같잖습니까.”

“뭐, 교태나 순진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사내의 이상형이라는 부분부터 다시 연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런 거예요.”

세필리아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상히 말했다.

그러나 귓불이 이미 새빨갛다.

아닌 척해도 수치를 알기는 하는 모양.

“오해하지 말아요. 진짜 오늘 몸 상태가 영 별로라 그래. 슈피랑 샤펠도 어쩜 그렇게 사람이 바뀔 수가 있냐고. 진짜로 소름 돋는다고 했는데.”

세필리아는 억울했다.

슈피레아와 샤페리아, 그러니까 두 여동생 앞에서도 시연해 본 참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자매들이 보낸 찬탄과 찬사란 실로 대단한 것이었기에.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너무 창피해서 도저히 연기에 몰입할 수 없었다.

“두고 봐. 내가 지고는 못 사는 성미인 거 알죠?”

“그걸 또 시도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와, 이 남자. 이렇게 나오시겠다?”

“뭐, 나름 재미있었으니, 좀 더 실력을 키운 이후에 도전하시지요. 얼마든지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나중에 두고 봐요.”

세필리아의 눈에 맹렬한 호승심이 떠올랐다.

이게 불타오를 일이던가? 시엔이 한숨을 삼켰다.

“그나저나, 저희가 무슨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습니까? 분명 대공이라 하셨습니다만.”

“아, 내 정신 좀 봐. 어마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셔요. 자세한 사항은 어머니께 듣게 될 거예요.”

* * *

시종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장소가 집무실이었다.

국왕의 집무실이었다.

왕비가 기다릴 장소로는 적절치 않다 하겠지만은.

사실 델피르 왕자가 왕세자위를 복권한다 해도, 당장 왕위에 오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광증에 걸린 왕자는 왕세자가 마땅히 배워야 할 것들을 아직 익히지 못했다.

그리고 시엔이 생각하기로는 당분간은 그간 누리지 못한 아이의 삶을 더 즐겨야 할 권리도 있었고.

한 왕국의 후계자란, 직접 겪은 입장에서 참으로 고된 일이라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

그러니 실권을 쥘 이는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도 갖췄으니.

그래도 국왕이 유폐되자마자 집무실을 꿰고 있으니 뜻하는 바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섭정이 집무를 행한다 해도, 본래 국왕의 자리는 침범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럼에도 왕비가 집무실을 꿰차고 앉았으니, 본래 말보다는 행동이 그 뜻을 강력히 전하는 법이었다.

“마마를 뵙습니다.”

“어서 와요. 내 충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충신이라 하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충신 중에서도 내 제일가는 충신이지요.”

왕비가 미소로 시엔을 반겼다.

알린 위피 페벨룬 타스테스테.

알린 왕비는 여전히 꼿꼿하고 기백이 넘쳤다.

저 사나운 듯한 인상은 장녀인 세필리아에게 물려준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델피르나 다른 공주들은 여리여리하니 아무래도 닮았다는 느낌이 옅다.

“내 오래 생각했던 바가 있는데, 공자께서 듣고 의견을 들려주길 바라요.”

“경청하겠습니다.”

“공자가 큰일을 해내느라 바빴음을 내 알고 있답니다. 그러느라 이미 혼기를 넘겼으니 또한 더욱 미안하고, 마음이 아픈 일이에요.”

곧장 본론이 날아왔다.

어째서 왕비가 마음이 아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시엔이 아무런 생각이 없음에도.

“내가 듣기로는 큰아이와 사이가 좋다던데요.”

“유별난 것은 아니고, 우정이라 할 것입니다.”

“어머나. 남녀 사이에 우정이라니요. 공자가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흐음, 아니야. 세피 그 아이가 워낙 야심이 크니 대장부와 같은 기상이 있기는 해요. 우정이 싹튼다 해도 이상하진 않겠지요.”

“정확하십니다.”

“공자, 이럴 때는 부정해야 하는 법이고, 그것이 예의랍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심을 참으로 몰라.”

“송구하옵니다, 마마.”

왕비가 인자하게 웃었다. 사실 워낙에 쎈 인상에 어울리지는 않는 미소였다.

“제일가는 충신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할까요. 내 고심 끝에 대공위를 내리는 것이 좋겠다 생각이 들어서.”

“대공 말씀이십니까.”

대공이라는 작위는 대단히 애매하다.

공작 이상 국왕 미만의 기이한 작위.

일단 공국의 지배자들을 대공이라 불렀다.

사실 공국이 독립국이라고 하기엔 모자라다.

사실상 그 뿌리가 된 왕국과 종속된 관계에 있으니 왕이라 칭하기는 모자라고, 그래도 일국의 수장이니 공작이라 부를 이는 아니다.

그러니까 대공.

아니면 강제로 작위를 따내는 경우였다.

왕실과 힘을 겨룰 수준의 영토, 권력, 군대.

이러한 힘을 가진 대귀족이 왕실을 압박해 대공위를 받기도 했다.

이후 정치적 다툼 후에 공국으로 독립하거나 아니면 밀려 몰락하는 결과가 되지만.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명예로운 작위에 그치기도 했다.

그러나 작위가 한 번 내린 후에 거두기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암만 총애하는 신하라 해도 그 충심이 대대손손 이어지리라는 보장도 없거니와.

“마침 북부의 큰 귀족으로 은혜를 입은 이가 감히 역심을 품어 축출되었으니, 그 영지가 지금 주인을 잃은 빈 땅이랍니다.”

왕비가 말을 이었다.

“거기에 더해 북방의 국경까지 닿는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주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이, 왕국이 지상에 나온 이후 사상 가장 큰 영지가 만들어질 테지요. 대공 작위에 어울릴 정도는 되겠지요?”

기존 흐레이그 영지를 북으로 국경에 닿도록 늘려 수여하겠다는 뜻이었다.

기존의 흐레이그 영지가 왕국에서도 가장 넓은 편임에도 그 두 배 가까이 확장이 되는 셈이었다.

영지 전부가 비옥한 옥토이며, 그로 인한 인구의 부양 역시 그 수준이 달랐다.

사실상 공국의 지위를 약속하는 바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공짜로 주겠다는 것이 아니다.

세필리아 공주가 가져오는 지참금이었다.

만약 시엔이 받아들이게 되면, 시엔은 대공으로서 왕실의 계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유사시에 왕위 계승권까지 가지는 막대한 권력이었다.

물론, 그로 인해 왕비 역시 이득을 톡톡히 볼 수 있었다.

북부 귀족들 사이에 심복을 끼워 넣을 수가 있었다. 시엔이 알아서 제압해 억누르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되면 왕국의 곡창이 온전히 왕실에 속하게 되고, 결국 전대미문의 강력한 왕권을 휘두를 수 있을 테니까.

시엔에게는 딱히 고민할 거리도 되지 않았다.

“분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물러주시기를 간청드리겠습니다.”

“어머나. 어째서지요? 가문의 위상을 대륙에 떨칠 기회가 아닌가요.”

“지금의 영지를 간수하는 일도 골치가 아플 지경이니, 어찌 벅찬 업무를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왕비의 눈썹이 떨렸다.

“거절이라. 우리 모두에게 좋은 제안이라 여긴 것이랍니다만, 그렇기에 내가 명령을 내릴 수도 있을 거예요.”

“하명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습니다만.”

“그러나 내 충신이 싫다는 데에 억지로 맏기기도 저어한 일이로군요. 그러니 어떤 연유인지 진실하게 말해줄 수 있겠나요?”

시엔이 잠시 말을 골랐다.

이걸 어찌 포장해야 할까.

그리고 결국 결론을 내렸다.

포장은 무슨 포장.

“사실, 귀찮습니다.”

“귀찮다니요?”

“천신께서 세상에 귀한 피를 차등으로 두셨으니, 위로 왕을 섬기고 아래로 영민을 보살피라 하셨습니다. 그러하니 큰 영지를 가지는 것이 곧 보살필 이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그게 진심이에요?”

시엔은 태연했다.

“세상에. 진심이야. 진심이로군요.”

왕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 공자가 보여준 행보들이. 이제야 이해가 조금 되네요. 그러한 것이었군요.”

“티란디스는 충분히 부유합니다. 마음껏 사치해도 가산이 남아돌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공자는 좀 더 욕심을 부릴 필요가 있어요. 공자야 그렇다 치고, 후대로 탄탄한 영광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나요?”

“딱히 생각해 본 바는 없습니다만, 자식이라도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시엔이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왕비가 이마를 짚었다.

“왕가가 충신을 홀대하는 그림이 나와서는 곤란한 노릇이에요. 영지는 필요 없다……. 조세권 정도는 반갑게 받겠나요?”

“감사한 말씀이십니다.”

“거기에 대공위도 제수하겠어요.”

그냥 명예직으로 받아두라는 뜻이었다.

세상에 명예직만큼 편리한 것도 없었다.

명예 성자라고 교단에게서 누릴 것은 다 누리고 해야 할 의무는 희박하지 않았던가.

명예 대공이라면야 내가 더 작위가 높으니 할 말 다 하고 편히 살면서도 어차피 지금에서 더 짊어질 의무도 없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일단 작위를 내리시면, 후에 회수하시기 어려울 것입니다만.”

“받는 이가 할 소리였던가요? 그러나 공자가 영지는 귀찮다 하니 어쩔 수 없이 그라도 해야 왕가가 체면이 살겠지요.”

포상이란 위엄의 수단이기도 했다.

가장 큰 전공을 세운 이에게 화려한 포상으로 화답하는 것은 곧 전체의 충성을 끌어내기도 하기에.

어쨌거나 왕비로서는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시엔이 말하기를 위로 왕을 섬긴다 했으니, 먼저 배신하지 않으면 끝까지 따르겠다고 말한 셈이다.

“이만 물러가도록 해요. 공자 덕분에 정국을 다시 짜야 할 판이니, 공연히 내 일거리만 늘어난 셈이로군요.”

“송구스럽습니다, 마마.”

“말이나 못 하면.”

이렇게 되면 후작가의 작위를 이어받기에는 실패하고 만 셈이었다.

새로 등극한 대공이 본래 가진 땅을 취하는 형태가 되고 말았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소개문에 글귀 하나를 더하는 일이었다.

왕국의 대공이자 또한 왕국의 후작, 티란디스의 주인 뭐 이런 식으로.

그러나 뭐 어떠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 39.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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