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대단원 [8] >
시엔과 공작의 전술이 달랐다.
시엔의 전술은 피해의 최소화가 목적이었다.
적은 숫자로 적을 지연시킨다. 그렇게 붙잡아 둔 적들을 지형의 유리함으로 피해를 누적시키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불리하면 물러나라. 성벽 몇 개는 내어줄 것이다.
자리가 아닌 목숨을 사수하라는 전술이었다.
공작의 전술은 정반대였다.
시체로 적을 돌파할 것. 적의 성채로 들어간 군이 애초부터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없었다.
그저 하나라도 더 붙들어 죽인 후에야, 삶의 끝으로 임무를 완수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래서 둘의 기세 역시 달랐다.
목숨을 우선하여 물러나는 이와,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드는 군대의 차이.
시엔의 군대가 점점 뒤로 밀렸다.
태양이 하늘의 절반을 가로질렀을 때, 이미 두 개의 성벽이 점령되었다.
시엔이 보루 위에서 바라보며 혀를 찼다.
“무식한 전술이네.”
“원래 공성전이 이렇지 말입니다.”
호위 기사 베른닐이 후렴을 붙었다.
여기가 전장 가장 높은 곳이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전황을 살피는 절세의 미남이다.
이 전쟁이 서사시의 일부분이라면, 아마 주인공쯤 되는 인사겠구나 할 정도로.
물론, 현실은 이름 없는 기사 1에 불과하겠지만.
시엔이 코웃음을 쳤다.
“누가 들으면 전쟁 좀 치른 놈인가 하겠어.”
“그야 도련님 호위에 바빠서 그런 거 아닙니까? 아니었으면 아마 왕국 기사 중 제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을 겁니다. 떠오르는 별. 베른닐 스타돌.”
“그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걸? 내려갈래?”
“허락해 주십니까? 해가 지기 전에 적장의 목을 대령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엔이 키득거렸다.
어차피 안 보내줄 것 아니까 막 던진다 이거지.
“노림수가 있긴 할 텐데. 도무지 알 수가 없네. 겨우 투석기만 믿고 이러는 건 아닐 테고.”
“그나마도 저네들이 부숴 먹었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한 대는 남았잖아. 여길 노리겠지.”
“그런데 여기 계속 있으셔도 괜찮습니까?”
“다가오는 것 같으면 날려버리면 되니까.”
“아.”
시엔의 군대가 약 사천이었다.
적의 군대가 삼만이었고, 개중 일만이 이탈했다.
공작이 이끄는 군대는 이만 명 정도.
전략가들이 말하기로 수성에는 성벽 한 장으로도 세 배의 적을 막아낸다고 했다.
마법사나 기사와 같은 비대칭 전력이 비슷할 때.
그리고 적의 공성 병기에 대응할 방어 시설, 해자 같은 것이 준비된 상황에서 하는 말이지만.
그러나 영주성은 보통 성채가 아니었다.
이 정도 규모의 성채를 함락시키려면 적의 병력이 온전한 상태라도 장담할 수 없다.
삼만의 군대로 공격하더라도 공멸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하물며 이만 명으로 도모할 성채가 아니었다.
한나절 동안 세 개의 성벽을 내주었다. 세 번째 성벽까지 적이 점령했고, 성벽 둘이 남았다.
적의 점령 속도는 매우 빠른 편이었다.
적이 성채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사다리를 성벽 위로 올려 반대편으로 이었다.
군데군데 유난히 사이가 좁다 싶더니, 성곽 아래 튀어나온 받침대가 있었다.
애초에 가교를 만들 수 있게 된 설계였다.
그렇게 이어진 임시 가교는 치우기도 까다로웠다.
사다리 위에 판자를 깔고 적이 넘어오니 성벽은 그 위를 지키기도 벅찬 판이다.
성벽 위에서 아래를 도와줄 손이 없으니 계속해서 적의 돌파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성벽 둘과 본채가 남았다.
적이 지상의 통로를 돌파해도 피해는 미미했다.
한 줄에 방패가 아홉이면 길을 막았다.
그 뒤에 스물하나를 더해 장창으로 찌르고 석궁을 쏘며 예비 방패로 빈 곳을 채웠다.
그렇게 겨우 서른 명이 길목을 막아 기백이 넘는 적을 처치하고서야 물러났다.
물러나는 것도 죽고 다쳐서가 아니라 시체가 쌓여 적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방어가 아직도 반절이나 남았다.
적은 이미 눈에 띄게 그 숫자가 줄었다.
이대로라면 어렵지 않게 승리할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파상 공세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적이 따로 준비한 계책이 있다는 뜻일 텐데.
시엔이 연신 전장을 살폈다.
* * *
나비는 전장에서 특히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여느 때처럼 시녀의 복장을 하고 있었으니까.
전쟁 중이니 보호대 정도는 찰 만도 하나, 나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분히 종교적인 이유였다.
그녀는 천신의 대리자를 모시는 하인이었다.
스승이 말하기를 하인으로서 본분이 그 복장에서부터 나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비가 있는 4성벽에도 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3성벽에서 이어진 임시 가교를 통한 진격이었다.
“죽엇!”
적의 창날들이 날아들었다.
나비가 춤을 추듯 회전했다. 창날 셋이 교차하나 그녀를 스치지도 못했다. 나비의 치마폭이 종처럼 부풀었다.
동시에 바늘이 여럿 날았다.
강철로 벼린 대바늘. 맞아봐야 아프다 싶겠지만, 그 끝에 극독이 발려있다면 또 이야기가 다르다.
“어? 어어…….”
병사가 목을 붙잡았다.
바늘이 병사들의 목에 박혔다.
대상이 징집병들이기에 가능한 묘기였다.
전 특급 암살자를 상대하기에는 터무니없는 전력이 아닌가.
대동맥에 독이 들어 곧바로 뇌로 향했다.
병사들이 곧 허물어졌다.
그 광경을 가교 너머에서 적병들이 지켜보았다.
열이 넘는 병사가 픽픽 자리에서 쓰러졌다.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그 가운데 선 여인.
무서워 눈치만 살피니 가교를 넘는 인원이 없다.
“에이. 재미없게.”
나비가 다시 보루로 시선을 옮겼다.
별 이유는 없다. 그저 주인께서 저기에 계시니까.
적이 있으면 적을 죽이고, 적이 없으면 그저 내 주인을 바라보리다. 광신도의 무구한 눈빛이 그저 제 주인을 좇았다.
그리고 허공을 잇는 선을 보았다.
갈고리. 암살자의 눈으로 보아 익숙한 것이었다.
* * *
“갈고리, 걸렸습니다!”
“좋다. 투석기에 신호를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성채 바깥 이동식 지휘탑의 꼭대기.
공작이 만족스레 미소를 지었다.
성채의 가장 큰 무기는 성벽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벽의 높이였다. 성벽의 높이를 모르면 사다리며 공성탑이 전부 쓸모없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높이가 유출되는 순간 성벽의 방어력은 확 줄어들었다.
게다가 흐레이그의 영주성에는 방어 취약점이 존재했다. 설계로부터 일부러 만들어진 약점이었다.
선대 공작은 언제고 영주성이 넘어가는 일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장담할 수는 없었다.
가문의 주인에게서 주인에게로만 전해지는 영주성의 약점.
유출의 위험성을 감안하더라도 성을 탈환한 계획을 마련하는 것이 낫다고.
약점이 유출되면 고쳐 세우면 되나, 철옹성이 넘어가면 탈환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기에.
개중 하나가 공성 돌파 지점이었다.
굳이 왕성의 거대 투석기가 아니더라도, 반나절의 포격이면 내성으로의 진군로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투석기가 무너지는 바람에 해당 안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른 방안도 있었다. 보루 침투였다.
어떻게든 3성벽까지만 점령하고 나면, 남서 방향에 보루와 최단 거리가 되는 지점이 있다.
갈고리를 던져 침투가 가능한 지점이었다.
보루는 일선 관측소이자 지휘소이며, 곧장 내성으로 통하니 방어의 최중심이 아니던가.
침투해 급소를 찌르는 기책이었다.
심지어 갈고리가 걸려도 보루 내부에선 잘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그 방면에만 성곽에 깊은 홈을 파 두었기에.
물론 아래에서는 잘 보인다.
그러나 워낙에 복잡한 성채였다.
지휘 전달 체계가 제대로 짜여 있더라도, 아래에서 관측한 결과가 보루에 닿으려면 돌고 돌아 내성에 진입하고, 또 내부를 통해 올라가야 했다.
그에 반해, 숙달된 침투병이 밧줄을 타고 오르는 데엔 몇 분이면 충분하다.
침투 지점을 확보하면 후속 부대의 진입도 순식간이었다.
심지어 그 선봉이 공작가 최고의 기사라면?
창성 기사단장쯤 되는, 오러 운용에 능숙한 자가 갈고리를 타고 오르는 속도는 어마어마하다.
달리는 속도와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뿐이랴.
일단 올라가면 설령 검위공이 지키고 있더라도 시간을 벌 수 있을 터였다. 후속 부대가 올라가기까지의 시간을.
그러나 왕국의 소드 마스터는 이미 내벽 안쪽에서 모습을 보였다.
검위공이 보루에 없다면 작전은 이미 성공이나 마찬가지였다.
위에서 혼란을 일으키고, 거대 투석기가 크게 한 방을 날려 지휘부를 궤멸시킨다.
마지막 승부수였다.
공작이 보루를 바라보았다.
관측병만큼 눈이 좋은 것은 아니나, 이미 갈고리가 걸렸다고 보고를 들은 이후였다.
보일 듯 만 듯한 밧줄. 성큼성큼 줄을 타고 오르는 이가 보였다.
공작이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감히 공작의 영주성을 탐한 결과다. 애송아.”
서로 마음이 통해 멀리서 목소리를 전할 방법이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알고 막을 수 있겠는가.
* * *
-시엔 님! 남동쪽! 남동! 적! 남동! 적! 적! 감히!
송수신기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비의 목소리.
어찌나 호들갑인지 귀가 아릴 정도였다.
-진정하고 말해. 남동쪽이 왜. 아니, 아니다.
보루의 성곽에 쇳조각 같은 것이 보였다.
두 갈래로 휘어진 두툼한 철 바늘. 본래 세 갈래를 하고 있을 물건이었다. 갈고리다.
하지만, 어떻게? 어디서? 아니지.
시엔이 떠오르는 의문을 지웠다.
이미 벌어진 일. 그 과정이야 중요하지 않았다.
* * *
창성 기사단.
왕실의 수호기사단을 제외하면 왕국 최강의 기사단 중 하나라 꼽히는 명문이었다.
그러한 기사단의 단장이다. 그 무위가 어떠하랴.
그러나 일신의 무위로도 어쩔 수 없는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밧줄을 타고 오르는 와중에 적이 그 끝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가까운 자리에서 눈이 마주친 데에다, 적이 검을 뽑아 든 상태라면.
동시에 단장의 갑옷 속 팔뚝이 부풀었다. 이대로 팔심으로 몸을 날릴 생각이었다.
그러니 잠깐, 아주 잠깐만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기사단장이 급히 입을 열었다.
“잠깐! 나는…….”
“비겁한 암습! 용서할 수 없다!”
기사단장이 추락했다.
아무리 오러를 다룬다 한들, 끊어진 줄을 잡고서 날아오를 수는 없었으니까.
보루 위, 베른닐이 상체를 내밀어 아래를 살폈다.
아득히 낮은 저 밑에, 손바닥만 한 크기로 보이는 갑옷이 있었다. 사지가 기이한 방향으로 꺾였다.
갑자기 떨어진 것에 놀란 병사들이 창끝으로 쿡쿡 찔러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미동이 없다.
베른닐이 검을 번쩍 들어 소리쳤다.
“내가 막았다! 내가 해냈다고!”
* * *
“안 돼!”
공작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떨어지는 푸른 갑옷에 공작의 심장도 떨어졌다.
기사단장.
심지어 공작이 아들보다도 신뢰한 충신이었다. 애초에 아들을 별로 믿지도 않았지만은.
이렇게 허망하게 갈 인물이 아니었다.
공작의 입이 벌어졌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 공작의 움직임도 멎어버리고 말았다.
영주성이 함락되었다 소식을 들었을 때도 보이지 않았던 표정이다.
“각하?”
“허어…….”
“각하?”
두 번 만에 공작이 정신을 차렸다.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공작이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투석기!”
“예?”
“당장 투석기를 무르라고 해! 티란디스 놈 사거리에 들어가선 안 돼!”
“하지만 각하, 그런 신호는…….”
깃발을 들어 보루를 쏘라는 신호만 정해두었다. 도중에 포기하고 물러나라는 신호는 없었다.
애초에 실패를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거기에다 깃발은 한정되어 있으니 그렇게 명령 하나를 할애할 생각도 없었고.
“그럼 뛰어! 당장 물러가라 해! 투석기를 잃으면 방법이 없다! 지는 거란 말이다!”
곧장 전령이 뛰었다.
공작이 하는 말을 들었다. 투석기를 잃으면 지는 거다. 승패가 달린 급한 임무였다.
전령이 지휘탑의 계단을 세 개씩 뛰어 내려갔다.
전령이 하는 훈련에 이러한 것이 있으니 위태로워 보여도 실은 능숙하게 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상이 코앞이었다.
다섯 개 남은 계단. 전령이 단숨에 뛰어내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젠장.
선배 전령들에게 호되게 얻어맞았던 나쁜 버릇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계단을 훌쩍 뛰어내리는 것.
그렇게 얻어맞으면서 고쳤다 싶었더니, 아주 급한 임무라는 말에 다시 튀어나오고 말았다.
남은 계단에서 절대로 뛰어내리지 마라.
선배 전령들이 누누이 강조한 사항이었는데.
전령의 발이 땅에 닿았다.
계단을 내려오던 속도가 몸무게에 더해 무릎으로 전달되었다. 관절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
전령이 바닥을 굴렀다.
무릎을 찔러 쑤시는 듯한 강렬한 통증.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무릎을 붙잡고 꺼억꺽 바람 새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꿈틀거리는 전령의 옆에, 푸른 깃털 하나가 일렁거리다 신기루처럼 스르륵 녹아내렸다.
< 38. 대단원 [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