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94화 (190/268)

< 38. 대단원 [7] >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런 때에…….”

흐레이그 공작이 본래는 타인 앞에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훈련받았고 또 가문을 이어서는 스스로 훈련해 왔다.

요즘은 평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공작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는 없었다.

어이없는 사고로 투석기 네 대를 잃었다.

한 발 쏴 보지도 못했다. 오히려 돌이 굴러 병력의 피해만 입었다.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병력이 상했으니 숫자가 적다고 할 일도 아니었다.

“각하, 어디를 노려야 하겠습니까?”

투석기 운용장이 질문을 던졌다.

본디 계획에 돌파구를 마련하려면 적어도 세 발은 명중시켜야 했다.

두 발만 맞추더라도 영주성 방어 네 겹을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발로는?

공작이 생각하기에 어디를 맞춰도 비슷했다.

게다가 공성 파괴자, 티란디스의 애송이의 특기가 초장거리 파괴 마법이라고 했던가.

남은 투석기 한 대도 발사 전에 파괴될 확률이 높았다.

“멀리서 대기하다가 신호가 가면 빠르게 끌고 와 중앙에 가장 높이 솟은 보루를 조준하게. 아주 멀리서 대기해야 해.”

실패 확률이 높으니 차라리 전투 중에 기습적인 운용이 낫다.

한참 전투가 벌어져 바쁠 때 지휘관 관측소인 보루를 직접 타격할 셈으로.

운용장이 물러났다.

지휘 천막의 귀족들이 일제히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성 준비가 끝나 사령관의 선언이 남았다.

공작이 갈등했다.

본래 공성전 최고의 전술은 그저 포위하고 버티는 것이다.

적의 식량은 비축이 전부고 공격 측은 보급이 가능했다.

항복을 종용하거나 말려 죽이거나 둘 중 하나로.

그러나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다.

왕성은 함락될 것이다. 방어가 탄탄하여 버티고는 있다. 그러나 결국 시간 벌기였다.

왕성은 반쯤 궁전이다. 궁전은 아름다움과 권위를 위해 설계되는 시설이다. 최종 방어선과 왕도 성벽으로 지연시킬 뿐, 뚫리고 나면 곧장 함락이라고 보는 것이 맞았다.

비장의 수단이 투석기를 활용한 강공이었다.

지금은 그마저 사라졌다.

남은 방법은 축차 투입을 통한 단기 결전이었다.

병력을 녹여 적의 피로를 이끌고, 공성탑과 사다리로 영주성을 점령해야 했다.

그 중간에 투석기 한 방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공작이 담담함을 가장해 명령했다.

“공격하게.”

* * *

방패수가 방패를 높이 들어 병사들을 엄호했다.

그 사이 사다리를 든 병사들이 앞으로 돌진했다.

투구로 갑갑한 시야. 보이는 것은 전우의 등이다.

그 너머에 높이 솟은 성벽도. 달리는 몸에 시야가 엉망진창으로 흔들렸다.

쏴아아아-

숲에 돌풍이 이는 듯한 소리.

세상 가장 소름 끼치는 소리다. 병사는 이미 전쟁을 겪었다. 비가 내리는 소리다.

화살비가.

방패와 화살이 부딪치기 시작했다.

비가 우박이 된 듯 요란한 소리.

투구 안으로 들어와 사방으로 튕겨 귀청을 찢는 것만 같았다.

병사는 달렸다. 할 수 있는 일이 그뿐이었기에.

그저 속으로 기원하며, 부디 천신께서 보우하시기를, 행운이 따르기를, 천운으로 살아남아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기를.

그러나 행운은 비정했다.

병사의 발이 꼬였다. 왼발이 오른발의 뒤꿈치를 걷어차고 만다. 양발이 동시에 허공에 떴다.

옆구리에 낀 사다리를 부여잡았다.

사다리를 낀 열하나 병사들이 일제히 앞으로 쏠려 넘어졌다.

그 위로 화살은 비처럼 쏟아졌다.

방패병은 필사적이었다.

받은 대방패는 판자를 엮어 철로 고정시킨 물건이었다. 가운데에 엄지손가락만 한 틈이 하나 있었다. 전쟁 중에 만들어진 물건이 대개 그러했다.

‘이거 이 틈으로 화살이 들어오는 거 아닙니까?’

‘멍청아. 방패에 화살이 백 대 날아오면 개중에 꽂히는 건 열 발 내외다.’

‘하지만 재수가 없으면…….’

‘야. 그만한 틈에 화살이 들어오지도 못할뿐더러, 설사 들어오더라도 각에 걸려. 비실비실해진 화살이라 투구나 갑옷을 뚫지도 못한단 말이다.’

고참은 그렇게 말했다.

오히려 그 틈으로 조금이나마 바깥이 보이는 게 좋다고.

꽉 막힌 방패 속에서 그저 이 악물고 버티는 것보단 낫다고 했다.

대체 몇 발이나 막았나. 화살 한 대를 막을 때마다 팔을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이제는 전해져오는 충격이 아프지도 않았다. 얼얼하게 마비된 지 오래라서.

다행인 점은, 고참의 말이 맞았다는 것이었다.

방패에 뚫린 작은 구멍. 너머로 하늘의 색이 비치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

화살이 쏟아져 때때로 검은 그림자가 비쳐도, 다시 파랗게 뜨는 작은 틈새가 있었다.

방패병이 그저 균열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화살 한 대가 균열을 통과했다.

깃조차 걸리지 않는 깔끔한 통과. 화살이 방패병의 투구로 날았다.

벌린 입으로 들어가, 혀를 뚫고 혀 아래를 통과한다. 그러고도 목에 파고들었다.

‘아. 화살 들어오니까 바꿔 달라고 했는데…….’

방패병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이후에는 고통뿐.

공작의 생각하기에, 반역도들이 영주성을 점령했으나 그 방어는 엉성하리라 여겼다.

당연한 일이었다. 영주성은 너무 복잡했다.

임시 가교를 놓게 된 설계가 핵심이다. 그걸 모르면 결코 제대로 된 지휘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전령이 명령을 전하는 데에 한나절이 걸리니까. 돌고 돌아 미로처럼 꼬인 통로는 방어 측에서도 큰 걸림돌이다.

공작의 예상과는 달리, 시엔은 간단히 해결했다.

시엔이 송수신기를 조작했다.

-중앙에 충차. 방화광들이 처리할 수 있도록.

-예, 시엔 님. 전달하겠습니다.

나비는 송수신기 제어에 가장 능숙한 인력이었다.

여러 대의 송수신기를 가지고, 명령을 받고 뿌리는 일에 의외로 적성을 발휘했다.

곧이어 성벽 위로 거대한 불덩이가 떠올랐다. 그 거체의 위용과는 달리 두둥실 가볍게 지상에 낙하했다.

굉음과 함께 성벽이 우수수 떨린다.

돌가루가 날렸다.

연기가 걷히고 나서,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멀쩡하네?”

공작이 충차에 마법사들을 붙여놓았다.

마법사가 본래 위험한 장소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왕실 마도병단 역시 필사적이었다. 이번이 최후의 결전임을 알기에.

게다가 충차의 속도가 심상치 않다. 기사들이다.

-어떻게 할까요?

-충차는 놔둬. 저러면 억지로는 못 치워. 방어가 여섯 겹인데 하나는 내어준다 여겨야지.

마법은 공격보다 방어가 쉽다.

수준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충차 하나 정도는 충분히 지켜내리라.

-1성벽에 전달해. 성문 방어에 신경쓰지 말고, 적 진입도 막지 말고. 그냥 성벽 위만 사수하도록.

-예, 시엔 님! 전달하겠습니다.

“장대병 자리로! 장대병 장대 들어!”

연락병의 고함에 장대병들이 자리를 잡았다.

적이 본격적으로 사다리를 걸 테니, 밀어 치우는 역할을 맡은 병사들이었다.

궁수는 더 높은 3성벽 위에서 활을 쏘았다.

성벽과 활이 닿는 사이에 공간이 있어 화살비가 내리지 않는 자리였다.

일단 도착한 적이 사다리를 걸 수 있었다.

소년병이 창을 쥐고 벌벌 떨었다.

공을 세워 기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입대했으나 전쟁은 낭만이 아니었다.

시야 가득 밀려오는 적. 화살비 속에서도 꾸역꾸역 달려드니 그 기세만으로 오금이 저렸다.

“임마, 정신 차려!”

“꼬맹아. 너무 떨지 말고. 보이는 얼굴만 찔러.”

고참들이 소년병의 머리를 톡톡 치며 웃었다.

어색한 웃음이다. 소년을 안심시키려는 듯, 혹은 저 자신이 안심하려는 듯.

힘이 약한 소년은 장창을 들었다.

사다리를 넘기기 전에 적이 올라오면, 얼굴을 노려 찌르는 역할을 맡았다.

탁.

뒤이어 성벽 위로 나무막대 두 개가 솟았다. 적의 사다리다.

고참들이 장대를 앞세웠다. 사다리 끝에 걸고 힘껏 밀쳤다.

그러나 한발 늦었다.

휙, 검은 그림자가 솟구쳤다.

그제야 사다리가 뒤로 넘어갔다.

그러나 적 기사 하나가 성벽에 발을 디뎠다. 가파른 사다리라도, 이름난 기사에게는 계단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기사가 검을 뽑아 휘둘렀다.

소년병에겐 갑자기 손에 칼이 들린 것 같았다.

쇠 빛이 두 번 동시에 번쩍이더니 고참 둘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적의 기사가 소년병을 바라보았다. 그저 어둠뿐인 투구의 눈구멍.

그러나 무심한 시선과 마주침을 알았다. 소년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 아아. 어어어.”

소년이 몸을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기사가 달려들었다.

으아악!

소년이 입으로는 비명을, 몸으로는 경기를 일으켰다. 자지러지며 뒤로 넘어진다. 꼬리뼈가 아플 새가 없다.

칼이 날아왔다.

죽는구나.

소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커억……!”

아픔 대신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병이 눈을 떴다. 창대에 꿰인 투구가 보였다.

눈구멍으로 소년의 손으로. 창대가 이어진 상태로.

투구 아래, 흉갑과의 이음매로 피가 흘러내렸다.

도우러 달려오던 기사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순전한 행운이었다.

소년이 중심을 잃고 넘어지며 무의식적으로 창을 뻗었다.

그 위로 칼날을 뻗던 기사가 스스로 창날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창대가 바닥에 닿아 투구의 틈새로 파고들었다.

곧장 지원 병력이 도착해 자리를 메웠다.

기사가 소년병을 바라보았다. 행운 또한 실력이라 봐야 할까.

“운이 좋았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지?”

“넨슨, 바디야 마을의 넨슨입니다…….”

“좋다, 넨슨. 기사를 처치했으니 큰 공훈을 세운 것이다. 내가 너의 명예를 보증해 주마. 네가 죽인 기사는. 가만, 이 갑옷? 천공인데?”

기사가 급히 시체에 달려들었다.

정중한 손길로 창날을 뽑고 바닥에 눕혀 투구를 벗겼다.

“아르탄 경.”

기사가 경악했다. 흐레이그 제일 기사단 천공의 부단장 아르탄 세이아스. 야만 기사로 유명한 샹라 경의 후임이었다.

분명 기사 자신조차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가 아닌가.

기사의 생각이 그러했지 사실은 백 번 싸워 백 번 패배할 정도의 강자다.

그런 이가 허망하게 갔다.

전의를 잃은 소년병 하나.

고작 어린애 한 명을 기어코 죽이려다 스스로 창날에 몸을 던진 꼴로.

“천신이시여…….”

기사도는 약자를 보호하라 했다.

적을 두고 약자라고 봐줄 것이냐는 논쟁은 오랜 전통이었다.

이 순간, 기사는 제 목격이 어떤 계시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기사가 마음먹었다.

만약 자신이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힘없는 이에게는 기꺼이 자비를 베풀겠노라고.

전체의 상황에서 이러한 기적은 몇 개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몇 개나 된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한 번도 일어나기 힘든 일이 몇 번이라면야.

거기에, 여기저기서 사소한 일이 벌어졌다.

성벽의 점령이 늦어지고 있었다.

독전관들이 채찍을 휘두르며 포효하나, 그렇다고 안 되는 일을 되게 만들지는 못했다.

사다리가 부러지거나, 잘못 고정된 사다리가 도중에 기울어 쓰러지거나.

아니면 적이 사다리를 미는 때가 참으로 절묘해 중심이 위에 쏠려 있을 때였다.

그런가 하면 위에서 끼얹는 끓는 기름이 하필이면 눈에 튀고 등줄기로 파고드는 일이 잦았다.

가까스로 성벽에 올라서고 난 이에게도 마찬가지.

눈을 감고 내지르며 오는 어설픈 공격이 급소에 파고들고, 베테랑 병사의 공격이 어이없이 빗나간다.

적의 궁수가 멀리 화살을 쏘니 간혹 눈먼 화살이 가깝게 떨어진다.

재수 없이 맞는 이가 나오면 백이면 백 북부 귀족의 병사였다.

아주 작은 불행들,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땀방울이 눈에 들어간다던가.

바닥에 깔린 시체에 잠깐 중심을 잃는다던가.

허리끈이 끊어져 바지가 흘러내리거나, 손에 땀이 차 무기를 떨구거나, 아군의 팔에 얻어맞거나.

넘어졌는데, 아군의 군화가 하필 급소를 밟고…….

우지끈!

충차의 공이가 성문에 구멍을 뚫었다.

기사들이 충차에서 망치를 꺼내 휘둘렀다. 가공할 힘이 담긴 충격이 성문에 난 구멍을 계속 넓혔다.

“충차를 해체한다!”

충차의 기둥을 빼고 다시 끼우기를 반복했다.

기사들의 손놀림이 투박하나 가공할 힘으로 밀어붙이니 작업이 곧장 끝났다.

공이와 바닥을 제거하고 지붕이 높이 솟았다.

깨진 성문과 통하는 간이 통로의 완성이었다.

“깃발을 올려!”

남은 것은 성문으로 계속해 진입하는 파상 공세였다.

북부 귀족군의 군대가 나무판을 세워 통로를 잇고 부대가 계속해서 성내로 진입했다.

1성벽과 2성벽 사이.

1왕자파의 병사 아홉이 어깨를 딱 붙이고 방패를 들었다. 통로가 꽉 막혔다.

그렇게 방패가 길을 막고 창병이 뒤를 잡았다.

그 뒤로 다시 방패병이 서고 또 창병이 서고…….

사람으로 차단된 통로였다.

그러나 성채 공략이 이런 식이었다.

방어자는 사람으로 통로를 막고, 공격자는 사람의 방벽을 사람으로 뚫어야 했다.

처절한 사투가 벌어지는 이치였다.

그리고 파랑새가 그 위를 날았다.

< 38. 대단원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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