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88화 (184/268)

< 38. 대단원 [1] >

흐레이그의 영주성에 막는 적이 없다.

본래 공성전은 적이 성문을 걸어 잠갔다면 시체로 탑을 쌓아 넘는 것이나, 적이 없으니 담백하게 성문이 열리고 말았다.

그저 사다리를 걸고 넘어가 뒤이어 문이 열리니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자 내부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저들끼리 싸워 자멸한 군대. 그러나 온전한 시체가 하나도 없다.

전부 토막 나 분해되어 있으니 대체 서로 무슨 원한이 이리 깊었던가 싶을 정도로.

“천신이시여…….”

병사들이 천신을 찾았다.

그네들이 할 생각이란 그 마법, 마법인지조차 확실치 않은 어떤 부정한 일의 결과이리라 짐작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뒤이어 굽이친 내성을 따라 수색이 개시되었다.

기사들이 앞장을 서서 진입하니, 개중에는 흰 갑옷을 입은 기사가 발견되었다.

1왕자파의 기사들을 발견한 흰 갑옷이 곧장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선두에 있던 카레네가 공격을 막아내며 소리쳤다.

“경, 승패가 갈렸으니 항복하시오!”

적의 기사는 대답 없이 그저 공세를 이어갔다.

공격을 받아친 팔이 뻐근했다.

오러를 다루는 이가 그 효과로 신체를 강화한다곤 해도 대단히 강력한 일격이었다.

이름난 기사임이 틀림없으리라.

마음 같아서야 서로 이름을 밝히고 결투를 청해 명예를 드높이고 싶었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상대가 이미 죽음을 각오했으므로.

“좋습니다! 경의 뜻이 그러하다면!”

기사는 싸워야 한다. 그것이 설령 패배가 정해져 항전의 결과가 죽음뿐이라 해도.

카레네는 그렇게 생각했고, 상대는 훌륭한 기사가 아닌가.

상대가 죽음을 각오했으니, 그 대적자들 역시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이었다.

기사들이 일제히 기사단의 이름을 연호하며 달려들었다.

그 결과, 한 손이 열 손을 당할 수는 없었다.

흐레이그 나이트는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또한, 치명상에도 운신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기사들의 합공을 버텨낼 정도는 아니었다.

검을 쥔 팔뚝이 잘려 나갔다.

흰 갑옷이 주먹을 쥐어 옆에 선 기사를 후려쳤다. 기사들은 내심 상대의 투지에 경이의 찬사를 보냈다.

심장을 꿰뚫고 나서도 상대가 계속 움직이기 전까지는.

“마물! 마물이다!”

딱히 흐레이그 나이트가 속임수를 쓰지는 않았지만, 저들끼리 속았다고 여긴 기사들이 격분했다.

토막 난 마물의 시체가 바닥을 뒹굴었다.

* * *

영주성의 생존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이 시엔의 군대를 만나 오히려 안도하고 기뻐하며 무기를 버리고 기꺼이 항복을 청했다.

흰 갑옷을 입은 마물들만 제외하면 저항은 없는 수준. 흐레이그의 영주성이 그렇게 함락되었다.

무혈입성이었다.

덕분에, 병사들에게는 공성전보다 뒷수습이 훨씬 고역이었다.

내부에 가득한 시체들을 밖으로 빼내 태우는 일이다.

시체들이 온전하지 않아 자루를 총동원해 담아다 부어놓고, 한편에서는 방화광들이 쌓인 시체를 태우느라 바빴다.

성녀 역시 바빴다.

화장을 주관하며 간단한 장례를 치르는데, 한 더미 끝나면 또 한 더미가 완성되니 같은 기도를 몇 번이나 치르느라 쉴 시간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시엔은 구슬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투명한 푸른 빛의 구슬.

아기 머리통만 한 크기에, 안쪽으로 흰 결정들이 소용돌이치며 은은한 빛을 뿌렸다.

얼핏 보기에는 유리병 속에 색 가루를 넣고 물을 채운 장식물처럼 보였다.

스노 글로브라고 하던가 하는.

“선배님. 저도 만져봐도 괜찮을까요?”

성녀의 기척이 성 밖에 있으니, 그제야 집 나간 시녀들이 다시 달라붙은 참이었다.

“안 될 것도 없지.”

시엔이 손에 든 구슬을 휙 던졌다.

세올이 기겁하며 허둥지둥 구슬을 받아냈다. 그리고는 크기에 비해 가볍기 그지없는 무게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결정 같은데요? 눈으로 관측 가능한 고순도 아케인 에너지, 외부로는 새어 나오는 기운이 없는데……. 이건 굉장히 귀하네요.”

“바다의 심장이라고 하더라.”

“대단히 거창한 이름인데요?”

“성능도 굉장하지. 물길잡이에 한해서는 셰계수 원목 지팡이와도 견줄 수 없는 물건이니까. 듣자 하니 증폭률이 천 배는 된다던데.”

“이게요? 완전히 전략 무기잖아요.”

“그러니까 잘 감춰 둬. 등대 모르게. 알면 돌려달라 난리를 칠 테니까.”

손에 들어온 전략 무기를 그저 원래 주인이라고 덥석 돌려줄 얼간이가 있을까.

사람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 선의로 돌려준 신물이 적의가 되어 공격해 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게다가 파도등대는 가난해서 뜯어낼 만한 보상도 없었다. 미안하지만 바다의 심장은 이쪽에서 보관하는 거로.

그때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도련님, 들어가겠습니다.”

차석 등대지기, 셀시의 목소리였다.

“앗. 아앗.”

세올이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랐다. 잘 감춰두라 듣자마자 들키게 생겼다.

트리예가 바다의 심장을 휙 낚아챘다. 그리고는 제 셔츠 아랫자락을 잡아당겨 옷과 배 사이에 쑤셔 넣었다.

양팔로 배를 감싸 쥐어 옷 안쪽에 오브를 품고는 새우처럼 허리를 굽히고 있다가, 문이 열리고 셀시가 들이치자 어깨를 툭 부딪치며 급히 빠져나갔다.

아흑. 배가……!

진짜로 배가 아픈 양 실감 나는 대사 한 마디와 함께.

과연 트리예. 믿음직하기 짝이 없다. 그에 비하면 세올은 그보다 백 살은 더 처먹고서도.

뭐. 곁에 두고 보기에 재미있으니 그만이지만.

“아니, 사람을 치고 말도 없이…….”

“죄송합니다. 워낙 급한 모양이라서. 셀시가 좀 이해해 주세요.”

“아. 배가 어쩌고 했던 것 같더니. 뭐, 그건 어쩔 수 없었겠네요. 급하면 그럴 수도 있죠.”

등대에서 본 바로, 그녀는 천성이 뱃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을 풀었다.

“그보다 도련님! 알리아를 찾으셨다고 들었어요. 어때요, 고 계집애. 분명 또 귀여운 척 내숭 떨고 있을 게 뻔한데.”

“어. 그게.”

시엔이 머뭇거렸다.

그러자 셀시의 표정이 급히 어두워졌다.

“혹시 상태가…….”

보물을 훔쳐 집 나간 동생이라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더니만, 그래도 피붙이라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었다.

“아마 보루 위에서 떨어진 모양이에요. 그 아래에 시체가 쌓여 있던 탓에 목숨은 건졌습니다. 마침 제가 재주가 조금 있어 곧장 치료해 일단 생명에 지장은 없겠습니다만.”

알리아는 시체 더미 위, 양쪽 다리가 기이한 방향으로 꺾인 채로 발견되었다.

다리가 먼저 떨어지고 뒤이어 골반과 등 머리 순으로 부딪쳐 깨어진 상태였다.

보루의 높이가 높이여야지.

아래에 시체 더미가 받아주었고, 거기에 발이 먼저 떨어져 충격이 줄었다 해도 기적에 가까운 생존이었다.

그나마도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발견이 조금만 늦어졌다면, 시체 중 하나로 화장되었을 터였다.

“후우……. 일단 살아 있기는 한 거지요? 도련님께 무슨 감사를 드려야 할지.”

“다만,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라서요. 신체는 치료하면 나을 수야 있겠지만은. 일단 상태를 한 번 보셔야겠네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시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셀시를 이끌고 병상으로 향하고 있으니, 조심스레 질문이 날아왔다.

“그, 혹시, 바다의 심장은 못 찾으셨나요?”

아. 거짓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시엔의 기준으로 상대를 속이는 일과, 직접 입으로 거짓을 말하기는 큰 차이가 있었다.

마법사가 마법을 행하는 데에 입으로 주문을 외워 세상이 편애하는 언어를 통해 그 힘을 행사했다.

마법사의 말은 세상과 세상을 잇고 없던 현상을 만드는 매개이니, 그만큼의 무게가 있어야 했다.

과거 흑마법사가 언어로 자신을 묶어 재림한 것도 그 일환이니, 거짓을 말하는 순간 이미 스스로 그 말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 아니던가.

시엔이 대신 딴소리를 했다.

사람을 속이는 데에는 굳이 거짓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진실만으로도 저 혼자 결론을 내도록 유도할 수 있었으니까.

“알리아 양은 보루에서 떨어졌어요. 스스로 몸을 던지지는 않았을 테니, 누군가 밀어 떨어뜨렸다고 생각해야겠죠. 적의 마법사가 최소한 넷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그들이 발견되지 않았고요.”

“아. 그렇겠군요.”

셀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의 마법사가 신물을 빼앗고 알리아를 밀어 떨어뜨렸으리라 하는 추론은 타당하기 그지없었다.

물길잡이가 아니라면 훌륭한 마도구는 못 되지만, 마법사란 족속이 원래 그런 걸 가리던가.

적 중에 또 다른 물길잡이가 있었을 수도 있고.

그렇게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알리아의 병실 앞에 다다랐다. 문을 지키던 기사 둘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잠긴 문을 열자, 알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셀시가 울컥했다. 특유의 비음 가득 섞인, 셀시가 말하던 가식적인 목소리가 그녀를 반겼음으로.

“앗. 오빠다! 안녕! 오빠! 근데, 옆에는 누구야?”

“알리아?”

“응. 알리아는 알리아야. 언니는 누구?”

알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작 하나하나가 큼직하니 다 큰 여인이 할 만한 품새는 아니었다.

셀시가 시엔을 바라보았다.

“도련님?”

“아마 큰 공포를 겪고 스스로 기억을 봉인한 상태로 보입니다만.”

“알리아가 유아 퇴행이라구요?”

“그게 뭔데? 알리아가 그거야? 근데 언니는 누군데! 알리아가 물었잖아!”

“나는…… 하…….”

셀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셀시.”

“셀시? 우와, 언니도 셀시야? 우리 언니 이름도 셀시인데? 우와아. 신기하다!”

“이게, 또 내숭…….”

셀시가 말을 잇지 못하며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 순진무구한 표정을 보며,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내가 네 언니야. 셀시 아스데니아.”

“언니? 언니라구? 하지만. 아, 알았다! 마법이지? 어른이 되는 마법! 아니, 언니 아냐.”

알리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왜?”

“하지만, 우리 언니는 알리아 싫어하니까…….”

“내가 왜 널 싫어하겠니?”

“하지만, 맨날 꺼지라고만 하고. 때리고, 욕하고. 알리아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태어난 게 잘못이라고 했어…… 우우. 알리아도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윽, 으우……”

결국, 알리아가 울음을 터뜨렸다.

셀시가 손을 뻗으려다 말았다. 엉거주춤 그저 그 애매한 자세로 얼어붙은 채로.

손을 더 내밀지도 거두지도 못하며.

셀시가 그렇게 어쩔 줄 몰라 어물거리다, 종래엔 도망치듯 병실에서 나가버리고 말았다.

결국, 둘이 남게 된 시엔만 곤란해졌다.

그렇다고 서럽게 우는 여인을 놔두고, 아니, 그저 평범한 여인이었다면 그냥 무시하고 자리를 떴으리라.

어차피 그녀는 적이었으며 새삼 그 가정사가 모질었다 해서 동정을 베풀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상태에서 알리아는 그저 몸만 큰 아이가 아니던가.

제가 한 행동 자체가 기억에 없으니, 애초에 동일인물이라 볼 수 있는지조차 의문인…….

슬퍼서 우는 아이를 두고 자리를 떠선 안 된다.

떼를 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제 처지가 서러워 우는 아이를 방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잔혹한 학대가 아닌가.

적어도 시엔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요즘 왜 이리 곁에서 우는 사람이 많아?

결국, 시엔이 괜찮다며 한참이나 달래고 나서야 알리아가 울음을 그쳤다.

* * *

“착한 오빠. 흡, 또 알리아 보러 와 줄 거야?”

“그래. 그러니 얌전히 있어라, 알겠지?”

“응! 약속! 알리아는 얌전히 있을게!”

알리아가 새끼손가락과 엄지를 내밀어 약속을 받아내고 나니, 시엔이 병실 밖으로 떠났다.

문이 닫히고 나자, 알리아의 표정이 빠져나갔다.

이태까지의 천진한 표정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나니, 남은 것은 자조적인 웃음뿐이었다.

“나이 먹고 이게 무슨. 한심한 년. 집 나와서 잘 살기는커녕 이상한 놈한테 잡혀 조종당하고, 기껏 비웃어놓곤 제대로 죽지도 못해.”

살았다는 걸 알았을 때, 알리아는 또한 제가 죽음을 면치 못하리란 사실 또한 깨달았다.

흐레이그에게 구출 받았건, 아니면 1왕자파건 간에 양쪽 모두에게 원한을 산 몸이었으니까.

흐레이그에서는 만화원이 실수 혹은 배신하여 일을 그르쳤다 할 테고, 1왕자파에는 루우트다렌 공방전 당시 대놓고 마법을 부려 피해를 불리지 않았던가.

그래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안 그랬어요.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알리아는 아주 어릴 적부터 속을 감추고 살았다.

바보는 미움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10년이 넘도록 계속된 연극이었다.

진짜 더럽게 미련한 년. 저 싫다는 인간들과 어떻게든 어울려 보겠다고 바보인 척 그렇게 살고는.

그러다 보니 이제는 아예 연극의 어떤 경지에 오르고 말았다. 눈물을 쏟고자 하면 바로 줄줄 흘릴 정도로.

“티란디스의 도련님이라. 좋은 사람이던데.”

이대로 도망쳐봐야 붙잡히면 연기만 탄로 나고 말 터였다.

게다가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문이 열릴 때 보니 갑옷을 입은 팔뚝이 양옆에 있지 않았던가.

최소 기사가 둘.

알리아는 호위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기사가 둘이나 지키고 섰으니, 위험한 적을 경계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겠는가.

“아, 그냥 눌러앉아야겠다.”

어린애 연기는 보통 피곤한 게 아니다.

아니, 자신을 감추고 사는 일 자체가 피곤했다.

그러니 몇 년만 꾹 참아야지. 연기도 조금씩 때려치우고 나중엔 그냥 본성대로 드러내야지.

알리아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만족스러운 결론이었다.

그냥, 티란디스에 자리 붙이고 살아야지.

그러다 가문의 마법사로 한 자리 잡으면 좋고, 아님 말고.

그렇게 살다 가야겠다고…….

< 38. 대단원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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