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86화 (182/268)

< 37. 재해만발 풍운도시 [9] >

세상이 또다시 뒤바뀌었다.

푸른 태양이 발하던 광선이 자취를 감추고, 그저 한없이 검은 것이 하늘 위에 떴다.

세상 가장 검은 원형.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만 같다.

구멍으로부터 검정이 새기 시작했다.

하늘에 풀리는 어둠.

마치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단단한 어둠이 올올히 풀려 녹아난다.

하늘이 탁한 색으로 물든다. 어느새 머리 위는 그저 어둡다.

검은 태양이 흑광을 비추었다.

하늘 아래의 모든 색채가 자취를 감추니 덜 검은 색, 검은색, 그리고 아주 검은, 그런 구분만 남았다.

죽은 것에는 색이 없다.

오직 잿빛에 지나지 않으리니.

어느새 하늘과 땅과 그 사이가 오로지 흑백의 윤곽으로 남았다. 부정 세계가 현상계에 온전히 구현되었다.

모든 산 것이 침묵했다. 죽은 것에는 소리가 없으니 죽은 세상이 또한 그러한 까닭이라.

누군가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 또 누군가는 경악 속에 신을 찾으나 소리 없는 말로 퍼졌다.

산 자가 침묵을 말하고 또한 침묵을 들었다.

‘시엔?’

뷔아가 시엔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의 기사를 묻는 것이었다.

성녀가 말하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또한 소리가 없다 하나 시엔은 알아 들었다.

죽음은 삶의 영원한 정지이자, 당연히 이루어지는 결과이기도 했다.

부정 세계가 죽음과 가까워 현상 없이 결과만 남았다.

‘괜찮습니다. 오래 갈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속에서 산 자는 오로지 불길하니 불안함으로 마음이 흔들릴 뿐이었다.

어차피 말로 위안이 될 것이 아니니 시엔이 손을 꽉 쥐어 괜찮다 신호를 보냈다.

팔로 전해져오는 떨림이 잦아드는 것을 느끼며, 시엔이 주문을 외웠다.

여기에 소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주문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그 뜻이 고스란히 그저 결과로 나타날 뿐이었으니, 성녀가 곁에서 그 말을 귀로 듣지 않았으나 또한 곧장 이해했다.

떠도는 이에게 약속하였던 복수를 지금, 이 순간 이루어내리라. 그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모든 이가 그 굶주린 원한을 아직 산 자의 피와 살로 채우리라.

뷔아가 듣기에는 저번 위령과 이어지는 내용이다.

주문의 내용 역시 결국 억울한 이가 원한을 풀게 되리라는 것이니 딱히 사악하다 느끼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흑마법사의 주문 중 가장 사악하고 끔찍하다 할 것 중 하나인지도 모르고.

* * *

시엔의 시녀들, 세올과 트리예는 일찌감치 구경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님께서 그 위업을 보이겠노라 뜻을 표하셨다.

그러니 진즉에 군대 후방 천막 옆에 의자를 깔고 앉았다. 대체 무엇을 보여주실까 기대하며.

심지어 트리예는 와인까지 준비했다.

그리고 두 세상이 겹쳤다.

두 흑마법사가 흥분해 환호하며 소리를 질렀다.

선배님, 존경합니다!

시엔 님, 사랑합니다!

살면서 본 광경 중 단연 최고의 것이었다. 특히 세올의 경우, 남들보다 훨씬 긴 삶을 돌아보아도 그러했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삶에도 다시 볼 수 없을 만큼의 절경이었다.

‘선배, 한잔하시죠?’

‘오냐. 네가 이제야 선배 높은 줄을 알았구나?’

‘시엔 님께서야 저 하늘 위에 계시지만,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이런 때 술이 없으면 섭섭하지 않겠어요?’

세올이 발끈했지만, 술이 없으면 섭섭하다는 의견에는 동의했다.

흑마법사 선후배가 잔을 부딪쳤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두 흑마법사가 태평하게 와인을 홀짝거렸다.

‘아. 좋다.’

‘그러게요. 좋네요.’

* * *

만화원의 흑마법사인 메이화 역시 보루에서 위와 아래의 광경에 전율했다.

심상 속, 차원문 너머에 일부분으로만 보던 부정 세계가 온 천지 사방에 펼쳐졌으니 어찌 경이롭지 않으랴.

‘이보게, 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건가?’

문득 전해진 말에 메이화가 정신을 차렸다. 정신 놓고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원초 세계를 불러들이겠다더니, 뜬금없이 부정 세계가 왜 등장했을까.

힘을 합친 마법사 네 명 중에 흑마법사가 없었다.

아케인 에너지를 다루는 넷이 모였는데 부정 세계가 열린 상황 자체가 애초에 말이 안 됐다.

메이화는 혼란 속에서도 마법사답게 사고했다.

이 상황이 의도한 것인가? 그럴 리가 있나.

그렇다면 적의 수작인가? 마법사 넷과 성유해와 신물을 동원한 주문을 도대체 누가 어떻게 뒤집어 덮어씌울 수가 있겠는가.

애초에 그건 과거 강대한 흑마법사가 재림해 돌아오더도…… 아.

메이화가 팔란에게 달려들었다.

눈꺼풀을 까 뒤집어보니 온통 희다.

선 채로 정신을 잃은 상태.

안 돼! 설마.

뼈에 그 영혼이 깃든다는 말이 있었다. 진실보단 그러한 말이 있음이 문제니. 그리고 말에는 힘이 깃든다.

그렇다고 아무 뼈에나 깃들지도 않는다.

발바닥의 발허리뼈나 주사위뼈 따위에 영혼이 담긴다고 하면 농담으로도 해괴하고 웃기지 않을 일이 아닌가.

그러나 팔란이 든 것이 성유해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흑마법사의 두개골. 영혼이 깃들었다면 사실 이 이외에는 생각하기 어렵다.

만약 어떤 방식으로 성유해에 남은 영혼이나 사념 따위가 깨어나, 마법사 넷의 의식이 묶인 때에 나타나 마법을 강탈하였다면?

메이화가 흠칫 놀랐다.

바로 지금, 지상에 현신한 부정 세계가 그 주인의 뜻에 따라 법칙을 바꾸었다.

떠도는 이에게 약속하였던 복수를 지금, 이 순간 이루어내리라. 그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모든 이가 그 굶주린 원한을 아직 산 자의 피와 살로 채우리라.

떠도는 이는 악령이니 곧 악령에게 힘이 실렸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모든 이라니.

세상에 죽음 앞에 의연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를 제외하면 모든 죽음은 억울한 것이었다.

즉, 모든 죽은 자가 산 자를 공격하라는 그런…….

과연 역사에서 지워질 만큼이나 끔찍한 흑마법사.

대체 무슨 악의로 이렇게 끔찍한 소망을 품는단 말인가. 세상을 멸할 작정이 아니고서야.

* * *

딘 파머는 흐레이그 직할대대의 병사다.

지금은 4성벽 2지역 수비를 맡아 병사 백 명의 지휘권을 받았다.

본디 귀족의 직속부대는 군대 중에서도 가장 충직하고 용맹한 자들의 차지였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대우에는 타 부대와는 확연한 차이를 두곤 했다.

전시에 소부대 지휘권을 가지는 것만 해도 그랬다.

이런 차별로 부대원들의 충성과 자부심을 이끌어, 어떤 명령이건 가리지 않고 수행하는 사냥개들로 조련하는 것이었다.

딘 파머 역시 충직한 사냥개였으며, 베스탄티의 학살에도 참여했다.

어느 날부터 그가 죽인 이들이 꿈에 나와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때로부터 매일.

‘딘 백부장님? 괜찮으세요? 피곤해 보이십니다.’

‘요즘 꿈자리가 영 사나워서.’

영주성 내에 병사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 적을 맞이할 준비를 한 상태였다.

모든 색이 빠져나가는 이변 속에서도 방어 태세는 계속되는 중이었다.

‘악몽을 꾸신다고 하셨습니까? 어쩌면 귀신의 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 할머니께서 영감이 좀 있으신데, 말씀하시기를…….’

‘그만. 난 미신 따윈 믿지 않는다.’

딘이 부관, 랜스의 말을 잘랐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랜스의 말에 찔리는 것이 있었다.

딘이 베스탄티의 학살을 떠올렸다.

명령이었으니까. 그저 명령에 따른 것뿐이었으니까.

‘……그래서, 귀신을 쫓는 방법이라도 아나?’

‘일단 천신께 기도드리고, 신관님이 축성한 물건을 머리맡에 놓아두라 들었습니다만.’

‘기도라.’

한편, 딘의 몸통을 붙들고 있던 악령들은 이제야 허락된 의지를 느꼈다.

악령의 붉은 눈에 물기가 서려 피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복수의 시간이다.

언어로 묶여 때를 기다리던 악령이 마침내 행동을 개시했다.

세상이 부정에 속한 지금, 악령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많았다.

-딘? 디인? 네 이름이 딘이구나?

‘이게 미쳤나, 상관 이름을 함부로 부르.’

딘이 눈을 부릅떴다.

방금까지 대화하던 랜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피눈물을 흘리는 늙은이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딘이 찔러 죽였던 노인네였다.

매일 밤 꿈에 나오던 바로 그 원흉이었다.

‘어떻게……! 분명 내가 죽였는데!’

-그래. 죽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네 목숨을 거두겠다. 아니지. 그 이전에 네 가족부터 몰살시킬 것이다. 살점을 한 점 한 점 발라 가장 고통스럽게. 네놈 그 살을 네 입에 넣어주마. 눈앞에서 바로 그렇게 해줄 것이야. 크흐흐.

끔찍한 저주에 딘이 겁에 질렸다.

곁에 있던 랜스가 깜짝 놀랐다. 상관이 혼잣말하더니만, 갑자기 창을 겨누는 것이 아닌가.

‘딘 백부장님? 왜 이러십니까?’

‘웃기지 마! 내 잘못이 아냐! 난 그저 명령받았다고! 명령받은 대로 했을 뿐이야!’

‘백부장님?’

‘안 돼! 내 가족은 놔둬!’

‘백부장님! 정신 차리십시오. 백부장님! 얘들아, 뭐해! 빨리 말리지 않고!’

‘백부장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죽엇!’

병사들이 딘을 붙잡았으나, 필사적으로 몸부림쳐 떨쳐냈다.

이 무슨 괴력인지.

병사들이 우당탕 넘어져버린 사이로, 딘이 기어코 창을 내질렀다.

베테랑 병사의 날카로운 창술이었다. 창이 부관의 가죽 갑옷을 꿰뚫어 심장을 통과했다.

-크흐하하하하, 죽였구나! 죽였어!

악령이 그제야 광소하며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나니 랜스의 모습이 보였다. 명치에 창이 깊숙히 박힌 그의 부관이었다.

틀어박힌 창자루가 랜스의 심장에서 딘의 손으로 이어졌다.

어? 나는, 나는, 내가.

딘이 비틀거렸다.

곁에 있던 병사가 급히 부축했다.

그러자 병사가 늙은이의 얼굴로 속삭였다.

-제대로 보지 못하고 애꿎은 이를 죽이는구나. 자, 내가 여기에 있다. 다시 기회를 줄 터이니 이번엔 제대로 찔러보아라. 날 죽이지 못하면 네 가족이 성치 못할 터이니. 네 딸 이름이, 어디 보자.

‘죽어어!’

딘이 광분해 창을 휘둘렀다.

병사들이 기겁하며 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백부장의 매서운 창질에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돌아버린 백부장을 둘러싼 채로 대치가 계속되었다.

‘백부장님이 미쳤다!’

‘빨리 막아! 막으라고! 붙잡아!’

‘젠장, 누가 저 창 좀 뺏어!’

한편으로는 젊은 병사가 랜스의 시체를 부여잡고 흔들었다. 랜스 부장님! 정신 좀 차리십쇼!

그러나 이미 심장이 꿰뚫렸다. 심지어 눈조차 감지 못하고 절명했다.

아무리 부르고 흔든다고 한들, 이미 죽은 자는 움직이지 못한다.

움직이지 못해야 했다.

억울하게 죽은 모든 이가 그 굶주린 원한을 아직 산 자의 피와 살로 채우리라.

랜스의 시체가 병사의 얼굴을 붙잡았다.

병사가 반응할 틈도 없었다. 망자의 입이 병사의 목을 물어뜯었다.

경동맥이 뜯겨나가 피가 솟았다.

이미 죽은 자가 피로 전신을 적셨다. 병사가 부들거리며 입만 뻐끔거렸다.

그러나 곧 숨이 끊어졌다. 세상에 억울하게 죽은 이가 하나 늘었다.

억울한 망자가 아직 살아 있는 자의 피와 살을 탐해 몸을 일으킨다…….

다섯 성벽과 그 안쪽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다.

악령이 원한을 찾아 사람을 죽이고, 죽은 자가 일어나 산 자를 공격했다.

‘구울이다!’

‘머리가 약점이다! 머리를 노려!’

몇몇 눈썰미 좋은 이가 외치며 전파했다. 그러나 망자는 망자일 뿐 구울 따위의 마물이 아니었다.

세상 그 어떤 삶도 두 번 죽지 아니하니, 이미 죽은 자를 죽일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 움직인다!’

‘팔다리를 잘라!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해!’

‘기름 가져와! 불태워야 해!’

‘틀렸습니다! 사방이 놈들입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에워쌌다. 창에 찔려도, 목이 베여도 움직이는 시체들이었다.

기사가 팔을 베었으나 그뿐, 남은 몸이 달려들었다. 심지어 잘린 팔조차 손가락을 움직여 산 자에게 향했다.

그리하여 죽음이 번졌다.

아군이 죽어 적으로 변하니 순식간에 수많은 삶이 종말을 맞았다.

성벽 위와 성벽 사이, 내성과 외성의 모든 장소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성문으로 막아 바깥의 침입을 막았으니, 반대로 성벽 밖으로는 새지 못하는 죽음이었다.

< 37. 재해만발 풍운도시 [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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