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85화 (181/268)

< 37. 재해만발 풍운도시 [8] >

시엔이 여유만만하게 적의 마법을 기다렸다.

이미 적의 마법사가 수중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뼈를 가진 것들이 하나같이 그 힘에 취해 본신의 능력을 아득히 초월한 마법을 부리려 든다.

때를 맞추어 뼈를 회수하기만 하더라도 심상 세계를 완전히 파괴할 수도 있었다.

여유가 생기고 나니 궁금하기도 하고.

* * *

마법사들은 세계를 크게 셋으로 분리했다.

첫 번째로 이 세상, 현상 세계가 있었다.

두 번째로는 개인 차원의 심상 세계가 있었다. 혹은 정신 세계라고도 하며, 지성을 가지고 사고하는 이가 속에 품은 공간이었다.

마지막 분류가 허수 차원의 세계들이었다.

아케인 에너지의 근원이 되는 관념 세계 혹은 원초 세계, 음차원 에너지가 흐르는 부정 세계, 그리고 역사가 기록된 동토 세계와 단절되어 닫힌 저 바깥의 외원계까지.

현상 세계에서 좌표를 특정할 수 없어 존재하지 않으나, 마법사가 심상을 통해 접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특정한 상황에서 현상 세계에 직접 연결되어 온갖 재해를 일으키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마경이었다. 사악한 것들이 모인 공간에 부정 세계가 열려 그 안의 마물이 튀어나오는 재난이었다.

역사에서 흑마법사가 사라지자 마경의 기록 역시 사라지고 말았다.

기록이 사라지고 나서도 마경은 존재했으니 역사에 마물이 창궐했다 하는 기록으로 남아서.

그리고 잠깐이나마 인간의 도시 위에 마경이 한 번 열렸다.

시엔이 강제로 열었다. 외원 세계와의 연결을 끊기 위한 것이었다.

만화원의 마법사들이 그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관념 세계 역시 지상에 불러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다섯 마법사가 모두 모여 궁리했다.

저마다 수준이 낮지 않았고, 따로따로 탑에 분류되어 저들끼리 뭉친 마탑과는 서로의 전달 속도 자체가 달랐다.

결과적으로 가능은 하다고 결론이 나오긴 했다.

세상에 없던 수준의 마법사 한 명씩, 도합 네 명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매개를 통해 심상 세계를 통합한다.

그와 동시에 증폭해 세상에 구현하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는 동시에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법사 개인의 역량이 까마득하게 요구된다.

서로 연결될 수 있는 매개라 해 봐야 떠오르는 것은 한 뿌리에서 자란 세계수의 가지들 정도였다.

엘프들이 아무리 소탈한 성격이라 한들, 세계수의 가지를 넘겨주는 일에는 너무나 엄격했다.

그런데 수중에 무언가 있다. 속성과 개인의 상성을 무시하고 불가사의한 수준으로 마법의 증폭을 이루는 신물이.

심지어 다른 신물과도 연결될 수 있으니 성유해의 성질이 의지 없는 개인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다.

그렇게 결론이 난 이후로는 한 번이라도 해보고 싶어 몸이 달았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 * *

이변의 시작은 태양이었다.

해의 뒤편으로 그 수백 배는 거대한 백색 태양이 새로 떠올랐다. 그 주변으로 색색의 작은 태양이 일곱 개 떠올라 원을 그리며 맴돌았다.

시엔의 진영에서 명령을 기다리던 화염탑의 부탑주 알렌과 옆의 고위 마법사들이 눈을 부릅떴다.

근원 세계의 백색 태양과 무지갯빛 새끼별.

하늘 정중앙에 가까운 태양을 시작으로, 하늘에 반투명하게 일렁이는 것이 점점 세를 불렸다.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것이 지상에 투명한 그림자로 일렁거렸다.

하늘에 뜬 바다, 물길잡이가 그 수기를 빌려오곤 하는 근원 세계의 심천해였다.

하늘을 시작으로 지상에 두 세계가 겹쳤다.

저 멀리 하늘까지 솟은 산이 원근조차 무시하여 험준한 산세를 드러냈다.

아흔여덟 분화구를 가진 칼리데이오스 화산.

한편 일부 발아래 땅이 투명해지며 아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허공에 발을 디디고 서게 되었다. 시엔이 선 땅도 그러했다.

아래가 비쳐 보일 뿐 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데. 시엔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땅 아래, 하늘만큼이나 아득한 깊이였다. 화염으로 빛나 그 깊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니 체감은 더한 것이었다.

시엔이 안전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등골이 서늘하고 오금이 저릿할 정도였으니.

붉은 화염이 아래로 푸르게 변하여 종래에 흰 것들이 가장 아래에 넘실거렸다. 화염에도 급이 있어 그 색으로 지독함을 나타낸다고 했던가.

“시, 시에엔…….”

애원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뷔아가 투명한 땅 위에 두 손 두 발을 다 붙인 채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시엔이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성녀가 아래와 위를 번갈아 보며 어쩔 줄을 몰랐다.

“나, 나, 손을 못 떼겠, 흐아아…….”

땅이 꺼지는 것이 아니니 눈을 감으면 좀 더 편할 텐데.

그러나 말해주기엔 뷔아의 꼴이 재미있었다. 대신 뷔아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높은 장소에서 무서워 엎드린 이다. 팔을 잡아 들었으니 짓궂고 고약한 장난이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뷔아가 경기를 일으켰다. 손이 땅에서 떨어지자마자 곧장 입에서 비명을 터졌다.

그리고는 와락 달려들어 목을 끌어안고 다리는 땅에서 뛰어 시엔의 허리를 휘감아 매달렸다.

단 내음이 훅 끼쳤다. 아찔하게 파고드는 향기.

시엔이 당황했다. 좀 놀렸기로서니 이럴 줄은 몰랐다. 게다가 매달려 얼마나 힘을 주어 조이는지 숨쉬기가 불편할 지경이었다.

“뷔아? 보기에만 두려운 허상이니 땅을 디디셔도 괜찮습니다만.”

“그, 그게. 엄맛!”

뷔아가 그 말에 한 발을 슬쩍 내렸다. 땅을 디디려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대뜸 제 어머니를 찾았다.

곧장 다시 허리를 휘감아온다.

순식간에 다시 원상 복귀.

비단 성녀만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대표로 나온 자리에 땅이 투명해 저 아래가 비치니 호위로 나온 방패병단 역시 자지러져 땅을 기는 중이었다.

저들이 바로 사령관을 호위하는 정예 중의 정예가 아니던가.

화살이 비처럼 내려 쏟아지더라도 물러나지 않는 용맹한 병사들이었으나, 아득한 높이 위에 서 있는 인간으로서의 본능은 이기지 못했다.

그나마 라이뱅 경이 성기사장다운 담력으로 겨우 무릎 꿇고 앉아 기도를 드리고 있을 뿐. 그나마도 눈을 감고 그저 천신을 찾았다.

“뷔아. 차라리 눈을 감으십시오.”

“어, 음.”

“감았습니까? 그러면 천천히 발을 디뎌 보시고.”

뷔아가 간신히 발을 디뎠다. 이어 두 발이 모두 땅에 닿았다.

목을 휘감은 두 팔이 느슨히 풀리나 싶더니, 뷔아의 손바닥이 시엔의 어깨로부터 팔뚝으로 더듬어 내려갔다.

이어 손과 손이 닿자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않았다.

“뷔아, 손을.”

“놓지 마여! 놓으면 안 돼요.”

얼마나 다급했는지 발음이 새었다.

“조금만 진정하십시오. 보는 눈이 많습니다만.”

“아, 안 돼요. 아니, 못 해. 나, 나 못 하겠어요.”

시엔이 손을 놓으려 하자 곤장 깍지를 끼어 붙들었다. 그도 모자라 품으로 당겨 아예 팔을 끌어안는 것이 아닌가.

옷을 사이에 두고 살과 살이 맞붙어 공포에 질린 떨림이 팔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지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는 상태구나. 성녀라 의연한 척을 해도 결국 그 나이대 여인에 지나지 않는데…….

문득 그러한 생각이 들어 시엔이 크게 반성했다. 도를 넘는 장난을 쳤다 싶어서.

일단 그 책임감으로 뷔아는 그대로 두기로 했다. 진정시키기보단 두려움의 원인을 치우는 편이 더 빨랐다.

그사이에 주문이 완성된 모양이었다.

온 세상천지에 마력이, 아케인 에너지가 가득 차 넘실거렸다.

마력 탐지로는 한 치 앞의 마법사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자욱한, 숫제 마력의 바닷속에 빠진 기분이었다.

이번엔 시엔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비록 남의 뼈를 빌려 완성한 주문이었다고 해도, 충분히 찬사를 보낼 정도의 결과물이었다.

관념 세계가 지상과 함께 존재했다.

하늘 위에 바다와 그 아래 대화산들, 부유하는 대지와 지하로 뻗은 하늘을 따라 피어오르는 화심과 심연에 희게 타오르는 화정의 자태…….

역사상 그 어떤 마법사도 행하지 못한 최초이자 기적이었다.

동시에 마법의 강력함 역시 알 수 있었다.

마법이 펼쳐진 범위 안에서, 마법의 주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야말로 전능에 가까우리란 사실도 알았다.

생각만으로 세상 모든 천재지변을 하나로 모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아쉽지만, 감상은 여기까지였다.

사실 누구 때문에 감상도 제대로 못 했다. 하지만 자업자득이라 할 말도 없으니 그저 빨리 끝내는 수밖에.

* * *

팔란, 라이네스, 뤼니에, 알리아. 각각 천문관, 땅지기, 방화광, 물길잡이인 마법사 넷은 전에 없던 고양감에 휩싸였다.

이 순간 넷의 의식이 하나로 묶여, 그야말로 세계와 함께 존재했다.

지상에 펼쳐진 관념 세계가 곧 그녀들의 심상 세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마법이 본디 마법사의 심상 세계에 허수 차원과 이어지는 통로를 뚫고, 그 현상 자체를 가져와 세상에 구현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만은 세 종류의 세계가 하나로 일치했다.

즉, 그녀들의 의지가 어떠한 과정 없이 곧바로 현실이 되는 공간의 완성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위대한 업적으로 의뢰를 완수하고, 황금과 도시의 소유 문서를 받아 그이에게 돌아가는 일뿐이었다.

그리고는 그이와 함께…….

-야. 이거 어떤 년이 떠올린 생각인데? 채찍은 왜, 악! X발, 더럽게 아프네. 양초? 양초는 왜, 잠깐 촛농 떨어지는데! 뜨거! 누구야 이 미친년! 알리아, 너지?

-아, 아냐. 알리아는 아냐. 알리아는 아픈 거 질색이란 말야.

-저기,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자기 스스로 이름을 호칭으로 쓰는 거 좀 역겹지 않아?

-알리아는 역겹지 않아! 그리고 방금 주제 돌린 거지? 성벽이 들켜서 그러는 거지? 채찍에 양초면 뤼니에 언니밖에 없지! 언니가 알리아를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어요.

-내가 태우는 건 남밖에 없거든? 내가 타는 건 좀 그래. 아, 근데 호칭 건은 내가 생각한 거 맞아. 귀여운 척 좀 제발! 진짜 태워버리고 싶으니까.

-잠깐. 그럼 그 상상 라이네스야? 라이네스?

-미안. 그런데 너희도 해보면 생각보다…….

-맙소사, 라이네스, 넌 정상인 줄 알았는데! X발 어째 정상인 년이 하나도 없어!

넷의 의식이 묶였으니 피치 못할 부작용이었다. 하나가 상상한 것을 나머지 셋과 공유했다.

예를 들자면 항상 과묵한 땅지기의 은밀한 성적 기호라던가.

천성이 남을 챙기기를 좋아해 만화원 내에서 유일하게 모두와 두루 좋게 지내던 라이네스였다.

모두의 충격이 더욱 컸다.

-진짜 미안. 그런데 마무리부터 하자.

-그런데 라이네스 언니, 그런데 그거 기분이…….

-알리아, 좀 닥쳐!

-맨날 알리아만 가지구 그래. 흥.

-그게 역겹다고. 흥은 또 뭐야? 콧소리가 왜 머리에서 나오냐구. 너 컨셉이지, 그거?

-젠장, 들켰네. 아니, 조금 전은, 알리아는 아니에요. 알리아는 억울해요!

-무의식 줄줄 새는 거 봐라. 역시 컨셉이었네.

-미친년들아. 일부터 끝내! 뤼니에 너도 그만하고 좋아하는 거나 해. 다 태워.

-네가 여태까지 한 말 중 제일 마음에 드네. 그럼 이제 좀 태워 볼까?

뒤이어 모두의 머릿속에 선명한 불길이 떠올랐다. 방화광이 떠올리는 불은 현실보다 훨씬 포악하고 흉악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머지 셋은 방화광이 그 좋지 못한 평판보다도 훨씬 더 정신 나간 족속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불이 꺼졌다.

뤼니에의 의식이 누구 짓이냐 펄펄 뛰었다. 셋이 모두 자기는 아니라 부인했다.

넷의 대화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이루어져 서로 거짓말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음에도 불을 끈 이가 없었다.

-그럼, 대체 누구야? 누가 내 불을 건드렸는데?

-나야.

여인 넷과 확연히 구분되는 이질적인 하나가 끼어들었다.

아예 성질이 다른, 압도적으로 강력하여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그렇게나 강인한 또 다른 누군가.

-누구야?

-타인의 위세를 빌렸음에도 그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너희의 기적이 모두 나의 것을 빌어 나타난 것인데.

-당신의 것이라니, 혹시 성유해, 당신 흑마법사시지요? 하지만 어떻게, 당신은 분명 죽은 사람인데.

-성유해에 남은 사념일지도 몰라!

-말도 안 돼! 전에 이런 적이 없었다구!

-의식을 일치시킨 적은 없었으니까…….

여인 넷이 하나로 뭉쳤으니 한 마디씩 던지는데도 바글바글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시엔의 의식이 넷의 입을 틀어막았다.

넷의 의식이 성유해 셋과 바다의 심장을 매개로 뭉친 상태였다. 그러나 흑마법사의 뼈가 온전히 시엔의 소유였다.

결국, 시엔의 의식을 잇는 순간 그의 심상 세계에 넷이 자연스럽게 딸려 들어왔다.

일순 조용해진 세계 속에서, 시엔이 웃었다.

-좋다. 너희가 너희 근원한 세계를 보여주었으니, 나도 내가 근원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맞겠지. 세상이 잊었으나 너희는 알고 있지 않으냐. 그러니 재주가 좋다면 살아남을 수도 있겠지. 내 응원할 터이니 재주껏 살아남아 보아라.

동시에 세상이 바뀌었다. 어느새 대기는 한없이 어둡고 우울했다.

그 가운데 새카만 빛을 뿌리는 검은 태양.

부정 세계에만 존재하는 부정한 해의 흑광이었다.

< 37. 재해만발 풍운도시 [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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