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재해만발 풍운도시 [7] >
아침부터 공성 준비가 한창이었다.
공병이 잔해를 쓸어 진격로를 만들고, 한편에선 투석기를 조립에 열을 올렸다.
각 부대가 아침부터 인원 점검에 나서니 군대 전체가 비장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어려운 전투가 될 것이다. 다들 그렇게 직감하고 있는 듯이.
지휘관 회의 역시 간단하게 끝났다.
영주성에 가서, 함락시키고 흐레이그의 대공자를 끌어내린다. 이미 승부수를 던졌으니 더 할 말이 있을 것도 아니었다.
늦은 아침, 이른 점심을 먹고 시엔의 군대가 영주성을 향해 진격했다.
전투에서 배가 고프면 싸울 수 없고, 배가 부르면 움직이기 힘들었으니까.
마침내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새 불탄 도시는 앙상하게 뼈만 남았다. 아직도 불길이 잡히지 않은 모양인지 먼 곳에선 연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분명 불을 제압할 준비를 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도시의 수호는 흐레이그의 책임이었다.
그 준비가 방만해서 불을 끄지 못했겠지.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여러모로 귀족의 자격이 없는 놈들이었다.
실상은 알리아가 무리해 지하수를 끌어 비를 내리려다 실패한 탓이었다.
지하수의 수위가 떨어져 물이 마르니 불을 끄려 해도 방법이 없었던 탓에.
그러나 시엔은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군대의 이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길을 만든다.
산중을 지나면 자잘한 관목 따위가 베어져 큰 길이 나고, 초원을 지나면 풀이 밟히고 땅이 다져져 역시 큰 길이 났다.
그리고 불탄 도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병과 방배병이 폐허를 밀치고 후려치며 그 뒤를 군대가 따르며 짓밟았다.
안 그래도 육두마차 다섯 대가 나란히 지날 법하게 생긴 널찍한 대로였으나, 군대의 이동을 따라 그 두 배로 확장되었다.
해가 중앙에 걸릴 때 즈음 영주성 앞에 여섯 가문의 깃발이 부대 단위로 정렬해 정지했다.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전령을 보낼 차례였다.
항복을 권유하고 공격 개시를 알리는 전쟁의 전통이었다. 꼭 전령을 직접 보낼 필요는 없다.
대표가 앞으로 나서서 마법으로 증폭한 메세지를 보내는 것 역시 같은 절차로 취급했다.
본래 받는 입장에선 전령이 염탐을 겸하는 경우가 많고, 보내는 편에선 전령이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으니 상호 이해하에 만들어진 대안이었다.
시엔의 진영에서 대표가 앞으로 나섰다.
이는 전장의 사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기도 했다.
누가 나서서 어떤 연설을 하느냐, 적을 도발하거나 훈계하고 아군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중요한 국면.
시엔이 직접 나서자 그 걸음을 따라 부대의 환호성이 뒤따랐다. 그 옆에 선 이를 보고 손을 모아 기도하며 천신을 찾는 병사도 많았다.
방패병이 빙 둘러 호위를 하는 가운데, 티란디스의 깃발 옆에 또 다른 깃발이 갑자기 솟아 펄럭거렸다.
교단의 깃발이었다.
* * *
흐레이그의 영주성, 지휘 보루의 위로 가신들이 전부 모였다. 높이차를 가져 정교하게 설계된 성벽 덕분에 최후 방어선과 이어져 성문 뒤에 우뚝 선 거탑이었다.
이름 높은 성채에나 있는 구조였으니, 흐레이그 영주성이 얼마나 견고한지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했다.
“적이 대형을 갖췄습니다.”
“작전대로 실행한다. 세 개 성벽까지 넘겨줘.”
적당히 방어하다 후퇴를 거듭해 성벽 세 개까지 넘겨준다.
그래도 성벽 두 개가 남고, 그 이후엔 내성까지 세 겹의 방어막을 남기는 셈이었다.
성벽 세 개를 넘겨주면 적들이 이미 성채 안으로 진입한 이후가 된다.
구불구불 미로와 같이 설계된 구조는 적들의 밀집을 막고 지휘를 마비시켰다.
이후에 만화원의 마법사들이 나서서 궤멸시키는 작전이었다. 겨우 마법사 다섯에 작전의 큰 틀을 맡긴 셈이었다.
그러나, 베사렌 흐레이그는 루우트다렌 요새에서 만화원의 물길잡이 한 명이 일으킨 기적을 이미 알았다.
그만한 마법사가 다섯이니 그 결과를 기대할 만할 터였다.
실제로 만화원의 마법사들이 그리 장담했다.
여기까지는 분명 문제가 없었다.
교단의 깃발이 갑자기 솟아올랐다.
기를 들고 선 이가 보였다. 멀리라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아도, 그 머리 위로 흰 고리가 떠올라 빛을 발하는 것만은 선명했다.
신성하기 그지없는 존재감, 누구나 굉장한 것임을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교단의 성녀였다.
“어떻게 된 일이오? 성녀는 처리했다면서!”
베사렌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만화원의 마법사들을 노려보다가, 방화광의 표정을 보았다.
그 얼굴에 떠오른 경악에 추궁을 단념했다.
“말도 안 돼! 그 폭발에서 살아남았다고? 잔해만 남은 것을 내가 봤는데…… 성녀가 아니라 전설 속 용이 있었더라도 살아남을 수가 없었는데…….”
보아하니 그녀 역시 성녀가 살아남았음을 몰랐으리라.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마치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한 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만은 알았다. 그러니 베사렌이 이만 부득부득 갈았다.
마침내 성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마력이 아닌, 신성으로 증폭한 목소리.
마력과는 다른 특유의 준엄한 울림이 있어 큰 행사의 대예배에서나 쓰이는 그러한 수법이었다.
[교단의 성녀가 성황 예하의 권위를 대리하여 말합니다. 이 땅에 추악한 범죄가 있었습니다. 성녀가 도시 베스탄티에 들러 참상을 목격하니, 기천의 시체를 전시하여 사악함이 하늘에 닿을 지경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군대가 아니었느니 성녀가 눈으로 본 것을 전합니다…….]
성녀가 담담하게 참상을 묘사했다.
광장에 켜켜이 개어놓은 시체들.
그 위에 맴돌던 온갖 종류의 벌레와 선연히 떠오르는 지독한 시취.
부패해 썩어가는 시체에 역력한 일그러진 표정.
흐레이그의 병사들이 다시금 분노했다. 이미 적들이 베스탄티를 포위하고 철저히 학살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으니까.
성녀의 입에서 나오는 묘사가 그들에게 더없이 끔찍했다. 개중 베스탄티에 가족을 둔 이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더욱더.
[이는 전쟁으로 변명할 수 없는 분명한 죄악이며, 흐레이그 가문은 이러한 범죄 행위의 혐의를 받아 신성 재판에 회부되었으니 신실히 임하여 이 땅에 정의를 다져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있었습니다. 과거형이었다. 좋지 않았다.
베사렌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지난밤 참화의 범인 중 하나가 찾아와 회개하며 그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흐레이그 산하 영주 직할대대 포함 이백 스물세 명이 베스탄티의 시민들을 참하였으며, 이들 모두 늙거나 병들어 쓸모가 없는 이라, 적군에게 범행을 뒤집어씌우기 위한 제물로 살해하였다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명령이 흐레이그 가문에서 나온 것이니.]
그러자 군대가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성녀가 거짓을 말한다기엔 머리 위에 뜬, 누군가에겐 머리 뒤에 또는 누군가에겐 그저 단단한 빛무리로 보이는, 헤일로가 너무나 신성한 것이어서.
[그리하여 증거가 명확합니다. 성녀는 성황 예하께서 대리하신 재량으로, 또한 스스로 재판관 열셋을 대리하며 판결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성녀가 말을 이었다.
[흐레이그는 최후의 반론을 하십시오. 지금 당장.]
베사렌이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러나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마법사에게 눈짓하고 곧 목소리를 높였다.
[부당합니다! 증언의 사실 여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또한 그가 적의 사주를 받아 누명을 씌우는 수작임이 확실치 않은데 어찌 단언하십니까!]
[그렇다면 추가 증언을 받겠습니다. 성녀가 명부를 받았으니 증인이 기억하는 범죄자의 이름입니다. 그 죄인의 이름을 밝히니 흐레이그는 확인하여 해당 인물을 보내어 주십시오.]
안돌프 바슨, 제자일 하우서, 딘 파머, 아인네프 밀러…… 성녀가 호명하는 이름이 주욱 이어졌다. 반수 이상은 매복 중 흩어져 사라졌으나, 나머지는 복귀해 방어를 준비 중이었다.
이름 불린 이들이 흠칫 놀라고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에 의문과 혐오가 깃들었다.
[해당 증인의 성실을 의심하겠습니다! 적의 명부야 전쟁 중 구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전시입니다! 교단이 한 편을 들어 압박하는 법은 세상에 없었습니다!]
[교단의 식구가 살해당하기 이전까지는 그랬습니다만. 흐레이그는 강스트프레 교구장의 살해 혐의 또한 갖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변론하시겠습니까?]
[오, 오해입니다! 교구장께선 방문한 적도 없으니 그러한 혐의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증폭 마법을 전개하던 팔란이 생각했다. 낯짝이 참 두껍기도 하지.
그에 비하면 거짓말이 고대로 드러나는 그이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또한 흐레이그는 신전의 구호소를 습격하여 여덟 신관과 소속된 형제자매 서른다섯, 및 강스트프레의 영민 다수를 살해한 혐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습격의 수단이 인간 폭탄이라 불리는 수법이고, 그 주체가 또한 흐레이그의 영민이었음에, 이에 대해 변론하시겠습니까? 인간 폭탄을 쓰는 무리가 진작의 교단의 적으로 선포되었으나 흐레이그가 이와 협력하였으니 이 또한 죄목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변론하셔야 할 것입니다.]
베사렌의 말문이 막혔다. 그저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만화원의 마법사들을 노려보는 수밖에는.
[이러한 죄상으로, 본 성녀는 열셋의 재판관을 대신하여 판결을 내립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씀하신 추가 증인들을 내어 보내겠습니다.]
베사렌이 팔란에게 손을 내저었다.
목소리 증폭 마법을 거두라는 뜻이었다. 팔란이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베사렌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젠장, 지금 당장 그 대마법인지 뭔지를 준비하시오! 지금 바로!”
“어머, 증인을 내보내시겠다면서요?”
“성녀의 말을 못 들었소? 이미 적개심이 스몄으니 나섰을 때부터 파문을 내릴 작정이었잖나! 이러는 법이 세상에 어디에 있나! 교단이 내전에 개입해서는…….”
팔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게 억울한 것처럼 말씀하시나요? 성녀의 말 중에 틀린 게 없었는데. 영민 학살, 교구장 살해, 구호소 습격. 다 하셨잖아요?”
“전부 다 자네들이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해 벌어진 사단이 아닌가!”
“우리야 요청에 따랐을 뿐이니까요. 그래서, 괜찮으시겠어요? 저만한 숫자를 전부 섬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열 중 서넛은 놓치게 될 텐데.”
“성녀, 그리고 옆에 성기사만 확실히 해치우게. 일단 그 둘만 없어지면, 신성 재판이 열려도 문제가 없어. 어차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뭐,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팔란이 웃으며 만화원의 마법사들을 보았다.
사실 그녀들이 가장 고대하던 순간이 아니던가.
“야, 이것들아. 이제 한번 크게 놀아 봐야지?”
그러자 마법사 셋이 저마다 매고 있던 상자를 끌러 바닥에 내려놓았다. 온갖 기하학적인 도형이 새겨진 상자였다.
성유해의 봉인함.
알리아가 멀뚱멀뚱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다에 심장이라는 더 귀한 신물이 있어 성유해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 * *
시엔은 성녀 옆에서 주문을 고르는 중이었다.
상황이 어쩜 이렇게 맞아떨어지는지. 본디 내전이 군대의 싸움이라 흑마법사가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시엔이 홀로 군대를 격파하고 다녔다면, 내전이 끝나고 나서 돌아오는 것은 그저 공포와 경계뿐일 테니까.
이미 한 학문과 거기 엮인 역사가 사라졌다. 사람이 본디 제 이해를 넘은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에.
그러나 성녀가 나서 판을 깔아주고 나니, 이제는 시엔이 무슨 마법을 벌여도 그저 천신께서 천벌을 내리셨다 호도하며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화려하고 끔찍한 것일수록 오히려 천신을 찬미하는 소리가 높아지니 흐레이그는 천벌을 받고 델피르 전하의 정통성이 드높아지는 결과가 될 터.
세속에 전쟁에 교단을 끌어들임이 아직도 걸리는 일이나, 흐레이그가 어리석게도 선을 넘었다.
이젠 비단 세속뿐인 일이라 할 수 없었으니 시엔도 더는 뷔아를 말릴 명분이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래서, 어떤 주문을 써야 할까.
용과 섞인 신체는 워낙에 튼튼한 것이다.
과도한 마법의 후유증, 백파이어를 몸으로 받아낼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거기에 세계수의 나뭇가지로 증폭한 에너지를 생각하면, 오히려 과거 전성기보다 더 큰 마법을 부릴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했다간 백파이어로 쓰러져 한동안 정양해야겠지만.
물론 흐레이그 공작 본인의 군대가 다가오고 있으니 무리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반나절 정도 정신을 잃는 선에서라면, 쓸 만한 주문이 몇 개나 있었다.
무엇보다 저 성채에 시엔이 풀어놓은 악령이 버글버글한 상태였다. 시체가 많던가 악령이 많던가. 시엔에게 둘 중 하나는 최고의 전장이었다.
굳이 둘 중 하나가 최고의 전장인 이유는, 둘이 모두 갖춰진 상황에서 시엔 정도의 흑마법사에게 전쟁이 성립되지 않는 까닭이었다.
일방적인 학살 혹은 유린을 전쟁이라 부르지는 않을 테니까.
[추가 증인을 내어 보내겠습니다!]
베사렌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뷔아가 불퉁하니 분기를 감추지 못하며 시엔에게 하소연했다.
“인제 와서 시간을 벌자는 수작이라니.”
“파문이 선고되고 나면 수습할 수 없을 테니까요. 당장 군대의 통제부터 잃어버릴 것이니, 어떻게든 막고자 하는 것입니다만.”
“애초에 파문당할 짓을 하질 말았어야죠.”
“뭐, 맞는 말씀입니다. 다만. 흠.”
“왜 그래요?”
“시간을 끌어봐야 어차피 안 된다는 걸 알 테니, 뷔아를 노려 입을 막고자 하겠군요. 아마 총공격을 가할 가능성이 있으니 이쯤 물러나는 것이……. 아아.”
시엔이 갑자기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시엔?”
“아닙니다. 그냥 여기 계셔도 되겠군요.”
“뭔데요. 혼자만 알지 말고.”
문득 감각에 잡히는 것이 있으니 분명 과거 흑마법사의 유골이었다.
본디 내 신체였던 것이 아직도 심령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멀리 있어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솟았으니 아마 봉인이라도 해놓았던 모양.
애초에 무언가 믿는 것이 있으리라 여기긴 했다.
저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 타인의 위세를 빌리는 덜떨어진 것들.
고작 준비한 것이 저런 모지리들이었던가. 그게 한자리에 셋이나 모여 있네?
시엔이 느긋하게 서서 마법을 기다렸다.
이젠 아예 뭘 보여줄지 기대가 되는 심정으로.
< 37. 재해만발 풍운도시 [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