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83화 (179/268)

< 37. 재해만발 풍운도시 [6] >

여인은 불안했다.

쿨럭.

아픈 폐는 아무리 참으려 해도 기침이 치밀었다.

입을 가린 손에 점점이 붉은 것들이 죄다 핏방울이었다. 병세도 좋아질 기미가 없고, 상황도 그러한 것 같았다.

“우우…….”

그녀의 아들이 불안한 듯 어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홉 살이 된 아들은 날 때부터 농아였다.

산모의 건강이 원체 좋지 못해 이렇다고 하니, 여인은 항상 미안하여 볼 때마다 가슴에 대못이 박혔다.

“괜찮아. 괜찮, 컥, 쿨럭.”

“우. 어으.”

“괜찮단다. 엄마는 괜찮아.”

여인이 애써 아들을 달랬다. 아들뿐만 아니라 제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듣기로는 그 무시무시한 티란디스의 군대가 도시로 쳐들어온다고.

사악하고 무자비한 학살자들이라, 아이는 재미로 죽이고 여인은 죽음보다 비참하도록 만든다던가.

그래서 대피가 시작된 지가 벌써 사흘째였다.

젊은 여인과 아이가 먼저 빠져나갔다.

그러나 여인의 순서는 아직이었다.

병들고 늙은이는 그 이후에. 여인은 폐병을 앓고 아들은 말을 못 하니 일단은 집에서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이럴 때 그이라도 있었다면.

여인의 남편은 양조꾼이었으나 전쟁에 징집되어 소식이 끊어졌다. 그래도 무소식이 가장 낫다더라.

죽은 병사들의 유가족에겐 예복을 입은 병사들이 찾아가곤 했다. 남은 이들은 차려입은 병사를 보기만 해도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혹여 집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적어도 여인은 그들을 보지는 않았다.

그러니 최악은 아냐.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해.

여인이 재차 다짐했다.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여인이 놀랐다. 진탕하는 속을 애써 진정시키고 문을 열자 창을 든 병사가 보였다.

예복은 아닌 것 같았다.

“이 집에 남은 이가 둘이라던데?”

“저와 제 아들, 콜록, 이렇게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광장으로 가시오.”

“대피인가요?”

“그렇소.”

여인이 옅은 미소를 띄웠다. 안도감의 표출이다.

미리 챙겨둔 짐보따리를 머리에 야무지게 뒤집어쓰고, 아들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섰다.

거리에 병사들이 집집마다 문에 쓰인 숫자를 확인하고 문을 두드려 대피를 알리고 있었다.

여인이 광장에 자리를 잡았다. 광장에 가득한 이들이 늙은이와 병자들이었다.

“우. 으으아.”

“괜찮아. 괜찮을 거란다.”

“으아, 으아.”

“얘가 왜 이래.”

“애가 불안한 모양이구먼. 얘야, 잠깐 기다리련?”

노파 하나가 웃으며 짐을 끌러 사탕 하나를 꺼냈다.

사탕이라곤 해도 무를 녹여 만들어 단맛은 거의 없는 싸구려였으나, 아이의 표정은 활짝 폈다.

“아, 감사합니다.”

“아유, 아녀. 젊은 애 엄마가 고생이 많지. 죽을 날 기다리는 노인네가 애들 보는 맛에 살지.”

그러는 사이 광장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찼다.

그러자 접어드는 모든 방면으로 병사가 수레를 끌고 오는 것이 보였다.

여인이 안도했다. 늙고 병든 이들이 어째서 마지막인가 했더니 수레까지 준비해 피난을 도울 생각이었나 보다.

영주 나리께서도 참 감사하셔라.

그러나 수레는 도착하지 않았다.

도중에 멈추어 쌓아 길을 막고, 창을 든 병사가 앞을 지켜 겨누니 광장에 불안한 소음이 번졌다.

그리고 쐐애액. 하늘에서 화살 비가 내렸다.

여인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서로 밀고 밀치고, 붙들고 쓰러지며 바닥을 구르는 사람들.

바람 가르는 매서운 소리가 사방에서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가운데, 그저 제 아들, 내 아들 하나 지키겠다며 끌어안고 필사적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인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기어코 군대가 막은 길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아들을 내밀고 있었다.

“제발 아이, 아이만은…….”

여인이 병사의 눈을 보았다. 병사의 떨리는 눈에 여인과 아들이 비쳤다.

창을 든 손의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을 가린다. 최후의 순간, 여인이 병사의 가슴팍을 훑었다.

마크 밀러.

저 주 를 . 절 대 용 서 못 해 .

“허억!”

마크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전신에 식은땀 범벅이었다. 이마에선 땀이 주륵 미끄러지고, 잠옷은 물론이고 침상의 시트까지 축축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불쾌감보다 먼저, 생생한 악몽의 기억이 마크를 뒤흔들었다.

“명령, 명령이었다고…….”

군대가 하는 일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군대가 하는 일이 전부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자 꺄르르, 어렴풋이 귓전을 스치는 웃음소리가 있었다. 마크가 소스라쳐 고개를 휙휙 돌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익숙한 방의 풍경뿐이었다. 그의 방이었다. 문득 의문이 치밀어올랐다.

내 방? 내가 언제 집으로 돌아왔던가.

그러자 벽이 열렸다. 사방을 막은 벽이 나무판처럼 밖으로 쓰러지고 나니, 어느새 광장 중앙에 선 자신을 눈치채고 만다.

그리고 그들이 온다. 온 사방을 메우며 다가오는 피투성이의 사람들을 보았다. 원독 가득한 눈빛으로 목소리 없이 입 모양이 전부 하나처럼 움직였다.

절 대 용 서 못 해 .

“허억!”

마크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물에 빠진 것처럼 온몸이 축축했다.

“여기는…….”

딱딱한 땅바닥 위. 불탄 잔해 사이였다.

매복 중에 불이 나 도망쳤고, 도중에 부상을 입어 신전에 찾아갔다.

치료를 받고 나선 다시 도망쳐 불에 탄 폐허에 숨어 잠이 들었더란다.

‘깊은 원한을 사 저주에 들렸군요.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죄를 고백하고 진심으로 뉘우치세요.’

분명 그 신관이 그렇게 말했다. 신관복을 입은 자는 아니었으나 신성 치료를 했으니 그러하리라.

저주, 저주라니.

“나는…….”

마크가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어깨를 툭 치는 손길이 있었다.

“백인장님? 뭐 하고 계십니까?”

“어, 어?”

“준비 끝났습니다. 총원 32. 출동 준비 끝.”

“출동 준비라니……?”

“아이참, 왜 이러십니까?”

마크가 부관을 보고, 또 그 뒤에 사열한 병사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뒤로 놓인 수레들을 보았다.

마크가 하얗게 질려 고개를 저었다.

“명령은 취소, 취소다. 작전 중지! 모두 해산…….”

“에이, 왜 이러십니까? 이거 보십시오. 여기 명령서가 아직 있잖습니까.”

부관이 손에 든 것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직 어린아이의 목. 머리만 남은 아이가 눈을 번쩍 떴다.

입술이 움직여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들렸다.

절 대 용 서 못 해 .

“흡! 으아아악!”

마크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여보……? 왜 그래요?”

그 서슬에 덩달아 잠에서 깬 모양인지, 아내가 몸을 일으켜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악몽이라도 꿨나 봐요.”

“아냐, 아무것도…….”

“당신 얼굴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요.”

“나는,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니까…….”

“하아. 당신은 꼭 그래요. 힘든 일이 있어도 혼자서만 끙끙대고. 내가 여기 있잖아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 편인 거 알죠?”

“알지. 아니까.”

그러자 아내가 팔뚝을 휘감으며 몸을 기댔다.

팔뚝으로 느껴지는 아내의 부드러운 온기에, 마크는 깊게 안도했다.

사랑스러운 부인에게 가볍게 키스하며 눈을 맞추니, 아내가 쑥스럽게 웃었다.

“아이, 참. 왜 이래요?”

“아니. 고마워서.”

“새삼 고맙기는. 아, 맞다. 나 당신한테 물어볼 게 있었는데.”

“뭔데?”

그러자 아내가 화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죽였어요?”

뒤이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절 대 용 서 못 해.

“아아악! 으아아악!”

마크가 또다시 깨어났다…….

* * *

“윽.”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시엔 님, 괜찮으세요?”

“아파. 죽겠어.”

“조금만 참으셔요.”

흑마법사가 하는 일 중 악식이 있었다. 독을 삼켜 따로 저장하는 일이었다.

시엔 정도 되는 경지에서는 맹독을 물처럼 넘기더라도 탈이 없을 정도였다.

과거 흑마법사가 제국의 청야전술에 맞서 잡다한 것을 몽땅 집어먹으며 살아남은 비결이기도 했다.

하나 악식에도 단점이 있다. 마취 역시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슴이 열린 채로 시엔이 연신 인상을 찌푸렸다.

트리예가 의술을 따로 배우지는 않았으나, 사람을 개조해 키메라를 만들 정도로 인체에 정통하기는 했다.

그리고 그게 의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과의로는 대륙에서 손에 꼽을 수 있으리라.

“세상에, 누가 이렇게 무식하게 치유를…….”

“그러게나 말이야.”

트리예의 손이 분주히 움직였다.

내장을 헤집어 뼛조각을 들어내고, 톱과 망치로 잘못 붙은 갈빗대를 능숙하게 떼어 붙였다.

폐에 박힌 조각을 떼어내자 거품 섞인 피가 빠져나왔다. 그러자 시엔의 손이 움직여 그 위에 신성을 뿜었다.

트리예가 경이를 담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수술은 길었다. 혹여 모를까 속을 헤집어 확인까지 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그러고 나니 수술을 하는 이나 받는 이나 온통 땀으로 흠뻑 젖은 꼴이었다.

그래도 이제 흉통도 없고 숨쉬기도 편했다.

트리예가 씻으러 가겠다며 물러나고 나니, 뒤이어 천막을 찾는 이가 있었다.

“시엔, 좀 괜찮아요?”

“이젠 멀쩡합니다.”

시엔이 뷔아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머리 뒤편을 보았는데, 어쩐지 헤일로가 보이지 않았다.

성녀가 잔뜩 풀이 죽은 표정이라, 아마 그 심리에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그, 생각해 봤는데.”

“무슨 생각 말입니까?”

“대주교님께서 영주성에 소식을 전하러 가셨어요. 신성 재판을 알리러 가셨는데. 아직 돌아오시지 않으셨으니.”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신전에 폭탄을 보내 몰살하려 들었으니, 제 성에 들어온 이라면 당연히 살려두진 않았을 터다.

뷔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시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부, 내, 내가. 나는, 시엔? 뭐 해요?”

“이전 소동으로 손수건이 더럽습니다. 보아하니 또 우실 생각 같아서 하나 찾아오려 합니다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진짜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만, 혹시 마시는 물이 전부 눈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보통 그만큼 눈물을 흘리면 마른 울음이라 하여 더는 나오지 않는…….”

“야! 뭐 이딴.”

“뷔아가 그렇게 눈물이 많은지 몰랐습니다. 뷔아도 몰랐던 것 같은데, 앞으로는 세 장씩 들고 다니십시오. 매번 남의 것을 빌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만.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뷔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제야 시엔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뷔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안 들어도 알겠습니다만. 하긴, 그 성격에 안 그럴까 싶긴 한데.”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요?”

“뷔아의 잘못이 아닙니다.”

뷔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제가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았으면…….”

“뷔아는 경솔하지 않았습니다. 대주교께서 악심을 가지고 가신 것이 아니고, 저들이 스스로 떳떳하지 못해 벌인 참사입니다.”

“그렇지만, 구호소가.”

“뷔아가 구하고자 한 이가 그저 가엾은 이가 아니었습니까? 그게 저들에게 해로운 일이 아니었으니, 뷔아가 한 일에 잘못이라곤 단 하나도 없습니다.”

어쩜 이리도 항상 마찬가지인지.

범죄를 저지른 이는 따로고, 그에 죄스러워 미안한 마음만은 항상 선량한 이가 뒤집어쓴다.

선량한 이가 근본적으로 멍청하고 어리석은 천치들이라 그랬다.

저 자신의 부귀와 영화를 쫓기도 바쁜 세상에 오지랖을 부려 남을 챙기니 보통 바보들이 아니었다.

교단에 속한 이들이 전부 그랬다.

시엔의 눈빛이 따스했다. 적어도 선량한 이가 제 잘못 아닌 일로 가슴 아프지는 말아야 하는 일인데.

“뷔아가 모든 상황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저 말뿐인 소리가 아니라, 가슴 속에 절대 그러하다는 확신이 담긴 말이었다.

뷔아는 부글부글 끓던 속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시엔이 급히 손수건을 내밀었다.

“어쩔 수 없으니 이거라도 쓰십시오.”

손수건이라기보단 온통 검댕으로 지저분한 천 조각이다.

피부에 문지르면 닦이기는커녕 오히려 시커멓게 묻어나 더욱 더러워지고 말 터였다.

단박에 뷔아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아니, 이건 또 뭔.”

시엔은 이제 제 천적이 여인의 눈물임을 알았다. 그리고 천적은 원래 마주치기 전에 피하는 것이 제일 아닌가.

아예 그 전에 선수 쳐서 막아버려야지.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자책하느니 뭐라도 찾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뷔아가 금방 알아듣고 생각에 빠졌다.

잠시 후, 성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병사. 시엔이 구호소에서 대한 그 병사를 찾아야겠어요.”

“찾아서 뭘 하시려고.”

“명확한 증거 없이는 파문을 내일 수 없으니까요. 시엔이 한 말이 맞다면 그 병사가 흐레이그의 죄를 증언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자 뷔아의 머리 뒤로 다시 후광이 비쳤다.

도대체 저건 원리가 뭐야?

시엔의 학자의 호기심을 꾹 억눌렀다.

어쨌거나 정신을 다잡긴 한 모양이니 또 눈물과 함께하는 하소연은 피한 모양이고. 또 얻어맞는 것도 사양이고 하니.

“그럼, 바로 움직여야겠어요.”

그리곤 뷔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나가는데, 어느 방향에서도 헤일로의 후광이 시엔의 시선 반대편에 위치하는 것이 아닌가.

관측자의 시선에 따라 이동한다고?

그럼 여럿이 관측할 때는? 모두 각자의 시선에서 머리의 반대편에 위치하나?

현상이 분명한데 개인의 관찰이 각각 따로 존재할 수 있다고? 그게 말이 되나?

시엔의 의문이 늘어가는 사이, 뷔아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시엔.”

“왜 그러십니까?”

“그, 고마워요.”

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뭐. 당연히 그래야겠죠. 생명의 은인인데.”

“좀 적당히 받아주면 안 되나요?”

“안 됩니다. 생각해 보니 말로만 고마울 겁니까?”

“아. 진짜!”

그리고 때를 맞춰 밖에서 시엔을 찾는 목소리가 있었다. 뷔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들어오라 하니 전령이 소식을 전했다.

“사령관님, 적병 하나가 투항해 왔습니다. 해당 포로가 성녀님을 뵙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37. 재해만발 풍운도시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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