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재해만발 풍운도시 [2] >
“매복조에게 철수하라 일러.”
베사렌이 이를 갈며 지시했다. 빌어먹을, 도시에 불을 지르다니.
티란디스 놈의 포악함을 진작 알았지만, 세상에 이러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잠시만요, 대공자님. 아직 철수를 말하기엔 조금 이르답니다.”
팔란이 베사렌을 만류했다.
“이르다니. 전부 타 죽게 놔두자는 건가?”
“만화원의 마법사를 얕보시면 곤란하세요. 불이 거세다면 물을 끼얹어야겠지요. 저희가 비를 내려 막겠습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분명 파도등대의 마법사들이 말하기를…….”
“맨하늘에 비구름 만드는 것이 어렵다구요? 그야 실력 없는 것들의 변명에 불과하답니다. 저희 물길잡이는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확실한가?”
“당연하죠, 저희만 믿으세요, 대공자님.”
팔란이 턱을 추켜세웠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팔란이 그렇게 장담했다.
* * *
화염탑의 실력자들이 한곳에 모였으니, 불을 지르는 일이야 큰 수고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화력이 너무 용맹하여 탈이었다.
불이 커지기 전에 재가 될까 봐 위력을 줄여야 했다.
그렇게 결국, 도시에 큰 화마가 일었다.
새카만 연기가 온 사방에 치솟았다. 매서운 열풍이 밀려와 살갗이 익은 듯이 화끈거렸다.
한낮의 태양 아래 투명한 불길이 일렁거리니, 집채들이 속절없이 우지끈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시엔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착잡한 표정.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가엾은 것들. 제 주인에게 받는 취급이 짐승이나 다름없는데, 그 와중에 침략자가 터전을 태우다니.
그 속도 함께 타들어 갈 것이 뻔했다.
전쟁이 끝나면 대대적인 보수가 필요할 터다.
집터를 다시고 건물을 올리는 것이 그저 인력만이 아니라 그 자재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만큼의 대량의 목재가 필요할 테고.
“로우드 녀석이 기뻐하겠네.”
“그러게. 아주 천직이 따로 없던데.”
카레네가 맞장구를 쳤다.
영지의 재무관을 맡은 로우드에게 희소식이었다. 대량의 목재를 비싼 값에 떠넘길 기회.
티란디스가 도시를 태우고 그 재건에 쓰일 목재를 또 비싸게 팔아넘기게 생겼다.
생각보다 더 괜찮은데? 불길을 키우라 할까.
시엔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불쌍하기야 사람이 가지는 당연한 연민이고, 귀족이 챙길 것은 결국 제 영지였다.
이참에 큰 이득을 볼 수 있다면 기꺼운 일이고말고.
그러다 시엔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화염탑과 파도등대의 마법사들 역시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강대한 마력의 파동 때문이었다.
강대한 아케인 에너지가 저 상공에 모여들고 있었다. 축축하고 질척한 냄새를 풍기는 마력이었다.
물길잡이가 행하는 마법의 전조.
시엔이 즉시 파도등대의 마법사들을 호출했다.
“비구름을 만드는 마법인데, 주변의 물기를 전부 빨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이대로라면 폭우가 쏟아질 테고, 그러면 불길도 곧…….”
“비내리기가 그리 쉬운 일이던가요?”
강우가 그리 쉬웠다면 대륙에 가뭄이란 말이 없었으리라.
파도등대의 물길잡이들이 번거롭게 바다에서부터 구름을 인도할 필요도 없었다.
주변의 물기를 강제로 모아 구름을 만든다는 것은, 파도등대의 고위 마법사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화기가 치솟아 하늘에 닿으면 성질이 뒤바뀌는 것이 순리랍니다. 이렇게 연기가 치솟으니 비구름을 만들기가 한층 수월할 거예요. 저희는 하늘에 씨를 뿌린다고 표현하는데요.”
시엔이 듣고자 하는 말은 아니었다.
이미 적의 마법사가 수작을 부리고 있으니, 막을 방도를 구하고자 했다.
어떻게 했느냐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만들어진 구름 몰이가 더 쉽지 않았나요? 모처럼 큰불이 났는데 비 소식은 그리 달갑지 않은데요.”
“어. 그게 말입니다, 도련님.”
셀시가 눈동자를 굴렸다.
문득 시엔이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셀시가 파도등대의 탈주자가 있다고 했죠?”
“후우, 네. 맞아요. 알리아, 그것이 부리는 수작인데. 바다의 심장을 가지고 있는 이상, 저기에 관여하기는 어렵답니다.”
바다의 심장. 물길잡이의 마력을 수백 배 증폭하는 외해의 신물이라고 했던가.
외해, 바다 너머의 또 다른 바다가 있었다.
세계의 법칙이 통용되지 않아 인간을 들이지 않는 곳이었다.
파도가 하늘보다 높이 일고, 바닷물이 위로 치솟아 폭포를 이루며, 육지가 수면보다 아래에 뭍을 드러내기도 한다고.
파도등대가 외해 탐사 중 찾았으나, 탈주자가 훔쳐 달아났다.
그 마법사가 루우트다렌 공방에서 일대를 빙판으로 만드는 기적을 선보이지 않았던가.
“바다의 심장을 가진 이상 구름을 끌기는 어렵겠어요. 큰비가 내리기 전에 미리 끌어내리는 건 가능하겠지만, 이후 전투에서 힘이 되어드리기는 힘들 것 같아요. 도련님,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이건 어때요? 도움이 좀 될까요?”
시엔이 품에서 나뭇가지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와! 도련님, 그거 설마.”
“맞아요. 세계수.”
“티란디스 영지에 엘프의 숲이 있었죠! 이러면 충분히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잠시 빌려도 괜찮겠어요?”
“어차피 도구는 필요할 때에 쓰여야겠죠.”
셀시가 두 손으로 공손히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받아들었다.
말이야 쉽게 하지만, 마법사가 제 손에 들어온 보물을 빌려주는 일이 여간 배포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셀시가 흥분 가득한 기색으로 자리를 떴다.
당장이라도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휘두르고 싶어 안달이 난 태도였다.
마법사다운 태도였다.
* * *
흔히 불의 천적이 물이라 하지만, 그것도 규모가 비슷할 때나 통하는 말이었다. 큰불 앞에 물은 곧바로 말라붙어 자취를 감췄다.
도시에 불이 번지는 상황에 가랑비가 내린들 그게 어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물방울이 못 되는 연약한 가랑비는 지상에 닿기도 전에 열기에 흩어져 사라졌다.
“으…….”
영주성의 첨탑 위, 물길잡이 알리아가 진땀을 뻘뻘 흘렸다.
무리하게 끌어모아 만든 비구름이었다.
한계까지 모아 폭우를 쏟아낼 요량이었으나, 누군가의 방해로 그 전에 물기가 새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왜. 이런 데에 등대지기급들이 잔뜩 몰려 있냐구…….”
알리아가 울상을 지었다.
대륙이 가물다 보니 물길잡이들이 등대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제대로 힘을 못 쓸 테니까.
그러니 여간해서 마주칠 일도 없고, 자신을 막을 자가 없다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분명 자신보다 강력한 마력 여섯이 비구름을 억지로 비집어 열고 있었다.
그 사이로 미처 붙잡지 못한 물기가 줄줄 새어나갔다.
“게다가, 설마.”
알리아의 눈이 떨렸다.
비구름을 공격하는, 개중 하나 특별히 강력한 마력이 있었다.
알리아가 알기로 이만한 실력자는 등대지기 본인, 그녀의 아비뿐이었다. 아니면 못돼먹은 언니, 셀시의 실력이 그간 월등히 성장했거나.
등대지기가 등대를 비우고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으니, 누구인지는 자명했다.
“그래, 언니. 또 방해하러 왔다 이거지?”
으득. 알리아가 이를 갈았다.
뒤이어 온 마력을 바다의 심장 안으로 불어넣었다. 그녀의 정신세계가 현상계를 더듬어 그 범위를 넓혔다.
온 도시에 우물에서 물이 솟구쳤다. 곳곳에서 세워진 물기둥이 하늘과 지상을 이었다.
지하수가 물길잡이의 인도를 받아 어마어마한 수량을 구름에 더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성장한 비구름이 비를 뿌렸다. 가루처럼 흩날리던 가랑비가 아니라, 제대로 된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불과 물이 지상에서 만났다.
도시에 물안개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간힘을 쓰기를 한참, 알리아의 코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알리아가 하는 일은 이미 물길잡이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지하의 물을 억지로 끌어 올리고, 그걸 또 하늘에 붙잡아두는 중이었다.
제대로 된 폭우를 쏟아낼 정도가 될 때까지 모아두기 위해서.
그러나 알리아를 방해하는 마법사들은 달랐다.
그저 하늘에 뜬 비구름을 열심히 찔러 비를 내리기만 하면 되니, 이렇게 쉬운 일이 또 있을까.
“아, 안 되겠다. 무리. 절대 무리.”
바다의 심장이 아무리 신물이라 한들, 기본적인 난이도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상황이었다.
알리아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애초에 안 되는 일을 어떻게든 해보고자 붙잡는 성격이 못되었다.
잠시 후, 팔란이 첨탑 위로 올라왔다.
“알리아, 어떻게 되어 가는…… 너, 피!”
“헤헤, 팔란. 미안.”
“미안? 그게 무슨…….”
“저쪽에 물길잡이가 여섯에다가, 차석 등대지기가 직접 온 것 같거든? 알리아 혼자서는 안 돼.”
팔란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러니까, 불을 못 끄겠다는 거지?”
“응. 못 해.”
“어쩜 그리 당당하게…….”
“못 하겠는걸. 어떡해? 알리아는 코피까지 흘리는데, 이렇게 열심히 했는걸.”
“젠장, 빌어먹을!”
팔란이 후다닥 등을 돌렸다.
불을 끄겠다고 대공자에게 호언장담을 했건만, 인제 보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체면이 당당히 상하는 일이지만, 그보다도 먼저 불가능함을 알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저 지능에 문제가 있는 물길잡이는, 오죽하면 스스로의 호칭을 자기 이름으로 부를 정도였다.
알리아를 얼마나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코피까지 흘리는 것을 보니 나름 애를 써 본 것도 같지만, 워낙에 의뭉스러운 년이어야지.
팔란이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딱딱딱딱 힐이 돌계단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여인의 구두가 본디 계단을 뛰어 내려가라 만들어지지 않았다.
도중에 굽이 똑 부러지니 팔란의 발목이 콱 꺾였다. 팔란이 계단을 굴렀다. 결과적으로 빠르게 첨탑에서 내려오기는 했다.
욱신거리는 발목의 통증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팔란의 머릿속엔 그저 위기감뿐이었다. 자칫하면 일을 망칠 판이었다.
모든 것은 그이를 위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낙인과 같은 암시가 팔란을 사로잡았다.
영주성의 중심으로 향한 팔란이 체중을 실어 문을 열어젖혔다.
“대공자님! 지금 당장 매복조를 물러야 하세요. 지금 당장요!”
“팔란? 도대체…….”
베사렌이 깜짝 놀라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산발이 된 머리에 잔뜩 구겨진 드레스.
밑단 무르팍 즈음엔 붉은 기가 배었고, 그 아래 드러난 발목이 두 배로 부은 상태였다.
“이보시오, 일단 좀 진정하시오.”
“마법이, 마법이 실패했어요. 도시의 불을 끌 수가 없게 되었단 말이에요! 당장 매복한 자들을 무르지 않으면, 매복, 짐승들!”
팔란이 비명을 질렀다.
짐승들. 만화원의 흑마법사, 메이화가 만들어낸 괴물들이 건물 속에 숨었다.
명령이 없다면 제 몸이 불타더라도 절대 움직이지 않는 괴물들이었다.
“메이화! 메이화!”
“이보시오, 진정. 진정을 좀 하시오.”
베사렌이 팔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고서도 진정할 기미가 없자,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결국 품에 당겨 끌어안았다.
애써 부드럽게 등줄기를 쓰다듬으니 그제야 마법사가 숨을 내쉬었다.
베사렌이 속으로 혀를 찼다. 잘난 척은 다 하더니, 실패했다고 패닉에 빠져 이 꼴이라니.
일이 잘못되었다면, 오히려 침착하게 대응에 나서야 하는 법이었다.
“이봐, 거기. 특실에 가서 마법사분들을 전부 모셔오도록.”
시종 하나가 명령에 따라 뛰쳐나갔다.
“진정하고 말해 보시오. 불길을 잡는 데에 실패했다고 하셨소?”
“예. 죄송합니다. 일이 그렇게 되어서.”
“좋소이다. 실패한 일은 어쩔 수 없지. 일단 넘어갑시다.”
“예, 예…….”
베사렌이 다시 명령을 내렸다.
“매복조는 당장 후퇴하라고 하게. 이미 늦었겠지만, 되는 대로 성채에 합류하도록 전달하게.”
기사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곤 밖으로 달려 나갔다.
팔란이 고개를 푹 숙였다.
창피함도 창피함이거니와, 정신이 들자 온 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동시에 서러움 역시 밀려들었다.
만화원의 구성원들이 그이 하나만 보고 협력하는 사이였다. 그러니 사이가 나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왜? 왜 나만 이 꼴인데? 다들 그이 잘되자고, 내조 좀 잘해 보자는 거 아니었나?
동시에 다른 생각도 들었다.
흐레이그의 대공자, 성격 나쁜 냉혈한인 줄만 알았더니 오히려 상황에서는 이성적이고 침착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의외로 자상한 면모도 있는 것 같고.
그런데 그이는? 맨 벌어다 주는 돈으로 놀고먹기만 하는 한심한…….
내가 왜 그이를 위해 이러고 있지? 왜? 왜? 왜냐하면, 내 사랑-
팔란의 눈빛이 되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추태를 보였어요.”
“진정하셨다니 다행이로군. 그래, 그러면 상황을 정리해 봅시다. 화재 진화에는 실패했고, 매복조도 흩어졌다고 봐야겠지. 짐승들은 그 메이화라는 마법사가 늦게라도 거두어야 할 테고.”
“예. 대공자님.”
“매복은 실패했다고 판단해야겠지. 결국, 일전을 준비해야겠군. 성채를 끼고 마법을 쏟아부어야겠소. 준비해 주시오.”
“예. 이번에는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팔란이 성유해를 떠올렸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운 물건이었다. 그 효능은 더욱더 그러했다.
가진 것만으로도 마법사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게 해주는, 그야말로 현상 세계에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최고의 촉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눈을 빛냈다.
“잠시만요, 대공자님. 그래도 폭탄은 좀 남았을 거예요. 지금까진 몇 번이고 실망시켜 드렸지만, 떠오르는 계책이 있으니 일단 들어 주시겠어요?”
< 37. 재해만발 풍운도시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