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80화 (176/268)

< 37. 재해만발 풍운도시 [3] >

뷔아는 심란했다. 불타 남은 잿더미들, 그리고 저 멀리에 여전히 피어오르는 거친 연기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렸다.

미리 대피하라 알렸으니 인명이 상하지 않을 것이라지만, 어디 사람 목숨이 그저 사는 것이 전부이던가. 집채를 태워 가산이 잿더미가 되니 제 일부가 타오르는 기분일 텐데.

거기에 말 못 할 개인사까지 그녀를 괴롭혔다. 나쁜 놈.

이렇게 가혹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냐. 이게 최선이 아니라 다른 방도가…….

문제는 실제로 매복조로 추정되는 이들이 대로에 모습을 드러낸 일이었다.

석궁을 끼고 가죽 갑옷을 입은 이들이 불붙은 집집마다 혼비백산 뛰쳐나왔다.

실제로 매복하여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시엔의 결정이 옳았다는 뜻이고,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사람의 목숨이 더 산 꼴이기도 했다.

그래서 뷔아는 두 배로 심란했다.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은 개인차가 있었다. 뷔아의 경우에는 노동이었다.

좀체 진정되지 않을 때면, 무엇이든 손에 붙잡고 거기에 집중하는 편이었다.

교단 본단 우물가에 손수 물을 묻히며 빨래를 돕는 성녀가 나타나면, 다들 무언가 속상한 일이 있었구나 하고 알 정도였으니.

그래서 뷔아는 할 일을 찾았다. 굳이 궁리할 필요도 없었다. 도시는 불타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차고 넘쳤으니까.

* * *

“구호소를 말입니까?”

“신전에 도움을 호소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형제자매님들과 함께 꾸릴 생각이에요. 집을 잃고 당장 오늘 밤이 곤궁한 분들이 많으실 테니까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시엔이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총공격은 내일 아침이었다. 밤새 도시가 불타도록 놔두면, 영주성으로의 안전한 진격로가 확보되었다.

거기에 성녀가 있으나 없으나 별다를 일이 없었다.

이미 흐레이그의 영주성에 무수한 악령이 스며들었다.

세상에 이미 흑마법이 자취를 감춰 알아채지도 못하겠지만, 설사 몇 없는 흑마법사가 저 안에 있더라도 매한가지였다.

시엔의 이름으로 복수를 약속했으니, 그보다 높은 격으로 악령을 달래지 않고서야 온전히 사역하는 것은 무리였다.

흑마법사가 억지로 쫓아내려 해도 그 숫자가 보통이 아니고, 세올과 트리예가 말하기로 심연탑의 망령술 계파도 거의 실전되었다고 했으니.

그러고 보니 심연탑도 찾아가 보기는 해야 할 텐데.

시엔이 딴생각을 했다.

한심한 후배들이라도 선배된 입장에서 한 번쯤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심연탑을 영지로 가져오면 더 좋고. 뭐. 까마득한 핏덩이들이 어쩔 거야. 대선배가 까라면 까야지.

“이봐요, 시엔?”

“아, 뷔아. 미안합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사람을 앞에 두고 딴생각이다?”

“아무래도 뷔아가 편해서 그런 모양입니다. 마음에 두진 마시지요.”

“잠깐, 그거 무슨 뜻이에요? 무슨 뜻인데?”

“아, 잠시. 생각할 거리가 아직 남았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생각난 김에 마저 해야겠습니다.”

“야, 씨이…….”

매번 하는 농담이었다. 시엔이 키득거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

“구호소라. 물론 훌륭하신 생각이십니다만.”

“또 안 되겠다?”

“안 될 것은 없습니다만. 흠, 흐레이그 가문으로부터 파문 재판에 대한 답변은 없었습니까?”

“대주교님이 직접 전하겠다 하셨어요. 나중에 듣게 되면 바로 알려줄게요.”

이 시국에 얌전히 재판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오히려 차후에 재판을 이기고자 할 터.

적이 시엔의 수단을 모르니 이대로 싸워 필승할 것이라 여기고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그러니 지금 존재하는 목격자를 제거하려 들지 않을까.

일단 성녀의 목숨을 노릴 테고, 대주교가 영주성에 들렀다 하니 신전 역시 위험에 처했다고 봐야겠지.

애초에 제 영민을 학살할 정도의 악심이라면 신전 하나 지우는 일이야 거리낄 것도 없으리라.

뷔아를 보아하니 그러한 생각은 못 한 모양이다.

사람 구하는 일엔 똑 부러지게 할 일 찾아 척척 해내더니, 누군가의 악의 앞에는 한없이 무지했다.

상대가 악독하게 나오면 대처조차 못 하니 순진하게 놀아날 판이었다.

하기야, 성녀 본인이 악의를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마는.

“이봐요. 또 생각 중?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뷔아 생각을 하는 중이었습니다만.”

“아니…….”

시엔이 순순히 대답했다. 뷔아의 대답이 만들어지다 말았다.

아니 다음은 뭐?

시엔이 뷔아를 바라보았다.

말문이 막힌 모양인지 입만 뻐끔거리며 영문 모를 손짓으로 목을 긁적이다 앞머리를 쓸고 괜한 소매를 만지작거린다.

어째 놀리면 반응이 점점 다채로워지는 것도 같고.

시엔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구호소라. 그럼 저도 살짝 돕도록 하겠습니다. 병사를 투입하면 일이 훨씬 수월해지겠군요.”

“무슨 속셈이에요?”

“점령군 군대가 도시를 돕는 일이야 전사에 흔한 전략 중 하나입니다. 전쟁이 적을 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땅을 뺏고자 하는 것이니 마음을 허무는 일 또한 공격이나 매한가지입니다.”

“마음을 허무는 것도 공격……. 전쟁이 그렇게만 싸우면 좋을 텐데.”

뷔아가 중얼거리다 문득 쌍심지를 켰다.

“잠깐. 교단에 행사에 끼어들어서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겠다고요? 그게 내 앞에서 당당하게 할 말이에요?”

“속이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아니, 왜 그렇게 당당한데!”

“어차피 유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니 뷔아가 거절할 리도 없잖습니까. 어차피 승낙일 텐데 굳이 아쉬운 모양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하, 누구 마음대로 허락을 해준대요?”

시엔이 대답 대신 뷔아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실제로 돕겠다는 말에 들어서 거절할 생각이 없었으니 할 말이 없어 더욱 분통이 터졌다.

약이 오른 뷔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 진짜 한 대만 세게 때렸으면 한다는 듯이.

* * *

구호소엔 검댕이 묻은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미리 대피하라 알렸지만, 그 와중에 다친 이도 한둘이 아니었다.

특히 대부분이 화상을 입은 이들이라 치료가 중했다.

화상은 고통도 고통이거니와, 놔두면 환부가 부패하여 죽음으로 이어지는 무서운 증상이었으니까.

시엔이 의술에 능한 편이긴 했다.

본디 흑마법사란 기본적으로 뛰어난 외과의를 겸했다.

그러나 화상 치료에 있어서는 의사들이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냥 독한 술로 소독하고 깨끗한 천을 둘러주는 것이 전부.

그나마도 흉한 상처가 남았다. 그러나 화상을 신관이 신성으로 낫게 하면 들이는 공은 적고 효과는 뛰어났다.

“그러니까 밥이나 해요. 시엔 의술이야 알지만, 화상 환자가 대부분이라.”

“물론 신성 치료가 효과적이기는 합니다만.”

시엔이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켰다.

저번에 얻어맞은 대가로 신성을 쓰는 법을 깨우치지 않았던가.

“환자분들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거든요? 사실 나 혼자서도 충분한 수준이니까 굳이 시엔이 나설 필요도 없네요. 그러니까 가서 식사 준비나 좀 돕지 그래요?”

공연한 심술이었다. 하지만, 말싸움으로 어딜 덤비려고.

시엔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요리야 뭐 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뷔아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제대로 지휘를 해보겠습니다. 대충 솥에 재료 좀 털어놓고 뿌연 가루들을 골고루 뿌리면 되는 일인데.”

“아니, 뿌연 가루라니 무슨 개 같은 소리.”

“소금이나 설탕이나 뭐 색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니 가루가 그렇지 아니하면, 요리에 색이 물들 테니 마땅히 그럴 수밖엔 없겠습니다. 아! 본대에 들렀다가 와도 좋겠군요. 부대의 요리사가 후추와 송로는 물론이고, 온갖 향신료를 가지고 있는데, 이참에 몽땅 털어 넣어서…….”

사실 시엔의 요리관이 그랬다.

과거 흑마법사가 악식에 능해 사실 무얼 먹어도 탈이 없었고, 거기에 제국의 청야 전술로 식량이 없어 아무거나 막 집어먹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깨친 요리가 맛없는 것을 덜 맛없게 하는 과정이었다.

“됐으니까 그냥 치료나 해요.”

뷔아가 학을 떼며 말을 바꿨다.

시엔이 뷔아의 뒤를 따랐다. 군대에서 빼 온 대형 천막에 환자들이 어수선하게 몰려 있었다.

시엔이 대충 뷔아 곁에 자리를 잡아 환자를 받았다.

그러자 뷔아의 목소리가 참견을 벌였다.

“형제님, 손을 더 붙이세요. 진짜 환부에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신성이 낭비되지 않는답니다.”

“형제님, 방금 그만큼 신성이 필요하지도 않았던 거 아시겠지요? 신성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 분이라도 더 도울 수 있답니다.”

“너무 약합니다, 형제님. 흐름을 기억하세요. 신성 치료의 핵심은 강한 힘을 단기에 집중해 환부를 재생하고, 이후 그윽하게 마무리하는 그 조절에 있답니다.”

이건 좀 얄밉네. 시엔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사람들 앞이라고 무게를 잡고 저러니 더욱더 얄미웠다. 더군다나 사람들 앞이라 평소처럼 받아치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어쨌거나 덕분에 요령을 좀 깨치기는 했다.

물론 그 심정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세상 어떤 흑마법사가 신성을 품어서 또 그걸로 치유를 펼치고 있단 말인가.

그러자 음차원 에너지가 시엔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그래도 괜찮다고 위로를 하는 듯이. 물론 공교로운 타이밍일 뿐이었다.

악령이 가지는 원한 가득한 기운에 시엔이 환자를 바라보았다.

누더기에 숯검정을 뒤집어쓰고 제법 심한 화상을 입은 환자였다. 그 뒤로 시뻘건 눈을 한 악령 셋이 달라붙었다.

환자가 흑마법사가 아니고, 또 악령에게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니 시엔이 이름으로 풀어놓은 녀석이 틀림없었다.

매복 중에 도망친 탈영병이거나, 아니더라도 상처가 너무 아파 시민인 척 찾아왔겠지.

그게 아니라면 어떤 불순한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고. 시엔이 치료를 마치고 심각한 낯을 했다.

“형제님.”

“예, 예?”

“형제님의 눈에서 죄악이 비치는군요.”

옆에서 환자를 보던 뷔아가 고개를 팩 돌렸다. 도끼눈을 뜬 성녀의 표정만으로도 하고픈 말이 귀에 선했다.

아니, 무슨 개소리세요, 하고.

그러나 환자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에, 뷔아의 표정도 비슷하게 변했다.

“아, 아닙니다.”

“그래요? 깊은 원한을 사서 저주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요?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할 텐데요.”

환자의 낯이 새하얗게 질렸다.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하시면…….”

“보아하니 마음이 굳건하여 지금까지 버텼지만, 상처와 함께 심신이 쇠약하니, 앞으로가 큰일이네요. 정말로.”

그럼 큰일이지. 시엔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거기에 끼워진 반지에서 강대한 악령 하나가 솟아올랐다.

해피 드리머. 사람의 마음에 기생하여 세상 가장 끔찍한 악몽을 선사하는 특별한 악령이었다.

-캬하, 핫?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려던 해피 드리머가 멈칫했다.

그러고는 성녀를 바라보고 질린 기색으로 어깨를 움츠리곤 슬그머니 반지로 되돌아가려 시도했다.

두려울 게 무어 있느냐. 네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란다.

시엔의 의지에 해피 드리머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다시 의기양양한 태도로 가슴을 편다.

뒤이어 악령을 밀치고 환자의 목덜미를 감싸 끌어안았다. 그 귀에 입술을 붙여 키득키득 웃음소리를 흘렸다.

환자가 겁을 잔뜩 먹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으헉, 저, 저는, 허억!”

“형제님. 속죄하세요. 죄를 고백하고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으면, 영혼이 천상에 닿지 못하고 고통받게 될 테니까요.”

“저는, 저는 아닙니다.”

환자가 애써 고개를 저었다.

같은 영민을 학살하는 지저분한 일을 맡은 놈이었다. 병사 중에서도 특출나게 충성스러운 이였겠지.

그러나 지금 해피 드리머가 붙고 말았다. 이미 그 격이, 전에 없던 수준으로 성장한 악령이었다.

눈을 잠깐 붙여 일 년 이상을 체감시키는 끔찍한 악몽을 선사해 줄 만치.

시엔이 일부러 인자한 미소로 말했다.

“성녀님께서 여기에 계시니, 언제라도 고해를 청해 받아주실 거예요.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찾아오도록 하세요.”

< 37. 재해만발 풍운도시 [3]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