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78화 (174/268)

< 37. 재해만발 풍운도시 [1] >

강스트프레.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거대한 도시.

그러면서도 높게 쌓아 올린 견고한 성벽은 왕국 제일 귀족의 권세와 같았다.

강스트프레는 이전에 방문했을 때의 딱 그 모습이었다.

이전에 페시번을 줍기 위해 방문했을 때와 같았다.

활짝 열린 성문, 그리고 분주히 드나드는 영민들의 모습까지. 마치 시간을 돌려 그때로 돌아간 기분까지 들었다.

시엔이 쓰게 웃었다.

“대놓고 함정이라……. 이 정도면 아예 정정당당하다고 느껴질 정도네요.”

군대를 보고도 모른 척 성문을 열어두었고, 영민들은 자유로이 드나들었다. 마치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검위공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허허 어이없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함정이 있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과 같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백기를 올리고 진입하는 군대에게 기습을 거는 편이 나았다.

그렇지 아니하였으니, 단단히 준비하여 자신이 있다는 뜻과 같았다.

“그러게 말일세. 웃기지도 않는 연극을 하는구먼. 그렇다 해도, 머리를 잘 굴렸어.”

“확실히요. 시간이 없으니까요.”

언제까지고 신중하게 지켜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북부 귀족군의 본대가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세올의 공중 정찰로 살펴본바 닷새 정도 거리.

기병만 따로 운용하면 당장 모레쯤에 먼저 도착하겠고, 야간 행군이라도 하면 사흘 안에도 눈으로 볼 수 있겠지.

“그래서, 어쩔 생각인가?”

“장단에 어울려 줄 이유는 없죠. 매복이 있으면 쫓아내면 되는 일이 아니겠어요?”

시엔이 씩 웃었다.

나름 기책이었으나, 과거 흑마법사가 이미 겪어보았다.

군단과 같이 강력하나 그저 한 명의 흑마법사에 맞서, 제국이 유인 기습 정도도 시도하지 않았을까.

도시에 숨어드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있다가, 일시에 사방을 막으며 달려드니 그때의 흑마법사 역시 목숨을 걸었더란다.

한 번 당한 일은 원래 두고두고 곱씹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그 파훼법 역시 알았다.

곧 식사 겸 전략 회의가 이어졌다.

본디 식사에 일을 함께하는 것이 대단히 천박한 일로 여겨지지만, 시간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본대가 이동해 성문과 성벽 위를 점거하고 대기합니다. 이후 저와 검위공, 그리고 기사단이 진입할 거구요. 필시 매복이 있을 터이니, 시민에게 알리고 도시에 불을 지르겠습니다.”

매복이라 해봐야 건물의 안과 지붕 위, 그리고 사이사이 골목길이 고작이었다.

물론 그 고작이 매복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가졌지만.

그렇다면 그냥 먼저 치워버리면 된다. 미리 알리고 불을 지르면 무고한 피해는 최소화될 것이고, 타 죽기 싫으면 알아서 물러나겠지.

뒤이어 행동 수칙과 이동 대형 등 의견을 받아 정하고 나니, 다들 먹는 둥 마는 둥 영양가 없이 배만 채운 기분이었다.

귀족들이 군대의 통솔을 위해 헤어지자, 뷔아가 다가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잠깐, 시엔. 제정신이에요? 멀쩡한 도시를 태우겠다구요?”

“반대를 위한 반대는 안 받겠습니다. 더 좋은 대안을, 최소한 차선안이라도 가져오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차라리 내가 교단의 기를 들고 앞장설게요. 교단의 성녀를 공격하진 않을 테니까요.”

“저들이 한 범죄를 눈으로 보시지 않았습니까? 제 영민을 학살한 자가 교단을 존중하리라 생각이 들진 않습니다만. 뷔아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성녀가 범죄를 직접 보았으나 그뿐이었다. 혹여 난리 통에 목숨을 잃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파국이었다.

범죄의 범인이 누구냐 교단이 물어 티란디스가 목격자를 지웠다고 하면 그때부턴 골치가 무척 썩으리라.

그러니 뷔아 혹은 라이뱅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생존해야 했다.

개인적으로도 친구를 잃는 일은 사양하고 싶고. 의외로 친구라고 할 만한 이가 많지 않았으니까.

“……씨이.”

“뷔아?”

뷔아의 얼굴이 또 붉었다. 시엔이 흠칫 놀랐다.

이제는 얼굴이 붉기만 해도 자연스레 경계하는 마음이 솟았다. 눈물로 호소하는 건 아무래도 비겁하지 않나 생각하면서.

뷔아가 후우하아- 하고 큰 숨을 내리 쉬었다.

그리고는 어쩐지 시선을 피했다.

시선을 피하면서도 또 할 말은 또박또박 내뱉는다.

“알겠어요. 대신 분명히 알려야 해요. 무고한 시민들이 대피할 시간도 충분히 줘야 하고요. 아, 그리고 배상도.”

“배상이야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배상은 페시번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쫓겨난 모지리를 그간 입히고 먹이고 재웠다.

거기에 가문을 떠먹여 주는 중이었다. 사소한 일은 알아서 처리해야겠지.

“그리고 불이 너무 커지지 않도록 방화선이나 소방 계획도…….”

“그건 도시 주인이 해야 할 일이잖습니까. 적의 병력이 불 끄는데 몰리면 오히려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은 더 낮아질 겁니다.”

“읏. 좋아요. 전 그럼…….”

뷔아가 도망치듯 허둥지둥 멀어져갔다. 좀 더 난리를 칠 줄 알았더니만, 의외로 순순히 넘어간다.

하기야.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가 그저 선하여 이상을 좇을 뿐이었다.

멍청한 인물은 아니었다. 도시에 불을 놓는다고 말만 들으면 사악하기 그지없으나, 실상 미리 경고하고 대피할 시간을 주면 재산만 불타고 끝이었다.

오히려 그러지 않고 진입하다 매복이 나와 군대가 통제를 잃는 것이 큰일이다.

전우가 쓰러져 공포가 아닌 분노를 일으키게 훈련되었다.

적의 병사와 시민의 구분이 없이 학살이 벌어질 것이 뻔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군대가 이동을 시작했다.

성문지기가 태연하게 길을 비켜 주었다. 지나가고 싶으면 마음껏 지나가라는 태도였다.

심지어 기묘한 미소를 띠기까지 했다. 함정이 있으니 당하는 꼴을 보겠다는 듯이.

시엔은 어이가 없었다.

“뭐야, 이것들. 싹 두들겨 패서 묶어 놔.”

* * *

흐레이그 영주성의 위용은 대단했다.

사방이 트여 장애물 없는 대도시야 원래 내성을 튼튼하게 짓는 편이었다.

흐레이그의 영주성은 튼튼함을 넘어, 아예 요새 한 채를 도시 한가운데에 박아넣었다.

첨탑은 하나뿐으로, 그 외에는 넓은 면적을 잡고 6중으로 벽을 쳐 미로를 설계했다.

각기 높이에 차등을 준 벽들은 하나를 점령해도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게 되었으며, 내벽으로 침투를 이어가기가 어렵게 만들었다.

그 영주성의 중심, 흐레이그의 대공자 베사렌과 그 가신들이 한참 전략을 점검했다.

“티란디스 놈이 성문을 통과했다고?”

“들어올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공작님께서 대군을 이끌고 오고 계시니 시간이 없어 서두를 겁니다.”

“매복 준비는?”

“이미 다 마쳤습니다. 한 개 군단이 대로를 따라 건물에 배치되었습니다. 신호만 하면 바로 뛰쳐나올 준비가 되었지요.”

“좋아. 그럼, 그쪽, 레이디께선……?”

배사렌이 만화원의 마법사 팔란을 바라보았다. 팔란이 상냥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제공해 주신 재료들 덕분에 폭탄은 무사히 제조되었어요. 다만, 좀 건강한 재료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비실한 것들이라 위력이 영.”

“재료라니.”

“재료가 아니었나요? 그럼 뭐였을까요?”

베사렌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다면 절대 저 사악한 마녀를 성에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동물들도 준비가 다 되었고. 이것도 재료가 좀 성치 않아서.”

“한꺼번에 말하시오.”

“준비는 끝났어요. 적들은 온전한 시신조차 남지 못할 것이랍니다. 마법사가 전장의 꽃이라 불리는 이유를, 두 눈으로 확인하시게 될 거예요.”

팔란이 당당하게 선언했고, 태도 역시 그러했다. 허리를 쭉 펴고 팔짱을 낀 품새가 여간 불손한 것이 아니었다.

베사렌이 꾹 참았다. 저 마녀의 말대로라면 아버지의 군대까지도 필요 없이 적들은 여기서 전멸이었다.

그때 신관 한 명이 찾아왔다. 베사렌 역시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강스트프레 교구의 교구장이자 교단의 대주교였다.

“대주교님? 여기는 어쩐 일이신지.”

“흠, 흠. 유감스러운 소식을 전하게 되어 미안하게 되었습니다만.”

“말씀하시지요.”

“성녀이시자 성황 예하의 대리인이신 뷔아 샤인 세러하드 님께서 교단의 입으로 선언하시니, 피고이신 베사렌 흐레이그 님은 신성 재판에 회부되셨습니다.”

베사렌의 표정이 굳었다. 신성 재판? 귀족이 신학을 배우는 것이야 당연한 교양이라, 어렴풋이 그러한 항목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아마도 파문을 건 중대사였던가.

“제가 신성 재판이라니요? 혐의는, 혐의는 무엇입니까?”

“베스탄티에서 수없이 많은 이들의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성녀님께서 직접 보아 확인하신 일이고, 이는 그에 대한 주요 용의이십니다.”

“웃기는군요. 학살의 장소에는 분명 티란디스의 깃발이 세워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만행이 저 티란디스의 소행임이 분명한데…….”

대주교가 흠칫 몸을 떨었다.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내 영지에 일어난 일을 내가 모르겠소?”

“허허. 시엔 티란디스 님 또한 피고 신분으로 재판에 회부되셨습니다. 교단의 권고로 정명한 재판을 위해 모든 개인적인 분쟁을 멈춰야 하십니다. 그렇지 아니하시면, 용의를 인정함으로 간주하여 최고형인 파문에 이를 수 있음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개인적인 분쟁? 말도 안 되는 소리!”

“저는, 어억…….”

순간 바람이 내는 듯한, 그러나 명백히 사악한 소리가 울렸다.

번쩍하고 빛이 튀니, 한때 대주교가 있던 자리에 반쯤 익은 노인만이 자리 잡았다.

“이 무슨 짓이오!”

“이런, 대공자님. 입을 항상 조심하셔야지요. 아직 소식이 도착하지 않은 때에 미리 알고 계시는데, 아예 스스로 행한 일이라 고백하시지 그러셨어요?”

“하지만…….”

“하지만? 티란디스가 했다 우길 게 아니라, 그게 무슨 참사냐 벌떡 일어나 놀라셨어야죠. 미리 알고 계셨다? 신전에도 알리지 않고 가만히요?”

“큭.”

“시력도 매우 나쁘신 모양이세요.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가 알아채고서도 모른 척을 하는 것도 못 보실 정도면.”

“무례하다!”

가신 한 명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팔란은 그저 상냥한 미소로 지팡이를 겨눌 뿐이었다. 가신이 겁을 먹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대공자님은 내게 감사하셔야 해요. 대공자님을 위기에서 구한 게 바로 저니까요.”

“하지만 교단을 적으로 돌리는 건.”

“아니, 세상에 누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어요?”

팔란의 말이 부자연스럽게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생각해 보니 그런 멍청한 짓, 예전에 하려다 실패했다.

“시체는 말이 없으니, 다 죽고 나면 산 자의 입이 곧 진실이 아닐까요?”

“이런 불경한…….”

“불경? 대공자님이 담으시는군요? 어쨌든, 일이 더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네요. 적어도 티란디스의 대공자, 그리고 그 옆에 소드 마스터, 거기에 성녀까지. 한 명이라도 놓치면 위험해지고 말았잖아요?”

팔란이 검지와 엄지를 붙어 동그라미를 만들어 잔망스레 흔들었다.

“그러면 추가 요금이 붙겠습니다, 고객님.”

“웃기지 마라! 애초에 이 모든 게 전부 네년이 말한 대로 한 것뿐이잖나! 만화원이라. 교단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나?”

“이런, 좋게 말씀드리려 했는데.”

팔란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베사렌이 코웃음을 쳤다.

“왜, 날 죽이고 도망가려는가? 아버지께서 계시는데 내 입 하나 막는다고 그게 막아질 성싶더냐?”

팔란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셨다.

“……젠장. 좋아요. 공자님께서 이기셨어요. 제 무례는 사과드리지요.”

“계획이 더 어려워졌다고? 그러면 무조건 성공시켜야 할 거야. 잘 된다면 그까짓 추가 보수야 얼마든지 더 쳐 줄 수도 있지.”

“대공자님께서 배포도 크셔라. 걱정하지 마세요. 저 멍청한 것들이 도시 한복판에 들어오는 순간.”

벌컥, 그때 또다시 불청객이 들었다.

“대공자님, 큰일, 아악!”

뛰어 들어온 병사가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보고 비명을 지르며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추태에 베사렌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례한 놈!”

안 그래도 심기가 상한 상태에 추태를 보니 두 배로 화가 났다.

그걸 보는 팔란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오르니, 불 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베사렌이 검을 뽑아 들자, 병사가 급히 무릎을 꿇었다.

“용서를, 용서를…….”

“쯧. 그래서, 무엇이더냐.”

“그것이, 놈들이, 놈들이 도시에 불을 지른답니다!”

“뭐라고? 상세히 말해 보아라.”

“적병이 소리치며 시민들에게 알아서 피신하라 외치고 있습니다. 도시에 불을 지를 것이니 바로 대피하고, 한편으로는 소화를 준비하라고.”

불을 지른다고? 거기에 있는 매복조들은? 숨은 폭탄과 짐승들은? 끌어들여 일거에 섬멸한다는 작전은 어쩌고?

베사렌이 선 채로 굳었다.

팔란의 미소도 사라졌다.

< 37. 재해만발 풍운도시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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