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얄밉게 더 얄밉게 (3) >
마법은 기본적으로 의지가 없는 대상에게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마법은 기본적으로 정신세계와 현상계를 일치하는 과정이다. 의지를 가진 것들은 작든 크든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니, 마법사의 세계와 간섭하여 반항하는 성질이 있었다.
사람에게 쓰는 것이 가장 어렵고, 동물은 개체별로 차이가 있으나 그 사고가 단순할수록 쉬워지곤 했다.
세올의 빙의는 기본적으로 대상의 의지를 백파이어를 통해 밀어버리고, 그 몸을 차지하는 방법이었다.
설명은 간단하지만, 시엔 정도나 되는 대가와 그 조수들이 붙어도 겨우 날짐승 정도에나 가능할 정도의 난해한 시술이었다.
애초에 세올이 리치가 되어 이루려는 것이 인공 신체가 아니었던가.
빙의 강탈보다 차라리 신체를 인공으로 만드는 편이 훨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데서 기인했다.
그렇다면 후유증은 무엇인가.
개체에게 임의로 부하를 걸어 정신세계를 파괴했음에도, 무언가 남는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 남는 것. 선배님은 잔류 사념이라고 정의한. 그것이 빙의된 새로운 의지와 연동? 아니면 혼재?
전자라면 영향을 받는 데에 그치겠지만 후자라면? 의지가 섞이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맞는가.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것, 서로 만나 사랑, 어머나. 헤헤. 그리고 증오 우정 등등. 그렇게 변하는 개인의 성격과 빙의를 통한 변질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세올의 고찰은 이제 철학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의지의 존재와 변화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평소에 허술하니 얕잡아 보이는 모양이나, 기본적으로 이 리치는 윤리와 도덕 따위는 개나 줘버린 사악한 존재였다.
그 능력 역시 이미 마탑의 장로들보다도 높은 경지에 있었다.
이러한 괴물이 지금도 향상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존재와 정신을 탐구했다.
왜냐하면, 돈벌레 한 마리 때문에.
‘쪼고 싶다. 꿀꺽. 아니. 안 돼! 다른 건 몰라도 돈벌레만은 안 돼!’
여느 때처럼 한 마리 고운 비둘기가 된 세올이 속을 다스렸다.
날짐승이 되고 나면 그 본능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곡식 낱알 따위야 쪼아먹을 수도 있고, 양보해서 지렁이나 애벌레까지는 허용 범위라고 치자.
그래도 저 흉측한 돈벌레는 아니었다.
세올 자신의 존엄이 달린 문제였다.
다행히 사고와 고찰을 통해 어느 정도 그 본능을 제어할 수 있었다. 관심을 돌림으로써 육신의 본능을 잊으려는 시도였고, 사실 꽤나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생각하자, 그러니까 이건 세올 내가 가진 욕구가 아니라 그저 이 신체가 가진 욕구, 즉, 쾌감이라고 한다면, 영적 쾌락과 신체적 쾌락. 신체적 쾌락? 그러고 보니 그 화염탑의 꼬맹이가. 어머나…….’
야심한 밤. 곡식 창고 안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부끄러움에 몸을 꼬았다.
그사이에 벌레가 급히 몸을 피하니, 세올의 번민 역시 자연히 해소되었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세올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푸드덕 홰를 치며 날아올랐다.
그야말로 산처럼 쌓인 곡식 부대들 꼭대기에 당당히 서서, 기이한 주문을 부리로부터 쏟아내기 시작했다.
새까만 안개와 같은 것들이 비둘기의 전신으로부터 흘러나와, 이내 창고 안을 가득 메웠다.
* * *
병사의 식사란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장정 서넛은 들어갈 만한 무쇠솥에 이것저것 넣고 끓이면 딱 완성이었다.
이 스튜의 특징은 군대의 보급 상황에 따라 맛이 크게 변한다는 것이었다.
보급선이 탄탄하고 여유가 있으면 염장 고기며 건어물, 몇 종류나 되는 곡물과 치즈까지 들어가 깊고 진한 맛을 냈다.
식사는 병사들에게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이니, 이를 관리하는 것이 곧 사기에 직결된 중요한 일이었다.
“음? 뭔가 역하지 않냐?”
“뭐가?”
“아니. 이거, 이상한데. 뭐가 상했나?”
병사 중 혀가 유달리 산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하게 우러난 국물 사이로 뭔가 한 줄기 역한, 상한 듯한 맛이 미묘하게 섞였다.
“상하긴 뭘. 맛만 있구만.”
“아니, 이상하다니까?”
“다들 맛있게 먹는데. 뭘, 또 난리네.”
“그런 맛이 나는데 그럼 안 난다고 하냐?”
“뭐, 한두 번이냐. 싫음 줘. 내가 먹을게.”
“……그건 아니고.”
어차피 재료 몇 개 상했다고 해도, 오랫동안 팔팔 끓이면 문제가 없는 법이었다.
기본적인 상식이었고, 취사병들이 좋아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병사 입장에서도 재수 없는 놈이 좀 심하게 상한 부분이나 먹는다는 식이었다.
그러니 미각이 좀 예민한 녀석이야 좀 이상하다 느낄 정도였지만, 으레 또 이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그 결과는 저녁나절이 되어 나타났다.
병사들이 복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허옇게 뜬 낯을 하고서, 소름이 오도도 돋아난 팔을 문지르며 몸을 배배 꼬았다.
영주관에 머무르던 킬지언이 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식역병이라고?”
“예. 몇몇 자들이 복통과 구토 같은 증상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상태는 심한가?”
“별로 그렇진 않습니다만.”
부관이 말을 이었다.
“이상이 있어 보고드렸으나, 사령관님이 크게 신경 쓰실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 솥에 날짐승 같은 걸 집어넣은 모양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간혹 그런 일이 있습니다. 어디서 들짐승이나 날짐승 따위를 잡아 와 같이 삶는 경우입니다만.”
큰 솥에 재료를 넣을 때, 간혹 임의로 다른 것들을 집어넣는 경우가 많았다.
대개는 고기, 그놈의 고기 때문이었다.
날짐승이나 들짐승 따위를 잡아 와 거기에 같이 삶아 먹겠다는 것이었다.
취사병들 입장에서야 어차피 넣어 같이 익히면 국물도 우러나고, 겸사겸사 다리 하나라도 요구할 수 있으니 거절하는 일이 없었다.
부관의 설명에 킬지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군령으로 처벌하도록. 처벌이 어떻게 되지?”
“그것이, 조금 애매합니다. 딱히 걸리는 것은 없습니다. 굳이 처벌하고자 한다면 문제는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사태가 별로 크지 않습니다.”
몇몇 병사들이 배앓이를 하는 것이야 늘 있는 일이었다. 굳이 이런 일로 군영을 뒤집을 필요까지는 없다는 뜻이었다.
킬지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시엔. 왜 귀찮게 하고 있어?”
파린이 물었다.
시엔이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보자, 어린 용이 다시 말을 이었다.
“시엔이 직접 나서면, 고작 인간이 저만큼만 모여서 뭘 할 수 있겠어. 겨우 인간 따위가.”
보통 일만이 넘는 군대를 두고 고작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파린은 용이었고, 시엔은 반쯤 용이었다.
양 떼가 아무리 많아도 늑대 앞에선 식사에 불과한 것처럼, 결국 인간이 용 앞에 그와 같은 것이니.
파린이 보기에 시엔은 굳이 편한 방법을 두고 귀찮은 일을 감수하는 중이었다.
“뭐. 하려면 못 할 건 없지.”
멀게 갈 것 없이 역병을 풀기만 해도 도시 하나 정도야 간단히 침묵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재작년 즈음 역병 의사로 행동할 때에, 체내에 모아둔 역병도 있기는 했다.
대죄인을 소환해도 되고, 직접 나서서 마수를 푸는 방법도 있었다.
혼자서 전쟁을 치르는 데야 이골이 난 시엔이었으니까.
“음. 흑마법사가 아직 세상에 없으니까?”
“그게 왜?”
“뭐, 그런 거지.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그걸 알려주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왜?”
“그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니까.”
현대에 재림한 흑마법사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인간을 초월한 육체나 강대한 마법, 혹은 대죄인의 소환 따위가 아니었다.
대륙이 완전히 지워 버린 흑마법에 대한 미지 그 자체였다.
아는 것에는 대처할 수 있으나, 모르는 것에는 대처할 수가 없다.
시엔의 가장 강력한 힘이 거기에 있었다.
“잘 모르겠어.”
“그야 넌 몰라도 상관없겠지만.”
“왜?”
“용이니까.”
용.
그만큼 강대한 생명체에겐 미지의 위협조차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어떤 상황도 그저 힘으로 깨부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러나 인간에겐, 제아무리 강대하다 해도 결국 한낱 인간. 힘을 과신한 인간은 언제나 그 끝에 까무러칠 수밖에 없을 터이니.
“그냥 하나만 기억하고 있으면 돼.”
“뭘?”
시엔이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모르면 맞아야지.”
* * *
다음 날.
“……별로 심각하지 않다 들었는데.”
“죄송합니다.”
부관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고개를 숙였다.
하루가 지나자, 상황이 급변했다. 일만이 넘는 병사가 배탈이 나고 말았다. 이미 군영 전체가 악취에 휩싸인 상황이었다.
킬지언에겐 악몽 같은 소식이었다.
킬지언은 총사령관이었고, 저번 참화로 인해 참가한 귀족들에게 얼마나 욕을 보았는지. 그런 상황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식역병이라니.
“군의는 뭐라고 하지?”
“그게, 개개인의 상태는 위중하지 않다고 합니다. 한 일주일 잘 쉬며 정양하고 물을 많이 마시면 나을 것이라고.”
“원인은?”
“곡식에 그늘병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늘병이라고? 확실한가?”
왕국 북부는 거대한 평야를 중심으로 농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곡식의 병해에 대해서는 북부 귀족에게 당연한 소양 중 하나였다.
개중에서도 그늘병은 특이한 질병이었다.
곡식에 스며 낱알의 중심이 검게 변하는 것이 특징이었는데, 드물긴 하나 그냥 돌연히 나타나곤 하여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늘병에 걸린 곡식을 먹으면 사람이 오랫동안 기력이 쇠하고 배탈을 앓았다.
다행인 점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정도로 중한 병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거기에 그늘병에 걸린 양곡은 버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햇볕 아래 잘 말린 후 물기 없는 곳에 반년 정도 보관하고 나면 독기가 빠져 다시 먹을 수 있었으니까.
사실, 이는 먼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병해였다. 곡식에 음차원 에너지가 스며든 상태를 질병이라고 하진 않았을 테니까.
과거, 흑마법사와 신비주의자들이 세상을 떠돌며 악령과 부정한 마나들을 회수하던 시기였다.
한 명의 흑마법사가 제국을 무너뜨렸고, 흑마법사를 두려워한 세상은 그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대륙에서 지워 버리고 말았다.
이제 악령은 그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 사이를 떠돌고, 공간에 모인 음차원의 마나와 거기에 오염된 것들은 희소한 질병으로 취급받게 되었으니.
“됐네. 그늘병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할 수밖에.”
킬지언의 안색이 조금 돌아왔다.
“그래서, 곡식이 얼마나 남았나?”
“현재 조사 중에 있습니다만.”
“병해에 걸린 곡식은 일단 분리하고 말려 돌려보내도록 하지. 나는 상황을 설명하고 보급을 재차 요청할 터이니 우선 정확한 피해를…….”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거칠게 열고 급히 들어와 얼굴을 보니 궤헬 백작가의 차남이 아니던가. 흐레이그의 오랜 가신 가문으로 이번에도 군대 이천을 이끌고 참여해 주었다.
“갑작스럽게 들어와서 죄송합니다만, 사령관님, 큰일 났습니다. 곡식에 그늘병이 들어서.”
“나도 들은 참이네만. 잠시 숨 좀 고르게. 그리 급할 일인가?”
“급하지 않단 말씀이십니까?”
궤헬 2세가 의아하다는 듯 킬지언을 바라보았다.
“곡식을 아예 못 쓰는 것도 아니니 일단 돌려보내 새것과 교환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럼 그동안 뭘 먹는단 말입니까?”
“그야 아직 멀쩡한 것들을.”
킬지언이 말을 멈추었다.
어떤 불길한 직감. 절대 틀리지 않는다는 예견에 가까운 예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예감이 들어맞았다.
“멀쩡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곡식이 병에 들렸습니다. 당장에 금일 저녁 취사에 쓸 분량조차 남지 않았단 말입니다.”
< 33. 얄밉게 더 얄밉게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