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얄밉게 더 얄밉게 (2) >
얄렘방의 주민들이 대로로 몰려나와 손은 흔들고 함성을 질렀다. 피점령으로부터 해방된 도시에서, 으레 그 해방군을 맞이하는 모범적인 태도였다.
그와 별개로, 주민들의 함성이 어색했다.
‘이걸 왜 해야 한대요?’
‘몰라. 영주님의 명이시니 해야지.’
‘어허이, 거기 입만 뻐끔거리지 말고 제대로 소리 질러.’
얄렘방은 전투 없이 항복했으며, 그 대신 시엔의 군대는 영지의 무장해제와 군량을 거뒀을 뿐 다른 것은 건드리지 않았다.
영민 입장에서야 제 자신이나 친지가 해를 입은 것도 아니다, 평민들에게는 남부 귀족이니 반란군이니 해도 잘 모르는 일이었다. 그저 같은 왕국의 그냥 다른 귀족 나리에 불과했다.
그러니 도시가 해방되었다던데, 그럼 뭐가 바뀌나? 어차피 그간 어수선하게 군대가 돌아다닌 것 이외엔 별일도 없었는데.
실상 진심은 하나 담겨 있지 않은, 군대를 환호하는 이 인파의 동원 자체가 그저 보여주기 용 요식 행위였다.
그러나 어쩌랴. 영주가 하라면, 영민이 따라야지.
사실 얄렘방의 영민들에게야 괜히 시간 쓰고 체력 쓰는 일이었지만, 영주인 팔퓌유에겐 꼭 필요한 행위였다.
반란군의 침략에 앞서 스스로 성문을 열고 항복했으니, 이렇게라도 조금 만회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쉽게도, 팔퓌유 자작의 노력, 정확히는 영민들의 일방적인 수고는 그리 효과를 보지 못했다.
“무사하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팔퓌유 자작님. 저 반역자들의 손에 고초를 겪지 않으실까 했습니다만.”
일견 들기에는 안부에 대한 걱정을 말하는 듯 하나, 사람의 말이 그저 그 내용으로만 이르는 것이 아니었다.
차게 식은 눈빛. 웃음기라곤 하나 없는 딱딱한 표정. 높낮이 없는 어조로 조근조근 소리를 내니,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이랬다.
싸워보지도 않고 겁쟁이처럼 항복하더니, 얼굴을 보니 참 좋아 보인다고.
“이 모두 대공자가 신속하게 대처하여 도와준 탓이 아니겠나. 내 불초하여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면목이 없고, 또 얼마나 감사하기는. 허허, 한지 오히려 할 말이 없네. 추후에 공작님께 감사하다 전해주시게나. 하하…….”
귀족어로 이 정도면 내가 무조건 잘못했다 비는 수준이었다.
킬지언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하기사, 팔퓌유 영지는 자작령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치 크고 비옥한 땅이었다. 이런 옥토를 대대로 가져온 가문이 계속 자작에 머물러 있다.
대대로 내려오는 가풍 자체가 명예보다는 실익, 향상심보다는 보전을 우선한다는 뜻일 테니, 자작의 행동 역시 그러했을 터.
“무사하셨으니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어떻게 할지가 더 중요하겠지요. 지금은 저 반역자들을 격멸하여 폐하의 뜻을 따르고 왕국에 충성을 보여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그, 그렇지.”
“그러나 어리석은 이들이 자작님의 충심을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작님께선 최대한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이끌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자작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 그것이 말일세.”
“자작님?”
킬지언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이 항복 자체가 속된 표현으로 간을 봤다 할 수 있었다. 박쥐처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유리한 측을 재려는 의도가 뻔하니, 확실히 소속을 정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니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라. 무리한 요구가 절대 아니었다.
반란을 진압하고 나면 그 공은 북부 귀족의 것이고, 그 공로라도 나눠 가지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 아니던가.
그게 아니라면 반란군들이 더 우세하다 여겨 협력한 변질자인 것인가.
킬지언이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팔퓌유 자작이 급히 변명했다.
“그게 아니라, 그. 군대라면 있네. 선봉에 서는 것이야 영주로서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말일세.”
“어떤 말이십니까?”
“그, 무기가…… 하나도 없네. 무기도 없고, 갑옷도 없고. 내 저 반란군에 맞서 이 치욕을 씻고자 하는 마음은 불같이 타오르나 그러려면…….”
“아니! 군대의 물자를 고스란히 가져다 바쳤단 말입니까!”
킬지언이 바락 소리 질렀다.
“그게, 그놈들, 반역자들이 겁박을, 그래, 협박을, 무도하게도 내 영민의 목숨을 놓고 협박을 하는데 어찌 내 영민을 버리고, 그러니 폐하의 백성인데, 귀히 여기는 것이 충정이? 그래 충정이지. 그래서 내 어쩔 수 없이…….”
팔퓌유 자작이 두서없이 변명을 쏟았다.
“큭, 젠, 아니, 알겠습니다. 그럼 재무장만 저희가 해드린다면 선봉에 서주시겠군요,”
“그렇지. 물론일세. 내 군대를 이끌고 당장 더 반역도당들의…….”
“후우. 알겠습니다.”
군대의 치장물자가 있으니, 그 정도는 감수할 만한 일이었다. 군세 천을 불리는 대가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일 테고.
“후우. 일단 지난 전투…… 에서 입은 피해를 다시금 재정비할 필요가 있을 터이니, 자작님께서는 일단 병사들을 위한 작은 잔치라도 준비하여 주시겠습니까?”
왕당파 군대의 사기는 참으로 미묘했다.
높은 것 같으면서도 낮고, 낮은 것 같으면서도 높은 기이한 상태.
낮은 부분은 지난 습격이 워낙 압도적이었던지라 불과 기마를 두려워하여 온갖 악몽에 시달리는 이들이 허다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삼 교대로 이루어지는 야간 근무에 지쳐버린 탓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군대를 분노케 하는 것이 전우의 시신이었다.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만큼 적개심을 키우고 있으니 또 사기가 완전 바닥에 있는 것만도 아니었다.
이럴 때 작은 잔치라도 벌여 주는 것, 잘 먹이고 모처럼 술로 목이라도 축이게 해주는 것이 사기를 고취하는 아주 오래된 전략 전술이었다.
그러자 남작이 대답했다.
“저, 그…… 비축된 군량도 몽땅 털어가는 바람에, 당장 군대에 지급할 것이 없는 상황이란 말일세, 그게 그렇게 되었네만…….”
결국, 얄렘방을 탈환하긴 했지만, 얻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다.
팔퓌유 자작이 병력을 이끌고 합류한다고 한들, 오히려 무기며 갑옷이며 먹을 것까지 챙겨줘야 하는 군대가 아닌가!
지난 습격에 죽은 자가 천을 훌쩍 넘긴 데에다, 징집병이야 그렇다 치고 정병을 많이 잃었으니 오히려 손해 보는 장사였다.
게다가 그렇게 손해를 보며 해방시킨 남작은 개털이었다!
킬지언은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고함을 지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팔퓌유 자작이 사색이 되어 흐레이그의 대공자를 말렸다.
“진정, 진정하게! 알겠네, 내 징발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준비해 볼 터이니, 응? 알겠나?”
* * *
시엔의 군대는 팔퓌유 자작의 군량을 빼앗아 소모했다. 천 명의 군대가 두 달 정도 먹을 양이었는데, 어차피 공짜로 들어온 것이라 시엔이 아낌없이 풀었다. 그러고도 남아, 한 톨 남기지 않고 전부 알뜰하게 싸 들고 떠난 참이었다.
시엔의 군대야 워낙에 배부르게 먹었고, 전투가 없어 군인들이 포악하지 않으니 영민에게 주어진 피해는 사소한 것들뿐이었다.
그에 비하면, 도시가 해방된 지금이 오히려 상황이 나빠지고 있었다. 얄렘방에서 징발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안 됩니다! 나으리들!”
“농사가 망해 겨울날 것도 모자란 곡식입니다! 제발, 자비를……!”
영민들이 자비를 외치나, 군인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애초에 군인이야 명령을 따르는 것이니 그네들이 무에 힘이 있으랴.
그 모습을, 지붕 위의 비둘기 한 마리가 무심히 바라보았다.
요즈음엔 날짐승들도 도시를 피했다. 아무리 새대가리라고 해도, 짐승이란 제 위험 하나는 기가 막히게 아는 법이었으니까.
가뭄이 들어 민심이 팍팍해졌다. 예전처럼 곡식 낱알을 뿌려주기는커녕, 돌을 날려 잡아먹으려 들지만 않아도 다행이었으니.
곡식 냄새는 나는데, 줄 것 같지는 않다.
비둘기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도시 여기저기서 같은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곡식 마대를 든 병사들. 그들을 부여잡는 영민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울상이었다.
그러던 와중, 비둘기가 한 지점을 뱅뱅 돌았다. 그 아래에 널린 수레들과, 쌓인 곡식들이 조류 특유의 번들거리는 눈깔에 비쳤다.
왕당파 군대의 보급이었다.
바가지로 곡식을 퍼다 취사가 이루어지니, 바닥에 떨어진 낱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방앗간에 참새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치로, 비둘기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정신없이 바닥에 흩어진 낱알을 쪼았다.
그리고, 팍!
날아든 화살이 비둘기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 충격에 빠진 깃털이 휘날리고, 뒤이어 병사 몇이 희희덕거리며 급히 달려왔다.
“고기다! 크큭, 고기가 날아 들어오네?”
“그러게 말입니다. 먹을 게 없으니 여기까지 온 모양입니다.”
“킥킥, 이거 안 보이게 챙겨둬. 있다가 취사장에 몰래 가서 구워 먹자 하자.”
* * *
“끄아아악! 화살, 저 또 화살 맞았어요! 내가 맞았다고!”
세올이 경기를 치며 제 머리를 더듬었다.
정수리며 옆머리, 뒷통수,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 세올이 어디 상한 데는 없나 열심히 손을 놀렸다.
시엔이 입을 열었다.
“멀쩡하니까 그만 더듬어.”
“읏, 나는…… 나는 용…… 인가? 나는 인간인가 비둘기인가. 이 세올은 도대체 무엇…….”
“멍청이. 넌 그냥 멍청이야.
시엔의 무릎 위에 앉아 있던 파린이 대답했다. 한심하다는 표정은 덤으로.
시엔이 피식 웃으며 콩이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세올이 그릇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리곤 화들짝 놀라며 다시 허리를 폈다.
“앗. 아, 이거 아니지…….”
그리곤 손을 뻗어 크게 한 줌 쥐더니, 입속으로 우악스럽게 욱여넣었다. 당연하게도 생콩 특유의 비릿함이 혀를 휘감았다.
세올이 떫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반쯤 씹은 콩들이 세올의 품으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예전엔 안 그러더니, 이번엔 새로운 육체로 갈아탈 때의 후유증이 심했다. 정확히는 인간 아닌 육체에 정착했을 때였다.
시엔의 마법이 정교해진 탓인지, 아니면 세올이 저번 용의 뼈로 만들어진 키메라에 깃들은 후유증 때문인지. 아니면 세올의 실력 자체가 늘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
“이봐. 먹을 걸 가지고 장난치면 안 돼.”
파인이 그러고는 콩 그릇에서 몇 알을 꺼내 오독오독 씹어먹었다.
콩 먹는 어린 용이었다.
시엔은 좀 이상하지 않나 생각은 들었지만. 어차피 어린 용이라도 용인데, 콩 좀 먹고 탈이 날까 싶기도 하고.
나중에 종류별로 먹여보고 감상이나 들어봐야겠다. 용의 유체의 식성에 대한 대륙 최초의 기록을 작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건 지금 중요한 일은 아니지.
시엔이 머릿속에 든 잡생각을 떨쳐냈다.
“그래서, 이번엔 찾았고?”
“예, 선배님. 이 세올이 드디어 찾아내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얄렘방의 북쪽…… 아니, 서쪽이었나? 그러니까 머리가 향하는 방향에서 오른쪽이니까, 어.”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우리는 대륙 어딘가의 위치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데요.”
“우리?”
“아. 선배님. 그러니까 우리가 아니라, 비둘기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본능에서 왼쪽에 적 보급창이 있었으니 방위로 따지자면. 음, 그러니까.”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됐어. 설명하지 않아도. 어차피 어디인지는 알고 있다는 뜻 아냐?”
“그렇다 인간. 앗, 아니 선배님.”
“그럼 됐어. 내가 갈 것도 아니고. 네가 밤에 다시 찾아갈 수만 있으면 되니까.”
“아. 그렇다…… 죠.”
세올은 겉보기엔 나사 빠진 여인에 불과했다. 사실 그 속 부분도 나사 빠진 여인이었긴 했지만, 그래도 제 영혼을 묶어 죽음을 피한 무시무시한 리치이기도 했다.
본디 육신이 없으니 영체 상태로 다른 몸에 깃드는 사술을 부릴 수 있었다.
예전에는 라이프 베슬 대신 과거 대마법사의 유해에 깃들었으며, 그 유해가 시엔에게 흡수되어 허수 상태로 존재하는 바람에, 시엔이 산 동안에는 어찌해도 불멸의 상태인 무시무시한 괴물이기도 했다.
“정신줄 좀 단단히 붙들고 있으면 좋겠는데.”
“헤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선배님.”
“흠.”
세상에 흑마법사가 한 손에 꼽을 정도라지만, 세올 정도면 과거 흑마법사의 시절에도 위에서 셀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믿음이 안 가는 이유는 대체 무어람.
“이제 위치는 알았으니, 오늘 밤에 가서 처리하도록 해. 요즘 같은 때에 멀쩡한 곡식을 부패시키는 건 좀 가슴이 아프긴 하지만.”
어차피 놔두면 적의 피와 살이 될 양식이었다. 빼돌릴 수 없다면 치우는 게 최선일 테니까.
< 33. 얄밉게 더 얄밉게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