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얄밉게 더 얄밉게 [4] >
헬른포드 왕국은 페벨룬의 서쪽으로 국경을 맞댄 이웃 국가였다.
국토는 페벨룬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페벨룬 서부에서부터 시작된 숲과 산지로 이루어진 지형 탓에 인구는 그 절반이 못 되었다. 국력도 딱 그 정도로 평가받았다.
애초에 페벨룬은 대륙 5대 왕국에 손꼽히는 강국이기도 했으니 둘을 비교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런데 그럴 이유가 생겼다.
“내전이란 말이지. 크큭.”
청년이 음산하게 웃음을 흘렸다.
좌대신이 인상을 팍 썼다.
“전하. 그렇게 웃지 마시라 누차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무릇 왕의 풍모란……”
“크하핫. 하하하하하! 하하하핫! 이제 되었느냐?”
좌대신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앙흠 헬른포드 2세. 현 국왕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탓에 왕태자인 앙흠이 국정을 물려받았다.
머리는 비상한데, 문제는 그 풍모였다.
매부리코에 움푹 들어간 눈. 그리고 유난히 검은 눈 아래의 색 때문일까. 분명 왕족답게 미형이기는 하나, 유난히 음침해 보이는 외모에 태도 또한 그랬다.
“마침내 우리에게 때가 오는구나. 왕국의 오래된 소명을 이제야 이룰 때가 되었어.”
“오래된 소명 말입니까?”
“그래. 오래된 소명. 왕국이 척박한 땅을 벗어나 옥토를 손에 가지는 것. 왕국의 곡창. 백성들이 먹을 곡식! 크큭.”
“전하.”
“크하핫! 젠장.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가 않는군. 내 웃음소리가 그리 듣기 싫던가?”
“듣기 싫습니다.”
즉답이었다. 앙흠이 정색했다.
“국경이 텅 비었다지?”
“변경백이 국경을 수호하는 군대를 빼내 왕성으로 진격중이라고 하더군요.”
“거 참. 개판이군.”
페벨룬 서쪽 국경을 수호해야 할 엘와즈 백작이 그 군대를 이끌고 내전에 절찬 참여 중이었다. 현재 1왕자파의 가장 큰 세력이었다.
“그 정도면 당장 국경을 넘어도 될 것 같은데.”
“아직은 아닙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나도 알아.”
“아십니까?”
“알지. 페벨룬에 대한 첩보를 강화하게. 페벨룬이야 전통의 강국이지만, 그것도 참 오래 해먹었지. 이제 바뀔 때도 되었고, 새로운 강국이 헬른포드가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지.”
“하오나 전하. 아무리 내전으로 혼란하다 하여도, 페벨룬은 강국입니다.”
인구가 반절이란 뜻은, 즉 군대도 반절이란 뜻이었다.
“이보게 좌대신, 기회란 왔을 때 잡아야지. 또 이런 기회가 있겠는가? 게다가 거 얼마나 좋아. 영토를 늘리기만 해봐. 사서에 기록될 명군으로 길이길이 남을 테지.”
“아무래도 명예에 눈이 머신 것 아닙니까? 대륙의 흉작으로 백성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내년의 피폐를 먼저 생각하셔야지요.”
좌대신이 쏘아붙였다.
좌대신은 그럴 수 있었다.
좌대신은 헬른포드의 공작이자, 앙흠 왕자의 스승, 이전 대부였으며 앙흠 왕자의 혼인 이후로는 장인이 되었다.
딸 뿐인 좌대신이 어린 왕자를 맡아 가르치며 쏟은 정성은 아들 이상이었다. 앙흠에게도 국정에 바쁜 국왕보단 좌대신을 더 따랐다.
“우리만 피폐한가? 다들 피폐할 텐데. 어차피 같은 조건이라면 이참에 이득이라도 보는 게 맞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러지 말고.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 보게. 페벨룬 북부의 옥토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내년의 고난은 잠깐이지만, 이후의 곡창이 되어 두고두고 왕국을 먹여 살릴 테니까.”
페벨룬 북부 평야. 한없이 펼쳐진 평탄한 대지에는 무려 지평선이 보인다 했던가.
지평선.
영토 전체가 산지이며 또한 숲인 헬른포드에서는 그저 그런 단어가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을 정도였다.
“좋습니다. 뜻이 그러하시다면 동맹을 구해야겠지요. 주변국에 은밀히 접촉해 보겠습니다. 아덴비엘, 그리고 데릇사. 그 외 국경을 맞댄 소왕국들 역시 솔깃한 제안일 테니까요.”
좌대신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좌대신이 말리는 척을 하나, 사실 왕자를 가르친 것이 그 본인이 아니던가. 위대한 정복왕이니 오래된 소명이니 하는 것들이 사실 좌대신에게서 나와 왕자에게 닿은 것이었다.
“좋아. 바로 추진하게.”
앙흠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왕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이 되도록.”
* * *
테디는 올해 마흔을 넘겼다. 열여덟, 열일곱, 열여섯의 세 아들, 그리고 열다섯의 딸 하나를 돌보는 좋은 아버지였으며, 곰머리 마을의 제분소 주인으로 재산이 넉넉하지는 않으나 베품의 미덕을 아는 마을의 좋은 이웃이기도 했다.
그리고 1왕자파의 십인장이었다.
테디가 창을 내질렀다.
왕당파 군대의 병사의 어깨가 그에 꿰뚫렸다. 어깨에 창날이 박히는 순간, 병사는 비명과 울음이 반씩 섞여, 둘 중 무엇도 아닌 괴성을 질러댔다.
“죽어!”
테디가 시뻘건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제분소 주인으로 평생 곡식이나 빻던 그였지만, 전장에서 새로운 재능을 깨달았다.
테디에게는 무재가 있었다.
징집병에게 급히 가르치는 창술, 창술이라기에도 민망한 몇 가지 기술을 마치 알고 있던 것처럼 능숙하게 쓸 수 있었다. 덕분에 그간 이루어진 전투에서 계속해서 적을 무찔렀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십인장이 되어 휘하에 아홉 병사를 둘 수 있었다.
대단한 일이었다. 테디는 징집된 제분소 주인이 아니라, 한 사람의 군인으로 신분이 상승한 것이다. 테디는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다.
테디가 창을 잡아당겼다.
하필이면 창이 근육에 박혔는지 아니면 뼈에 박혔는지, 뽑히는 대신 어린 적병이 묵직하게 딸려들어 왔다.
테디가 군화로 적병의 머리를 걷어찼다. 그 서슬에 적의 조악한 가죽 머리 가리개가 벗겨져 그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진 앳된 청년이었다. 테디의 아들들 중 하나와 동갑이리라.
문득 테디는 아들들이 생각났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면, 제 아들들 역시 군문에 들일 수 있으리라. 군인이 넷이면, 제분소의 일 년 수입 따위야 한 달이면 그 이상이 나온다.
도시로 이사하게 될 테고, 아들들은 물론이고 딸에게도 좋은 혼처를 잡아줄 수 있으리라. 착하기만 하고 영 모자란 마을 젊은 놈들 말고, 능력 있는 도시의 괜찮은 녀석으로.
테디가 활짝 웃으며 어린 병사의 가슴팍을 짓밟고 창을 뽑아들었다. 어린 병사가 애원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바닥을 뚫고, 창날이 떨어져 내렸다.
십인장 테디가 조금의 전과를 쌓았다.
전장 여기저기서, 1왕자파 군인들의 작은 전과들이 쌓였다. 작은 것들이 모여 큰 흐름을 만드니, 전선이 기울어지며 왕당파의 군대가 연신 밀려나기 시작했다.
결국 호루라기와 뿔나팔이 전장의 소음 사이로 새어나오기 시작하니, 왕당파의 군대가 등을 돌려 퇴각했다.
“전황이 좋군요.”
“적의 병력이 빠져나간 것이 유용합니다. 티란디스의 대공자가 잘 해주고 있으니까요.”
1왕자파의 하부 전선 사령관. 엘와즈 백작이 말했다. 당장의 승리와는 달리,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좀처럼 돌파가 되지 않았으니까.
시엔이 맡은 상부 전선에서 북부 영지를 치고들어가니, 왕당파의 군대 일부가 제 영지 수호를 위해 되돌아갔다. 거기에 더해, 약 이천여명 정도가 추가로 상부 전선 공세를 위해 이탈한 상황이었다.
덕분에 1왕자파의 전투는 연신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왕성으로의 진군은 지지부진했다.
“적의 마법사만 어떻게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부사령관 랭무튼 백작이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쩌정! 기묘한 소음이 전장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이미 여러번 들었으니 이제는 무슨 소리인지 안다. 얼음이 어는 소리였다.
후퇴하는 적병의 끄트머리, 거대한 얼음벽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왕당파의 가공할 힘을 가진 물길잡이. 마법사 하나의 소행이었다.
돌파가 미진한 이유였다.
전투에선 연신 승리하고 있으나, 추격하여 적을 흩어내야 할 때에 항상 저 얼음벽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애초에 마법사 한 명이 전황을 이리 굳힌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참으로 불합리합니다.”
랭무튼 백작이 하소연했다.
엘와즈 백작의 고소가 더욱 진해졌다.
“우리도 거기에 대해선 크게 할 말이 없겠습니다만…….”
마법사로 따지자면 이쪽에도 만만치 않은 전력이 있었으니까.
단신으로 성문을 깨는 공성 파괴자이자 세상 유일한 용의 사역자. 시엔 티란디스.
시엔이 애초에 제 전력의 세 배. 이제는 네 배에 가까운 적의 전력을 상부 전선에 묶어두고 있지 않은가.
왕당파는 상부 전선으로 병력을 충원하고선 이쪽의 맞대응을 기대하는 모양이지만, 시엔 티란디스 본인이 증원은 필요없으니 왕성으로 진격로를 확보해달라 요청한 상황이었다.
덕분에 계속 승리하여 적의 병력 소모를 유도하는 중이었으니까.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에 합리 불합리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엘와즈 백작이 말했다.
진격이 늦어지고 있다고는 하나, 상황은 점차 1왕자파의 손에 들어오고 있었다.
적의 병력은 열세이며, 전투가 계속될수록 이쪽의 우세가 굳어지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1왕자파의 입장에서는 원정이었다. 서부 귀족이 중앙을 향해 진군하는 중이라, 내전이 길어져 황폐해지는 것도 결국 적들의 영지였다.
“결국, 승기는 우리에게 있으니, 그저 끈기 있게 밀어붙일 뿐이지요.”
* * *
같은 이유로 시엔은 여유로웠다.
왕당파의 군대가 팔퓌유 영지를 수복했으나 그뿐이었다. 1왕자파 입장에서는 점령지를 내어준 것뿐이고, 그 와중에 피해도 없이 온전히 후퇴한 참이었다.
하부 전선에서 연이은 승전보가 들려오고 있으니, 이대로 방어 태세를 굳히기만 해도 결국 내전의 승리를 따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슬슬 진군하겠습니다.”
지휘 천막. 시엔이 말했다.
귀족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대공자. 적의 병력이 일만이 넘소이다만.”
“게다가 성을 끼고 있으니. 아무리 대공자가 성문을 깬다 한들, 이 정도 병력으로 공성은 무리가 아니겠소?”
“지리적 이점도 없습니다. 온통 트인 평야에서 적에게 둘러싸이기라도 하면…….”
귀족들이 난색을 표했다.
현재 시엔의 군대는 팔퓌유 영지에서 물러나 서부 귀족 케이슬 자작령 경계선 늑대울 숲에 주둔 중이었다.
평야가 끝나고 북으로는 높은머리 봉우리의 험준한 산세, 서남쪽으로 레른 봉우리의 맥이 뻗어 만나는 본격적인 산악 지역의 경계점이었다.
서부 귀족의 땅이 으레 이러하니, 그 군대가 싸우는 법 역시 이런 험지에서 빛을 발했다. 그러니 적이 세 배에 달할지라도 맞붙어 싸워볼 만 한 천혜의 요새였다.
왕당파의 군대 역시 이를 알기에 함부로 진격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아. 여러분들은 여기를 지켜주셔야 해요. 저 반역자들이 서부의 땅을 넘봐서는 안 되죠.”
1왕자파는 델피르 왕자를 중심으로 왕권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흐레이그를 필두로 한 사악한 무리들이 현 국왕을 왕성에 감금하고 왕태자 암살 시도를 통해 함부로 폐하고 국정을 휘두르려 한다는 명분을 세웠다.
그러니 서로서로 칭하는 말이 저 반역자들이었다.
귀족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진군하겠다더니, 또 여기를 지켜달라는 말은 무엇인가. 대공자는 진군하고, 나머지는 지키겠다는 뜻인가?
시엔이 뒤이어 설명했다.
“소수 정예 부대. 가장 뛰어난 이들과 함께 북부를 한 바퀴 휘저어 보겠습니다. 그러면 적의 병력이 분산될 테고, 여러분들께선 때를 보아 공세에 나서 주세요.”
“듣자하니 대공자께서 직접 나설 생각이시오? 그렇다면……”
귀족들이 눈을 빛냈다.
얄렘방 주둔 당시 야습의 결과를 눈으로 지켜본 귀족들이었다. 당시 나선 이들이 오로지 티란디스의 기사들 뿐이라, 그 전공이 전부 시엔의 몫이었다.
위험 역시 시엔 혼자 가졌지만, 원래 큰 위험에 큰 이득이 따르는 법이었으니까.
상부 전선에 참여한 귀족들이 가진, 시엔에 대한 믿음은 두터웠다. 그리고 지난 야습 이후로는 더욱더 그랬다.
“소수 정예라 하면, 우리 홉브의 아홉 창날 기사단 역시 빠질 수가 없겠구려.”
“바일의 기사들도 한 몫 거들고 싶소만.”
그리고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각 기사단 역시 그 소식에 환호했다.
티란디스의 창공 기사단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 중이었다. 일만의 적을 상대로 돌격을 감행했으니 그 용맹과 충성이 대체 어떠한 것이랴.
화상 따위의 가벼운 부상이 있긴 했지만, 심지어 전원 생환하여 이야기, 책 속 전설을 재현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번에는 그 대열에 합류할 기회가 온 것이다.
< 33. 얄밉게 더 얄밉게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