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55화 (153/268)

< 33. 얄밉게 더 얄밉게 (1) >

시엔 티란디스가 이끄는 1왕자파의 삼천 군대는 북부 귀족의 도시 얄렘방을 점령했다.

왕당파는 킬지언 흐레이그를 사령으로 구천 병력을 선발대로 보내 대처했으며, 공성 병력을 추가로 편성하여 얄렘방을 수복할 계획이었다.

그 와중 1왕자파의 야습으로 왕당파의 군대에 천오백의 사상자가 나왔다.

격분한 흐레이그가가 지원 병력 이천을 추가 편성했다. 그렇게 조직된 왕당파의 지원 병력이 무려 오천에 가까웠다.

하부 전선의 병력까지 무리하게 끌어모은 병력이었다.

왕당파의 주공은 서부 지역에서 왕성으로 직선으로 향하는 하부 전선이며, 북부로 돌아 들어가는 시엔의 상부 전선은 조공에 해당했다.

적의 주공에 대한 방어를 축소하고 조공을 역습하겠다는 기이한 판단이었다.

레이알드 셉텐 페벨룬. 페벨룬의 국왕에게는 다분히 괘씸하기 그지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시엔 티란디스가 이끄는 조공 군단의 목적이 무엇이던가. 직접 북부 귀족의 땅을 공격하여, 하부 전선의 왕당파 귀족 병력을 제 땅으로 유인하는 수작이었다.

그럼에도 흐레이그 공작은 왕성으로의 진격을 막는 하부 전선의 병력을 빼내 상부로 돌렸다.

반란군 놈들의 수작에 훌륭하게 놀아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덕분에 자신을 지켜야 할 방패가 얇아지고 말았으니, 국왕의 심기가 편할 리가 없었다.

심기가 불편하니 자연히 독설이 나올 수밖에는.

“티란디스의 어린놈의 술책에 넘어가다니. 그래, 후계자끼리의 다툼에서 밀리니 속이 상하던가?”

시엔 티란디스와 킬지언 흐레이그. 두 가문 대공자의 대결은 티란디스의 압승이었다.

세 배의 병력차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작전으로 사상자 숫자만 천오백 대 열 이라는 일방적이다 못해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세상에 없던 결과였다.

국왕이 그걸 비꼬는 소리였다.

본디 제 욕은 참아도 자식 욕은 참지 못한다고 하던가. 그러나 그 앞에 마주 앉은 흐레이그 공작의 표정은 평온했다.

“송구하옵나이다, 폐하. 그러나 신 흐레이그, 폐하께 충정을 다하고 있사오니,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충정이라. 감히 왕성을 향하는 저 반역자들보다 영지의 안위를 살피는 것이, 대체 언제부터 충정이었는가?”

“폐하의 염려는 알고 있사옵니다만, 이는 전략적인 판단일 뿐입니다.”

“말해 보라.”

“폐하께서도 익히 아시듯, 단순한 숫자와 유불리를 떠나 군대 역시 급소가 있지 않겠습니까. 신은 그저 저 간악한 반역도들의 급소를 찌르고자 함입니다.”

전쟁에는 언제나 영웅이 나타났다.

영웅은 승리를 보장하는 깃대와 같았다. 그저 존재함이 군의 사기를 드높이니, 단신의 지원으로도 군대의 전투력이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가 아니던가.

반대로 그 적들에게는 그저 존재만으로도 악몽으로 자리 잡았다. 적의 영웅은 아군의 전의를 꺾고 두려움을 퍼뜨린다.

현 상황에서는 시엔 티란디스가 바로 그 영웅이었다. 용의 주인. 단신으로 성문을 파괴하는 공성 파괴자. 교단이 인정한 명예 성자.

반대로 영웅은 패배해서는 안 된다.

영웅이 패배하여 몰락하는 순간, 지금까지 제공하던 그 모든 이점이 뒤집히고 마는 것이다.

군대는 좌절하고 사기는 땅에 묻혔다.

희망이 절망으로 뒤바뀌는 순간은, 차라리 꿈을 꾸지 않는 편이 더 낫다 싶게 될 테니까.

시엔이 절대 패배해서는 안 되는 이유였다.

“……따라서 적의 군대 역시 티란디스의 대공자를 지키기 위해 움직일 터. 그렇다면 하부 전선의 유불리는 사라지고, 오히려 먼저 움직임을 취한 저희가 유리한 고지에 이를 수 있사옵니다.”

반대로 왕당파의 입장에서 시엔만 잡는다면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아울러 상부 전선 방어를 공세로 돌려 역으로 서부 귀족 영지로 진군하게 되면, 1왕자파의 군대는 공격을 포기하고 영지 방어에 나설 터이니 스스로 와해되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물론 이 ‘상부 하부 공세 전환 작전’의 선봉에는 흐레이그의 대공자가 있게 될 터. 흐레이그 공작은 거기까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물론 국왕 역시 인물은 인물이라, 그 속내를 알았으나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들어보니 전략적으로 맞는 말이며, 그 와중에 제 잇속을 조금 채우는 정도야 넘어가 줄 수 있었다.

“흠, 흠. 내 공작을 오해한 듯하이. 미안하네.”

“아닙니다, 폐하. 애초에 일이 이렇게 되고 만 것이 제 불찰이니, 폐하께서 그에 심려케 하여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흐레이그 공작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국왕에게 보이는 정수리 아래 감춰진 표정은 싸늘하게 그지없었다.

‘폐하의 치세에는 숙이겠습니다. 그러나 폐하. 살아야 얼마나 사시겠습니까. 다음 권력은 왕세자가 아닌 흐레이그가 가지겠습니다’

흐레이그 공작은 이번 국왕에게는 충심을 다할 생각이었다. 간이며 쓸개며 달라는 대로 다 내놓으리라.

아무리 길어봐야 30년. 국왕이 늙어 노쇠하고 나면 그때는 가문이 왕국을 집어삼킬 테니까.

국왕이 고개를 숙인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그 속셈이야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적어도 자신이 왕권을 쥐고 있을 땐 충신으로 남을 인물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모르는 척 속아 주고, 반란군 토벌이 끝나면 조금씩 정리에 들어가면 되겠지.

* * *

후퇴하는 부대의 사기는 바닥을 친다. 보편적인 상식이지만, 세상일이 꼭 그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열을 넘긴 건 알겠는데 잠깐 헷갈려서 잊어버렸단 말이지. 그리고 또 열을 넘게 세다가, 그때였는데. 그때 세상이 환하게 타오르면서, 그때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야습에 참여한 기사들이 콧대를 높이 치든 채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종자들은 몇 번을 들은 이야기임에도 한 글자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귀를 기울이고, 다른 기사들이 또 시작이라는 눈빛으로 말을 몰아 속도를 높였다.

떠드는 녀석이 그걸 또 따라가며 무용담을 계속 늘어놓았다. 간밤의 작전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알 만한 풍경이었다.

그 모습에 시엔이 곁에 말을 모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베른닐이었다.

다만 오늘은 입술이 좀 튀어나왔다.

시엔이 피식 웃으며 팔꿈치로 베른닐의 가슴팍을 쿡쿡 찔렀다.

“왜, 부럽냐?”

“그럼 부럽지 안 부럽겠습니까? 그런 작전이라면 적어도 제게 한 번은 참가하겠냐 물어보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물어봤으면?”

“제가 선봉에 섰겠죠.”

“수호 기사가 뭔지 몰라? 어딜 주군을 내버리고 사지로 기어들어가려고?”

베른닐의 주둥이가 조금 더 튀어나왔다.

“사지가 사지가 아니었지 말입니다.”

출동에 나섰던 오십의 기사들이 그대로 다시 돌아왔다. 시엔조차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운이 좋으면 두셋, 아주 재수가 없으면 열 명 이상의 기사를 잃으리라 생각했던 작전이었다. 그런데 전부 생환했다.

나갈 때는 아주 비장하기 그지없었는데, 심지어 각자 유서까지 써 놓지 않았던가. 그런 만큼 돌아올 때는 아주 의기양양한 상태였다.

사실 이쯤 되면 전략이나 전술, 지휘를 떠나 행운의 영역이었다. 천운이라고 하는 녀석이던가.

“뭐.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긴 했는데.”

시엔이 쓰게 웃었다.

전부 살아왔으니 기쁘긴 한데, 한편으로는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었다.

한껏 기세가 오른 카레네 때문이었다.

매일같이 돌격 공격 총공세를 외치던 누이였다. 적어도 함께 먹고 자며 훈련하던 기사단의 일원을 잃고 나면 조금 정신을 차리려나 했더니.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말았다.

오늘 아침만 해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사기가 떨어진 왕당파를 향해 총공격에 나서야 한다고 외쳤으니까.

물론 카레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승리하려면 지금이 적기고, 시간을 주면 저들 역시 피해를 극복하고 오히려 더 전의를 다지게 될 테니까.

그러나 야습 자체가 최소한의 병력 소모로 승리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총공격이라니, 그렇게 이기면? 이쪽의 병력은 또 얼마나 남고. 그렇게 소모하기엔 내 영민은 좀 귀한 편이라서.

어쨌거나 기사는 귀한 재원이었다. 어떤 전술가는 기사 하나를 병사 오십에 견주고, 또 누구는 백에 견주기도 할 정도였으니까.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것이었다.

카레네야 이번 일로 언젠가 큰 화를 입겠다는 막연한 예감이 들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래도 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생각을 정리한 시엔이 씩 웃으며 농을 건넸다.

“또 모르지. 베른닐이 나섰으면 유일한 전사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크흠. 저도 이제 예전 같지는 않습니다. 검위공께 사사하기도 했지 말입니다.”

“시간을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뭐.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고 치잔 말씀이십니까…….”

베른닐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번 야습은 왕국에, 어쩌면 왕국을 넘어 온 대륙에 퍼질 용맹한 일화가 될지도 몰랐다. 부러운 것이야 당연하고, 사실 수호 기사가 거기 참여할 수도 없었을 일이었다.

그냥 부러워서 아쉬운 소리나 해본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래도 정말 괜찮은 겁니까?”

베른닐이 다시 물었다.

“응? 뭐가?”

“이…… 전선을 뒤로 무르는 것 말입니다.”

전선을 뒤로 물린다. 다른 말로는 도망친다고도 표현할 수 있으리라. 시엔이 키득거렸다.

실제로 황혼을 틈탄 기습 철수를 감행한 참이었다.

해질녘 즈음 연기를 피워 취사를 준비하는 것처럼 꾸몄다. 그리곤 반대편 성문을 열고 그대로 줄행랑을 쳤으니까.

“인제 와서 쫓아와 봐야 추격은 불가능해. 우리 병력이 온전한데 기병으로 된 추격대를 보내주면 나야 고마운 일이고.”

진형을 갖추고 일사불란하게 고속 행군 중인 군대였다. 이미 불리한 상황에서 패주하는 상대를 사냥하듯 잡는 것을 추격이라고 했다.

그저 뒤로 행군하는 군대를 쫓는 건 그리 현명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 전선을 어디까지 무르실 생각이십니까? 잘못하면 하부 전선에 망치를 꽂아버리시게 생겼습니다만.”

상부와 하부 두 전선이 같은 수직선상에 있어야 전선이 안정되는 법이었다.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돌출되면, 저지 부대로 시간을 끌고 우회 공격을 감행하는 이른바 망치와 모루 전술에 취약해지고 만다.

베른닐의 말이 그런 뜻이었다.

시엔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망치 자체가 녹슬게 될걸? 덤으로 기분도 상당히 더러울 테고 말야.”

“기분이 더럽다는 말씀은……”

“뭐.”

시엔이 잠시 이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먼 과거, 가장 융성한 제국이 한 명의 흑마법사와 전쟁을 벌였다.

흑마법사의 공세는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끔찍한 마수가 난데없이 솟아나 사람을 덮치고, 더불어 지독한 역병이 퍼져 무수한 이들이 죽어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죽은 이들이 다시 일어나 산 자에게 칼을 겨눴다.

군대를 투입하면 투입할수록 적의 군세가 늘어나는 끔찍한 상황이었다.

결국, 제국은 마수와 사체들을 상대하는 대신 흑마법사 그 자체를 노리기로 결심했다.

흑마법사도 결국 사람이니, 먹지 못하고 여러 날이 지나면 제아무리 강대한 마력의 소유자라 한들 어쩔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제국은 스스로 영토를 불태워 흑마법사를 불모지 속에 위치하도록 유지했다. 벌레 한 마리 남기지 않은 완벽한 소거였다.

청야 전술.

그렇게 제국 영토의 절반이 초토화되고 나서야 끝내 쇠약해진 흑마법사를 잡아 목을 베었다.

그 후유증으로 결국 제국 역시 무너지고 말았지만.

회상을 마친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당해보면 아는데, 이걸 설명하기가 참 그러네.”

< 33. 얄밉게 더 얄밉게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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