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신부는 안녕하십니까? [1] >
체른노아의 중앙 광장.
상단 습격 사건의 용의자들이 목이 내려가고, 새로이 여덟 구의 목이 걸렸다.
대륙에 그 악명을 날린 푸른 장미의 마스터와 그 수하들이었다.
-우리 티란디스는 푸른 장미의 암살 시도를 맞이하여 천신의 가호 아래 오히려 그 수괴를 붙잡아 처형하였다.
그 소식은 곧바로 대륙에 퍼져나갔다.
워낙에 악명을 떨치던 암살자였으니 호사가들의 입이 쉬질 않았던 까닭이었다.
곧바로 시엔을 칭송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원수의 처단에 감사를 표하는 편지들이 계속해서 후작가로 날아들었다.
마스터가 죽고 나자, 푸른 장미는 조각조각 찢어져 버리고 말았다.
가진 재산이 워낙에 많으니 일부는 제 몫을 챙겨 달아나고, 일부는 서로 조직을 이어받겠다 치열한 싸움에 돌입했다.
그 와중에 권력의 최상위권에 닿았던 선들이 끊어졌다.
덕분에 대륙의 최고 권력자들은 티란디스령으로부터 퍼진 소문이 진실임을 알았다.
흐레이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젠장, 빌어먹을 티란디스! 대체……!”
뭐 하나 걸려드는 법이 없었다.
역병을 퍼뜨린 건부터 시작해서, 대륙 최고의 암살자까지. 타격을 주려 해도 오히려 그 명성만 드높여 주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당연히 분통이 터질 수밖에.
겨울이 깊어지며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티란디스에서 사업을 명목으로 군대를 키우는 것이야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속을 까보니 아예 대규모 군대를 키우고 있음이 드러났다. 다섯 개 대대이니, 영지의 병력을 두 배로 불린 셈이었다.
왕실에서 강력히 규탄했지만, 티란디스는 그저 도로 공사 사업의 일환이라 우길 뿐이었다.
왕성에 출두하라 하니 일이 바쁘다 하고, 조사대를 파견하니 보여주는 것이 군대를 키우고 있음을 전혀 숨길 생각이 없었다.
누가 봐도 군대의 양성임에도 끝까지 도로 사업이라 우겼다.
문제는 시엔 샤인 티란디스. 빌어먹을 명예 성자가 대륙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명예가 없는 이가 그리 우기면 모를까, 가진 이름이 드높은 이가 우기면 트집을 잡을 명분이 없었다.
그러니 뻔히 군대를 키우는 것을 이를 갈며 바라볼 수밖에는.
그러나 어찌 두고만 보랴.
흐레이그 공작이 왕성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머리를 모아 새로운 도발 거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 * *
그렇게 시간이 지나, 겨울이 끝물에 이르렀다. 겨울 가뭄이라고, 눈조차 드물었던 겨울이었다.
봄을 앞두고 겨울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모양으로, 요즘 들어 추위가 기승을 보였다.
시엔은 바빴다.
원래 보는 영주 대리 업무에 송수신기 개량까지 함께 손댄 까닭이었다.
“역설계가 불가능해야 해.”
“아무리 복잡하게 만들더라도 역설계는 피할 수 없을 겁니다만.”
“성능을 깎아서라도 그렇게 할 필요가 있거든.”
첩자가 없는 영지가 어디에 있으랴.
송수신기는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적의 손에 들어갈 수밖에 없으니, 제식 도구로 삼기 위해서는 역설계가 불가능한 것이 무조적인 첫 번째 목표였던 것이다.
적의 손에 들어가도 역설계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한계가 있을 겁니다. 기존 마법 체계를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 한에는. 암튼 그렇습니다.”
“아니면 잊어버린 마법 체계라던가.”
“예?”
“이런 거 본 적 있어?”
시엔이 간단한 흑마법을 펼쳤다.
자울은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세, 세상에. 그게 대체 무슨 마법입니까?”
“잊혀진 마법이야.”
“고대 마법이란 말씀이십니까?”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놈의 고대 마법은 무슨.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같이 고대 마법을 숭배하나. 고대에 마법이 있었으면 원시적인 형태겠지 지금보다 더 뛰어났겠어?”
천 년 전에도 고대 마법 어쩌구 하며 유적지를 훑고 다니는 마법사들이 있었다.
“어쨌든 이걸 혼합하면 역설계할 수 없겠지?”
“분석 자체가 불가능할 겁니다.”
그 결과, 송수신기의 크기가 좀 더 커졌다.
아케인 에너지와 음차원 에너지 양 회로를 따로 구성하여 쌍적층으로 구조를 쌓고, 거기에 의미 없는 층계를 끼워 넣고 술식을 우회해 연결했다.
덕분에 오히려 성능이 더 떨어졌지만, 적의 손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새 송수신기를 완성하고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복잡한 마도구를 생산하여 기사단과 군대에 보급하고, 그 사용을 훈련하여 익히는 것만으로도 겨울이 훌쩍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 * *
허공에 뼈가 솟아올랐다. 사람의 뼈대였다.
뼈대 안으로 장기가 솟아오르고, 그 위에 힘줄과 근육이 자라 자리를 잡았다. 이내 잡티 하나 없는 뽀얀 피부가 그 위를 덮었다.
세상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탄생이었다.
탄생과 더불어, 한 명이 풀썩 쓰러졌다.
세올의 생체 강신체의 연구도 계속 발전해서, 이제는 본 신체와 분리한 독립 활동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차게 얼은 바닥에 실 끊긴 인형마냥 쓰러진 한 본체를 보며, 새로 탄생한 여인, 세올의 강신체가 비명을 내질렀다.
“꺅, 내 몸! 야! 붙들고 있으랬잖아!”
“아. 맞다. 그러셨었죠.”
“맞다? 맞다아아아? 야! 너 일부러 그랬지?”
“어머, 선배. 무슨 섭섭한 말씀이세요.”
트리예가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세올의 강신체가 빽 소리를 질렀다.
“상처라도 나면 어떡하려고. 흉 진단 말야!”
“그럼 누렁이 님께 보여드리면 되죠.”
“아니, 그러니까.”
세올의 말문이 막혔다.
트리예가 능숙하게 세올의 원래 몸을 들어 제 품에 안았다.
“자자. 이제 잘 붙들고 있을게요.”
“너, 두고 봐.”
세올의 강신체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수많은 허수아비가 선 중앙이었다.
“자, 그럼 시도할게요.”
“야, 잠깐만……!”
“르 크사 에 라 트리예……”
트리예의 입에서 사악한 진언이 흘러나왔다.
세올의 강신체의 몸에서 복잡한 문양이 일었다.
그리고. 팍!
순간 여인의 몸이 폭발했다.
살과 뼈가 조각조각 흩어져 사방으로 쏘아져 공간을 휩쓸었다. 허수아비가 부러지고 꿰뚫리고 뽑혀 날아갔다.
“하윽…….”
동시에 세올의 원래 몸이 활처럼 휘었다.
고통이 지나치면 오히려 비명도 나오지 않는 법이었다. 그저 억억 숨이 억지로 막히는 소리밖에는 낼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세올의 상태가 딱 그랬다.
이 추운 날, 순식간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강신체와 본체가 감각을 공유했다. 강신체가 폭발하니 산 채로 온몸이 터져나가는 고통이 고스란히 세올을 덮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트리예가 말했다.
“보세요, 선배. 성공이에요.”
그 많던 허수아비들이 몽땅 쓸려나갔다.
그러나 세올은 격통에 정신이 없을 뿐이었다. 보아하니 보통 상태가 아니라, 트리예가 그제야 세올을 눕혀 팔다리를 야무지게 주물렀다.
“자자. 숨 크게 들이키시고. 따라하세요. 후으읍.”
“후으읍.”
“내쉬시고. 하아아아.”
“하아아아.”
“다시. 후으으읍.”
“후으으읍.”
“하아아아.”
“하아아아.”
몇 번을 반복하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 모양이었다. 세올의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선배, 정신이 들어요? 저기 보셔요. 파괴력이 계산치보다 삼 할은 더 높게 나왔답니다. 대성공이에요.”
세올이 고개를 저었다.
일명 자폭 강신체. 성야제의 인간 폭탄을 보고 영감을 얻어 트리예가 완성한 마법이었다.
독립형 강신체의 생성 과정에서 특수 시약을 운용했다. 세오르기아라 이름붙인, 트리예의 발명품이었다.
그리고 시약과 신체의 반응을 주문으로 유도 강력한 폭발을 이끌어내는 것.
물론 완전한 독립형 강신체의 분리 운용은 리치인 세올만이 가능했다. 실상 세올과 트리예가 함께 운용해야 하는 마법이었다.
트리예야 주문이나 외우면 끝이지, 세올 입장에서는 산 채로 터져나가는 경험이었다.
그나마도 이미 죽어본 경험이 여럿이라 버티는 것이지, 세올이 아니었다면 심리적 쇼크로 본체의 목숨 역시 끊어졌으리라.
세올이 성공의 소감을 내뱉었다.
“차라리 그냥 이 세올을 죽여. 나쁜 년아.”
* * *
노인과 여인이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노인은 누렁이고, 여인은 나비였다.
누렁이와 나비. 개와 고양이의 이름을 가진 노소가 한 방향을 향해 엄숙한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중이었다.
문득 누렁이가 눈을 떴다.
“그분께서 이동하신단다. 아마 야식을 찾으시는 모양이다. 내 바른 방향을 향할 터이니 보고 따라하려무나.”
“네, 할아버지.”
누렁이가 발을 움직이니 천천히 그 방향을 바꾸었다. 정확히 시엔을 향한 방향이었다.
나비가 바빠졌다. 기도하랴, 누렁이를 따라 방향을 바꾸랴. 번갈아 하려니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시에 생각했다.
아. 아직 내 믿음이 모자라서 위대한 분께서 계시는 방향을 알 수 없구나.
겨우 내내 벌어지는 일이었다.
* * *
카레네는 두 달에 이르는 초장기 혹한기 훈련을 계획하여 기사단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불쌍한 베른닐이 거기에 휘말려 차디찬 들판을 헤맸다.
델피르는 그간 수많은 교육에서 벗어나 살판이 났다. 그러자 보다 못한 예절 선생이 시엔을 찾았다.
“전하께서 한참 제왕의 도를 깨우치셔야 할 시기가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적기라는 것이 있으니 지금 배움에 매진해야 할 때 사정이 이러하니 방도가 없겠습니까?”
어쩌면 저리 우아한 사내가 존재할까.
시엔이 예법 선생을 보며 감탄하는 한편,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전하께서 계심이 세상 가장 큰 비밀이니 함부로 스승을 청할 수가 없네요.”
“물론 제가 그러한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니 대공자님께서 조금의 시간이라도 할애하여 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제가요?”
“대공자님의 덕이 이미 세상에 이름이 높고, 또한 신하를 귀히 여기어 기용하여 백성을 이롭게 살피는 이치가 이미 군왕의 도를 알고 계십니다.”
“에이, 과찬의 말씀이세요.”
“배움은 누구나 추구해야 할 것이며, 가르침의 자격은 미미하나 앞선 자라면 누구나 가진 것입니다. 대공자님께서 전하께 가르침을 드리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흠.”
사실 시엔도 제왕학을 배운 몸이었다.
한 때는 시엔 역시 왕자였으니까.
하지만 요즘 참 바쁠 때라,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면 겨우 두 시간여 되는 꿀 같은 낮잠을 포기하거나.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저보다 더 적임이신 분이 계시네요.”
“오오. 어떤 명사이십니까?”
“후작님께서 요즘 시간이 많으실 테니까요.”
“과연. 티란디스 후작님께서 계시는군요!”
예법 선생이 기뻐했다.
시엔이 보기에 후작은 아주 살판이 났다.
지금까지의 헌신이 전부 이때를 위함이었다고 자랑이라도 하듯 모든 업무에서 벗어나 놀고 있는 와중이었다.
마침 후작이라면 왕자의 스승으로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기도 했고.
시엔이 때는 바로 지금이다 하며 왕자를 떠넘겼다.
그런 이유로 후작에게나 왕자에게나 서로 불편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 * *
시엔이 문득 잊고 있던 이름을 떠올렸다.
가끔 그러한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페시번 녀석은 뭘 하나?’
이내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녀석 따위, 내가 알 게 뭐람.
* * *
로우드는 볼 때마다 재정이 마른다며 툴툴거렸다.
보석 두 개를 제외한 금화 이만 개 어치의 재화를 품에 안겨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놈의 재정이 나쁘다 곡소리가 숨을 쉬듯 튀어나왔다.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항상 재정이 문제야? 겨울이라 요정목 수급도 늘었지, 납품 계약 단가를 그만큼이나 후려쳤잖아. 상단 무장도 이젠 안 하는 데에다, 부수입도 챙겨줬는데.”
“군대가 두 배라 그만큼 나가는 돈이 만만치 않지. 전쟁물자 비축도 계속해서 확장하는 와중이고. 무엇보다. 곡물 가격이 작년 대비 열 배야. 알다시피 지금까지 비축분을 풀지 않았으니까. 계속해서 사 먹고 있으니 갈수록 상황이 나빠진단 말이다.”
“그만. 젠장. 알아들었으니까.”
가뭄이 비단 왕국만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곡물 가격이 가파르게 뛰었다.
물론 티란디스야 가뭄의 영향이 없어 예년과 같은 소출이 나왔으며, 그것도 진작 금화로 거둬들여 대신 고기 또 고기 또 고기를 먹였다.
티란디스의 재정이 휘면 휠수록 영민은 무탈하게 잘 먹고 잘산다는 뜻이었으니, 이러한 어려움쯤이야 얼마든지 감내하리라.
지난 가뭄이 이제야 활짝 피기 시작했다.
겨울까지야 가뭄의 반의반 토막이 난 소출이라도 먹고살 것이 있었다. 그러나 겨울이 끝나가는 지금에 와서는 왕국 전체가 극심한 식량난의 시작 지점에 있었다.
그리고 국왕의 부덕으로 비가 내리지 않았다 하는 소문이 이제야 활개를 치고 돌아다녔다.
백성이 왕을 원망할 때는, 당장 먹고 살기 힘든 시점이라는 뜻이었으니까.
티란디스가 아닌 왕국의 다른 땅에서는 백성이 모여 하는 말들이 왕실에 대한 성토였다.
민심이 들끓고 있었다.
이제는 슬슬 무언가 큰일을 도모해 볼 판세가 되었다.
물론, 시간은 시엔의 편이었다.
봄이 되면 기아는 더 심해질 것이고, 그때엔 적들의 군대 역시 그 힘을 잃으리라.
그러니 왕실 입장에서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면 지금이 바로 마지막 기회였다.
그리고 왕실이 시엔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겨울의 마지막 날이었다.
오늘따라 하인들이 시엔을 바라보는 시선이 기묘했다. 무언가 안쓰럽다는 듯한,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기도 한, 어쨌거나 걱정 어린 시선이었다.
그러한 시선이 로우드에게까지 이어졌다.
“너, 괜찮냐?”
“뭐가?”
“세필리아 공주님 말야.”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피? 세피가 왜?”
로우드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래도 못 들었나 보네. 하긴, 아무도 네게 전하고 싶진 않았을 테니, 아직 모를 수도 있겠네.”
“뭔데?”
“세필리아 공주의 정혼이 발표되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뭔 소리야?”
“부르도 왕국 국왕의 후처로 들어가게 되었어.”
부르도라면 서쪽으로 국경을 맞댄 왕국이었다. 시엔이 턱을 쓰다듬었다.
“부르도 국왕? 내가 알기로 예순 넘은 늙은이 아니었나? 그새 계승이 있었나?”
“그 늙은 국왕 맞아.”
로우드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부르도 왕국에서 대규모 식량 원조를 받기로 했다더군. 사실상 팔려가시는 거지. 그 늙은 국왕의 후처, 말이 후처지 사실상 첩으로 말야.”
< 당신의 신부는 안녕하십니까?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