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39화 (137/268)

< 28. 가시가 날카로워도 상처는 깊을 수 없는 법 [6] >

배울림 숲은 체른노아 서쪽에 자리 잡은 너도밤나무 수질의 숲이었다.

너도밤나무는 가공이 어려울 만큼 단단했다. 그런가 하면 감시탑만큼이나 곧고 높이 자랐다. 밝고 치밀한 나뭇결로 사랑받으며, 그 쓰임새가 가구로부터 선박에까지 넓으니 상품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새 도로가 뚫리자마자 숲의 보호를 위해 통행이 금지되었다. 덕분에 기존 숲을 가로질러 체른노아로 향하는 도로는 지금 쓰이지 않는 상태였다.

길도 사람이 지나야 계속 살아 있는 법이었다. 사람이 지나지 않으니 노반은 깨지고 금이 갔으며 그 사이로 풀이 무성하게 자라 계절을 타고 누렇게 떴다.

야영지로 쓰이던 공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황량한 공간 위에 두 무리가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마스터 로즈가 대상의 일행을 바라보았다.

가운데 선 이가 바로 그 명예 성자였다. 어째서인지 모르게 제 허리춤까지 오는 작은 아이가 성자의 소매를 꼭 붙들고 있었다.

그 좌우로 두 시녀와 호위 기사가 서고, 집사 복장의 늙은이가 장미 하나를 붙들고 있었다.

장미 하나는 의외로 자유로운 품새였다. 어디 묶인 곳 없이 그저 늙은이에 팔에 붙들려 있을 뿐이었으니까.

인질을 제대로 대우해준 모양인데, 그러한 자비가 오히려 독이 되리라.

잘 묶어 놓았더라도 발화의 괴력으로 끊어낼 판에, 사람 하나가 붙잡고 있으니 뿌리치기란 손바닥 뒤집는 것 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앗, 마스터! 마스터가 오셨네요!”

마스터 로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장미 하나가 영악한 수작을 부렸다.

마스터의 정체를 드러냈다. 불상사가 생기면 저들은 마스터를 쫓아 움직일 터. 그러니 제 인도 거래에서 허튼짓하지 말고 좋게 가자는 뜻이 아니겠는가.

갑자기 장미 하나가 순수한 마음을 가지거나, 혹은 바보가 되지는 않았을 테니 분명 그런 의도의 행동이 틀림없었다.

‘빌어먹을 계집. 임무를 실패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이빨을 들이밀다니. 잠시 후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때, 공작대장이 물었다.

“인원이 단출하지 않습니까?”

“나름 머리를 쓴 모양이다.”

마스터 로즈가 대답했다.

“머리를 썼다 하심은?”

“숲에 병력이 가득하겠지.”

“매복입니까? 그럼 당장 탈출을.”

“그럴 필요 없다.”

일부러 소수로, 심지어 아이까지 대동하고 나왔다. 그 말인즉슨, 숲에 그만큼 병력을 깔아두었다 대놓고 밝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이리 대놓고 알려주고 있으면서도 굳이 병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병력을 깔아두었지만, 거래가 멀쩡히 성사된다면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기도 했다.

그저 인원 구성만으로도 많은 뜻을 담고 있으니, 명예 성자가 여간내기가 아니긴 한 모양.

하지만 순진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영리한 이라도 순진하면 당할 수 밖에 없는 세상이었다.

마스터가 그렇게 흉흉한 생각을 하며 서로 거리를 좁혔다. 그러자 대상이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너희 장미 하나는 무사해. 그럼 받을 것부터 먼저 받아 보겠어. 금화부터 보내도록 해.”

“좋다. 약속은 지키겠지?”

“그럼. 그쪽에서 먼저 깨지만 않는다면.”

“좋다. 수레를 보내.”

당나귀 한 마리가 짐수레를 끌고 공터를 건넜다. 금화 오만 개면 본디 거대한 짐마차로 몇 개 분량이나, 이러한 거래에 그만한 규모를 동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탑이 보증한 희귀 원소. 그리고 보석으로 금화 오만 개 분량이다. 보증서를 첨부했으니 천천히 확인해도 좋다.”

대상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여기까지 와서 사기를 치진 않았을 테니까.”

“그런가? 그러면.”

마스터 로즈가 눈을 빛냈다.

“장미 정원에 불이 타오른다! 장미 하나, 암살 대상을 즉시 참살해라!”

발화의 시동어가 흘러나왔다.

저도 모르게 무의식 깊숙이 박혀 절대 헤어나올 수 없는 그런 주박이었다.

장미 하나가 눈을 치떴다.

그리고 입을 열어 대답했다.

“내가 왜요?”

“뭐?”

“그러니까, 왜요?”

에블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스터 로즈가 당황했다.

에블리는 이미 신앙에 귀의했다.

시엔이 악령을 거뒀고, 때를 맞춰 누렁이가 포교에 나선 탓이었다. 그 이후에 악몽도 악령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용서받았구나.

에블리가 곧바로 믿음에 사로잡힐 수밖에는.

애초에 에블리의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던 것도 큰 이유였다.

마음 일부가 비어버린 사람은 그 자리를 신앙으로 채우곤 했다.

거짓 자아로 텅 빈 속을 감추었으나, 이제는 그 모두가 신앙으로 차올랐다.

이제는 미약하나마 신성을 일으킬 정도였다.

신성이 심장에 자리를 잡았으니 깊숙이 박힌 세뇌라 해도 당연히 자취를 감출 수밖에는.

“이익, 장미 정원에 불이 타오른다!”

“와, 어디 불났어요?”

“장미 정원에 불이 타오른다!”

“어딘데요? 으음. 연기는 안 보이는데.”

에블리가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늘은 맑고 연기는 없으니 어디 불이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까지.”

시엔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암호인지 뭔지, 아무래도 에블리의 충성심을 과대평가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해피 드리머에게 망가지는 바람에 잊어버리고 말았거나.

어느 쪽이건, 마스터라는 녀석의 노림수는 분명했다. 에블리를 이용해 마지막 공격을 가할 속셈이었던 모양.

“황금에 취해 사람이나 잡는 잡것들이 약속의 고귀함을 알 리가 없지.”

시엔이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너, 무슨 짓을!”

“너희가 약속을 어겼으니, 너희에게 베풀 자비는 이제 없다.”

“젠장, 후퇴한다!”

푸른 장미들이 즉시 몸을 돌렸다.

철석같이 믿고 있던 발화가 실패했다. 숲에는 이미 티란디스의 병력이 잔뜩이리라. 그렇다면 빠른 후퇴가 정답이었다.

그러나 푸른 장미를 맞이한 것은 병력이 아니었다.

드드드. 땅이 진동했다. 파사사사 나무가 떨려 낙엽이 흩날렸다.

검은 벽이 솟아올랐다.

벽이 아니라 뼈다. 거대한 짐승의 머리뼈.

숨구멍이 하늘 높이 치솟으며,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며 치솟았다. 용의 해골이었다.

딱.

용의 머리가 입을 다물었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이빨들이 저 높은 곳에서 서로 맞물렸다.

하늘을 바라보는 용의 머리뼈가 지상 위에 솟았다. 마스터를 비롯한 푸른 장미들이 그 안에 갇혔다.

“젠장, 퇴로를 확보해. 부숴!”

깡깡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용의 뼈를 부수려면 어지간한 날붙이로는 어림도 없다. 특히나 두개골은 개중에서도 가장 단단한 것이 아니던가.

특수한 금속을 쓰더라도 거대 해머 정도나 되어야 겨우 박살을 낼 수 있을 터.

땅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용의 양 팔뼈가 솟았다. 제 두개골을 향한 팔들이 손뼈를 뻗어 하나는 제 숨구멍을, 하나는 제 눈구멍을 틀어막았다.

푸른 장미들이 완벽하게 용의 아가리에 갇히고 말았다. 눈구멍과 숨구멍이 막히고 나자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이 전부. 사위가 밤처럼 어두웠다.

그 속에서, 시엔의 목소리만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신뢰를 모르고 약속을 저버렸으니, 이제 너희는 너희 스스로 제 살길을 찾아야 해. 사람이 물과 양식이 없으면 얼마나 사는지 아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닫힌 공간에 울려 퍼졌다.

-보름 후에 돌아와 산 자에겐 삶을 베풀겠어. 너희의 피로 갈증을 채우고, 너희의 살로 허기를 채워 봐. 그러면 한 명쯤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서로를 잡아먹어서라도 살아남으라는 뜻이었다. 시엔의 말이 이어졌다.

-아. 그런데 내가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은 없다? 너희가 먼저 약속을 어겼으니 나 또한 그리한들 할 말은 없잖아. 보름 후에 내가 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살아남은 이에게 삶을 베풀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러니 그동안 사이좋게 잘 지내봐.

* * *

푸른 장미의 인질 교환 대금은 실제로 금화 오만 개 값어치를 했다.

이만한 미끼를 던져 암살을 성공시키려 했으니, 불패의 신화를 지키기 위한 금액이라 치면 당연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았겠는가.

특히 마음에 드는 점은, 부피를 줄이기 위해서인지 귀한 보석이 잔뜩이었다는 점이었다.

시엔이 지금 들여다보는 물건처럼.

선연한 핏빛의 보석이었다.

그러나 높이 들어 햇빛을 받으니 그 붉음이 거짓말처럼 물러나고 새싹 같은 연둣빛이 슬며시 비쳐나왔다.

금록석.

그늘진 연녹색의 광택과 선명한 핏빛이 공존하여 빛에 따라 교차하는 신비한 보석이었다.

게다가 원체 나오질 않는 녀석이라, 대륙에서 가장 희귀한 축에 속하는 보물이었다.

게다가 중앙에 박힌 노오란 문양까지.

일부 보석들에게 나타나는 문양으로, 이러한 문양이 붙으면 그 총칭을 묘안이라 불렀다. 보석 중에서도 드물게 나타나는 것이니 값이 오르는 것도 당연지사.

금록석에 묘안석이기까지 한 물건이 붙었으니 세상 가장 귀한 보석 중 하나이리라.

감정서에 따르면 이것 하나가 금화 일만 이천 개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 귀물의 이름이 용의 눈이었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을 가진 생물 중 가장 귀한 것이 용이니 그러한 이름이 붙더라도 신기한 것은 아니다.

“용의 눈이라. 불경하기 짝이 없어. 하여간 인간들의 미적 감각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단 말야.”

시엔의 품속, 파린이 툴툴거렸다.

그러면서도 용의 눈에 시선을 떼지 않으니 파린 역시 대단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시엔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맞는 말이네. 이런 귀물이 용의 눈이라니. 그 값에 비하면 이름이 너무 싸구려야.”

“뭐?”

“쓸 데도 없는 용의 눈알보다야 이 보석이 훨씬 낫지. 안 그래?”

“이익! 세상 가장 고귀한 생명의 눈이야. 그런 돌덩어리 따위에 붙이는 건 말도 안 돼.”

“뭐, 그래. 그렇다 치자.”

시엔이 파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큭. 파린이 분한 소리를 냈지만, 결국 별말 없이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용의 눈엔 이미 악령이 자리를 잡았다.

버닝 신. 악의로 불타는 화염이 새 보금자리가 마음에 드는 양 새하얀 화염을 내뿜었다.

그리고 귀한 보석이 하나 더.

시엔이 다른 귀물을 집어 들었다.

흑보석이라고도 불리는 블랙 사파이어였다.

검은 보석이라 대개는 흑요석과 혼동되지만, 블랙 사파이어의 광채는 흑요석과는 완전히 다른 빛깔을 띠었다.

다만 블랙 사파이어 자체가 애초에 그다지 값어치가 높은 물건은 아니었다. 검은 것이란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으니.

그러나 성채가 붙으면 이야기가 달랐다.

일부 보석류에는 별빛의 균열이 들어차 찬란히 빛나곤 했다. 이를 성채라 하고 성채가 깃든 보석을 성채석이라 불렀다.

블랙 사파이어의 검은빛은 흑요석과는 달리 요요로운 광택이 흐른다. 그 위에 커다란 별이 찍혀 자체로 빛을 내뿜었다. 성채가 이리도 고르면서도 절제된 형상을 띄고 있으니 존재 자체가 기적인 보물이었다.

이 보석의 이름은 희망. 가장 어두운 밤 홀로 빛나는 찬란한 별을 뜻함이었다.

감정서에 따르면 경매가가 금화 만 팔천 개에 달했다.

희망 속에 자리 잡은 것이 해피 드리머였다. 절망을 노래하며 사람을 죽이는 악령이 희망에 깃들어 있으니.

참으로 마음에 드는 선택이었다.

시엔이 흐뭇한 표정으로 보석을 바라보자, 파린이 결국 한 마디 툭 던졌다.

“악취미야.”

“이젠 내 건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

“귀한 것을 다 망치고 있잖아.”

악령이 깃든 보석은 한층 아름답다.

음울한 검은 광채가 스며드니, 보석의 아름다움을 한층 배가시켰다. 보석은 사람을 홀리는 것이라, 거기에 사기를 더하여 사람이 눈을 뗄 수 없으리라.

그러나 악령이 깃든 사령석이란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기를 잃어버리는 끔찍한 물건이었다. 악령의 주인이 아니라면 그럴 수밖에.

“요즘은 또 안 그럴걸?”

흑마법이 지워졌으니 이제는 사령석이 무엇인지 아는 이도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러니 사령석이 세상에 나가면 묘안이나 성채처럼 새로운 수식이 붙어 더욱 값진 것으로 취급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할 말이 없어진 파린이 결국 말을 돌렸다.

“됐으니까 손 멈추지 마. 계속 쓰다듬어.”

“이건 뭐. 개도 아니고.”

“개는 안 물어도 용은 무는 수가 있거든?”

“거야 뭐. 무는 개는 때려잡지만, 무는 용에게는 그럴 수가 없잖아?”

“칫.”

그러면서도 어린 용이 쓰다듬는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용의 보호자가 가진 의무란 반절 이상이 머리를 쓰다듬는 일이 아닐까.

그러면 용을 보호하는 것과 개를 기르는 것이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밥 주고 간식 주고 산책시키고 쓰다듬고.

영리한 개는 주인의 말을 용케 알아들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용이나 개나 다른 점이 없는 것 같다.

그때였다. 집무실에 찾아온 하인이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누구인데?”

“장미 셋이라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올려보내.”

얼마 지나지 않아 좌우로 유난히 널찍한 사내가 집무실에 들어섰다. 시엔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장미 셋?”

“그, 그렇습니다. 에블리는, 에블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무사합니까?”

“실제로 보니 인상이 완전히 다르네.”

“뚱보.”

“어허. 그런 말 하면 못 써.”

“뚱보를 뚱보라 하는 게 뭐 어때?”

시엔이 한숨을 푹 쉬었다.

“초면에 미안하게 되었네. 조금 정신 나간 아이라 생각해도 좋아.”

“괜찮습니다. 그보다 에블리는.”

자울이 급히 물었다.

시엔이 대답했다.

“간식을 사러 나갔어. 곧 돌아오겠네.”

“예?”

자울이 눈을 꿈벅거렸다.

뭘 사러 나가?

송수신기로부터 푸른 장미가 배반하여 거래가 무산되었다는 전언을 들었을 때는, 눈앞이 깜깜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오늘까지도 딸이 무슨 고초를 겪고 있을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지 않았던가.

그런데 간식을 사러 나갔다니?

“아비가 올 거라 했더니 슈가 밤을 유난히 좋아한다 준비하고 싶다 하길래. 슈가 밤의 매력을 알다니. 확실히 미식이 뭔지 잘 알고 있네.”

시엔 역시 단 것이라면 눈을 빛냈다.

다만 슈가 밤은 이름 그대로 단맛의 폭탄과 같았다. 아무리 단 것을 좋아하는 이라도 과하다 하여 찾는 이는 정작 많지 않았다.

시엔은 참 좋아했다.

“자. 사담은 이쯤하고. 푸른 장미가 거래를 망치긴 했지만, 자울. 네 본의가 아닌 건 알아. 그러니 네 개인과 나 사이의 거래는 아직 유효하다 할 수 있겠지.”

“저, 그러한 말씀은.”

“조건은 같아. 금화 오만 개에 네 딸과 교환하지.”

자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푸른 장미는 지불할 능력이 있었지만, 자울 개인에게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당연히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그, 오만 개는.”

“왜? 안 돼? 그럼 어쩔 수 없고.”

자울이 납작 엎드렸다.

“제발, 도련님.”

“흠.”

시엔이 생각하는 척을 했다.

이내 선심 쓰듯 이야기를 꺼냈다.

“금화 오만 개 어치 노동으로 대신할 수도 있어. 보아하니 대단한 걸 만들어냈던데. 겨우 암살단 따위가 운용하기엔 과분한 마도구야.”

“그 말씀은.”

“네 발명을 존중해. 충분히 대가로 불릴 자격이 있어. 한 학파의 명사를 가문의 마법사로 들이려면 한 달 봉급은 얼마나 줘야 할까? 금화 110개 정도면 될까?”

자울이 눈을 굴렸다.

시엔의 저의를 모르겠는 까닭이었다.

“금화 열 개는 생활비로 쓴다 치고, 나머지 백 개를 네 빚에서 변제하면, 대충 42년 정도 일하면 오만 개를 채우겠네.”

딸을 돌려받고 싶거든, 결국 후작가에서 일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자울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좋아. 연구실이 들어설 자리는 봐 두었으니, 설비 및 마도구 제작에 있어서 필요한 예산은 재무관에게 제출하도록 해. 일단은 송수신기의 생산을 부탁할게.”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시엔 님, 저예요. 밝은 목소리가 시엔을 찾았다. 문이 열리고 에블리가 총총 경쾌한 발걸음으로 집무실에 들어왔다.

“앗, 아빠!”

“에블리야!”

부녀가 서로를 끌어안았다.

감동적인 상봉이라기엔 부녀의 과거가 너무 화려하긴 했다. 저 둘로 말미암아 일어난 슬픔이 도대체 얼마만큼이랴.

“아. 맞다. 나 이제 에블리 아니에요.”

“그럼?”

에블리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비요. 나비.”

< 28. 가시가 날카로워도 상처는 깊을 수 없는 법 [6]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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