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신부는 안녕하십니까? [2] >
부르도 왕국은 소국은 아니나 대국도 아니었다. 빈국도 아니며 부국도 아닌 그런 어중간한 왕국 중 하나였다.
자원이 나질 않는 땅이나, 대신 국토 대부분에 평야를 끼어 농업 생산력만큼은 대단히 높았다.
어쨌거나 먹을 것이 풍부하면 중간은 가는 법이었다.
국명과 같은 부르도 산이 영토 중앙에 자리 잡았다. 부르도 산은 일곱 개 강의 수원지이기도 했다.
물이 샘솟아 사방으로 흘러내리니, 가뭄의 여파에서 그나마 멀쩡한 모양이었다.
그와 별개로 부르도 국왕의 호색이 유명하다고. 후처가 서른 명에 이른다나.
마침 페벨룬에 가뭄이 들었다. 왕실에서 독특한 미인으로 소문난 세필리아 공주를 팔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독특한 미인이라.
세상에서 가장 사나운 얼굴의 미인을 좋게 표현한 말이었다.
세필리아가 제대로 인상을 쓰면 그 담대한 시엔마저 가슴이 철렁하고 오싹한 기분이 들 지경이 아니었던가.
시엔이 생각하기에, 그 늙은 부르도 국왕이 세필리아 공주의 그 강렬한 눈빛을 맞이해 쓰러지지나 않을까 걱정해야 할 상황인 것 같지만.
“왕실의 도발이네.”
“세필리아 공주가 스스로 부르도 행을 결정했다 하더라. 굶주린 백성을 위해 스스로 나섰다는 그런 그림이야.”
“흠.”
세필리아가 공공연한 비밀 같은 것으로 시엔의 연인이 아니던가.
시엔은 이제 사랑하는 정인이 이웃 왕국에 첩으로 팔려가게 된 상황에 처한 것이었다.
시엔과 세필리아처럼 공식적인 발표는 없으나, 이미 세상 사람들이 이미 연인으로 여기는 경우는 사실 드물지 않았다.
그러니 그런 연인을 두고 양 가문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가문도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다. 당연한 예의였다.
왕실의 처사는 말 그대로 티란디스를 완전히 무시한 셈이었다.
게다가 그뿐만 아니었다.
“신부행이 영지를 지난다고 하더라.”
“부르도라면, 그게 맞긴 하지.”
부르도 왕국이 서쪽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세필리아의 신부행이 티란디스를 가로지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연인을 떠나보내는 것도 서러운데, 그 신부행이 영지를 가로지르다니.
누가 보아도 잔혹한 처사이리라.
로우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왕실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영리한 수작이지.”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어떻게 하냐니? 이미 성사된 혼인에 내가 끼어들어 신부를 납치라도 할까? 그것도 왕실과 왕실 간의 혼인인데?”
그러자 로우드가 진지한 표정을 했다.
“시엔. 나는 비설 양을 알고 나서, 삶에 진정한 즐거움이 뭔지 알았다. 어차피 왕실에 반기를 들 예정이라면, 이번엔 네 뜻대로 해도 나는 그 편을 지지하겠어.”
“세피를 빼돌리자고? 제정신이야? 대규모 식량 원조가 무산되면, 기껏 만들어 놓은 민심이 어디를 향할 것 같아?”
“티란디스의 영민은 굶지 않으니까. 게다가 어느 쪽이라도 왕실이 이득을 보긴 마찬가지고.”
어쩐지 평소와는 정반대의 입장이었다.
본래라면 시엔이 왕실에 반발하려 들고 로우드가 만류했을 터. 그러나 지금은 로우드가 먼저 막 나가자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로우드의 말이 맞았다.
어느 쪽이건 왕실로선 이득이었다.
시엔이 세피를 떠나게 놔둔다면, 왕실은 대규모 원조를 받아 민심을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어차피 알린 왕비의 소생인 세필리아야 국왕으로선 어차피 멀리 치워 버려야 할 대상이었다. 어차피 치워야 할 패를 때를 잘 맞아 비싸게 팔 수 있다면 그만 한 이득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와 반대로 시엔이 세필리아를 가로챈다면, 그건 그것대로 왕실이 바라는 일이었다.
현재 들끓는 민심의 화살을 시엔에게 돌릴 수 있을 테고. 무엇보다 반역이라는 훌륭한 명분을 세울 수 있으리라.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네.”
“시엔!”
로우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시엔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일단 세피 본인의 의사부터 물어보는 게 먼저 아니겠어? 세피의 신부행이 도착하면 그때 물어보자고. 가겠다 하면 가는 거고, 여기 남겠다 하면 남는 거지.”
* * *
원래 왕실 간의 혼사란 오랜 시일을 두고 진행되는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귀족들도 혼인이라 하면 짧아도 한 계절은 건너 그 일정을 잡고 준비하지 않는가.
하물며 두 왕실이 함께하는 행사이니 기본이 반년이오, 길면 내년 내후년 이후를 잡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세필리아 공주가 정혼이 발표되자마자 일주일 만에 신부행이 결정된 것은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사실상 신부행에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면, 페벨룬의 하객은 준비할 시간은커녕 참석하기조차 어려운 판이었다.
왕족의 모든 행사는 명분이 필요했다.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하루라도 빠른 원조를 받아내기 위한 것이라나.
사실 웃기는 소리였다.
어차피 왕실 간에 약속이라면 함부로 파기할 수 없는 준엄한 것이었다. 그러니 혼전에 원조를 먼저 받는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이 없는데, 그를 빌미로 혼인을 서두르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명분이란 말이 되기만 하면, 그 이후로는 계속해서 우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지금까지 시엔이 그러했듯이.
시엔이 요새에 서서 다가오는 왕실의 마차를 바라보았다.
일렬로 선 기사들이 예장용 갑옷을 번쩍이고, 좌우로 군대가 정연히 도열했다.
왕가의 행차다.
그 호위의 인수인계는 당연히 해야 할 예식이었다.
“부대애, 반속 전진!”
“반속 전진!”
마차가 가까이에 도달해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마침내 티란디스군의 앞에 이르렀다.
“부대, 정지!”
“정지!”
그 후로야 예식대로 진행되었다.
인수군이 예를 표하면 인계군이 그에 화답했다. 그리고 대표자, 시엔이 나서서 상대방 대표에게서 왕실의 깃발을 넘겨받을 차례였다.
티란디스와 동쪽 경계를 마주한 다나타난 영지의 영주, 올랭 다나타난 자작이 직접 깃발을 내밀었다.
다나타난 가문은 오랫동안 티란디스의 가신 가문이었으니, 자작의 얼굴이야 이미 익히 아는 사이였다.
그 깡마른 자작이 깃발을 넘겨주면서도 그 얼굴에 측은함이 가득했다. 표정 뿐만 아니라, 결국 입을 열어 한 마디 하고 말았다.
“힘을 내시게. 대공자.”
“……감사합니다.”
딱히 할 말이 없어 감사하다 하고 말았다.
사실 세피와는 진짜 연인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아는 사이보다는 친하니 친구라고 부를 정도는 되겠지만.
그러한 입장에서 안쓰럽다는 시선을 받는 일이란 아무래도 어색하고 민망한 일이었다.
시엔이 그렇게 신부행을 인계받았다.
신부행의 신부는 함부로 사내와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관습이 있었다. 덕분에 중간에 들르는 두 개 도시에서 하루씩 보내는 일정으로 마침내 체른노아에 도착하고서야, 비로소 세필리아와 얼굴을 보며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후작저로 모시겠습니다. 공주님.”
“좋아요. 앞장서도록 하세요.”
그러나 그뿐이었다.
왕가친위대가 해체되고 새로 편성된 왕실 근위기사들이 무장 호위로 붙어 세필리아의 객실을 지켰다.
시엔이 세필리아의 의사를 물어야 할 필요가 있었음으로, 결국 단둘이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했다.
시엔이 요청했다.
“공주님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죄송합니다. 관례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특히나 대공자님께 접근을 금하라 특명이 있었습니다. 공주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물러나 주시지요.”
근위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맞는 말이기는 했다. 공공연한 연인 사이로 알려졌으니, 둘이 독대하여 부정한 소문이 돌기 십상이었다.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하긴요. 오히려 제가 죄송하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라. 경께서야 말로 이해를 못 하신 모양입니다만. 제가 미리 죄송하다 말씀드렸는데요.”
“예?”
복도의 양단에서 척척척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른쪽에선 창공 기사단장과 기사들이, 왼쪽에선 카레네를 선두로 기사들이 날이 선 장검을 뽑은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가 바로 후작성이었다.
후작성 안에서 그 주인이 하고자 하면 못 할 일이 무엇이 있으랴.
“제압해.”
이미 안전하다 판단하여 셔츠 차림에 간단히 장검이나 찬 근위기사들이었다. 그에 반해 창공 기사단은 이미 중무장을 한 상태였다.
게다가 숫자에서도 절대적인 차이가 있었으니.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았다.
간단히 제압된 근위 기사가 언성을 높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실례는 사과드리죠.”
“공주님의 명예를 생각하십시오!”
“그렇다면 내 기사와 누이가 함께 공주님을 뵙겠습니다. 그럼 괜찮겠지요?”
“이건 반역입니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경께서도 제 사정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근위기사가 멈칫했다.
시엔이 묶인 근위기사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곤, 이내 방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뾰족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대공자, 이게 무슨 짓이죠?”
“잠깐 대화나 할까 해서 말입니다.”
“그래도 이런 식이면 되겠어요?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저라고 이렇게까지 하고 싶었겠습니까? 중요한 이야기라 그렇습니다만.”
“흥. 어디 들어나 보죠.”
“시녀분들은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시녀들이 머뭇거리며 한 편을 바라보았다.
카레네가 손에 쥔 장검을 향해서였다.
붉은 리본은 귀족가 출신 시녀의 상징이었다. 평범한 영애가 검날 앞에 설 일이 없으니, 이내 새파랗게 질려 자리를 뜨고 말았다.
“그래서, 그 중요한 이야기는 뭐죠?”
“이 상황에서 굳이 뭐 다른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 웃겨.”
세필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대공자가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내 발로 스스로 부르도로 향하는 거예요. 내가 말하지 않았나요? 내 취향에 대해서.”
“무능한 남자 말씀이십니까?”
“그럼 뭐 내가 더 설명할 게 있나요? 부르도 국왕이야 여색이나 탐하는 노망난 늙은이지. 나는 당당히 부르도의 왕실을 장악할 계획이에요.”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만.”
“내가 누구 딸인지 모르겠어요?”
알린 왕비가 페벨룬에 사실상 유폐된 것으로 쫓겨났으나, 이후 1왕비로 국정을 움켜쥐지 않았던가.
시엔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마마께서 지금 상황이 그리 썩 좋지는 않으십니다만.”
“대공자는 아직도 내 어머니가 어떤 위인인지 모르나 봐. 지금쯤 포기한 척 온순한 모습을 하고 계시겠지만, 속으로는 빈틈을 봐 탈출해 타스테스테를 끌어들일 생각을 하고 있을 걸요?”
“설마. 외세까지 끌어들이려 하시겠습니까.”
“설마는 무슨. 내 장담해요. 그러고도 남을 분이시지.”
세필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확실히 왕비가 그럴 생각이었다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제 어머니가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판단하고 있는 셈이었다.
시엔이 키득거리자, 세필리아가 고리눈을 떴다. 원래 사나운 얼굴이 한층 더 사나워지는 진귀한 광경이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죠?”
“실은 왕비 마마를 이미 뵈었습니다. 마마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어머니를 뵈었다구요? 어떻게…….”
“원래 유능하면 다 되는 법입니다.”
“하. 진짜 사람이 알면 알수록 별로야, 진짜. 그나저나 어머니께서 정말로 그러세요? 정말로 타스테스테를 끌어들이시겠다고?”
“공주님께서 장담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여간 독하시다니까.”
세필리아가 혀를 찼다.
“어쩐지. 그래서 뻗대고 있었어요? 어머니께서 타스테스테를 끌어들이고, 그때 나서서 어머니께 붙기로 약속했나요?”
“뭐. 대충 비슷하다 해야 하나.”
“어쨌거나, 대공자가 뭘 물어보려는지는 내 알겠어요. 내가 팔려간다 우는 소리라도 할까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필요 없어요. 나는 내 나름대로 내 삶을 헤쳐 나갈 생각이니까.”
“티란디스가 보호해 드릴 수 있습니다만.”
“하. 웃겨.”
세필리아가 시엔을 노려보았다.
시엔이 움찔했다. 하여간 적응이 안 되는 얼굴이었다.
“티란디스가 보호할 여력이 있기는 해요? 지금까지야 어떻게 민심에 명예 성자를 앞세워서 명분을 차단했으니 이렇게 버텨온 거지.”
“말씀만 하시면 되겠습니다만.”
“날 빼돌리면 그땐 반역이에요. 그걸 감당할 수 있겠어요? 아니. 못 하지. 그러니 대공자는 대공자 알아서 할 일 하시고, 나는 나대로 알아서. 살 길을. 으읏. 찾겠어요.”
세필리아의 목소리가 점차 잠겨들었다. 말미에 있어선 그 소리가 축축하니 물기가 가득했다.
사납게 부릅뜬 눈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힘주어 악문 입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억지로 참아내는 중이었다.
하기사. 아직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예순이 넘은, 그것도 호색한으로 유명한 늙은이에게, 그것도 아예 연고 하나 없는 타국으로 팔려가고 싶을 리가 있을까.
그러니 보호를 요청하고 싶다. 하지만 뻔히 보이는 파멸을 알면서도 그러지는 않겠다는 의지였다.
시엔이 미소를 지었다.
세필리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지금 누구는 속이 터져 죽겠는데 싱글벙글 웃고 있으니 한층 서러워진 까닭이었다.
“뭐, 뭐에. 윽.”
대차게 쏘아붙이고 싶은데 더 입을 열었다간 통곡을 할 것 같았다. 세필리아가 입을 아예 다물었다.
그러자 시엔이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하나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었습니다만. 델피르 전하께서 영지에 계십니다. 마마께서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때를 기다리시는 중이나, 이제 슬슬 때가 되었군요.”
반역을 감당할 수 없기는커녕, 아예 반역을 준비 중이라는 뜻이었다.
때가 되었다 하니 지금이라도 들고 일어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다는 뜻이었고.
세필리아의 안색이 본래 색을 되찾았다.
찰랑찰랑 넘치기 직전까지 차올랐던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어 지워내며 태연히 중얼거렸다.
“아. 요즘 날이 건조해서 그런지 이유 없이 눈물이 나온다니까.”
“뭐. 그런 체질이 있긴 합니다만.”
시엔이 대답하자, 세필리아가 눈을 흘겼다.
“됐고. 시엔. 지금 뭐 하고 있어요?”
호칭이 대공자에서 시엔으로 되돌아왔다.
시엔이 턱을 쓰다듬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저 밖에 감히 일국의 공주를 팔아넘기려는 무도한 작자들이 있는데, 영지에서 추방해 날 보호하지 않고.”
“세피의 뜻이라면야.”
세필리아가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알아들었으면 뭐 해요? 당장 안 움직이고.”
< 당신의 신부는 안녕하십니까?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