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97화 (97/268)

< 20. 다시 봄, 춘풍 부는 계절에 [8] >

불이 피어올라 수렁뱅이를 집어삼켰다.

수렁뱅이가 바닥을 뒹굴었다. 그 전신에 뻗은 촉수가 요동쳤다. 그러나 악령의 불길이 독하니 꺼지지 않고 연신 타올랐다.

마침내 수렁뱅이의 숨이 끊어졌다.

베른닐이 킁킁거리며 말했다.

“이 녀석은 사과향이군요.”

완전히 미쳐버린 수렁뱅이에게선 저마다 다른 냄새가 났다. 과일이나 빵, 잘 마른 빨래 특유의 냄새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넓어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시엔이 바짝 구워진 잔해를 내려다보았다.

“점점 기괴해지네.”

“징그럽기 짝이 없는 놈들입니다.”

베른닐이 허공에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검신에 묻은 수렁뱅이의 체액을 터는 것이었다.

체액마저도 제각기 색이 달라, 노랗고 파랗고 초록색의 체액들이 튀어 벽면에 무수한 점을 찍었다.

핸슨이 말한, 미쳐버린 수렁뱅이들이었다.

제국수도의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미쳐버린 수렁뱅이가 일그러져, 이제는 팔다리마저 제멋대로였다.

트리예가 아직 미련을 못 버린 듯, 시체를 갈라 헤집으며 말했다.

“이상하네요. 개체적인 통일 요소가 없답니다. 오염이라 하셨지요? 정말로 제국이, 아니 사람의 손으로 발명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답니다.”

“설계적 특징이 없으니까.”

“예. 바로 그거에요.”

무언가를 만듦에 있어 설계가 있고, 완성품이 아무리 독특해지더라도 결국 그 기본은 설계에 있는 법이었다.

부정 세계의 마물이 기괴하고 뒤틀려있다 해도, 결국 종마다 같은 특징을 가졌으니 하나로 묶어 정의할 수 있지 않은가.

그에 비하면 미쳐버린 수렁뱅이들은 전부 제각각이었다.

내부 장기마저도 어떤 것은 품고 어떤 것은 품지 않았다. 냄새가 다르고 체액의 점도와 색상마저 다르니 사실 전부 다른 종이라 불러야 할 것들.

“흠. 발명이 아니라 발견일 수도 있겠지.”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발명이라 하고, 이미 존재하는 것을 눈치채는 것이 발견이었다.

“발견이라 하시면.”

“요근래 몇 가지. 흠. 그렇지. 트리예, 바깥 것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바깥 것이요?”

트리예가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보석이되 보석 아닌 것들을 본 적은 없고?”

“보석이되 보석 아닌 것이라. 수수께끼인가요? 소녀는 수수께끼에는 약한 편인지라······”

“아니. 이런 걸 본 적이 있는지 묻는 거야.”

시엔이 반지 하나를 내미니, 사파이어와 닮은 푸른 보석이 박혔다. 트리예가 받아들어 이리저리 살펴보곤 낮은 신음을 흘렸다.

“사파이어도 아니고, 블루 토파즈도 아닌데. 이게 어떤 보석인가요?”

“보석이 아니니까. 영혼의 봉인석으로 사용 가능한 촉매라는 것 정도는 알겠지만.”

“혹시 소녀가 가져 연구해봐도 될까요?”

트리예가 눈을 빛냈다.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시엔 님. 어떻게 허락해주시면 안 될까요?”

원래 말 한 마디라도 토 다는 일 없이 순종하던 트리예였다. 웬일로 어울리지 않는 애교까지 부려가며 욕심을 냈다.

그런데 트리예의 전공 분야와는 전혀 관련 없는 물건 아닌가? 왜 이리 욕심을 내지? “위험해서 안 돼. 가진 것만으로도 정신 세계에 간섭하는 물건이야.”

다른 물건이라면 못 줄 것도 아니나, 이미 한번 큰 일이 터진 전적이 있지 않던가.

시엔이 고개를 젓자, 트리예가 그제야 반지를 돌려주었다.

그러면서도 아쉬운 눈빛이 역력하니 정말로 연구해보고 싶은 마음이 컷던 모양이었다.

“어지간하면 맡기겠는데, 저게 한번 크게 사고를 친 전력이 있기도 하고.”

시엔이 세올을 가리키자, 트리예의 표정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흉흉한 표정으로 세올을 바라보며 이를 악문 목소리를 냈다.

“선배 때문에 내 반지가.”

“그게, 이 세올의 고의는 아니었는데······.”

그 기세에 세올이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가 아니라, 너, 눈빛이 그게 뭐야? 감히 이 세올에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배가 우습게 보여?”

“칫.”

“어머머머, 선, 도련님, 얘 좀 보세요! 위아래가 지엄한 법인데 하늘 같은 선배님에게 지금 이렇게 불손하게······”

“닭날개를 탄 여름귤!”

세올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던 와중이었다.

이상한 외침이 말을 끊으니 일행이 바로 전투를 준비했다.

미친 수렁뱅이가 내는 소리였다. 미쳐버린 까닭일까. 인간의 언어를 내뱉으나 어떤 뜻도 담지 못한 그저 공허한 소음에 불과했다.

“틀니 먹고 주춧돌에 망아지!”

눈앞에 돌연 한 떼의 미친 수렁뱅이들이 나타나니, 왜곡을 타고 공간을 뛰어넘은 기습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미친 수렁뱅이란 기괴하고 이상한 것들일 뿐, 일행에게 위험하진 못했다.

원한 깃든 불이 피어오르고, 그림자가 창날이 되어 솟았다. 베른닐의 검이 연신 질척한 살을 가르고, 두 여인의 강신체가 손가락을 뻗어 뾰족한 끝에 꼬치처럼 꿰었다.

그렇게 몇 번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야, 마침내 중앙 통제실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엔이 잠시 서서 생각했다.

현시대를 사는 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연이리라.

“여기선 나 혼자 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만.”

“위험이라곤 조금도 없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냥 내가 따로 할 일이 있어서 그래.”

“뭐, 그러시다면야.”

베른닐이 순순히 물러섰다.

시엔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위험하다면 네 실력이 운운하며 떼어냈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위험이 없다 하면 정말로 없다는 뜻이니.

시엔이 중앙 통제실에 들어섰다.

중앙 통제실은 원형의 방으로, 얇고 굵은 선들이 복잡하게 얽혀 공간의 중심으로 향했다.

그 중심에 머리통만한 원구가 자리잡았다.

제국수도의 마력 공급 핵이었다.

시엔이 핵 위에 손을 올렸다.

눈에서 흑광이 번쩍이고, 음차원 에너지가 흐르자 핵으로부터 희뿌연 안개가 솟았다.

안개가 뭉쳐 인간의 형상을 취하니 허공에 떠 일행을 내려다보았다.

-제 13 수도지기 에스엘 달란단트입니다. 중앙에서 오셨습니까? 드디어 전쟁에서 승리한 모양이군요.

“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수도 점검을 실시하겠습니다.

안개, 에스엘이 눈을 감고 잠시 그대로 부유하다, 이내 입을 열어 말했다.

-왜곡률 32 저하. 오수도 순환 정지, 환기 장치 정지, 에스파-우드 곡률 12이하. 정수도 개변식 수문 정지. 아케인 에너지 공급 부족률 각각 83, 92. 97, 78. 현재 수도 내 상주인원 323명, 비규격 오염 개체 757기가 발견됩니다.

유령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잔뜩 당황한 표정을 뒤집어 쓴 이후였다.

-아니, 세상에. 거의 반파 수준이군요. 전쟁이 그리 격렬했습니까? 아주 난리통이로군요. 오염 개체가 득실하니, 연합군의 개새끼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인 모양입니다! 시엔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이제 복구 사업에 들어가시는 겁니까? 저도 드디어 전역이군요!

“어차피 눈 한 번 감았다 뜬 거 아냐? 드디어 까지 말 할 거리가 있나?”

-그래도 전역이 아닙니까. 아, 그나저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습니까? 전쟁이 길어질 수도 있다고 했는데, 5년 쯤 지났습니까?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에스엘의 반투명한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설마, 더 길어진 겁니까? 제가 얼마만에 깨어난 거지요? 설마 10년?

시엔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말을, 말을 해 주십시오, 관리관님!

“천 년.”

-예?

“아니다. 천 년 보다는 조금 짧나? 얼추 천 년 쯤 될 거야.”

-그게 무슨.

시엔이 유령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바로 제국이 그간의 마력을 공급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리치의 봉인구를 응용한 핵에 흑마법사의 영혼을 봉인해둔 것.

산 영혼이라 소모된 마력이 다시 모이니, 시설에 지속적인 마력을 공급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그,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농담이라?”

-아무리 관리관님이라 하셔도, 저 역시 군인의 신분입니다. 더 이상의 모욕은 참지 않겠습니다.

“거짓말이 아냐. 제국이 멸망한지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났으니.”

-재미없는 농담은 집어치우고······

“에스엘 달란단트라고 했나? 네 육신이 이미 썩어 흙으로 되돌아가고, 그에서 비롯한 생명을 먹은 인간이 또 죽어 땅에 묻히길 반복하는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딴 소리 들으려고 내가 자원한 게······.

“제국은 멸망했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것이 진실임을 내 심원에 맹세하지.”

심원에 대한 맹세. 마법사의 마력 근원에 건 맹세에 언어가 마력의 형태로 불어와 시엔의 머리를 헝클었다.

-심원에 맹세······.

“자. 나는 멀쩡하지. 이제 좀 믿을만 한가?”

-정말, 정말로 천 년이 지난 겁니까?

“천 년보단 조금 짧은데, 얼추 그 쯤.”

-제 몸은, 하. 남아있을 리가 없지. 젠장. 연합군 놈들에게 결국 패배하고 말았단 말인가.

“연합군? 아아. 왕국이 연합하여 약해진 제국을 공격했다고 했지. 끝내 멸망했지만.”

-그렇군요.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군요.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 전에.

에스엘은 혼란스런 표정이었다.

마력 핵은 리치와는 다른 방식의 봉인구였다. 깃든 이의 정신이 잠들어 의식이 없다.

그가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시술에 들어가며 눈을 감았을 터, 다시 떴을 때에 별안간 천 년이 지났다고 하면 그 기분이 어떠하랴.

-젠장, 빌어먹을. 그 악마 놈만 아니었다면.

“악마?”

-제국의 반을 불태운 그 악마 자식 말입니다! 역사엔 뭐라고 기록되었죠? 인세에 다시 없을 끔찍한 개자식 같으니!

“역사엔 기록되지 않았어. 왕국은 너무 두려운 나머지, 아예 지워 잊어버리는 편을 선택했거든.”

-하.

에스엘이 기가 차다는 듯 헛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잠시. 금방 낯이 변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것도 잘 된 일이군요. 그 자식처럼 강대한 힘을 가지고, 역사에 미치지 못하고 지워졌다면 그것도 잘 된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나?”

-뭐. 절 깨웠다면 당신 역시 흑마법사겠군요. 음? 그럼 내 후배 아니냐?

“흠.”

-하긴. 천 년이나 지났으면 선배라고 주장하기도 뭐하겠네. 혹시 리치 쪽을 전공한 친구가 있으면 좀 소개시켜 줄 수 있겠어? 이왕 이렇게 된 거, 천년 후의 세상이나 구경하다 죽어야겠는데.

꽤 낙천적인 청년이었다.

천 년이 지났다면 제 아는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닌가. 그런데도 리치로 자유를 얻어 세상이나 둘러보겠다니.

시엔이 미소를 머금었다. “왕국은 불타 사라져 남은 이는 하나요, 그 외엔 풀 한 포기조차 남지 못했다.”

-응?

“그리하여 살아남은 하나가 맹세하기를, 남은 이의 권리로 제국의 모든 것을 해하여 남기지 않겠다 하였으니.”

시엔이 이를 드러냈다.

서슬 퍼런 웃음에 에스엘이 주춤 물러났다.

-잠깐, 왜 이래?

“시간이 흘러 전부 사라졌다 여겼거늘, 아직 여기에 잠든 이가 하나 남았구나. 참으로 기꺼운 일이지.”

시엔이 마력 공급 핵을 조작했다.

이미 여러 번 만져본 것이니 못 만질 것도 없었다. 마력 소모 금지 명령이 이렇게였던가?

희뿌연 형체 자체가 마력을 소모하는 것이니, 핵의 조작에 따라 에스엘의 형체가 차츰 투명하게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잠깐, 우리 말로, 말로 하자고. 왜 이러는거······

그걸로 끝이었다.

에스엘이 의식이 마력 공급 핵 속에 갇혔다.

남은 것은 음차원 에너지가 담긴 구슬이었다. 그것도 사용하더라도 천천히 다시 마력이 차오르는 그런 구슬.

마법을 부리는 데에 사용하는 것 중에 이러한 구형의 매개를 오브라고 했다.

마법 지팡이가 마력의 증폭에 그 효능이 있다면, 오브는 저장을 통해 마법 자체에 힘을 더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둘 모두 마법 효과의 극대화를 위한 것.

그러나 일정한 증폭 효과를 가진 지팡이와는 달리, 오브는 저장해 둔 마력의 조절을 통해 그 증폭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다만 미리미리 충전시켜둬야 하고, 충전해 놓더라도 긴 시간동안 유지가 되지 않았다.

번거로우니 선호도는 지팡이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그러나 그것도 보통의 오브에게나 통하는 말이었다. 알아서 충전되는 오브가 손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게다가 시설의 거대 단위 마법에 마력을 공급하는 핵이라, 그 저장량을 생각하면 보물 중에서도 보물이라 할 것이었다.

“오브는 별로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장갑 따위를 착용하지 않고 양손에 쥐어 쓰는 것이라, 영 운용이 불편하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흠결이었다.

그렇다고 손잡이를 달기도 애매하고,

“여차하면 망령 밥을 줘도 되겠고.”

천 년을 묵은 영혼이니, 의식이 없었다 해도 그 힘은 여간이 아니리라. 악령의 먹이로 주면 단숨에 격이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어느 쪽이든 이만큼 유용한 것이 얼마나 있으랴.

기분이 좋아진 시엔이 휘파람을 불며 중앙통제실을 나섰다.

< 20. 다시 봄, 춘풍 부는 계절에 [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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