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다시 봄, 춘풍 부는 계절에 [9] >
시엔이 되돌아오자, 두 시녀가 오브에 관심을 가졌다.
“도련님, 그건······.”
“흠. 제국 오브라고 해 둘까.”
“제국 오브요? 오브 치곤 꽤 크지 않나요?”
“명품 중 명품이거든.”
시엔이 오브를 세올에게 넘겨주었다.
오브를 들어 요모조모 살펴보던 세올이 이내 감탄을 토했다.
“햐, 세상에 이런 물건이. 용량이 무지막지한데요? 가만, 안에 뭐가 들었는데요.”
“세올 선배, 저도 좀 봐요.”
“얘. 잠깐 기다려봐. 위아래가 엄연한데 어디서. 으음. 영혼인가? 봉인식으로 억제한 영혼 같은데.”
“오브라기보단 봉인구에 가깝겠네요. 음차원 에너지를 꺼내 쓸 수 있나요?”
“음. 이렇게? 오오.”
세올의 등 뒤로 강신체가 모습을 드러내고, 큰 눈을 더 키웠다.
“순수하게 오브의 마력만으로 구동한 건데, 총량에 거의 변화가 없어. 이정도면 고위 흑마법사의 마력 총량과 거의 비슷한 수준인데.”
“그 정도의 저장량이 가능하다구요? 헤인스메달의 마질량비 법칙에 위배 되지 않나요?”
“선배님이 가져오신 물건이 보통 물건이겠어?”
“저도 좀 봐요.”
“아, 잠깐 기다려 보라니까.”
“흠.”
트리예가 세올의 손아귀에서 오브를 탁 챘다. 오브를 빼앗긴 세올이 눈을 부라렸다.
“야! 지금 하늘 같은 선배의 물건을 건드려도 되는 거야? 무슨 버르장머리가.”
“그러게 적당히 하셔야지요. 어머나, 세상에. 이리도 충만한 마력이라니. 뭘까요, 수정인가?”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저 둘은 그냥 저렇게 놔 두도록 하고.
“핸슨.”
“예, 예! 나으리.”
“더 이상의 미궁은 없어. 공간 왜곡이 곧 사라져버릴 테니, 내일이면 더는 벽을 뛰어넘어 이동하는 것도 불가능할 거야.”
“그, 그러면 저희는 어떡합니까! 병사들이 창칼을 앞세우는데, 그마저 불가능하다면.”
핸슨이 울상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백작의 군대가 제국수도를 헤집으며 닥치는 대로 수렁뱅이를 베어내고 있었다. 그간이야 왜곡을 이용한 이동으로 도망쳐 어찌저찌 살아남았지만, 그것이 불가하다 하면 당장 명줄이 위태로운 까닭이었다.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너희가 내 영민이 아닌데, 내게 물어봐야 대답해 줄 이유는 없지.”
“아이고, 나으리. 도와주십시오!”
“도와? 말했잖아. 수렁뱅이가 내게 속하지 않았다고. 게다가 사실 뭐, 너희가 굳이 필요하지도 않고. 그러니 너희에겐 두 가지 선택이 있지.”
“그, 그게 어떤 것입니까요?”
“하나는 백작에게 자비를 구하는 거지. 가서 무릎 꿇고 살려달라. 해로운 짓은 하지 않았다 해명하고 이대로 살게 놓아달라 빌 수가 있겠지.”
시엔이 턱을 쓰다듬었다.
“추천은 못 하겠네. 백작이 그리 자비로운 인물 같지는 않았으니. 게다가 수렁뱅이는 이미 한 번 도망친 것들이잖아?”
“그럼 어찌합니까요?”
“네가 원한다면, 통제실을 무너뜨려 줄 수도 있지. 길 안내를 해 준 값이라 치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요?”
“여길 무너뜨리면, 바깥세상과는 아예 접점이 사라지게 될 거야.”
정수로와 오수로가 한 지하에 복잡하게 얽혔으나, 결국 왜곡을 제하면 접점이 없었다.
식수를 제공하는 깨끗한 물과 오수가 섞여서는 큰 사단이 날 것이 뻔하니 어쩔 수 없는 설계라.
지금에 와서야 정수로에서 물을 공급받는 이가 없으니, 실상 지하수가 흘러 다시 지하수로 돌아가는 통로에 불과했다.
“그래도 좋은가? 살 수는 있겠지만, 그저 죽을 때까지 이 지하에 붙어있게 될 거야.”
“그렇게 해 주십시오. 지상에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습니다요.” 시엔이 씩 웃었다.
“좋아. 만 하루면 오수로와 정수로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질 거야. 네 동족에게 알려 대피하려면 꽤 열심히 뛰어야 할 테지.”
“그것은.”
“이제 볼일은 없어. 가.”
시엔이 손짓하자, 핸슨이 고개를 숙여보이곤 뒤돌아 달음박질을 쳤다.
애초에 세상의 순환에 속하지 않은 것이니, 그저 지하에 동떨어져 존재하다 그저 스러지리라.
바깥 것이라면 계속해서 바깥에 있는 것이 제일일 테니.
시엔이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도 이제 돌아가자. 볼 일 다 봤으니, 괜히 끼어들지 말고 빠져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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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텔테 백작은 시름이 두 배였다.
하나는 룬데엘의 난동 때문이고, 나머지는 수색을 돕겠다며 참여한 시엔 티란디스의 실종 때문이었다.
애초에 허락을 해 주는 게 아니었는데. 이제와 후회한들 어쩌겠느냐만은.
“젠장, 어떻게 해서든 찾아!”
“룬데엘 공자님과 시엔 공자님 중 어느 쪽을 말입니까?”
“둘 다!”
룬데엘 때문에 살사스 후작가와 틀어지게 생겼고, 시엔 때문에 티란디스 후작가와 문제가 생길 판이었다.
위아래로 두 제후 사이에 낀 야스텔테 가가 둘 모두에게 밉보였다간 미래가 없을 판이었다.
백작이 초초한 기색으로 수색을 이어나갔다.
“빌어먹을 괴물 놈들! 다 죽여! 지하에 이런 것들이 우글거리다니, 빌어먹을.”
“살려, 컥.”
애꿎은 수렁뱅이들이 죽어나갔다.
그러나 일부일 뿐, 대개는 등을 돌려 도망치니, 얼마 지나지 않아 홀연히 모습을 감춰 사라지니 쫒던 이들만 망연히 설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구구궁. 예사롭지 않은 떨림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져 올라왔다. 바닥이 떨리고 벽면과 천장이 하나로 떨렸다. 그 서슬에 오수가 튀고, 썩은 물이 요동쳐 악취가 한층 짙어졌다.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백작님, 피하셔야 합니다!”
“안 된다! 지금은 안 돼!”
백작이 고함을 질렀다.
지금은 안 될 일이었다. 적어도 하나는 찾아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남은 것은 몰락뿐이었다.
다행히 진동이 이내 잠잠해져 멎었다.
“수색을 재개하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급히 달려온 병사 가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백작님! 찾았답니다!”
“누구를?”
“시엔 티란디스 공자님입니다.”
“상태는 어떻지? 어디 다친 곳이라도 있다면, 아니지, 당장 신관을 붙여.”
“공자님과 그 일행 모두 다친 곳 없이 무사하십니다. 돌아가겠다 하시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백작이 한숨 돌렸다.
모진 생각이지만, 룬데엘보다는 시엔을 찾아내는 일이 급했다.
이미 사건이 벌어져 살사스 후작이 노했으니, 잘 해결이 된다 해도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다. 절반의 성공? 아니, 절반의 손해였다.
룬데엘의 헛짓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모두 잘 풀렸을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하지만 티란디스와는 아직 문제가 없으니, 더욱 크게 벌어질 일은 일단 막아낸 셈이었다.
“위험하니 모시고 나가도록.” “알겠습니다.”
“이제 룬데엘 놈만 찾으면 되겠군.”
백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새삼 울화가 치미는 탓이었다.
귀족가의 일원으로 태어났으니, 마땅히 천한 것들을 위에 군림하며 지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리가 바로 가문에서 나왔다.
그러니 마땅히 가문을 위해 삶을 바쳐야 하거늘.
원체 어리석어 영민이 굶주려 불쌍하니 세금을 낮추자 곡식을 풀자 하는 멍청한 소리나 하는 아들이었다.
원래 천것들이란 그렇게 살아야 귀족을 두려워하고 그 은혜를 갈구하며 따르는 법이건만.
룬데엘이 아둔한 것이야 알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가문의 전환점이 될지도 모르는 중요한 성사를 망쳐 버릴 줄이야.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가문의 은혜도 모르고 큰 화를 불러들여 보답하니 더는 아들이라 생각하기도 싫은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놈.”
백작이 이를 으득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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룬데엘의 수색은 사흘 동안 이어졌다.
왜곡이 끊어져 남은 것이 반쪽인 오수로일 뿐이라. 제아무리 넓다 해도 군대가 동원되었으니 모든 장소의 수색이 이루어진 것이다.
당연히도,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이미 제 아이를 품은 여인과 도주했으니 애먼 수로에서 발견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인과 함께 도망쳤을 겁니다. 요컨데 사랑의 도피라는 거지요.”
“확실한가요?”
“수렁뱅이가 그러더군요. 지상에 아예 미련이 없으니 나갈 이유가 없다고. 그런 이들이 어째서 여인을 납치하겠습니까?”
“수렁뱅이라. 그 치들이 거짓말은 한 건 아니구요?”
“아마 저택에 돈 될 만한 것들이 많이 사라졌을 겁니다. 내기를 해도 좋습니다.”
시엔의 말에, 세필리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결국, 언니만 불쌍하게 됐네. 개자식.”
그러자 세이리가 세필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세피, 나는 괜찮아.”
“괜찮긴 뭐가? 신랑이 성사 당일, 그것도 선서 중에 도망을 쳤는데. 언니도 매번 괜찮다고만 하는 거 아냐. 그러다 속이 다 썩지.”
“하아, 괜찮다니까. 얘는.”
세이리가 피곤한 미소를 지었다.
잃어 본 이가 잃은 이의 마음을 알리라. 그 속을 대충이나마 헤아린 시엔이 한 몫 거들었다.
“살사스 영애께선 정말로 괜찮으실 겁니다.”
“시엔?”
“처음부터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누구라도 상관없다 하셨지요. 그저 좋은 아비감이면 족하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지금 언니가.”
세필리아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원래 사나운 얼굴이 더욱 사나워지니, 그저 눈에 힘을 준 것만으로도 철천지 원수를 바라보는 양 매섭기 짝이 없다.
시엔이 말을 이었다.
“걱정은 그 정도만 하시라는 말입니다. 안 그래도 걱정은 충분히 받고 계실 테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살사스 영애?”
세이리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떤 표정에서도 공허함이 드러나던 얼굴에, 모처럼 다른 감정이 엿보였다. 통쾌함이나 후련함 비슷한 무언가였다.
“딱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언니.”
“나만 보면 다들 걱정들이라니까. 걱정해 주는 건 좋지만, 걱정받는 사람 입장도 생각해 주렴. 나는 괜찮은데.”
“괜찮지 않잖아.” 세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맞긴 해. 괜찮지 않지. 그이가 먼저 떠나고 나선 계속해서 괜찮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그건 괜찮아. 내가 괜찮고 싶지 않은 거니까. 그이의 빈자리가 정말로 괜찮아지는 건 내가 원치 않으니까.”
“언니.”
“그거랑 이건 별개. 야스텔테 영식과는 그저 얼굴 몇 번 본 사이인걸. 솔직히 낯선 이이나 마찬가지인데 떠난들 무어 문제겠어.”
세필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티란디스 영식께선 사려깊으시기도 하지. 좋은 아버지가 되시겠어요. 세피만 아니었어도.”
“정략이 필요하다 하면 굳이 피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기왕이면 제게 마음이 있는 여인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이런. 퇴짜맞았네요.”
세필리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아주 둘이 짝이 잘 맞네?”
“어머, 질투도 하니?”
“질투는 무슨 질투. 이참에 왕실에서 주선이라도 해 줄까?”
“세피 얼굴은 항상 무섭지만, 기분이 나쁠 때는 더 무서워. 농담이니 기분 풀렴.”
“누가 기분이 나쁘다고.”
“흠. 그래도 티란디스 영식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좀 아쉽기는 하네요.”
“무엇이 아쉽단 말씀이십니까?”
“야스텔테 영식께서 제 여인이 품은 아이 때문에 다 버리고 떠나셨잖아요? 분명 좋은 아버지가 되실 분이셨을 텐데.”
그런 식으로 사내를 고르는 것이 절대 현명한 일은 아니겠지만. 사랑할 이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이를 갖고 싶을 뿐이라니.
“하라엘은 어떻습니까?”
“대공자님 말씀이세요?”
“백작께선 이대로 혼약이 깨어지길 바라지 않을 테니까요. 룬데엘이 떠났으니 남은 자식은 한 명 뿐이지 않습니까?”
“잠깐, 시엔. 그는 대공자라구요. 언니가 그와 혼약을 맺게 되면, 차기 야스텔테 백작 부인이 되는 건데······.”
대공자의 짝이란 즉, 가문의 안주인이 된다는 뜻이었다. 시엔이 으쓱하며 되물었다.
“그게 무어 문제가 있습니까?”
이대로라면 야스텔테와 살사스가 크게 틀어지게 생겼다. 이를 어찌 대처해야할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하라엘의 짝이 아직 없으니 룬데엘을 대신하는 것.
가문의 안주인으로 모시겠다는데야, 딸사랑이 지극한 후작 입장에서야 더욱 잘 되었다 싶은 일이리라.
야스텔테는 안주인을 미끼로 끌어들일 동맹 카드 하나를 잃는 셈이지만, 적어도 제후급을 적으로 돌리는 것보단 나으리라.
“살사스 영애께선 어떠십니까?”
“대공자님이라. 뵈었는데 느낌으로는 꽤 냉막하신 분이라. 좋은 아버지가 되실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책임을 아는 사내였습니다. 기꺼이 남편과 아비의 책임을 다할 사내이나.”
시엔이 뒷말을 삼켰다.
스스로 책임을 아는 사람은, 같은 것을 타인에게도 요구하는 법이었다. 그는 성실한 남편이며 아비가 되겠지만, 아내와 자식의 책임을 역시 강요하리라.
생략된 말을 알아들은 세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책임한 아이로 키우고 싶진 않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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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좋은 날이었다.
하늘은 맑고, 새털 같은 구름떼가 뿔뿔이 하늘을 나니 아름답기 그지 없는 광경이라.
봄은 흐드러져 땅에선 온기가 솟아, 날이 따뜻하니 참으로 온화한 날씨였다.
그럼 봄중에 펼쳐진 드넓은 화원, 그리고 그 중앙에서 인간중 가장 성스러운 아이가 물었다.
“하라엘 야스텔테는 부인을 맞이하여 사랑하고 아껴줄 것을 천신께 맹세하시겠습니까?”
잠시 흡, 숨 들이키는 소리가 옅게 깔렸다.
하객들이 긴장하여 내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예, 맹세합니다.” 신랑의 목소리에 하객들이 일제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시엔이 킥 웃음을 터뜨렸다.
하객들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다른 생각이 들었을 뿐.
분명 겨울과 같은 일이었다.
남녀가 눈이 맞고 정이 통해 도망을 갔으니.
허나 누구는 제 동생에게 여인을 줄 수 없다 빼앗아 도망치고, 또 누구는 제 형에게 여인을 내맡겨 버리지 않았는가.
그러자 누군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고개를 돌리자 매서운 눈매가 시선을 마주쳐왔다. 인상 더러운 공주님이었다.
“실례에요. 시엔.”
“그런 건 아닙니다만.”
“됐고. 시엔. 뭔가 꺼리는 음식이라도 있나요?”
“그건 왜 물어보시는지.”
“있으면 좀 권해드리려고. 누가 나한테 설탕 덩어리를 먹인 게 생각이 나네요.”
흑마법사가 전쟁통에 먹을것 못 먹을것 모두가 모자라 굶었으니, 세상에 가리는 음식이 있을 리가 있나.
시엔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원체 아무거나 잘 먹는지라.”
< 20. 다시 봄, 춘풍 부는 계절에 [9]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