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다시 봄, 춘풍 부는 계절에 [7] >
제국 수로의 구조는 결국 전부 비슷비슷했다. 수원과 방류지, 그리고 노출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뿐, 기본적인 설계가 같았기 때문이었다.
같은 지하의 층위에 두 개의 수로를 파내 이었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설계라, 결국 가장 효율적인 하나를 따를 수밖에는 없었으리라.
“이쪽.”
“길을 아시는 겁니까?”
“뭐. 대충.”
“대체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시엔이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선명하게 남은 기억 때문이었다.
과거, 가장 강대한 흑마법사가 수로에 갇혀 한 달을 헤맸다. 워낙에 호되게 당했으니 그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심지어, 시엔에겐 그렇게 오래전 경험이 아니었다. 천 년의 텀을 두고 재림했으나, 본인에게는 그저 잠깐 눈을 붙인 정도의 체감이었다.
“책에서 읽었어.”
“책에서 말입니까?”
“뭐, 그렇게 알아 둬.”
“뭐, 그렇게 알아 두겠습니다.”
베른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진 않았지만 납득하겠다는 뜻이었다.
기사의 참 바른 자세라 하겠다. 이제 실력만 좋아지면 될 텐데.
그렇게 깨끗한 정수로를 따라 걷기를 얼마일까. 돌연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베른닐이 바로 검을 뽑아들었다.
잠시 일행이 멈춰 대기하니, 문득 눈앞으로 한 무리의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묘한 등장이었다.
없던 것이 눈 앞에 나타났으나, 원래 있었던 것처럼 위화감이 없다. 눈으로 본 것과 느끼는 것이 다르니 사고가 어지러워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이런 돌발 상황에서야말로 그 대응을 통해 얼마나 훈련되었는가를 알 수 있는 때였다.
베른닐이 바로 몸을 날려 검을 치들었다.
괴물 하나가 쓰러지듯 주저앉으며 소리쳤다.
“살려줘!”
“읏.”
베른닐이 급히 검을 꺾었다. 이미 나아가던 궤적이 각을 그리며 애꿎은 허공을 베어냈다.
“세상에.”
“말을 하잖아!”
두 시녀가 놀라는 사이, 시엔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괴물들이 주춤 놀라 뒤로 물러났다.
“수렁뱅이들인가?”
“예, 예, 맞습니다. 나으리.”
시엔이 수렁뱅이를 바라보았다. 전신에 진흙과 비슷한 것이 흘러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꼴이었다.
머리를 조아리니 꼴은 엉망이나 태도는 조심스럽다. 말이 통하니 굳이 검을 뽑아들 이유가 있을까.
“베른닐, 검을 치워.”
“예, 도련님.”
베른닐이 물러나 시엔의 곁을 지켰다.
그제야 수렁뱅이들이 한숨 돌린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리고 나니 머리로 보이는 것들이 시엔에게 향하니 눈치를 살피는 모양이었다.
시엔이 입을 열었다.
“정수로에 발을 디딜 정도면, 수도의 구조를 아는 모양이지?”
“정수로라 하시면······”
“깨끗한 수로가 정수로, 더러운 곳을 오수로라 하거든. 수도의 구조를 꿰고 있는 모양이야?”
“그것이, 저희가 여기에 살다 보니.”
“혹시 중앙통제실, 그러니까 배관이 복잡하게 얽힌 장소가 어디인지 알고 있나?”
“그건.”
“알고 있는 모양이네. 아직 길이 통하나?” 천 년이 지나며 왜곡이 온전하지 못한 곳이 있어, 아닌 게 아니라 조금 헤매던 참이었다.
룬데엘이야 뭐 알 바가 아니니, 이 소란이 시엔에겐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 수렁뱅이라 하여 굳이 베거나 쫒아버릴 이유는 없지 않은가.
“통하긴 합니다만······.”
수렁뱅이가 미적거렸다.
시엔이 눈썹을 까닥거리자, 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우우, 그곳은 위험합니다요.”
“위험하다고?”
“미쳐버린 것들이 드글드글하니, 저희도 감히 발을 못 들입니다.”
“미쳐버린 것들이라.”
“그것이, 오래 묵은 이들을 저희는 그렇게 부릅죠.”
“흠.”
시엔이 턱을 쓰다듬었다.
“오래 묵었다고? 얼마나?”
“사오십 년 정도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미쳐버리기 전에 다들 무덤에 알아서 찾아갑니다요. 아, 무덤이 바로 나으리께서 말씀하신 그곳입니다요.”
“이성을 잃기까지 사오십 년?”
시엔이 직접 겪은 오염과는 달랐다.
청야 전술이란 제 영토를 소거하고 후퇴해 침략자의 보급 소요를 늘리는 방법을 뜻했다.
제국이 강대한 흑마법사에게 대응한 방법이기도 했으며, 덕분에 얼마나 굶주렸는지.
개중 소거하지 못하고 남겨둔 도시를 발견했다. 혹여 식량이라도 있을까 발을 들였다가, 오염된 것들의 공격을 받았다.
지성을 가진 것들은 극소수요, 대개는 이미 괴물이 되어 그저 맹목적으로 달려들 뿐이었으니.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아마 오염 역시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그 힘을 많이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런 추측을 해 볼 수밖에.
어쩌면 오염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도 이미 상식과 법칙을 뛰어넘은 기술이 아니었던가.
그 전에, 마력 유지 핵을 찾도록 하고.
“나는 중앙통제소, 너희들이 무덤이라 부르는 곳에 가고자 할 뿐이야. 한 명이 안내한다면, 나머지는 보내주마. 어때?”
수렁뱅이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코입이 없고 앞뒤가 하나로 흘러내리는 진흙더미일 뿐이라, 아마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만 했을 뿐이었지만. 지성이 있다면 으레 그러할 테니까.
그러다 마침내 하나가 남고, 나머지가 일별하며 수로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수렁뱅이가 익숙한 길을 가듯 앞장을 서니 시엔 일행이 그 뒤를 따랐다.
“이봐. 흠. 뭐라 부르지?”
“핸슨입니다.”
“이름은 그럴듯하네. 좋아, 핸슨. 어쩌다 그 꼴이 되었지?”
“한때는 저 역시 꽤 큰 농장을 운영하는 놈이었는데, 흉악한 가뭄이 들었습죠. 먹을 것이 없어 굶는데 병사가 들이닥치니 재물을 빼돌리고 세금을 내지 않았다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꼴이 되었다고? 중간이 많이 생략된 것 같은데.”
“소문이 돌았습죠. 지하에 추한 것들이 모여 산다고. 살고 있으니 뭔가 먹을 게 있다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밤중에 처자식 챙겨 숨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는 이리 되었습니다.”
“후회하지는 않나?”
“후회라니요.”
수렁뱅이가 즉답하니 고민해 볼 필요도 없다는 뜻이었다. 시엔이 다시 물었다.
“왜지? 인간의 삶이 그립지 않나?”
“배부르고 춥지도 덥지도 않습니다. 일할 필요도 없으니 이만하면 팔자가 폈습죠.”
“일할 필요가 없다고? 흠. 원래 일이란 건 밥벌어먹자 하는 것들이지. 먹잇거리가 그리 풍부하던가?”
“먹을 것이야 언제나 발 아래 있습죠.”
수렁뱅이의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뚝뚝 흘러내린 진흙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니, 시엔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걸 먹는다고?”
“몸뚱이가 어찌되먹었는지 모릅니다만, 상당히 맛이 좋다 아니겠습니까.”
시엔이 멈칫했다.
먹이를 자체 생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맛이 좋기까지 하다니. 진흙 같은 잔해를 먹고, 또 같은 것을 계속해서 흘리니 자체로 살아남을 수 있는 종이라. 시엔이 알기로 이런 생물은 없었다.
모든 산 것들은 저마다 영향을 끼치며 잡고 먹고 먹히는 거대한 순환에 속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게 한데 속했다. 죽어 육신이 땅에 남아 미물의 먹이로 흝어지고, 남은 것은 흙이 되어 곡식으로 자랐다.
미물은 작은 짐승의 먹이가 되고, 작은 짐승은 또한 큰 짐승의 먹이가 되니.
인간이 먹는 모든 것이 곧 결국 죽은 이의 흔적이라.
그런데 지금 그 예외가 눈앞에 있지 않은가. 수렁뱅이의 말대로라면, 세상과 동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 누가,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런 걸 만들어냈단 말인가.
“잠깐, 대체 수렁뱅이가 되는 과정이 대체 어떤 건가요? 당신도 갑자기 되고자 하여 그렇게 된 것은 아니겠지요?”
더 이상 듣고만 있기가 힘들었는지, 트리예가 끼어들었다. 핸슨이 대답했다.
“수렁왕님을 뵙고 은혜를 받았습죠.”
“수렁왕?”
“저희는 그렇게 부릅죠. 그분을 뵙고 은혜를 가져 인간의 걱정이 모두 사라지니 바로 인세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잠깐.”
핸슨의 목소리가 점차 뒤틀리기 시작했다.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으며 먹을 것이 항상 곁에 있고 삶이 풍족하여 그저 산 것들이 즐거울 뿐이다. 그저 삶이 삶으로 풍족할 뿐이라. 영혼을 태우고 그저 유희를 추구하는 의식이 모여 사회를 이루니 곧 전파하여 낙원이 지상에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또 왜 갑자기 고장이 났나? 한 대 치면 제정신으로 돌아오려나 싶기도 한데, 연신 쳐져 흘러내리는 진흙을 보니 손대기가 영 껄끄러웠다.
“그리하여 왕께서 어느 날 살펴 눈치채시매 초점이 맞아 시선을 주실 것이다. 그저 존재하여 바라보니 그 순간 모든 세계가 일시에 법칙을 잃고 존재로서 존재하는······”
“베른닐, 이것 좀 한 대 쳐봐.”
베른닐이 검을 뽑아들었다.
시엔이 다시 말했다.
“아니, 치라고. 베지 말고.”
“치란 말씀이십니까?”
“정신이 나간 것 같으니까 정신 차리게 뒷통수 한 방 날려 줘.”
“······그분께서 관심을 주신다! 날 바라보신다! 눈동자가! 눈동자가 돌아. 켁.”
퍽. 베른닐의 건틀릿이 핸슨의 뒷통수를 호되게 후려쳤다. 그 서슬에 바닥에 넘어져 나동그라지니, 이윽고 팔 같은 부위를 들어 제 머리를 쓸었다.
“아이고야, 이게 무슨 일이야. 워매, 머리야.”
“흠.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은데. 이봐.”
“나으리?”
몸을 돌려 올려다보는 핸슨을 보며, 시엔이 다시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새 형태가 변해, 앞뒤 없는 진흙 인형에 얼굴이라 할 법한 현상이 생겨 난 것이다.
생선 같은 둥근 눈이 뜨이고, 콧대 없이 숨구멍이 트였으며, 그 아래로 가는 촉수들이 수염처럼 뻗었다.
문득 끔찍하도록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고위 마법사의 예감이란 그저 느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정신 세계가 동토 세계, 얼어붙어 박제된 역사와 연결된 이들이 아니던가.
무의식적인, 그저 본능에 가까운 어떤 의지가 직감적으로 그 위험을 감지해낸 것이었으니.
더 파고들어서는 안 되겠다.
게다가 눈동자라 하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 바깥 것이라 불리는 보석을 취해 오염된 정신 세계의 풍광이 떠올랐다. 무수한 눈동자가 떠올라 사방을 살피던 그 광경.
대죄인이 뭐라 했던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주시하지 말라 하지 않았던가.
다른 대죄인도 아닌, 순진무구의 조언이었다. 그 분별없는 것이 그리 말할 정도의 무언가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바깥 것이라 칭한 이름이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세계에 순환에 속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바깥 것이라 부를 수밖에 없겠지.
“됐으니까 안내나 계속해.”
“예, 이쪽입니다요.”
한층 더 기괴한 꼴이 된 핸슨이 다시 안내를 시작했다. 정수도에서 오수도로, 다시 정수도로 뒤바뀌니, 갈수록 바뀌는 점차 그 빈도가 잦아졌다.
“······나으리.” “응?”
“혹시 이 난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갑자기 병사들이 들이닥쳐 칼을 휘두릅니다. 저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요!”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인 한 명이 사라지고, 그게 수렁뱅이의 소행이라 하던데.”
“그럴 리가요. 저희가 지상에 나갈 이유가 없습니다요. 더군다나 여인이라 하셔도······”
“여인이면 뭐?”
“그것이······.”
핸슨이 머뭇거렸다.
“그래서 뭐?”
“그게, 서질 않는다고 할까, 그런 생각 자체가 안 들단 말입니다. 그러니 지상에 나갈 일도 없거니와 여인을 데려올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렁뱅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핸슨의 말이 사리에 맞았다. 게다가 도히려 억울하다며 무슨 일이냐며 되려 물어보고 있으니 더욱이 그러했다.
“그 녀석, 머리를 잘 썼네.”
수렁뱅이가 제 여인을 잡아갔다 하여 다급히 뛰쳐나갔으니, 당연히 여인을 찾아 지하수렁으로 향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백작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수로를 뒤집는 중이었고.
그 군대가 어디 있다 나타났겠는가. 결국 가까이에 도시를 방어하는 이들이니, 그만큼 도시 경계는 소홀해지고 말 터였다.
이때를 틈타 숨겨둔 제 여인과 도망쳐버리면, 백작은 헛수고로 시간만 버리고 결국 추적조차 요원해지고 마리라.
아니면 룬데엘과 여인 모두 찾지 못하니 그저 죽어 썩은 물 어딘가에 있겠거니 하고 아예 죽은 이로 취급받게 될 수도 있겠고.
그 녀석의 선택이었다.
덕분에 애꿎은 수렁뱅이들만 죽어나가는 와중이었지만.
그러나 수렁뱅이들이 수렁왕이니 뭐니 하여 다른 이를 섬기는 이들. 저들의 왕이 아닌 타인의 영지에 기생하고 있으니 마땅히 감수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제법이잖아.”
시엔이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남은 이들에겐 안 된 일이지만, 삶이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니. 그러니 눈치 안 보고 저를 위해, 그리고 제 스스로 움직여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 20. 다시 봄, 춘풍 부는 계절에 [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