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81화 (81/268)

< 18. 남서남으로 진로를 돌려라 [3] >

페시번의 상태가 나빴다.

허벅지에 맞은 화살이 근육 깊숙이 파고들었다. 상처가 덧나 붓고 전신에 열이 퍼졌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었다. 어설프게 화살을 뽑거나 했다면 이미 세상을 떠났으리라.

상처를 살핀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가 응급조치는 했네.”

“병자분들께서 도와주셨어요.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병자들이 말입니까? 여기 병자들이라면.”

“네. 그분들께서요. 여기 숨어있는 것도 전부 그분들 덕분이랍니다.”

“흠. 나름 은혜를 입었군요. 여길 태워버릴 생각이었습니다만. 소란을 틈타 빠져나가는 게 제일 쉽지 않겠습니까?”

“그건 안 돼요. 은혜를 해로 갚을 수는 없답니다.”

셜리가 단호히 말했다.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차안으로 가도록 하죠. 베른닐. 가져온 것들 꺼내 봐.”

베른닐이 가방을 풀었다. 면도칼과 약품 따위가 계속해서 나왔다. 시엔이 그 중 하나를 집어들어 셜리에게 내밀었다.

“일단 유르반 영애께선 염색을 하십시오. 독한 약이라 머리가 많이 상할 겁니다만.”

“저는 상관없어요.”

“그리고 머리도 좀 자르시면 좋겠습니다. 기왕이면 아주 짧게 쳐 버리십시오.”

“그건······.”

“머리 모양과 색만 달라도 인상이 달라지는 법입니다.”

“아니. 그러한 것이 아니라.”

“뭔가 저어하실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정말로 낯선 분이다 싶어서요.”

재림 전 시엔이 항상 쓰다듬으며 기꺼이 여기던 머리카락이었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자르라 하니 역시나 눈 앞에 선 이는 같은 꼴을 하나 새파란 타인과 같았다.

셜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하겠다는 태도였다.

셜리와 에르제가 염색약을 들고 천박 밖으로 나가자, 시엔이 베른닐을 불렀다.

“베른닐. 면도 할 줄 알지?”

“거야 뭐. 혼자 살다 보니.”

“잘됐네. 이 녀석 머리털 좀 싹 밀어버려. 기왕이면 눈썹도 같이. 수염은 더 기르게 놔 두는 편이 좋겠네.”

“흠. 괜찮겠습니까?”

“괜찮아. 내 거 아니고 베른닐 거 아닌데.”

“그도 그렇군요.”

베른닐이 킬킬거렸다.

머리와 눈썹을 밀라니. 세상에 그런 행색을 하는 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저자의 건달도 하지 않을 모양새였다.

싹 밀어버리니, 의외로 두상이 나빴다.

뒷통수는 푹 꺼져 평평하고, 대신 이마 위는 툭 튀어나온 짱구였다. 거기에 눈썹까지 밀어버리고 나니, 냉막한 인상의 청년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냥 더러운 인상의 민머리가 누워있을 뿐.

이거 일어나면 어찌 반응하려나.

시엔이 키득거리며 이어 지시했다.

“자. 베른닐. 단단히 누르고 있어. 일단 상처부터 해결해야겠으니.”

베른닐이 페시번의 가슴 위를 짓누르고 앉아 양 팔을 붙들었다. 시엔이 환자의 다리를 제 아래 깔아 고정시키고는 환부를 살폈다.

아직도 뽑지 못한 화살촉이 문제였다.

사람의 몸이란 바깥 것이 박히고 나면 버티지 못하는 법이었다. 환부에 고름이 고이고, 열은 전신으로 치솟는 법이었으니.

화살이란 애초에 만들어지기가 악독했다. 촉의 양 날개가 요사하게 휘어, 몸에 박히면 쉬이 뽑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허벅지는 인체의 급소 중 하나였다.

근육이 많아 단단하다 여기기 쉬우나, 실제로는 큰 핏줄이 지나가는 장소라. 사람 몸의 가장 큰 핏줄 중 하나라 여기가 터지면 순식간에 피가 빠져 죽음에 이른다. 박힌 부근이 하필 그 참이었다.

아예 환부를 갈라 화살촉을 꺼내야 하는 이유였다.

시엔이 칼날을 깊숙이 박아넣었다.

“우웁!”

고통 때문인지, 페시번이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뿐. 입에는 재갈이 물리고 신체는 장성한 사내 둘이 내리누르니 아파 드러누워있던 주제에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어허, 힘 빼. 근육 다 찢긴다.”

시엔이 갈라진 환부에서 화살촉을 꺼내 살폈다. 모양이 온전하니 속에서 깨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혹여 다른 조각이 있을지 몰랐다. 시엔이 상처를 헤집었다. 속살이 말려 올라와 상처 위로 소복하게 솟아올랐다.

“우우웁! 우우우웁!”

생살을 째고 그 안을 쑤시니 세상에 이러한 고통이 또 없으리라. 환자가 몸을 비틀고 재갈 밖으로 막힌 비명이 새어 나왔다.

“자자. 얼마 안 남았어.”

시엔이 대바늘을 꺼내 상처를 꿰멨다.

비집고 올라온 속살을 밀어넣어 제자리에 맞추고 깊숙한 매듭을 묶었다. 그 위를 다시 꿰메어 붙이고 약재를 빻은 가루를 마구 뿌렸다.

연고를 바르고 깨끗한 붕대로 감싸고 나니 이제 할 일은 전부 한 셈이었다.

“크윽. 빌어먹을. 무슨 치료를 이따위로 험하게······”

“이제 정신이 좀 드는 모양이지?”

“너, 너!”

페시번이 손가락질을 했다.

시엔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기껏 치료를 해 줬더니 손가락질이라. 생명의 은인에게 할 행동은 아닌데.”

페시번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뿐. 조용히 입을 다물고는 시엔을 응시했다.

정신을 차렸으나 아직 온전한 몸이 아니었다. 열은 높고, 체력은 빠진 병자가 아닌가. 게다가 통증도 심한 상태였으니.

“왜 네가 여기에······.”

“네 피앙새가 편지를 썼거든.”

“셜리가? 셜리? 셜리는 어디 있지?”

“아주 사랑꾼이 나셨구만.”

시엔의 비아냥에, 페시번이 재촉했다.

“대답해. 셜리는 어디에 있지?”

“글세.”

“너 이 자식······”

그때였다.

셜리와 에르제가 천막으로 돌아왔다.

어지간히 독한 약이었다. 나갈 때의 귀족 영애는 온데간데없고, 볼품없이 갈라진 짧은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의 에르제는 아예 울상이었다. 잘린 머리카락을 잘 포개어 묶어 들고는, 연신 셜리의 머리와 번갈아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이는 좀 어떤······. 페시번!”

“아······.”

“정신이 들어요? 어때, 나 알아보겠어요?”

“당신, 머리가 왜 그래······ 젠장.”

페시번이 힘없는 손길로 셜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타까움 반, 분노 반이 섞인 눈빛이었다.

셜리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이 정도면 양호한 거지. 당신 머리나 챙기고, 크흡. 당신 의외로 머리빨이, 있었네요.”

“내 머리?”

페시번이 제 머리를 더듬었다.

으레 붙어야 할 것이 없고, 만질만질하니 갓 밀어낸 두피만 손에 닿았다. 페시번이 당황해 양 팔을 들어 제 머리를 더듬었다. 베른닐이 꼼꼼하게 잘 밀어버린 까닭에, 까슬하게 걸리는 부분 한 군데 없이 매끈하기만 했다.

“어, 어? 뭐, 뭐야?”

“뭐긴 뭐야.”

“시엔, 네놈이 설마······.”

“이래놓으니 못 알아보겠는데? 문둥이인 척 하고 있던 건 참신하지만, 나병촌 바깥으로 못 나가는 꼴이었으니 높은 점수는 못 주겠다. 차라리 밀어놓으니 알아보지도 못하겠네.”

“너, 너어······.”

페시번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오래 앓아 쇠약한 몸이 따르지 않으니 그저 시선으로만 죽일 듯이 바라볼 수밖에.

“일단은 체력을 회복하자고. 흐레이그의 대공자가 대머리일거라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테니, 얼마간은 속일 수 있을 테지만. 어차피 오래는 못 가.”

확실히 알아보기 힘든 꼴이기는 했지만, 너무 눈에 띄는 인상이기도 했다. 그러니 멀리 가지 못해 결국은 들키고 말리라.

그러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일단 앞마당을 벗어나면 그때부턴 야숙을 하며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환자의 체력 보충이 중요했다. 들키지 않았을 때 최대한 멀리 나가기 위해서였다.

이를테면 숲이라던가. 적을 요격해 가장 유리한 땅에 자리를 잡을 필요가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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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엔 일행이 나병촌을 빠져나와 고급 여관에 짐을 풀었다. 변장 아닌 변장이 퍽 효과가 좋아 여관 주인도 그리 주의를 살피는 꼴은 아니었다.

촉을 제거하고 상처를 꿰메어 붙였으니, 남은 일은 별거 아니었다. 그저 환부를 소독하고 잘 먹고 잘 자며 체력을 끌어올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한동안 여관방 안에 쳐박아 놓으니 그새 눈에 띄게 혈색이 좋아졌다. 이젠 사람다운 안색을 한 페시번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속셈이지?”

“속셈? 속셈이라. 난 그저 구원요청에 응했을 뿐인데.”

“그러니까 무슨 속셈이냐는 거다. 설마 아직도 셜리에게 미련이 남아서······.”

“아. 그건 아니니까 됐고.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무슨 생각으로 과감히 야반도주를 택했나 모르겠어. 다 버리고 둘이 행복하게 살기라도 하겠다고?”

“내 약혼녀를 내가 챙겼을 뿐이다.”

“챙겨서 뭐하려고? 결국 도망쳐서 둘이 살겠다는 말 아냐?”

“도망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릴!”

“도망이 아니면?”

시엔이 되물었다.

페시번이 입술을 깨물었다.

“······영지를 떠나 용병이 될 생각이었다.”

“용병? 농담이지? 지금 웃으면 되냐?”

“농담이 아니야. 용병단에 들어가서.”

“아아. 알겠네. 뭐. 드문 이야기긴 해도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

큰 용병단은 군대와 다름없다.

그리고 간혹 그 안에 후계 다툼에서 떨어져나온 귀족 자제가 섞이는 일도 있었다.

볼모의 중요성이란 용병단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들고 일어나 저들이 품은 귀족 자제를 가주로 옹립할 수만 있다면?

용병단이 아니라 정규군이 될 수 있었다. 계약에 따라 떠도는 용병단이 한 영지의 정규군으로 뿌리내릴 기회였다.

이미 여러 선례가 여럿 있는 일이었다.

“뭐. 아예 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그런데, 공작가쯤 되는 대가문이 그렇게 엎어진 경우도 있었던가?”

“······메켈네스의 용병 공작.”

“그 외엔?”

“······.”

“쯧.”

시엔이 혀를 찼다.

용병대의 규모가 아무리 커도 결국은 용병대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상하 체계, 꾸준한 훈련으로 전쟁 기술을 특히 단련하며, 제식 장비와 그를 통한 집단 전투술을 갖춘 정규군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리 큰 용병단이라해도, 공작가쯤 되는 집안과 일전을 벌여 가주 옹립을 벌이기엔 그 힘이 턱없이 부족하니.

“결국, 별 대책 없다는 뜻이었네?”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

“언제까지 참을 생각이었는데?” “젠장! 그럼 가만히 앉아 빼앗기란 말이냐! 가문도, 셜리도? 그저 빼앗기고 있느니 차라리 낮은 가능성이라도 스스로 움직이겠다! 나는 그렇게 했을 뿐이다!”

“뭐. 그도 그렇네.”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엔이었어도 같은 판단을 내렸을 터였다. 아무것도 못 한 채로 빼앗긴다는 것이 얼마나 뼈아픈 일인지 이미 겪은 바였다.

“용병단보다는 그래도 내가 낫겠네.”

“뭐라고?”

“용병단보다는 티란디스가 더 가능성이 크지 않나? 델피르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시기만 한다면야.”

페시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날더러 가문을 배신하라고?”

“배신? 그건 같은 편일 때나 하는 소리고. 활 맞고 앓아누운 게 누구더라.”

“젠장. 그딴 소리 해도 소용없다. 원수의 손에 가문을 쥐어주느니.”

“쥐어주느니? 그냥 네 동생에게 넘기는 편이 낫다고?”

“······젠장.”

시엔이 히죽 웃어 보였다.

“쉽게 가자고. 티란디스라면 네가 네 것을 되찾게 해줄 수 있다니까. 그냥 후작저에서 셜리랑 같이 알콩달콩 살다 보면 어느샌가 네 손에 쥐어져 있을 거라구.”

“빌어먹을. 시엔. 뭘 원하지?”

“메월 곡창지대. 티란디스는 온통 숲뿐이라서. 곡창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거든.”

“젠장, 영지의 삼분의 일을 가져가겠다고?”

“아니면 전부를 포기하던가.”

“젠장! 필요없어! 나는 내 식대로 하겠다! 네 도움 따위······”

“아직도 이해를 못 하네.”

시엔의 눈에서 흑광이 비쳤다. 음차원 에너지가 실체화하여 검은 안개가 되어 풀려나왔다.

“너, 너! 눈이!”

“별거 아냐. 마법이지.”

“마법이라니! 네가 어떻게!”

“마법사가 마법을 부리는 게 이상한가?”

“하지만, 하지만 너 같은 건 본 적이······.”

“그야 없겠지. 아니, 없는 것도 문제인가.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겠지. 쯧. 한심하긴.”

셜리에 편지에는 흑마법사들에 대한 것도 적혀 있었다. 괴물을 부리는 자가 있었다고 했던가. 후계자라는 놈이 그에 대한 것도 모르니 결국 처음부터 허울뿐이었다는 뜻이라.

시엔이 혀를 쯧쯧 찼다.

뭐. 어차피 잘 된 일이었다. 잘난 놈보단 못난 놈이 다루기 쉬운 법이니까.

원수 가문의 수장으로 앉혀놓을 놈이 뛰어난 것도 문제가 있지 않겠는가.

< 18. 남서남으로 진로를 돌려라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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