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82화 (82/268)

< 18. 남서남으로 진로를 돌려라 [4] >

특이한 행색을 한 이는 눈에 잘 띄는 법이었다. 페시번은 제게 쏠리는 시선이 영 불편한 모양이었다. 연신 쏟아지는 헛기침이며, 불안한 시선처리가 그를 증명했다.

“와! 대머리다, 대머리! 반짝반짝해!”

“쉿, 못 써.”

아이 하나가 탄성을 질렀다. 페시번의 험악한 시선을 마주한 어미가 급히 치마폭에 제 아이을 감췄다.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나 페시번의 표정은 떫기 그지없었다.

더욱 어깨를 움츠리는 페시번에게 시엔이 말했다.

“당당하게 걸어.”

“큭. 그게 되면······.”

“제집 앞마당에서도 어깨를 못 펴나? 한심하긴. 하긴. 그러니까 이 꼴이지.”

“너. 뚫린 입이라고.”

페시번이 으르렁거렸다.

시엔이 피식 웃음으로 대꾸했다.

어차피 강아지 비슷한 놈이었다. 으르렁대봐야 한 입 거리도 못 되는 녀석이 어쩌겠는가. 천지 분간 못 하고 아무에게나 이빨을 들이대니 실상은 제가 겁을 먹었다고 자랑을 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빌어먹을 자식.”

기어코 한 마디 하고는, 그래도 조금은 긴장이 풀린 모양새였다. 적어도 팔과 다리가 동시에 나가지는 않았으니까.

대로를 따라 온통 벽면에 종이가 붙었다. 페시번의 초상이었다.

머리를 가져오는 이에게 막대한 포상을 약속하는 수배서였다. 즉, 죽이나 살리나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산 사람보단 죽은 이의 머리가 휴대하기 훨씬 간편한 법이었지만.

네 장 중 하나꼴로 셜리의 초상도 붙어있었다. 발견 시 신고. 혹은 정중히 모셔오거나, 불편하지 않게 보호해 드릴 것.

납치범과 그 피랍자의 온도차이였다.

셜리는 굳이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 언제든지 제 정체를 밝히며 나서면 극진히 보호받으며 가문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입장이었으니.

시엔이 새삼 셜리를 바라보았다.

염색약으로 상한 머리가 엉망으로 잘리고, 그 위에 싸구려 솜옷을 입었다. 피부가 고우니 이상하긴 해도, 얼핏 보면 평범한 여염집 아낙이라.

“괜찮아요. 괜찮을 거에요.”

“미안해. 나 때문에.”

“그러지 말아요. 내가 당신을 따랐잖아요?”

“고마워.”

“그럼 나한테 잘해요. 알겠죠?”

절뚝거리는 페시번을 부축하며 대화를 나누니 아주 깨가 쏟아지다 못해 파묻힐 지경이었다.

문득 왼손에 낀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수수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에 광택을 보니 값싼 은도금이나 한 것이었다.

페시번과 함께 차고 있으니 과연 알 만한 일이었다. 다들 사랑의 도피라고 떠들었던가.

“쯥,”

혀차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베른닐이 죽상이다. 무언가 한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너는 왜 또?”

“뻔뻔하고 낯 두껍고 잔인한 여자 아닙니까. 저야 뭐 도련님이 하시겠다면야 따르겠습니다만, 별로 내키지는 않는군요.”

“넌 또 왜?”

“거야 뭐······.”

베른닐이 머뭇거렸다. 시엔이 재촉하자 마지못해 제 속을 털어놓았다.

“뭐 저들끼리 붙어먹겠다는데야 상관없지만, 그래도 도련님 앞에서 저 꼴을 떨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음?”

예상지 못한 대답이었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전 연인 앞에서 현 연인과 알콩달콩 노닥거리고 있었으니.

애초에 시엔은 거절당한 입장이고, 그로 인해 독까지 마신 위인이 아니었던가. 어째 요 계속해서 태도가 퉁명스럽다 싶더니, 제 주인이 혹여 속앓이라도 할까 계속 걱정을 했던 모양이었다. 기특하기도 하지.

물론 그 시엔이 이 시엔이 아니었다.

그러니 저 성질머리 나쁜 애송이, 심지어 이제는 대머리에 민눈썹인 짱구 녀석이 뭐가 그리 좋은가 궁금할 뿐이었지만.

“난 괜찮은데.”

“말씀 그렇게 하셔도 다 압니다.”

“뭘 알아?”

“정 뵈기 싫으시면 제가 한 마디 하죠.”

“아니. 괜찮다니까.”

“사람 속이란게 말입니다.”

시엔이 베른닐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그럼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자고. 베른닐의 두건, 아니 전처가 다른 남자랑 네 앞에서 붙어있으면 어때?”

“당장 그 남자를 구해야겠군요.”

“그 남자가 원수 가문의 아들이면?”

“그럼 축하해줄 일이군요.”

“그거 봐.”

시엔과 베른닐이 함께 킬킬거렸다.

수배자를 낀 일행이 대놓고 대로를 활보했다.

현상금 사냥꾼으로 보이는 치들이 수배서 앞에 모여 인생 역전이니 걸리기만 하라는 등의 허언을 내뱉곤 했다.

물론, 정작 그 둘이 사이좋게 붙어 스쳐감에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당나귀와 수레를 사서 페시번과 셜리를 올려놓고, 용병 차림의 셋이 앞장을 섰다.

그럴듯한 그림이 만들어졌다. 다리를 다친 영민 내외와 그를 호위하는 뜨내기 용병 놀이꾼들.

남문에 도착하자 위병들이 앞을 막아섰다.

“어디로 가는 길이지?”

“어디였더라? 켈우드?”

“케루드겠지. 용병인가? 용병패는?”

“아. 여기 있다오.”

시엔이 보란 듯이 무지개색 특별패를 내밀었다. 위병들도 익히 아는 것이었다. 호구이니 적당히 뜯어드시라는 길드의 표식이 아닌가.

“흠. 의뢰인가? 길드의 의뢰서는.”

“다리를 다쳐서 거동이 불편한 평민, 흠흠, 아니 백성, 아니지 영민? 그러니 이 시란이 직접 의뢰를 맡기로 했지.”

“의뢰서가 없단 말인가?”

“길드의 의뢰 절차가 생각보다 쉽지 않은 모양이던데. 그럼 힘없고 가난한 이들은 일이 생겨도 어쩔 도리가 없단 말이오?”

위병이 고개를 저었다.

무지개 용병패에 정의 운운하는 꼴이니 경험 많은 위병에겐 어떤 상황인지 단숨에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흠. 하지만 의뢰서가 없으면 함부로 내보낼 수도 없는 노릇인데. 흠?”

위병이 수레에 탄 대머리를 바라보았다. 낯선 얼굴인데, 어쩐지 또 낯이 익으니 기묘한 일이었다.

어디서 본 듯 한데, 누구였더라? 저런 머리를 한 놈을 내가 본 적이 없었을 텐데?

시엔이 재빠르게 은화 몇 개를 꺼내 위병의 옆구리를 찔렀다.

“결국, 당신도 통행료 이야기를 꺼내려는 거 아니오? 대체 오며가며 무슨 통행료가 이리 비싼지 모르겠어.”

“흠흠. 통행료라니. 그게 아니라 임시 통행 발급 과정을 통과하니 수수료를 내는 것인데.”

위병이 슬그머니 은화들을 챙겼다. 눈치를 살피니 동료들의 눈빛이 여기에 붙었다. 혼자 먹긴 글렀으니 아무래도 술 한 잔이라도 돌려야 할 판이었다.

그래도 공짜 술이 어디랴.

“흠흠, 그럼 편한 여행이 되기를.”

“여행이라니 나는······.”

“아. 의뢰였던가. 뭐 아무튼. 자, 통과! 다음!”

시엔이 불만 가득한 척, 한숨이나 푹 쉬어보이곤 남문을 통과했다.

“정말로 이게 먹힐 줄이야.”

“이대로 티란디스까지 잘 속아 넘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티란디스에 가도, 젠장. 문제투성이야. 엉망이라구.”

“잘 될 거에요. 다 잘 될 테니까요. 내가 옆에 있잖아요.”

“셜리······.”

“페시번.”

놔두면 자리를 깔고 누울 기세였다. 나귀에 올라탄 시엔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잘 안 될걸?”

“또 왜! 빌어먹을 티란디스.”

“대머리는 너무 눈에 띄거든. 한두번이야 속여넘길 수 있겠지만, 언제 들켜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이상하지 않다고?”

“오면서 봤더니 여기저기 군대가 쫙 깔렸어. 가도엔 군대가, 야지엔 현상금 사냥꾼들이 돌아다녀. 초상화와 다르니 못 알아본다 해도, 결국 네 얼굴을 익히 아는 이의 눈을 속이긴 힘들 테니까.”

“그럼 야지로 가면 되지 않나! 현상금 사냥꾼들은 초상화밖에 못 봤을 텐데.”

“현상금 사냥꾼들? 걔넨 닮기만 하면 신경 안 써. 머리를 잘라 바쳐다 맞으면 버는 거고, 아니면 그냥 시간이나 버린 셈 치겠지.”

현상금 사냥꾼은 제대로 된 부류가 아니었다. 애초에 수배범을 잡겠다고 대륙을 떠도는 것이 제정신 박힌 이가 할 일이겠는가.

“그럼 이제 어쩔 셈이지? 그저 들키지 않길 기도하며 빠져나가자는 건가?”

“그때부터는 강행돌파지.”

페시번이 입을 떡 벌렸다.

“너, 너, 지금 그걸 계획이라고······”

“죽을 때까지 문둥병자 행세를 하려는 것보단 낫지 않나?”

“큭.”

시엔이 안심하라는 듯, 미소와 함께 말했다.

“너무 걱정하진 마. 일이 잘못되어도 나랑 베른닐은 무사히 빠져나갈 자신이 있으니까. 네 피앙세랑 하녀도 마찬가지겠고. 너만 죽으면 되거든.”

“젠장! 빌어먹을 티란디스!”

전혀 안심할 수 없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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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간은 별일 없이 지나갔다.

공작저가 위치한 직할도시 강스트프레를 떠나, 소로를 타고 촌락을 지나며, 소도시 두 개를 통과한 시점이었다.

이제 반은 빠져나온 셈이었다. 앞으로 사흘이면 흐레이그와 영지를 맞댄 안통 백작가의 땅으로 접어들 터였다.

안통 영지를 지나 살베지 영지로. 살베지 영지는 서리바람숲과 직접 맞대고 있으니 그를 통과해 복귀할 계획이었다.

북서 구릉 연합. 살베지를 주축으로 광산을 가진 그 주변 귀족들이 모인 파벌. 안통 백작 역시 그 소속이었다.

중립에 있는 영주라 흐레이그라 해도 함부로 추격할 수 없으니, 안통 영지로 들어서면 이 별 재미 없는 용병 놀이도 끝이었다.

흐레이그 가 역시 같은 판단이었다.

그러니 안통 영지로 향할수록 군대와 마주치는 빈도가 높아졌다. 중립 영지로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한 차단선이었다.

저 앞으로 말을 탄 병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열 기 정도의 기마병에, 높이 든 깃발이 흔들렸다. 보아하니 기사단의 휘장이라.

“오성 기사단이다.”

“몇 번째 기사단이지?”

“네 번째.”

“네 얼굴을 알 만한 이가 있나?”

“아마 없을 거다. 감찰 및 순찰을 맡은 기사들이라, 어지간해서 강스트프레로 들어오는 일이 없었으니까.”

“그럼 긴장 좀 풀지 그래? 아주 딱딱하게 굳어서는. 돌덩이가 따로 없네.”

“누, 누가 긴장했다는 거냐!”

페시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도 셜리의 손을 꽉 쥔 모습이 누가 봐도 긴장한 꼴이었다. 담도 약한 녀석이라 순찰대며 검문을 만날 때마다 이 모양이었다.

폭급하고, 건방지고, 제 잘난 줄 아는데 사실 잘난 구석도 없고. 그나마 얼굴이나마 좀 봐줄만 한 꼴이었지만 이제는 머리도 눈썹도 없는 꼴이었다.

거기에 가문에게 쫒기는 범죄자 신세니 세상에 이보다 최악의 조건을 가진 사내도 없으리라.

그걸 또 좋다고 매양 달라붙어 있는 셜리 역시 분명 제정신은 아니리라.

하기야. 사내와 여인이 맺어지는 데에 어떤 법칙이 이는 것이 아니니.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했다고 했으니 그게 진심이었던 모양이다만은. “정지. 정지하라!”

“무슨 일이신지요? 기사분들께서.”

“우리는 수배자를 찾고 있으니 협조를 부탁하겠다. 신원과 목적을 밝혀라.”

“저는 시란이라 하고. 보시다시피 용병이랍니다.”

“용병이라고?”

기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용감은 좀 들었지만, 아직 길이 덜 든 새 장비임이 틀림없었다. 이러한 장비를 차고 있는 용병이 있던가?

위병이나 용병이라면 용병 놀이를 하는 어딘가의 도련님이라 눈치채겠지만, 기사에게는 영 낯선 모습이었다.

기사가 생각했다. 장비가 훌륭한데. 실력 있는 용병인가? 아직 젊어 보이는데.

딱 기사의 사고방식이었다.

“용병패는?”

“여기 있습니다.”

“이게 용병패라고?”

“특별패지요. 특별한 실력자에게 지급되는 것입니다. 용병 길드에 문의하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호오. 과연. 이런 것도 있었나. 그래서, 용병. 어디 가는 중이지?”

“아스우드로 가는 중이지요. 제 의뢰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아스우드?”

“베헤브윈드에서 하루 거리에 있는 촌락이라던데요.”

기사가 제 동료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흠. 너희들, 아스우드에 대해 들어본 녀석이 있나?”

“아스우드?”

“아. 부단장님. 가헨 녀석 종자가 거기 출신이었던가 했을 겁니다.”

“호오. 가헨의 종자라면 그 말라깽이? 뭐. 어쨌든. 있긴 있는 모양이지.”

부단장. 기사를 부르는 호칭에 시엔이 슬그머니 베른닐을 바라보았다. 부단장쯤 되면 몇 번쯤 보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기사는 잠시 일행을 둘러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다. 용병. 통과하도록.”

“예, 기사님.”

시엔이 나귀를 탄 채 기사들 사이를 통과했다. 수레에 놓인 대머리가 신기한 모양인지, 기사들의 시선이 한데 모여 같이 움직였다.

그때였다.

“잠깐.”

기사가 시엔을 불러세웠다.

“예?”

기사가 천천히 말을 몰아 다가왔다.

베른닐이 시엔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떡하죠? 벨까요? 시엔이 미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직. 좀 더 두고 보자.

시엔에 앞에 이른 기사가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접힌 종이를 펴 보여주니 페시번의 수배서였다.

“이런 이를 본 적이 있나?”

“온 사방에 붙은 수배서로군요. 제가 보았다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하긴. 그도 그렇군.”

기사가 피식 웃으며 수배서를 거둬들였다. 수배서를 곱게 접던 기사가, 문득 손을 멈췄다.

“음?”

기사의 시선이 수배서와 페시번을 오갔다. 그 옆에 붙은 셜리를 바라보곤, 다시 품을 뒤적거렸다. 셜리의 수배서를 찾는 것이라.

결과적으로, 기사가 수배서를 꺼내드는 일은 없었다.

얼굴에 칼이 박히면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시엔이 말의 갈기를 붙잡고 뛰어올랐다. 검을 내지르니 그 끝이 열린 투구 안으로 깊숙히 파고들었다.

“베른닐!” 시엔의 외침. 베른닐이 검을 뽑았다.

가까이에 선 말의 목을 베고, 쓰러지는 기사를 잡아 내팽개쳤다. 그 위에 칼이 떨어졌다. 사슬 갑옷 사이로 칼날이 들이쳐 심장을 꿰뚫었다.

화륵. 불이 타올랐다. 기사가 휘감겨 비명을 질렀다. 버닝 신. 악령의 소행이었다.

“빌어먹을! 적이다!”

기사 셋이 순식간에 당했다. 남은 이들이 급히 칼을 뽑았다.

그러자 그림자에서 창이 솟아올랐다.

창에 찔린 말이 구슬픈 울음을 흘렸다. 기사가 낙마해 바닥을 굴렀다. 그림자의 창이 연신 솟아 말들이 연이어 쓰러졌다. 쉐도우 스토커. 시엔의 그림자에 도사리고 있던 악령이 본색을 드러냈다.

기사가 불타고, 꿰뚫리고, 검에 찔리고 베여 바닥을 굴렀다. 베른닐의 검이 기사의 목을 스치고, 시엔의 주먹이 말의 머리를 후려쳤다.

완벽한 기습에 당한 기사들이 제대로 검을 휘둘러보지도 못한 채 쓰러져갔다. 말에 깔린 기사 하나가 급히 소리쳤다.

“젠장! 테브! 본대에 알려! 수배자가!”

“빌어먹을!”

개중 후열에 있던 기사가 말머리를 돌렸다.

남은 기사들이 그 뒷모습을 가로막고 섰다. 열 명에 이르던 이들이 이젠 셋뿐이었다.

“흐레이그를 위하여!”

“흐레이그를 위하여!”

기사들이 일시에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누구를 위해서? 시엔이 싸늘히 조소했다.

굳이 검을 쓸 필요도 없었다. 하나는 불타 바닥을 구르고, 하나는 그림자에 꿰뚫려 허공에 매달렸다.

나머지 하나는 베른닐이 들이받고 머리를 잡아 비틀었다.

바로 몸을 돌려 멀어지니 과연 기사의 소양은 가진 녀석이라.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빠르게 소식을 알려 적을 포위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임을 알기에 망설임없이 등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제 온 군대가 이 소식을 알게 되리라.

베른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큭, 한 놈 놓치다니. 서둘러야 합니다!”

“한 놈 놓치다니?”

“그야.”

시엔이 손가락을 들었다.

어느새 부쩍 멀어진 기사를 가리키자, 돌연 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기사가 팔다리를 저으며 땅 위를 헤엄치듯 허우적거렸다.

꺄하하핫. 어쩐지 아스라한 웃음소리가 바람결에 섞여 귓전을 맴돌았다. 끔찍한 악의가 담긴, 오싹한 여인의 소성이었다.

베른닐이 놀라 물었다.

“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잘.”

“······굳이 말씀하기 싫으시다면야. 뭐.”

어찌 되었건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기특한 태도라. 실력 말고는 이제 흠잡을 데가 없는 호위가 된 것 같다. 실력 말고는.

시엔이 웃으며 대답했다.

< 18. 남서남으로 진로를 돌려라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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