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남서남으로 진로를 돌려라 [1] >
던전 탐사가 끝났다.
꼭 갈 때보다 돌아올 때 일행이 늘어나는 것 같더라니. 이번에도 어김없이 일행이 한 명 늘었다.
전직 레인저, 제이든이 마차의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엔이 물었다.
“죽을 자리만 찾는다더니.”
“그 수로에서, 칼날이 바로 발아래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가더군요. 어떤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손에 무언가 잡히니 휘둘러 몸을 틀었습니다. 칼날이 가까스로 스쳤지요.”
시엔이 눈을 가늘게 떴다.
수로에서 손에 잡힐 것이 뭐가 있겠는가. 결국, 다른 이를 붙들고 늘어졌다는 뜻이었다.
“무언가라.”
“······피가 튀더군요. 뜨거웠습니다. 어떤 계산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이지요.”
“뭐. 비난할 생각은 없어. 산 자는 살기 위해 사는 법이니까. 제 죽음을 두고 타인을 살리라 강요할 수는 없지. 그래서?”
“문득 웃음이 나오더군요. 죽겠다는 놈이, 정작 죽음을 앞에 두니 두렵다는 게. 남을 죽이고 제가 살았다는 게.”
“그래서, 이젠 살고 싶어졌다?”
제이든이 제 까칠한 수염을 더듬었다. 계속해서 그렇게 턱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대답이 돌아온 것은 한참 후였다.
“······딱히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제이든의 어조가 평이했다.
담담히, 그저 사실을 말한 뿐인 투였다.
“그럼 왜 따라왔어?”
“도련님께서 필요하다 하셨으니까요.”
“호오.”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살아도 별거 없고, 그렇다고 죽기는 싫더군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필요하다 불러주는 곳에 가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럼 무어라도 할 테니까요.”
“뭐. 좋아.”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든이 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할 말은 다 했다는 뜻이었다.
시엔이 고개를 돌렸다.
그 옆에, 어쩐지 넋이 나간 여인이 한 명 앉았다. 시엔이 바라보자, 멍한 눈동자가 축축한 시선으로 마주쳐왔다.
눈에 말갛게 습기가 차오르더니, 이내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또로로 굴러떨어졌다.
“끅, 선배님.”
“넌 또 왜 질질 짜고 앉았어?”
“하지만, 우으.”
“차인 것도 아니고 네가 차 놓고는 왜 네가 울어?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하지만······. 끅.”
리치는 헤인트가 아니라 세올로 남았다.
세올의 눈시울이 벌겋다. 억지로 참고 있지만 놔 두면 꺼이꺼이 곡소리를 할 태세였다.
시엔이 혀를 차며 말했다.
“베른닐.”
“예?”
“덥지?”
“예? 지금 말입니까?”
겨울이 한참이니 더울 리가 없다. 베른닐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만 꿈벅거렸다.
“더우면 웃통이라도 좀 까.”
“예? 도련님, 그게 무슨······.”
“까라면 까.”
“뭐. 알겠습니다. 그 정도야.”
베른닐이 상의를 훌훌 벗었다.
그걸 얌전히 개켜 한 편에 정리하는데, 네모반듯하게 각이 딱 잡혔다. 어떻게 하면 옷을 접어서 저리 날카롭게 각이 서지?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빈 시간에 단련을 멈추지 않는 기사의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베른닐은 키가 크고 몸이 얇았다. 근육이 잔뜩 붙었으나 결국 그 체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세올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끅, 딸꾹. 어머머······”
세올의 얼굴이 아까와는 다른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부끄럽다는 듯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다만. 부자연스럽게 벌어진 손가락 사이, 두 눈이 음흉한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하여간 단순하긴. 시엔이 한숨을 푹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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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란디스령의 경계. 병사들이 던전 탐사를 마치고 돌아온 시엔을 마중 나왔다.
의외의 인물이 병사를 이끌고 나섰는데, 바로 재무관 로우드였다. 얘는 또 무슨 변덕인가 싶었는데, 알고보니 목적은 따로 있었다.
“비설 양! 무사하셨군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머리가 아파.”
“어, 어디 다치셨습니까?”
“아니. 너무 많이 자서.”
“저런. 너무 많이 주무셨군요.”
“응.”
저것도 지극 정성이네.
어쨌거나 던전 탐사는 꽤 성공적이었다.
시엔의 몫으로 보화를 한 궤짝 가득 받아냈고, 용의 이빨도 챙겼다. 용의 유골은 일단 그대로 두고, 나중에 몰래 챙길 방법을 강구해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용의 악령도 얻었다.
어린 용이라곤 하나 영혼의 강함 자체는 인간에 비할 수 없는 바였다. 아무리 시엔이라 해도 다룰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일단 단단히 봉인해 챙긴 것만 해도 큰 성과가 아닌가.
아직은 다룰 수 없으나, 언제까지고 불가능으로 놔두지는 않으리라. 그게 바로 마법사의 숙명이었으니.
조인의 산 깃털도 손에 넣었다.
거리를 초월해 그 생명력을 공유하는 깃털이니, 연구하면 흑마법 운용에 새로운 장을 열 수도 있으리라.
그 외의 소득도 있었다.
여름의 성야, 교단 본신전에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성야의 달 아래, 명예 성자의 칭호를 정식으로 부여할 예정이라고. 이는 곧 발표가 될 것이니, 머지않아 온 대륙이 다 알게 되리라.
어쨌거나 큰일을 했으니, 이제 한동안 놀고먹고 쉬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이제 겨울, 딱히 할 일이 없는 시기기도 하고.
던전에 있던 동안, 재미있는 소식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흐레이그의 후계자가 바뀌었다.
장남 페시번이 대공자 자리를 잃었으며, 차남 베사렌을 새로운 후계로 발표한 것이었다.
“뭐. 그렇게 되었나.”
“별로 놀라시지 않는군요.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뭐. 대충.”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만인 원정 때에, 흐레이그의 기사인 샹라가 대공자 페시번을 암살하려 하지 않았던가.
왕자가 책임권자인 원정에서 대공자가 죽는다. 그로 인해 왕실을 압박하고 나아가 정치적 실권을 쥐기 위한 장치로 쓰기 위해서였다.
버림패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후계로 차남을 찍어두었을 확률이 높았다. 페시번의 암살을 시엔이 막아내며 그 시도가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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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 사각. 글을 써 내려가는 시엔의 손이 자꾸만 멈칫거렸다. 글이 매끄럽지 않은 까닭이었다. 계속해서 손이 멈추니 시엔의 표정 역시 밝지는 않았다. 타인의 관찰은 쉬우나 본인을 들여다보기는 쉬운 것이 아닌 까닭이었다.
시엔이 글을 쓰는 것은 굳이 남기기보다는,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한번더 기억을 환기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이 또한 꼭 필요한 일이리라.
시엔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그러나 손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써나갔다.
순진무구의 의사놀이는 보편적 법칙과는 달리 제가 믿는 의술을 실제로 발현시킨 것에 불과하다 하겠다.
이는 소드 마스터와도 통하는 곳이 있어, 제가 믿는 이론을 실제로 끌어내는 작업이다.
그러나 그 치료 과정에서 두 관찰자의 법칙 충돌을 막기 위해 의식을 놓았다.
시술자의 개인적 견해와, 피시술자로서의 관찰이 달라 그 사이에 참사가 일어날 가능성을 막기 위한 것이니.
그러나 그런 이유로 대체 신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 수 없어 이 문서를 작성한다······
「개인적 법칙에 의한 치료와 그 부작용.」
체감하는 가장 첫 번째 변화는, 전체적인 체력 수준의 향상 및 여러 신체적 초월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크게 지치는 일이 없어졌다. 그러나 정확한 수치를 판단하기 위해, 그 체력적 한계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흠.”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도 발은 쉬지 않아, 기사단의 연병장을 계속해서 빙글빙글 도는 와중이었다.
시엔이 수련한다며 베른닐이 웃는 낯으로 곁을 지켜 함께 뛰었다. 한 바퀴가 열 바퀴가 되고, 열 바퀴를 한 세트로 벌써 열 세트에 달할 때쯤이었다.
“후욱, 후욱. 도련님?”
“뭐야?”
“후웁, 계속, 뛰실 겁니까?”
“벌써 지쳤어?”
시엔이 태연한 얼굴로 되물었다.
오히려 베른닐이 기가 막혔다.
“도련님? 후욱.”
“흠. 이상한데?”
“뭐가 이상, 후우. 안 되겠습니다.”
베른닐이 숨을 몰아쉬다,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놀랍게도 베른닐의 거친 숨이 잦아들었다.
“오러를 운용한 거야?”
“예. 보통 체력 단련 시에는 오러를 운용하지 않으니까요.”
“흠.”
“도련님? 혹시 오러를 깨치셨습니까? 숨 한번이 한 흐트러지시는군요.”
“뭐, 그렇다고 치자.”
시엔이 대충 대답했다. 어차피 설명해봐야 무용이니 알아서 이해하라 놔 두지 뭐.
이래서야 아무리 뛰어도 문제가 없다.
심폐 호흡에도 역치가 있는 법이라, 일정 수준 이상을 벗어나야 빠르게 소진되는 법이었다.
그저 천천히 걸을 뿐이라면, 세상 사람 모두 숨이 차 헉헉거릴 이유가 없다. 체력적 역치를 한참이나 밑도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현재 심폐 기능이 비정상적으로 발달되었다 판단해야 옳을 것이다. 그저 달리는 정도로는 그 역치에 닿지 않을 정도로.
그렇다면 전력 질주, 온 힘을 다 쏟아 내달려야 그 한계를 알 수 있으리라.
시엔이 힘껏 땅을 박찼다.
생각보다 더 빠르게 몸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니 당황해 다른 발을 뻗고, 또 앞으로 쭉 나아가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탁탁탁탁탁!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속도가 사뭇 위협적이라, 시엔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달리면서 자신이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해 넘어지는게 무슨 한심한 꼴이란 말인가.
그러자 베른닐이 다가와 말했다.
“도련님. 그렇게 뛰시면 안 됩니다. 오러 운용의 신체는 일반인과는 다르니까요.”
“그럼?”
“최대한 보폭을 넓히셔야죠. 달리는 게 아니라 번갈아 계속해서 멀리뛰기를 한다는 요령입니다만.” 시엔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른닐의 조언에 따라 다시 땅을 박찼다. 최대한 디딤발에 힘을 주어 몸을 밀어내고, 반대편 발을 뻗어 땅을 디뎠다. 그리고 또 그 반복.
연병장의 전경이 시원하게 스쳐지나갔다.
“상체는 좀 더 낮추시고, 예. 앞을 보셔야죠. 아직 뻣뻣하십니다. 좀 더, 뭐랄까. 다이빙? 앞으로 구른다는 감각에서 중심을 뒤로.”
베른닐이 따라붙어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러나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한 체술은 베른닐이 더 잘 아는 것이라.
배움을 청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 시엔이 순순히 그에 따랐다.
“예! 방금! 그게 맞습니다.”
“오. 훨씬 편한데?”
“그게 기본적인 움직입니다. 거기서 좀 더 요령을 부리면, 방향 전환이 자유롭게 되지요.”
“어떤 식인데?”
“이렇게입니다만.”
베른닐이 훌쩍 앞으로 내달렸다. 디딤발을 딛으며 발목을 축으로 돌리니, 두 발이 뜬 채로 몸의 빙글 반 바퀴 돌았다.
뒤이어 양발을 가지런히 모아 무릎을 굽히여 자세를 낮추니, 뒤이어 반대 방향으로 뛰어 시엔의 곁을 스쳤다.
“방금 어떻게 한 거야?”
“한번 더 보여드립니까?”
“응.”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움직여 아픈 곳이 없고 숨이 차지 않았다. 그러니 괴롭지 않고 그저 상쾌할 뿐이었다.
어쩐지 엘딘 그 늙은이가 매일같이 수련을 하자 조르더니. 저는 이런 경지에 있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권할 수 있었겠지.
시엔이 베른닐과 함께 강화된 신체의 운용에 열중하는 사이, 창공 기사단의 기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누구지? 시엔 도련님?”
“오러 운용 신체 강화 체술? 상당한 수준이신데?”
“왜, 그. 검위공께서 다녀가셨잖아.”
“아무리 제작년까진 검도 제대로 못 드셨는데. 아무리 검위공께서 가르침을 내리셔도, 단기간에 저 정도면 재능의 경지겠지.”
기사들이 구경하며 한 마디씩 던졌다.
“도련님은 그렇다 치고.”
“저 새끼만 대박났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도련님을 모신다고 할 걸. 나도 검위공께 가르침을 받았으면.”
“뭔 개소리야? 원래 쟨 재능이 있긴 했어. 그걸 안 쓰고 버리고 있었으니 문제지.”
기사들이 부러운 눈으로 베른닐을 바라보았다.
베른닐은 원래 재능이 있었다. 그러니 도박장에 매일같이 드나들고 술이나 퍼마시면서도 그 실력이 줄지 않았다.
그나마 실력이라도 있었으니 안 잘리고 남았지,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에 쫒겨났을 녀석이었다.
“무슨 일들이야? 수련들 안 해?”
“아가씨. 연병장에 선객이 있습니다만.”
“선객? 기사단 연병장에 선객이라봐야······. 세상에. 시엔? 쟤 시엔이야?”
카레네의 입이 떡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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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시번의 수난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공자 지위를 잃은것도 모자라, 이제는 약혼녀도 잃어버렸다.
흐레이그는 유르반 백작가에 파약을 신청했다. 대공자 페시번과 셜리 유르반 백작영애의 약혼을 무효로 돌리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르반이 파약을 받아들였다.
원래 흐레이그 공작가와 유르반 백작가는 약혼으로 맺어진 동맹 관계였다.
그리고 약혼이 깨진 지금은?
예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페시번의 파약과 차남 베사렌의 혼약 신청을 같이 보냈기 때문이었다. 유르반의 입장에서도 전 대공자보다는 현 대공자가 훨씬 기꺼운 일이 아니겠는가.
유르반이 파약과 혼약을 동시에 받아들이자, 페시번이 제 약혼녀를 동생에게 빼앗기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여러모로 모자란 놈이었다.
남의 연인을 빼앗더니만, 그걸 또 잘 간수하지 못하고 제 동생에게 뺏기다니.
시엔이 셜리를 떠올렸다.
자길 사랑해주는 사람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택했다고 했던가. 페시번은 몰라도, 적어도 셜리는 마음이 있었던 모양인데.
뭐. 알아서 할 일이지.
어차피 내 일도 아니니 상관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간 것이 얼마 전이었다.
왕국에 새로운 소식이 퍼졌다.
셜리 유르반 납치 사건이었다.
새로운 약혼자의 반지 교환을 위해 셜리가 흐레이그로 향했다. 그러자, 연인을 빼앗긴 데에 앙심을 품은 페시번이 야밤 중 셜리를 납치해 사라져버린 것이다.
흐레이그와 유르반 가문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둘을 제외한 모든 왕국의 귀족들은 다른 방향으로 해석했다.
가문의 억압을 피해, 사랑하는 남녀가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가문의 비호도, 귀족의 지위도 포기한 사랑의 도피였다.
그 증거로, 귀족 영애들의 티 파티가 여기저기서 동시에 열렸다. 이 재미있고 로맨틱한 사건에 대해 서로 떠들어보자는 신호였다.
떠드는 사람이야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지만, 두 가문의 입장에서는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특히나 흐레이그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제 가문을 방문한 약혼자 하나 지키지 못해 행방불명이오, 심지어 그 범인은 후계에서 밀려난 직계 혈족이었다.
그런 이유로 흐레이그에 총동원이 이루어졌다. 모든 종류의 군대가 움직여 길목을 막고 도시를 헤집으며 도망친 남녀를 찾아다녔다.
페시번의 얼굴이 길거리에 붙고, 그 아래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붙었다.
일거리를 찾던 용병들이 몰려들고, 일확천금에 농부며 장인들마저 항상 눈을 빛내며 주변을 돌아볼 정도였으니.
후작저에 예기치 못한 손님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도련님. 정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만.”
“뭔데?”
“도련님을 봐야 한답니다. 부랑자 한 명이 악을 쓰며 버티는데, 혹여 몰라 확인 부탁드린다던데요.”
“흠.”
“어쩌십니까?”
베른닐이 물었다.
부랑자라. 딱히 찾아올 사람도 없고, 부랑자라면 더더욱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찾는다면 이유가 있으리라. 부랑자라 해도 그게 내 영민이라면 한번 보아 듣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뭐. 일단 들여보내 봐. 이야기나 들어보지.”
그렇게 나타난 이는 꽤 비루한 꼴이었다.
여인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엔 때가 끼고, 손은 곱아 터지고 걸친 것은 걸레 더미에 가까웠다.
그러나 아는 얼굴은 아니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참이었다.
부랑자가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간절히 소리쳤다.
“공자님, 제발 아가씨를 도와주세요!”
“아가씨?”
“그, 여기 아가씨께서······.”
부랑자가 무릎으로 기어와 공손히 편지를 내밀었다. 이미 구겨짐이 심하니 편지보단 종이 뭉치에 가까운 꼴이었지만.
시엔이 편지를 펼쳤다.
「시엔에게.
셜리에요. 제가 이런 편지를 보낼 입장도, 염치도 없다는 걸 잘 알아요. 하지만 도와줄 사람이 한 명도 생각나지 않았어요.
시엔.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어요. 저번에 만났을 때처럼 아직도 낯선 사람인가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도와주세요.
흐레이그는 페시번을 찾을 생각이 없어요. 그들은 활을 쏘고 창을 들이밀었어요.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페시번의 목을 베어 제 가문을 달랠 생각 같아요. 게다가 괴물들, 온 사방에 괴물들이 널렸어요. 흐레이그가의 이상한 마법사들이 괴물을 부리고 있어요.
페시번이 많이 아파요.
화살을 맞았고, 상처가 곪아 열이 오르고 있어요.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신께서만 아시는 일이겠죠.
천신께서 보우하시길.
-셜리 유르반」
시엔이 안절부절 눈치를 살피는 하녀를 바라보았다. 볼품없는 꼴이었다.
흐레이그 영지에서 티란디스의 직할도시 체른노아까지. 가까운 거리가 아니니, 편지를 전하고자 여기까지 온 고초가 그대로 묻어나는 꼴이었다.
시엔의 시선에, 하녀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도련님, 제발, 제발 아가씨를 좀 도와주세요. 네? 제발······”
“유르반 영애가 좋은 하인을 뒀네.”
그래도 한 청년이 끝까지 붙들고 있던 여인이 아니던가.
이 몸뚱이의 이전 주인은 한심하기 짝이 없던 놈이었다. 그래도 한 청년이 제 순정을 다 바치고, 그 상실에 독을 마실 정도의 여인이라.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이였으리라.
하인을 보면 그 주인을 아는 법이었다. 이리 헌신적인 이를 두었으니, 그 주인의 성품 역시 알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상관 없는 여인이었다.
전 연인이라고 해도, 결국 지금의 시엔에게는 새파란 타인에 불과했다.
“그래서, 지금 둘이 어디에 있는지 아나?”
“도, 도와주시는 건가요? 세상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필요까진 없는데.”
셜리의 생각은 알 수가 없었다.
전 연인, 제게 헌신적이었던 청년을 떠올리고 도움을 청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영리하게도 이 구원 요청 자체가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는 것을 알고 보냈을 수도 있었다.
다른 가문의 혈족을 쥐고 있는 것은 상당히 큰 무기였다. 특히나 그게 전 대공자라면.
페시번을 티란디스에서 확보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일전을 벌일 수 있는 훌륭한 명분을 손에 쥐게 되는 꼴이었다.
흐레이그의 적법한 후계자가 티란디스에 망명했다. 그 후계자가 정당한 권리로 가문의 계승을 요구하니, 우리는 그를 도와 정의가 바로 서도록 힘쓸 것이다.
영지전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일왕자가 왕위에 올라 왕실을 등에 업게 되면, 아예 흐레이그 가문을 무시한 채 정식적인 작위 승계를 밀어붙일 수도 있었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페시번을 확보해 가주 자리에 올릴 수 있다면, 티란디스가 취할 이득은 금화 따위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엔이 결정을 내렸다.
“베른닐, 짐 싸. 오늘 밤에 출발한다.”
< 18. 남서남으로 진로를 돌려라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