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지키는 사람 안 지키는 사람 [7] >
진탕 퍼마시고 자리에 누우면 세상 이리 편안한 곳이 없다. 거의 기절하듯 잠드니, 이때만큼은 비로소 안식을 취한 것처럼 안락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안온함의 대가는, 잠에서 깨었을 때 치러야 하는 것이었다. 숙취. 제 몸을 챙기지 못한 끔찍한 업보다.
소수의 몇몇 축복받은 사람만이 이 업보를 피할 수 있었다.
“하암.”
시엔이 부스스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둘러보니, 이게 숙소인지 피난처인지 알 수 없는 꼴이었다.
무수히 뒤덮인 엘프들의 뉘인 몸 사이에서, 시엔이 잠시 덜 깬 정신으로 눈만 깜박거렸다.
어제는 뭘 했더라. 해가 뜰 때까지 마셨던 것 같은데. 지금은 또 몇 시고. 그나저나 잘 잤는데.
“뭔가 허전한데.”
시엔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쩐지 느껴져야 할 무언가를 잊어먹은 듯한 그런 느낌. 시엔이 한동안 그러고 있다, 다시 상체를 눕혀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게 무에 중요하랴. 체온이 적당히 달아올라 기분 좋은 나른함이 전신에 퍼졌다. 그러니 일단은 더 자야겠다 싶어서.
이내 숙소 안이 새근거리는 숨소리로 가득 찼다. 간혹 인간의 기사가 코를 골았지만, 술기운에 잠든 이들에게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오후의 햇살이 숙소 안으로 비치자, 엘프들이 하나둘 눈을 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난 엘프들이, 혹여 다른 이들이 깰까 살금살금 하나씩 자리를 비웠다.
붉은 노을이 숙소 안으로 파고들 때쯤이었다.
쾅. 문이 거칠게 열렸다. 역광을 타고 거친 방문자의 실루엣이 검게 비칠 뿐이었다. 그늘진 머리가 주변을 훑다가, 이내 한편을 보곤 딱 멈추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한숨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으니, 방문자의 것은 안도가 듬뿍 담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방문자가 주먹을 꽉 쥐었다. 과한 힘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이내 분노에 찬 목소리가 우렁차게 터져 장내를 뒤흔들었다.
“야!”
그 서슬에 베른닐이 벌떡 일어났다.
“저, 적습인가! 도련님!”
베른닐이 기세 좋게 검을 뽑아 앞을 겨눴다. 시도는 좋았으나 벽을 겨누고 섰으니 도대체 뭘 하고 싶은지 알 수 없는 꼴이었다.
“뭐야?”
시엔이 눈을 떠 무례한 방문자를 바라보았다. 역광이 비치나 그를 뚫고 얼굴이 선명히 보이니 기묘한 일이었다.
뷔아를 확인한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잘 자던 잠에서 강제로 깬 것도 그렇지만, 깨자마자 불쾌한 신성이 바로 앞에 있으니 두 배로 정신이 사납다.
시엔의 표정을 본 뷔아가 빽 소리질렀다.
“야, 이 나쁜 놈아!”
“뭡니까? 아침부터 시끄럽게?”
“아니, 어떻게, 사람이.”
뷔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몸도 같이 떨었다.
커다란 두 눈에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하자, 시엔이 그제야 당황했다.
“어. 음. 저는 아침 수련을 하러 이만.”
베른닐이 해질녘 아침 타령을 하며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아하하······. 수레가 도착했는지 모르겠네.”
“아. 오늘 나무 보러 가기로 했었잖아.”
“갑자기 산책이 하고 싶네.”
그러자 숙소에 남은 인원들 역시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사람이 어떻게······! 가면 간다 살았으면 살았다 말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혼자 쓱 사라지면 그뿐이에요?”
“어. 그게.”
“그렇다고 기운이 잡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짓을 했는지 이젠 아예 눈앞에 있어도 기척이 안 잡히네? 대체 뭐에요? 뭔데 이러냐구! 걱정하는 사람 속은 생각도 안 했지? 어떻게 이래!”
시엔이 아차 싶었다. 이건 내가 잘못한 게 맞지. 시엔이 얌전히 시인했다.
“음. 잘못했습니다.”
“잘못? 잘못한 줄은 알고? 그런 사람이 지금 이러고 있어? 아주 사방 천지가 다 술병이네. 술 퍼먹고 퍼질러 자는 동안 내 생각은······”
뷔아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내 생각? 뭔가 말이 이상하지 않나?
“으흠. 어쨌든 이러는 거 아니에요. 이러면 안 되는 거고.”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뷔아에게 걱정을 끼쳐 드렸군요.”
“아니, 누가 걱정했다 그래요?”
“방금 뷔아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아, 아니거든요? 누가 걱정을 했다 그래.”
“뭐. 알겠습니다.”
“아니, 알긴 뭘 또 알아요! 그거 아는 사람이 지금 여기 이러고 있었냐니까! 어쩜 다른 사람 생각은 하나도 안 하지.”
이거 잘못하면 루프에 빠지겠는데.
시엔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게. 음. 용을 좀 잡느라 말입니다.”
“용? 무슨 용이요?”
“용이 초대했더군요.”
“······자세히 이야기를 좀 해 봐요.”
무한 반복의 초입에서 일찌감치 탈출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시엔이 급히 이야기를 풀었다.
용의 수호자에 대한 이야기. 수호자를 뽑기 위해 용이 던전을 지었고, 시엔이 가장 적합하다 여겨 따로 불러냈다.
어찌어찌 사투 후에 용을 잡고 제 발로 기어나왓다고.
“용을 잡았다구요?”
“조금 애를 먹었습니다만.”
“어떻게요?”
“잘?”
“아니, 잘하고 자시고 간에 당신이 말하길 용이.”
“당신은 너무 가신, 아닙니다.”
뷔아의 눈이 희번득거리는 통에, 시엔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 꺼낼 말은 아니고.
“아직 어린 용이었습니다. 고룡이었다면 어림도 없었겠죠. 두 번쯤 죽을 뻔했습니다만.”
순진무구를 불러낼 때 한 번 위험했고, 용이 죽고 나니 순진무구가 남아 더욱 위험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사실 지금도 몸이 정상이 아닙니다. 어디 한 군데 제대로 된 곳이 없는 것 같은데.”
비정상적으로 뛰어난 상태였으니, 정상이 아니라는 말도 거짓은 아니었다.
“어디 봐요. 어디 아파요?”
“아시잖습니까. 신성은 오히려 제게 해롭습니다만.”
“그래서, 어떻게 된 거죠?”
“그래서 결국 뷔아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용이 죽었으니 아마 함정도 인형도 더 움직이지 않았을 겁니다. 맞습니까?”
“······어쩐지. 하아.”
뷔아가 허탈한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오히려 제가 물어야겠군요. 탐사는 어찌 되었습니까.”
“끝났어요. 결국 용의 소굴이었네요. 어쩐지 보화가 산처럼 쌓여있더라니.”
“보화 말입니까? 제가 나올 때는 못 봤는데.”
“용의 문 끝에 보물방, 그래 보물방이라고 했었죠? 그게 있었어요. 금붙이며 보석 따위가 한가득이더군요. 금화 수만개 정도는 족히 나올 양이에요. 그 뒤로 바로 출구가 있었구요.”
“바닥에 뚫린 거대한 수직갱은 못 보셨습니까?”
“그런 건 없었어요. 아마 시엔은 다른 출구로 나온 모양이죠?”
“과연.”
시엔이 눈을 빛냈다. 용의 뼈라고 하면 일단은 굉장한 보물이었다. 물론 연구가 거의 없으니 그 효능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애초에 인간이 용의 뼈를 가질 기회 자체가 굉장히 드물었으니까.
그 거대한 것을 전부 챙길 방도도 없고, 마탑 외 여러 세력이 얽힌 보상 구도에서 그걸 챙길 방법도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용의 이빨이나 뽑아 가방 가득 챙겨온 것으로 만족하던 참이 아니던가.
그런데 뷔아의 말대로라면 용의 유골로 통하는 통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마법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뷔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태워버렸어요.”
“그럼 교단의 적은······.”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아무리 적을 끌어내기 위함이라고 해도, 죽는 사람을 보고 싶진 않네요.”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가 그렇게 생각해 정했다면야 뭐.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이번 던전 탐사로 얻은 것들이 이미 쏠쏠하니 대가를 이미 톡톡히 챙겼다.
“흐아. 힘들다. 선배님, 아니 도련님! 이것 좀 보, 윽. 저 여자는 또 왜 여기······”
숙소의 문을 열며 경쾌하게 등장한 헤인트가 성녀를 보곤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뷔아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볼게요. 라이벵 경이 부상자 분들을 빼낼 구출대를 짜고 있어요. 금방 다시 들어가야 하니. 시엔은 몸이 정상이 아니라 하니 쉬고 있는 편이 낫겠네요.”
성녀가 자리를 떴다.
그러자 헤인트가 다가와 주머니를 내밀었다.
“선배님! 이거 보세요! 제대로 된 것만 챙겨왔습니다!”
“호오.”
주머니를 열자, 광채가 번뜩였다.
루비, 사파이어, 토파즈, 에메랄드······. 색색의 보석이 찬연히 빛나니 하나같이 투명하여 맑고, 제대로 색이 고른 것들이었다.
사실 보석의 상품과 하품을 구분하는 일은 꽤 숙련도가 필요한 일이었다. 보석의 질은 크기와는 별 관련이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에 한해선 보석 장인, 아니면 흑마법사가 바로 꿰뚫고 있었다.
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하니, 개중 좋은 것만 골라 챙겼으리라. 그러니 성녀가 들이닥치고서도 이제야 겨우 숙소로 돌아왔을 테고.
“선배님. 저 여자랑은 혹시?”
“혹시 뭐?”
“아니, 끝나자마자 어디로 급히 뛰어가길래 어디 가나 싶었는데요. 여기 와 있으니 말입니다. 혹시이······.”
“끔찍한 소리 말고.”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표정에 헤인트 역시 깨닫는 바가 있었는지 무안한 표정으로 헤헤 어색한 웃음만 머금을 뿐이었다.
“부탑주는?”
“방화광들을 챙기고 있어요. 확인만 하고 금방 온다고 했으니까······”
“슬슬 화염탑의 부탑주도 정리해야지.”
“예? 선배님?”
헤인트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만 꿈벅거렸다.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정리 안 하려고? 계속 둘이 붙어있을 생각이야?”
“어, 그럼 안 되는 건가요?”
“뭐?”
“아하하, 그게 말입니다. 선배님. 그 아이를 계속 곁에 둬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걸 말이라고 해? 넌 헤인트가 아니잖아.”
“그······. 안 들키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 아이의 실력도 보셨잖아요? 전력으로 꽤나 유용하기도 하고.”
“그건 그거고. 됐으니까 이제 정리해 놔. 괜히 따라붙지 못하게 확실히 못 박아 둬.”
시엔이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헤인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참이나 그렇게 가만히 서 있다, 이내 한 마디 겨우 내뱉고 말았다.
“······싫어요.”
“뭐?”
“저, 저는 못하겠어요. 어떻게 그래요? 그렇게 좋다고 달려드는데. 제가 얼마나 오랬동안 기다려 온······”
“좋다는 게 네가 아니잖아. 이미 불타 사라진 그 몸뚱이의 주인이지.”
“저는 상관없어요. 저는 괜찮으니까.” “신소리 말고 정리나 해.”
“하지만, 선배님도! 선배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왜 굳이 저만······!”
헤인트가 대들었다.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나랑은 다르지. 지금의 관계는 한참 전에 죽은 이 몸뚱이가 남긴 것이 아니니까.”
후작가의 애물단지 시엔은 이미 죽었다.
지금의 시엔을 보고 과거의 나약한 도련님을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지금의 시엔은 온전히 흑마법사가 이룬 것이었다. 받는 기대도 충성도 그 모두.
그러나 리치는 아니었다.
화염탑의 부탑주가 찾는 인물은 리치가 아니라, 이미 불타버린 헤인트였으니까.
“하나를 골라야 할 거야. 티란디스의 시녀 세올인지, 화염탑의 마법사였던 헤인트인지.”
“하지만 둘 다 할 수 있단 말입니다. 둘 다 할 수 있다고요. 알렌한텐 새 이름을 얻어서 살고 있다고 하면······.”
“알렌이 널 사랑하나? 세오르그 오스텐을 사랑하나? 네 몸뚱이를 보고 이전의 연인을 떠올리고 있는 것뿐이 아니라?”
“그건.”
헤인트가 입술을 꺠물었다.
“그건 상관없어요. 비록 그 아이가 이 껍데기만을 바라보고 있다고 해도······.”
“진실이란 결국 드러나게 되어 있는 법이야. 그때에 부탑주가 과연 널 이해해줄까? 아니면 제 연인의 몸을 빼앗을 괴물이라 생각할까?”
“선배님! 어떻게······!”
“네 것이 아니잖니.”
“하지만 어떻게요? 그 아이가 저를 보는 눈빛을 아시나요? 곧은 시선에 오로지 한 여인이 담겨 피하지 않는 마주침을 아시겠어요? 혹여 조금이라도 불편할까, 다칠까, 아플까, 세상 가장 귀한 보석처럼, 눈을 뗄 수 없는 간난아이처럼,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겨진다는
그런 감정이.”
“세올.”
“전 몰랐어요! 이태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책에서 읽은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구요.”
헤인트가 울먹였다.
“사람들이 절 보던 시선을 기억해요. 제 아름다웠던 언니를 볼 때와는 달랐어요. 사내들, 아니 사내들뿐만 아니라 그 부모라는 치들도, 하인들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요. 그 모멸을 아시겠어요? 그저 못난 외양을 타고났다는 것만으로 참아야 하는 그런 것들이요.”
“······.”
“그래서 결심했어요. 이 더러운 몸뚱이 때문이라면, 스스로 바꿔 보겠다고. 그래서 흑마법에 들어왔고, 아주 오랜 시간 아름다움을 위해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심장만 세상에 남아서도 계속. 계속이요.”
“세오르그.”
”날 사랑해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남들 다 하는 연애? 다 하는 일이 아니에요? 그게 제게 얼마나 절실했던 건지 아시겠어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제가 찾아 헤메던 가치, 그 가치가 이제 손에 들어왔는데!”
“그건 네 것이 아냐.”
“어떻게 그런 말씀을!”
바락 소리지르던 헤인트가 멈칫했다.
시엔의 시선 때문이었다. 따뜻하고 자상한. 그러나 딱하다는 듯 측은하고 연민 어린 시선이었다.
울컥 화를 쏟아내려던 헤인트가 멈칫했다. 그저 입만 뻐끔거리다,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차라리 경멸을 하세요. 속물이라고, 속여서라도 그 마음을 곁에 두고자 하는 병신이라 하시고 말면 될 것을.”
“곁에 둬도 괴로울 뿐이겠지. 부탑주가 정말로 너를 바라보나? 그 껍데기를 바라보며 이미 불타 사라진 과거의 여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너를 사랑하지 않는 이를 곁에 두고 네가 마음이 편할까?”
“알렌은 지금의 모습이 더 낫다고 했어요. 예전에 우울하던 그때보다 지금이 더 낫다고. 밝은 모습을 보니까 자기도 마음이 놓인다고.”
“글세. 부탑주도 꽤 한심한 놈이로구만.”
시엔이 기억을 떠올렸다.
셜리 유르반. 재림 전의 외톨이 도련님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한 여인. 유일한 희망이었으나 떠나,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독을 삼키게 만들었던 그 여인이 떠올랐다.
“재림 전 이 몸의 연인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래서요?”
“날 보고 묻더구나. 시엔은 어디 있냐고, 시엔에게 무슨 짓을 했냐면서. 내가 시엔이 아니라고 하더군.”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택했다고 말했던가. 그러나 결국, 셜리는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었음을 증명했다.
세상 오로지 한 사람, 변한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니. 적어도 독을 마시고 죽은 이를 세상 가장 깊게 이해하고 있었던 여인이었기에.
“탑주라는 놈도 결국 그 정도인 거야. 변한 모습이 더 좋아? 그럼 예전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그건······.”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도, 너는 그걸로 괜찮겠어? 부탑주가 널 바라보는게 아니라도?”
“하지만, 하지만······.”
시엔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 몸은 이제 네 것이다. 네가 원하던 아름다운 육신이기도 하고.”
“저는 모르겠어요. 제가 아름답나요? 저는.”
“그러니 굳이 네 것이 아닌 것을 가지려 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히 찾을 수 있을 테니까.”
“······.”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강요는 하지 않겠어. 사실 반푼이 흑마법사보단 화염탑의 부탑주를 부려먹는 게 더 남는 장사기도 하고.”
“반푼이라니요, 이 세오, 헤인트는 그래도 한 번 죽음을 극복한······.”
“화염탑의 부탑주에 비하면 반푼이가 맞지. 축복을 타고난 녀석이니까. 불의 축복.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테고. 널 볼모로 아래 두고 부려먹으면 편리하겠지.”
헤인트가 살아있는 것이 전부 자신의 덕이고, 생명이 종속되어 있다 말하면 그만이었다.
종속. 시엔이 죽으면 리치가 따라 죽고, 시엔의 의지로 리치의 목숨줄을 언제든 끊을 수 있는 그런 관계였으니까.
그렇게 말하면 부탑주는 이를 갈지언정 후작가의 마법사로 얌전히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데도 굳이 정리하라 말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그러나 네 뜻이 정 그러다면, 나 또한 그 선택을 존중하겠다. 하지만, 후작가의 하녀 세올이 굳이 그딴 애송이에게 목을 맬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네. 좀 푼수에, 음흉하고 호색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좋은 사
람을 만난 수 있으리라 생각해.”
“저는······.”
헤인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 17. 지키는 사람 안 지키는 사람 [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