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죽어 죽지 않아 같으나, 또한 다르다 [5] >
드르렁. 코 고는 소리에 시엔이 깨어났다.
눈을 뜨니 낯익은 천장이다.
가면 없이 맨눈으로 보는 제 방의 천장이었다. 반가운 일이나 그도 그뿐. 타의로 깬 몸이 여기저기 시큰하니 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드르렁! 또다시 코 고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진원지는 가까운 곳이었다. 시엔이 고개를 돌렸다. 밝은 밤색의 머리카락 아래로 연신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아대니.
의자를 하나 끌어다 앉고는, 남의 침대에 팔을 포개 그 위에 머리를 처박은 이였다.
시엔이 입을 열었다.
“베른닐.”
드르렁. 대답 대신 숨 막히는 소음이 되돌아온다. 시엔이 주먹을 쥐어 쿵 쥐어박았다.
“왁, 뭐, 뭡니까!”
“남의 침대에서 뭐야?”
“아, 도련님! 깨어나셨군요!”
“입가에 침이나 닦고······ 젠장.”
베른닐의 입가에 침이 주륵 흘러내렸다.
시엔이 급히 침대를 살피며 욕설을 삼켰다. 아닌 게 아니라 침대보 위로 짙은 얼룩이 선명했다.
졸고 있던 게 아니라 침을 짜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하인을 시켜 제대로 빨아놓으라, 아니 아예 새 걸로 들여놓으라고 할까.
“머리야······.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시엔이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여기 온 것이 사흘 전이니, 이제 보름 좀 넘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걱정?”
시엔의 시선이 침대보를 향했다. 졸며 흘린 침이 아예 호수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베른닐이 어색한 헛기침을 내뱉었다.
“흠흠. 그래도 제가 사흘 밤을 꼬박 새우며 도련님 곁을 지키지 않았겠습니까. 사흘까진 어찌 견뎠는데, 그 이상은 저도 좀.”
“흠.”
“진짭니다.”
베른닐의 표정이 진지했다.
시엔이 표정을 풀었다. 뭐. 어쨌거나 걱정되어 곁을 지켰다는데야. 내 침대에 침을 흘린건 아무래도 용서하기 좀 그렇긴 해도.
“뭔가 거슬리는데······”
시엔이 무언가 좋지 않은 기분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내 눈썹 사이로 골이 패였다.
“저건 또 뭐야?”
“아! 성녀님께서 주고 가신 물건입니다! 세상에, 성녀님입니다! 제 눈으로 직접 봤지 말입니다! 소문이 사실이더군요. 정말 아름다우신 분이었습니다.”
“그래 봐야 뭐 할 거야? 여자 얼굴 뜯어먹고 사는 거 아니니까 얼굴에 혹하지 말라면서?”
“그렇긴 합니다만. 흠.”
베른닐이 전처와 두건을 통해 얻게 된 교훈이었다. 그 교훈을 세상의 절대적 진리라도 되는 양 설파하던 베른닐이 아니었던가.
“······그 정도 미모라면 성질이 좀 더러워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허용 범위죠.”
“내가 봤는데, 성질이 아주 더럽던데.”
“예쁘지 않습니까? 그 정도는 참고 살 수 있을 겁니다.”
“매일 얻어맞고 살 텐데?”
“지금도 매일 얻어맞으니 맷집엔 자신 있습니다.”
“검위공은 그래도 어디 터지고 부러질 때까지는 안 패잖아. 걘 일단 패고 치료하고 또다시 팰 거야.”
“에이. 농담이 심하십니다. 성녀님 아닙니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은데.
어차피 믿을 것 같지도 않거니와, 성녀가 베른닐에게 구애할 일은 세상이 망하고 다시 서 같은 역사가 수만번을 반복해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그래서, 저게 뭔데.”
“성물이죠.”
“저게 왜 여기 있는데?”
“도련님의 치유를 도울 거라 하시더군요. 대신전의 성물이니 깨어난 후에 신전으로 반납하라 하셨습니다.”
“그 옆엔?”
“저도 모릅니다. 도련님 물건이라 하시던데요?”
“······꽤 고역이었겠는데.”
“예?”
시엔이 혀를 쯧쯧 찼다.
책상에 놓인 천신의 신상은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신전의 성물에도 급이 있으니, 맨눈으로도 희미한 신성이 깃든 것이 보일 정도라 보물 중의 보물이리라.
그 옆에 나란히 선 머리통만 한 유리병. 리치의 보존구였다.
신성을 뿜는 성물 옆에 리치의 심장이라니.
아마 계속해서 심장이 꿰이는 고통에 시달렸으리라.
뭐. 그리 당해도 할 말이 없는 녀석이긴 했다.
어찌 보면 요행이나마 큰 행운이리라.
교단에서 가져가 보관할 줄 알았건만, 의외로 시엔의 손에 계속 쥐어둔 모양.
곁에 성물을 두지 않았다면 리치가 구현화한 신체로 제 보존구를 들고 도망을 쳤으리라.
“됐고. 내가 자고 있었던 동안 어찌 되었는지나 좀 말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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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에서 성전을 선포했다.
교단을 노리는 적에 맞서 모든 교도가 한데 뭉쳐 싸울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딱히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은 아니었다.
적에게 보내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적의를 알고 있으며, 교단이 그에 굴하지 않고 싸울 것이라는 그런 메세지를 내보낸 것이다.
그와 함께 이번 역병 사태가 주적에 의한 공격이라 선포하여 희생자 모두 성전의 용사로 대신전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고.
별개로 다른 발표도 있었다.
시엔 티란디스는 하우드란드의 역병 사태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고.
천신의 계시를 받아 성흔을 새겨 나아가 대적하니, 성녀와 교단의 군세와 함께 사악한 무리를 해치웠다.
이에 이례적으로 명예 대주교로 임명하니, 성사에 뜻이 없는 자이나 그 신실함이 모두를 감동시켰기 때문이라.
“······내 살다 명예 대주교는 처음 들어 보는구먼.”
“명예 성자가 될 뻔한 걸 최대한 낮춘 결과라던데요.”
“성자면 성자지, 명예 성자는 또 뭔가?”
“그러게요.”
“여튼 건강한 것 같아 내 한숨 놓았네. 오래 누워 있으니 찌뿌둥하니 몸이 근질근질하지 않나? 그럴 때 대련 한 번이면 싹 낫네만은.”
“일 없습니다.”
“쯧. 굴러온 복을 발로 차 버리는구만.”
“암만 복이라도 저 싫으면 그만 아닙니까.”
“하여간 말로는. 일 없네.”
엘딘이 토라져 밖으로 나갔다. 사내는 늙어도 애나 마찬가지라더니 딱 그 짝이 아닌가.
‘그건 그렇고.’
시엔이 책상 위의 보존구를 집어들었다.
“이제 슬슬 대화할 때인 것 같은데.”
그러나 허공에서 돌연 재가 모여들어 해골의 형상을 취했다. 바닥을 디디고 선 해골이 온기없는 목소리를 냈다.
-크흑. 비열한 놈! 이 세오르그 오스텐을, 위대한 흑마법사를 감히 이리 붙잡고 고문을 하다니!
“고문? 무슨 고문?”
-성물을 옆에 두고 내 심상을 상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더냐! 이미 나 세오르그 오스텐의 목줄을 쥐었거늘, 어찌 그리 무도한 고문을 가한단 말이냐!
“내 의도는 아니었는데. 뭐. 그렇다고 네가 대접받을 처지도 아니잖아?”
-큭.
“자. 몇 가지 물어보자고, 그럼.”
-내가 순순히 대답할 것 같으냐?
“자꾸 뻗대면 손이 미끄러질지도 모르는데?”
시엔이 보존구를 들어 보였다. 리치가 어림없다는 듯 나지막이 웃으며 대답했다.
-큭큭, 그러한 협박인가? 어서 물어보아라.
“너, 어지간히 살고 싶은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다. 산 것은 모두 살고자 하지 않은가. 나 세오르그 오스텐, 비록 어리석은 선택으로 이 꼴이 되었으나 살고자 하는 것에 어떠한 부끄러움도 없다.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한때 리치가 되어 육신을 초월하여 마도의 끝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그건 틀렸다. 이 세오르그 오스텐이 틀린 것이다. 육신이 없는 삶이란 결국 삶이 아니었다. 무엇을 만져 느끼지 못하고 무엇을 먹어 맛을 모르니 모든 것이 허망할 뿐이다.
“리치가 된 것을 후회한다? 뭐. 다들 그러더라고. 그래서 다 죽어가는 늙은이가 아니면 별로 리치가 되는 이가 없지.”
자신을 잃어간다는 부작용은 너무나 큰 것이다. 천 년 전에도 그 두려움 때문에 리치가 되는 이가 얼마 없었으니.
리치가 된 이도 점차 제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쯤 스스로 보존구를 파괴하곤 했다.
리치의 화법에 유달리 제 이름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름을 잃어버리는 것이 곧 존재의 소멸이기에.
“자. 그럼 어디서부터 대화를 해 볼까.”
-그 전에 이것부터 말해두어야 할 것이다. 나, 세오르그 오스텐은 네 비열한 협박에 굴하여 대답하나, 그것이 과연 진실일지는 장담할 수 없으니.
“거짓말을 하시겠다? 손이 미끄러운걸?”
-크큭. 이 세오르그 오스텐이 네게 의심의 씨앗을 심었다. 나는 성실히 대답할 것이나 그것을 믿을 것인지는 네게 달린 일이 아닌가.
“혓바닥이 간교한 이로구나.”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리치의 말이 맞았다. 리치가 거짓을 말해도 시엔이 그를 어찌 알아차리랴. 이미 리치가 제 말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고 말했으니 그 의심을 어찌 떨칠 수 있을까.
“그럼 심원에 맹세라도 하지 않겠어? 진실만을 말하겠다 심원에 약속한다면 아무리 너라 해도 거짓을 말할 수는 없겠지.”
-크크, 강요된 맹세가 어떤 효력이 있겠느냐. 너 역시 알고 있는 바가 아니냐.
“나도 알아. 그냥 한 번 해본 말이야.”
-그러지 말고 나를 놓아주어라. 그리한다면 나 세오르그 오스텐은 기꺼이 맹세하마. 남은 평생 너와 관계없이, 아주 먼 곳에서 조용히 마도에 정진하며 살겠다. 너와 나 모두 심연을 바라보는 이가 아닌가. 동도의 정을 베풀어다오.
“내가 왜?”
-합리적으로 생각해다오. 나를 강제하여 데리고 있다 하여 네게 어떤 쓸모가 있지 않으니, 차라리 놓아주어 상관없는 이로 살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난 정보가 필요해. 누군가 나를, 내 영지를, 내 영민을 해하려 했다. 어떤 놈이 어떤 수작을 어째서 부리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닌가.”
-나 세오르그 오스텐. 은혜를 아는 자다. 네 놓아준다면 그 은혜로 평생 은둔하여 더는 상관하지 않겠다. 허나 네게 진실을 말하여 내 은인이 상한다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느냐.
“네 은인이라. 배신은 못 하겠다?”
-나 세오르그 오스텐은 그러한 이다!
“아. 손이 미끄러지려고 하네. 이래도?”
-의심의 씨앗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시엔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리치. 네가 내 물음에 진실로 성실히 대답한다 맹세한다면, 나 역시 네 것을 기꺼이 돌려주리라 심원에 맹세한다.”
-······나 세오르그 오스텐을 속이려 하지 마라! 언제까지 네 물음에 답해야 하는가! 평생이라 하여 날 묶어둘 셈이던가.
“그럼 아무리 길어도 오늘까지로 하지.”
리치가 턱뼈를 다물었다. 한동안 침묵하며 서 있던 리치가 말문을 튼다.
-나 세오르그 오스텐. 심원에 걸고 맹세하니, 시엔 티란디스의 질문에 진실로 응할 것을 맹세한다.
“바로 배신이네?”
-크큭. 애송이. 너야말로 내 함정에 걸린 것이다. 이 세오르그 오스텐, 은인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시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른다고?”
-그러하다. 은인께서 인세에 다시 없을 아름다운 분이시라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모른다.
“뭐가 아름다운데? 얼굴이?”
-얼굴은 모른다! 허나 그 영혼을 느끼어 안다! 세상 가장 아름다운 이임에 틀림없다.
“개소리 말고.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이였다. 흑마도에 막혀 좌절하는 이 세오르그 오스텐에게, 은인은 홀연히 나타나 성물을 내어주었다. 추후 그 힘이 필요할 때에 사람을 보내겠다 하여. 어느 날 그 버르장머리없는 소드 마스터가 내게 도착했다.
“그래서 역병을 짜 풀어놓고 교단을 유인해 공격했나?”
리치가 두개골을 끄덕였다.
“왜?”
-모른다. 받은 은혜를 갚은 것뿐. 어째서 그러한 일을 벌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은인이란 치가 벌인 일은 확실하고?”
-그렇다! 허나 그 외에 아는 것이 없으니, 네게 진실로 대답해도 네가 얻는 것이 없구나! 크크큭! 허나 너 역시 맹세하였으니, 내 보존구를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안되었다, 애송이! 이것이 바로 세오르그 오스텐의 지략이다!
리치의 말대로였다.
시엔 역시 맹세를 했다.
강대한 마법사일수록 제 말에 책임이 따르니, 말이 곧 얼어 역사가 되기 때문이라.
“좋아. 그럼 다른 질문을 해 보자. 그 성물이란 게. 여기 네 보존구에 든 뼈를 말하는 거지?”
-그렇다. 바로 그것이 은인께 받은 것이지.
“내가 아는 성물은 이런 게 아닌데.”
-교단의 물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유해. 한때 가장 멀리에 이른 흑마법사의 것이다.
“그래서, 이게 어떤 작용을 하는데?”
-그것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마법의 촉매다. 음차원 에너지로부터 아케인의 네 가지 마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마법에 통하여 강력한 지배력을 가진다.
“흑마법사의 것이라며? 그런데 아케인 에너지를 다룬다고?”
-크큭, 어리석은 애송이! 그러니 성물이라 칭하지 않느냐!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거지. 애초에 뼈에 깃든 음차원 에너지는 그리 많은 양도 아니고.”
-그것이 바로 성유해의 가치다! 오랜 시간의 원념이 깃든 기적이다! 그는 죽어 사라졌으나 남은 것이 초월하여 신에 이른 것이다!
리치의 설명이 이어졌다.
천 년 전에 강대한 흑마법사가 있어, 단신으로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시엔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부분이라 굳이 더 들을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흑마법사는 죽어 악신이 되었다.
대륙 모두가 두려워하여 역사에서 지워버리고자 할 정도의 끔찍한 존재로 여겨졌다.
인간이 부리는 모든 기적은 결국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
마법사는 세계를 넘어 다른 힘을 부렸다.
사제가 신을 믿어 신성을 피워냈다.
소드 마스터가 제 믿음에 기이한 검술을 부리는 것이 모두 한데 정신의 힘이었다.
그러니 온 대륙 모든 인간의 정신이 하나로 두려워하니 그것이 모여 새로운 힘을 창조했다.
“흠. 그럴듯한 가설인데.”
물론 가설이었다.
직접 보아 관측한 것이 아니니.
그러나 앞뒤가 맞고 타당한 가설이었다.
-그가 이제는 지워져 기억하는 이가 몇 없다. 그러니 성유해는 더이상 탄생할 수 없는 천고의 보물이라. 내 이를 받아 단숨에 경지에 올랐으니 어찌 은인이라 하지 않겠는가.
“좋아.”
시엔이 고개를 끄덕이며 보존구를 내밀었다.
“자. 맹세는 지켜야지. 네 것을 돌려줄게.”
-크큭. 얻은 것도 없이 내게 보존구를 돌려주는구나! 너무 분해하지 말거라, 젊은 흑마법사. 이것이 바로 세오르그 오스텐의 연륜이란 것이니.
리치가 제 보존구를 들고 득의양양하여 말했다.
“그래서. 이젠 뭘 하려고?”
-나 세오르그 오스텐. 은혜와 원한을 절대 잊지 않는다! 네가 이 위대한 몸에게 치욕을 주었으니, 나 역시 같은 값을 치루게 할 것이야!
“역시. 그렇게 나오나.”
리치가 점차 흐릿하게 변하여 사라져갔다.
그 와중에도 턱뼈가 쉬지 않으니 계속해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 가장 행복한 때에 내가 돌아와 절망을 선사할 것이다! 두려워라하! 이 세오르그 오스텐을 두려워하라! 크큭, 크하하하핫! 크하하학! 으억!
털썩. 리치가 돌연 무릎을 꿇었다.
속이 훤히 빈 제 흉곽을 부여잡으며 고통에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보존구를 좀 봐.”
리치가 보존구를 들어올렸다.
쿵쿵 뛰는 리치의 심장. 손뼈가 심장을 꽉 쥐어 압박을 가했다. 그 힘이 사뭇 강력했다.
-흐억, 어째서, 성물이, 성유해가!
시엔이 리치를 내려다보았다.
시엔의 눈에 어둠이 서렸다.
-네놈, 무슨 짓을. 큭. 하였느냐! 맹세를 하지 않았느냐!
“맹세는 지켰다. 리치. 네 것을 온전히 돌려주지 않았느냐.”
성물이란 결국, 천 년 전 강대한 흑마법사의 신체 일부였다. 누군가 가져가 제 것이라 우긴다 한들, 그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는 자명한 일이 아닌가.
그러니 시엔은 맹세를 지켰다. 리치의 보존구를 돌려주었으나, 그 안에 든 것에 자신의 뼈가 있었다.
“천 년 전. 흑마법사의 이름을 아느냐? 지워져 그 누구도 알지 못하니 너 역시 알지 못하겠구나.”
-무슨 소리를······
“그러나 나는 안다. 천 년 전. 흑마법사가 죽음에 이르러 말하길 재림할 것이라 하니 또한 그 역시 이루어졌다. 그러하니 내가 누구더냐.”
시엔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었다.
감춰둔 정신 세계가 그를 통해 드러난다. 일곱 허수 차원에 닿아 깊이가 대양보다 깊으며 넓이가 대륙보다 넓으니.
-너, 아니, 당신, 당신께서는······
리치의 몸이 덜덜 떨렸다.
흑마법사가 어찌 그를 보고 모를 수 있을까. 제가 그 끝이라 상상했던 막연한 경지를 아득히 초월한 저 너머의 어딘가.
-재림, 재림하시어, 당신께서.
뼈뿐인 몸이 떨려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내 살며 배우기를 내 사람을 지키며 적을 태워 해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네가 내 적을 자처하는구나.”
-자, 자비를······
“그러니 내가 베풀 자비는 없다.”
보존구 안의 손뼈가 주먹을 쥐었다.
리치의 심장이 짓눌려 부풀다 이내 갈래갈래 찢어져 맥없이 떠오른다.
-안 돼······. 죽고 싶지 않아······
리치의 몸이 바스러져 흩어지기 시작했다.
저번엔 거짓으로 연출하였으나, 이번엔 명백한 죽음의 전조였다.
마침내 허우적거리던 해골이 스러져 자취를 감췄다. 뼛가루마저 녹아 사라지자 더는 남은 것이 없었다.
그저 미약한 리치의 음성만 남았다.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고······
리치의 음성이 이어졌다.
-나 세오르그 오스텐이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질 수는 없다. 이래서는 안 되는 일이며 이럴 수도 없거늘······.
죽는 순간에 말이 많은 녀석이네.
시엔이 그리 생각하는 참이었다.
-좀 더 살고 싶었다. 이미 죽은 몸이나마 살아 언젠가 마도를 이뤄 다시 육신을 얻기를 바랬다. 육신을 얻어 못 이룬 것을 이루고 싶었는데. 그 소망이 여기서 스러지는구나. 아아. 어째서 운명은 이 세오르그 오스텐을 이리 가혹하게 내칠 수 있단 말인가.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 그리 많아?”
-아아······
리치의 음성이 탄식을 마지막으로 그쳤다.
별 이상한 놈이 다 있구만.
시엔이 혀를 차며 보존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 것이 내게 돌아와 원래 자리를 되찾으리라.
보존구 안의 손 뼈가 흐물흐물 녹아 사라졌다. 검은 기운이 되어 병을 통과해 시엔에게 날아들었다.
음차원 에너지가 차올랐다.
천 년 전 경지에 비하면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양이나, 지금의 신체에선 단숨에 한 단계를 건너뛸 만큼은 되었다.
“음?”
그 속에 불순물이 섞였다.
이질적인 것이 딸려 들어와 정신 세계에 자리를 잡았다.
타인의 영혼이다.
마치 제자리인양 자연스레 자리를 잡았다. 원래 거기에 있던 것처럼 아무런 위화감이 없다.
처음 보는 이의 영혼이다.
빰이 홀쭉하니 마르고, 얼굴이 그러니 신체는 어떠하랴. 앙상한 꼴을 한,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의 영혼이다.
그런데 그 영혼이 왠지 익숙하다.
-어. 음. 여긴 정신 세계인데. 아! 혹시 당신께서, 저 세오르그 오스텐을 살려주신 겁니까?
시엔이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뭐야? 넌 또 왜 거기로 들어가 있어?”
< 12. 죽어 죽지 않아 같으나, 또한 다르다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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