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죽어 죽지 않아 같으나, 또한 다르다 [4] >
교단의 군세가 줄고, 그나마 남은 이들의 신성도 미약했다. 모두 선량한 이들이라 시엔의 속이 편하지 않다.
그와 별개로, 신성이 숨을 죽이니 음차원 에너지가 이제야 겨우 살겠다 기지개를 켠다. 오래 억눌려온 마력이 퍼져나가니 그 감각이 예리하기 짝이 없다.
그 가운데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쪽인가.’
시엔이 숲을 헤치고 나아갔다.
키엑, 키이······. 바르키아올이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시엔에게 다가온다. 부정 세계의 마수는 그 많던 다리가 절반이 남지 않았다. 그래도 그 숫자가 여섯이라 다리를 굽혀 몸을 부비며 애교를 떤다.
“그래. 너도 수고했지. 조금만 더 고생하자.”
시엔이 바르키아올을 달래며 그 위에 올라탔다. 감각에 잡히는 것을 따라 움직이니 멀지 않은 곳에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이 이미 썩어 검고 질척하다. 호수가 아니라 독 늪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바르키아올이 들어가 다리를 연신 휘둘렀다.
이내 머리통만한 유리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탁한 액체가 가득 차 내용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마 저 안에 심장 아니면 두뇌 따위의 신체 부위가 들었으리라.
리치의 보존구였다.
“그건 내려 둬.”
뒤이어 바르키아올이 질척한 덩어리 하나를 꺼내들자 시엔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역병 둥지는 밖으로 나오면 상하는 것이니, 의사들이 와 제대로 채집할 때까지 놓아둘 셈이었다.
“음?”
시엔의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차원 에너지가 가득 담긴 보존구였다. 흑마법사인 자신이 익숙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뭔가 다르다.
더 익숙하기도 한. 뭐라고 할까.
뭐. 리치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고.
시엔이 바르키아올을 바라보았다. 충직한 마수가 수백의 눈동자를 한데 모아 시엔을 바라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좋아. 수고했어.”
심장에서 음차원 에너지가 풀려나왔다.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지나 증폭되어, 현상 세계에 검은 안개가 되어 풀려나온다.
음차원 에너지가 바르키아올에게 스며들었다.
잘린 다리에서 긴 것이 매섭게 솟아나니 순식간에 자라 본 모습을 되찾았다.
그뿐이랴. 바르키아올의 몸통이 쑥쑥 자란다.
커다란 한 개의 눈동자에 핏줄이 오르며 위아래로 팽창하고, 그 속의 무수한 눈동자들이 따라 커진다. 그리하여 남는 자리에 작은 눈동자들이 눈을 떠 새로이 자리를 잡는다.
키엑! 키에엑!
바르키아올이 몸을 떨며 괴성을 내질렀다. 기쁨에 겨워 내는 소리였다.
가면 속, 시엔의 안색이 창백했다.
남은 모든 음차원 에너지를 전부 바르키아올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니.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만일을 위해 꼭 비워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헛수고라면 좋겠지만. 글쎄.
“그럼 이제 돌아갈래?”
바르키아올이 제 몸통을 흔든다.
부정 세계의 지독한 환경보다야 현상 세계가 안온하니 마수야 당연히 돌아가고 싶지 않다.
어차피 지금이야 억지로 돌려보낼 방법도 없다. 제가 알아서 돌아가면 모를까, 억지로 되돌리고자 하면 음차원 에너지가 필요하니.
마력을 완전히 비웠으니 지금은 될 일이 아니다.
“좋아. 대신 숲 밖으로 나와선 안 돼. 인간을 공격하는 것도 금지. 알겠지? 마물을 잡아먹는 건 좋지만, 폭식했다간 씨가 마를 테니 적당히 하고. 알겠지?”
키엑! 바르키아올이 기세 좋게 몸통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좋아. 계약에 따라, 넌 자유야.”
바르키아올이 다리를 놀리며 기이하게 움직인다. 제 딴에는 춤을 추는 것이리라. 그렇게 한동안 덩실거리던 부정 세계의 마수가 슬그머니 수해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진다.
시엔이 손에 든 보존구를 내려다보았다.
리치의 명줄도 손에 넣었고, 역병의 본 둥지도 찾았으니 치료제도 금방 만들어지리라.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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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이 없는 신체가 무겁기만 하다.
시엔이 다시 야영지로 돌아오자, 반가운 마음이 앞서 칼끝이 되어 돌아왔다.
“역시.”
시엔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리되지 않았으면 했는데. 허나 어쩌랴. 저들도 인간이니 의심이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시엔 티란디스. 당신을 압송하겠어요.”
뷔아가 말했다. 늘씬한 팔 한쪽을 통째로 드러낸 파격적인 복장이었다.
“압송이라. 죄목이 뭔데?”
“당신이 죄인이라는 뜻은 아니에요. 다만 이 일련의 사태에서 당신이 보여준 능력 때문이죠.”
기괴한 마수를 부리며, 사악한 기운을 휘둘러 죽은 자를 움직이니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난 최선을 다했어. 네가 바로 증인이잖아? 누구 덕분에 지금 그러고 서 있는지 알지?”
“그건······.”
뷔아가 움찔 몸을 떨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애써 시선을 피하며 애먼 곳을 응시한다.
그러자 라이벵이 한 발 나서 말했다.
“시엔 공자님. 당신께 해를 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교단의 적이 나타났어요. 공자님께서 부리시는 능력이 이와 비슷하니 참고를 얻고자 할 뿐입니다.”
“뭐. 이해해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라이벵의 태도는 공손했다.
그러나 교단의 속한 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은혜를 입어 개인에겐 구명의 은인이나, 성기사의 의무가 그 앞에 서니.
시엔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성녀가 정신을 차려 원기를 회복하니, 그 신성이 퍼져 모두 온전히 서서 시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성기사들은 검을 쥐고, 사제들의 손엔 신성이 어렸다.
뷔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부디 협조를 부탁드릴게요. 제 이름을 걸고 최대한 편의를 봐 드리리라 약속드리겠어요.”
“내가 그러지 않겠다면?”
“······그러하실 생각이신가요?”
“사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 나는 그렇게 애를 써서 구하고자 했는데, 그 결과가 이러면.”
“그건. 죄송합니다. 진심이에요.”
문득 옆구리에 낀 리치의 보존구가 가늘게 떨려온다. 시엔이 양손에 쥐어 바라보니, 병 안에 가득하던 검은 액체가 요동을 치며 그 수위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무슨 짓을!”
“시엔 공자님!”
뷔아와 라이벵이 안타깝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시엔이 손을 내저었다.
“잠깐. 이거 내가 한 거 아니거든?”
“그게 무슨······”
푸스스스! 순간 땅이 떨리고 나무가 부대껴 거친 소음이 장내를 휩쓸었다. 뒤이어 거대한 목소리가 이어지니 그 성량에 바람이 일 지경이었다.
-감히! 감히이! 필멸자 주제에 이 위대한 세오르그 오스텐에게 치욕을 주느냐! 내 절대 용서하지 않으니 그 영혼을 거둬 영원한 고통 속에 빠뜨릴 것이다!
거대한 해골의 상반신이 몸을 일으켰다. 왕성의 가장 높은 첨탑도 저 반절에 이르지 못하리라.
수해의 거대한 나무조차 미물로 만드는, 실로 압도적인 크기의 적이 솟아올랐다.
그 두개골엔 삐죽하니 두 뿔이 서고, 눈구멍엔 검은 불길이 이글거리니 어둠 속 더욱 어두운 빛을 뿌렸다.
리치의 신체란 허상이며 곧 현실이니, 본신의 마력을 사용하여 만들어내는 것이다. 보존구의 음차원 에너지마저 끌어 한계를 다하니 세상에 다시없을 흉악한 언데드가 모습을 드러낸다.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리치가 노성을 내질렀다.
땅이 울리는 거대한 소음에, 교단에 군세가 하나로 몸을 돌려 저마다 신성을 앞세웠다.
“큭!”
“천신이시어······”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저 정도의 마력을 가진 놈이었다고?’
당장 천 년 전의 흑마법사가 리치가 되어 신체를 재조립한다 해도 저 정도면 꽤 힘에 부치리라.
아니, 애초에 그 정도의 흑마법사가 이태까지 고작 바르키아올의 거미줄에 묶여있었다는 것이 말이나 되나?
모르면 물어보면 될 일이다.
시엔이 저를 보는 이가 없음을 확인하곤, 슬그머니 리치의 보존구를 앞으로 내밀었다.
-감히! 감히! 감히! 감······
리치의 노성이 순간 잦아들었다. 시엔의 손에 들린 보존구를 발견한 탓이다. 제 목숨줄이 적에 손에 들렸으니 당황할 수밖에.
시엔이 교단의 인원들 몰래 손짓을 보냈다.
보존구를 망치로 두드리는 척을 하고, 뒤이어 손날을 펴 목어림에 두고 슥슥 휘둘렀다.
-어. 으흠.
시엔이 재차 보존구를 두드리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리곤 손을 휘휘 내저어 물러가라 손짓을 보냈다.
리치가 분노에 차 목소리를 높였다.
-크아악! 마력을 너무 소모하였다. 더는 존재할 수가 없다······
왠지 어색한 유언과 함께, 거대한 해골의 상반신이 스러지기 시작했다.
점점이 뼛가루로 화해 바람에 날린다. 순식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뭐······지?”
“자멸한 걸까요······”
바짝 곤두서있던 사제들이 하나로 얼이 빠져 중얼거렸다. 대체 뭐야? 뭔데 갑자기 나타났다가 또 갑자기 사라지는데?
죽음마저 각오했던 차라, 지금 와선 오히려 그만큼 허탈하기 짝이 없다.
“이게 바로 천신의 은혜, 흠. 음.”
개중 한 명이 그리 말하려다 제가 무안했는지 헛기침만 삼키고 말았다.
시엔이 리치의 보존구를 살폈다. 보존액이 1/3가량 사라져 내용물이 얼핏 드러났다. 검게 변색하여 홀로 뛰는 심장이다.
심장이 뛰고 있으니 리치가 아직 멀쩡하니 그저 몸을 숨겼다는 사실은 알겠다.
리치의 심장 위를 덮은 사람의 손가락 뼈가 보인다. 딱 보니 팔목 아래를 같이 담가 가볍게 심장을 틀어쥔 형상이리라.
시엔이 지금까지 느끼던 기이한 익숙함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또 내 거네?
아니, 내 뼈가 왜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리치의 심장과 함께 담긴 것이 바로 천 년 전의 흑마법사의 손이라.
허나 이 의문은 잠시 접어둬야 할 때다.
“음, 흠. 어쨌든. 다시 말씀드리자면 공자님의 협조를. 꺅, 뭐, 뭔데?”
어수선한 소동에 애써 이전 화제로 돌리려던 뷔아가 어느새 제 코앞에 가면을 들이민 시엔을 보고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거친 말로 제 본색을 드러낼 정도였다.
“그냥. 여기 있는 모두가 내 능력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을 침묵으로 지켜주었으면 해서.”
“그게 무슨 개솔, 아니지. 무슨 황당하신 말씀이시죠? 저희가 어째서······”
“내가 부탁하니까.”
뷔아가 입을 떡 벌렸다.
기가 막히면 말도 안 나오는 법이라더니.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뷔아가 항변했다.
“아니, 그게 무슨 돼먹지도 않은 웁······”
뷔아의 항변이 중간에 뚝 끊겼다.
시엔이 장갑을 벗어 제 손가락을 성녀의 입안으로 푹 찔러넣었기 때문이다.
뷔아가 무슨 짓이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가면 너머로 시엔과 똑바로 눈이 마주쳤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창을 넘어 그 안에 바로 마음이, 정신 세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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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의 숙원은 세상 모든 신비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섭리를 법칙으로 정의하고, 세상 모든 이가 이해하여야 한 데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화염탑의 방화광들이 심화의 심처에 제 영혼을 두길 원하는 것처럼, 계파마다 따로 목표가 있긴 하지만.
마법사를 한데 묶어서 보면 대체로 그러하다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신에 대한 의문은 당연한 것이리라.
마법사들이 신을 정의하기는 명료하다.
태초에 만물이 있으나 그 시선이 제각각이라. 보는 이마다 모양이 다르고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그저 혼돈뿐인 세상이었다.
그때 신이 있어 세상 모든 것들 관찰하니, 신이 보는 대로 모든 것이 제 모습을 찾아 질서가 자리를 잡았다.
신은 관찰자다.
신이 바라보기에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는 것조차 제 모습을 찾고, 현재가 과거가 되어 기록되며 동토 세계에 역사를 남긴다.
정의와 이론의 차이는 그것을 실제로 관측하여 체감하느냐의 문제다. 곧, 마법사들이 신을 정의하는 이유는 실제로 만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성녀와 성자. 신성을 타고난 이들의 정신은 신과 통하니, 경지 높은 마법사가 소통하여 그 앞에 이르른다.
시엔이 고개를 들었다.
[그/그녀는 한 영혼을 바라본다. 법칙과 인과와 만물을 보는 시각을 넘고 뒤틀어 재림 한 영혼이다. 아주 먼 과거에, 또한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난 재회에 반가움을 표시한다.]
신의 말이었다. 음성도 몸짓도 아닌, 그저 존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영혼으로 듣는 말이었다.
“예. 오랜만입니다.”
[그/그녀가 미소짓는다. 그/그녀는 지성을 가진 영혼을 보고 사랑스러워 기꺼이 맞이한다.]
온전히 영혼으로 느껴지는 거대한 사랑이란 쑥스럽기 그지없다. 시엔이 얼굴을 붉혔다.
“제가 아니라도 마찬가지잖습니까?”
관찰자는 모든 지성을 가진 것을 사랑한다.
거기에는 더함과 덜함이 없어 절대적으로 같은 것이니 시엔이 아니라 그 누가 앞에 서더라도 똑같이 사랑하여 기꺼울 이다.
“이리 뵈니 또 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만. 어차피 대답해주시진 않으실 테니.”
[그/그녀가 동의한다.]
모든 것을 보는 관찰자니 세상 모든 진리를 이미 알고 있는 이라. 마법사가 그렇듯 배움을 청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알려줄 이가 아니다.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엔 감히 당신을 한 번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그/그녀는 걱정스럽게 영혼을 바라본다. 강대한 영혼이나 또한 먼지와 같이 하찮아 격의 격류에 휘말려 찢길 것을 이미 보았다.]
시엔이 눈을 떠, 신이라 부르는 것의 진체를 들여다본다. 순간 익숙한 세상이 깨어지고 온통 모르는 것이 어디에나 있고 또한 어디에나 있다.
안과 밖을 뒤집으나 그 모든 것이 한데에 있어 사물을 보니 그 뒷면이 앞과 같이 비친다.
처음과 끝이 다르나 결국 하나가 되어 다가오니 종말을 보고 종이 탄생하며 산 자가 먼저 죽어 태어나 늙고 젊음이 동시에 존재한다.
시엔이 열이 되고 백이 되어 서로를 보고 또 보지 않으니 심장이 밖에 있고 팔이 신체 안으로 뻗어 온통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것또한 의지가 없어 제멋대로라.
영혼이 산산히 분해되는 고통에도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신의 사랑이라. 그와 같은 존재들. 인지를 초월한 어떤 것. 세상을 보나 그 핵심을 뚫는 다른 격의 존재.
그러나 더는 버틸 수가 없다.
신은 그저 바라볼 뿐이다. 시엔이 여기서 영혼을 잃고 방황하더라도 그저 바라보니 그것이 바로 자유의지요, 그래서 사랑이라.
아직 이르다. 이만큼 강대하였으나 아직 미물에 지나지 않는 어떤 격이 다른 세계가 있다.
시엔이 눈을 감았다.
“헉. 허억. 허억.”
[그/그녀는 존재 너머를 감히 들여다본 한 영혼을 내려다본다. 대견함과 책망이 동시에 깃들어 미소지으나 또한 인상을 구긴다.]
“내가 안 될 거라고 했지, 뭐 이런 말씀이십니까?”
[그/그녀가 웃습니다. 유쾌합니다.]
“이번엔 물러나겠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신비 속에 숨어 존재하리라 생각하진 마십시오.”
[그/그녀가 손을 흔듭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며 찰나에 불과한 짧은 기다림 끝에 당신을 기다리겠다 약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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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관념 안에서 이루어지니 현상 세계에선 찰나와 같은 시간이었다.
시엔이 휘청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 서슬에 손가락이 쏙 빠져나온다. 성녀가 오만상을 쓰며 말했다.
“에퉤, 어우 짜! 뭐야! 더럽게!”
“뭐긴······. 음······.”
시엔이 그대로 쓰러져 무너져 내렸다.
인간에게 허용된 세계를 벗어난 부작용이다. 격이 다른 존재를 마주하여 영혼이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야! 야! 갑자기 왜······”
“내 부탁. 알 거야.”
시엔이 떨리는 손을 들어 뷔아의 팔목을 붙들었다. 이내 고개를 떨군다.
뷔아가 기겁하며 맥을 짚었다. 쿵쿵 뛰는 맥박은 정상. 위아래로 움직이는 가슴도 정상이다.
“뭐야? 자? 대체 이건 또 무슨······”
뷔아가 말끝을 흐렸다.
시엔이 장갑을 벗어 드러난 손, 그 손등 위에 기이한 형태를 그리는 상처가 눈에 들어온 탓이다.
“성흔? 성흔이라고?”
성흔. 천신을 마주한 이가 가지는 영광의 흔적이었다. 성자와 성녀가 날 때부터 가진 것이며, 덕 높은 사제가 간혹 신을 보아 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왜? 얘한테?
“야! 일어나! 일어나 보라니까!”
뷔아가 혼란에 빠져 그저 어깨를 쥐고 흔들 었다. 성녀라 신체가 이미 인간을 초월하였으니, 사람을 흔드는 꼴이 아니라 곡식의 낱알이라도 탈탈 터는 것만 같았다.
“뷔, 아니 성녀님! 체통, 체통을!”
“성녀님, 일단 진정을 좀 하시는 것이······.”
그 모습에 수히와 라이벵이 달려들었다.
< 12. 죽어 죽지 않아 같으나, 또한 다르다 [4]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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