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죽어 죽지 않아 같으나, 또한 다르다 [3] >
“퇴로를 확보하라! 기사들은 개창하여 저 사특한 벽을 부순다!”
빛의 창들이 날았다. 그 광택이 희미하다.
광량도 미약한 것들. 성기사가 이미 기력이 쇠하여 신성 투창 역시 그 힘이 모자라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만나면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순리라. 부실한 공격이나마 여러 개가 맞대니, 뼈로 세워진 거대한 기둥에 균열이 가고 바스러져 작은 틈새가 만들어졌다.
“사제님들은 몸을 피하십시오! 반드시 살아남아 교단의 적이 있음을 알리셔야 합니다. 저희는 버티고 있겠습니다!”
성기사장 라이벵의 말에, 사제들이 입술을 깨물었다. 기사는 항전하되 사제는 물러나라. 그러한 명령이 아니던가.
사제들이 몸을 돌렸다.
천신의 검을 든 형제들이 여기서 죽음을 각오했으니,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그 의무리라. 뼈 방벽에 난 틈새로 그 몸을 욱여넣는다.
“그럼 안 되지.”
목소리와 함께, 틈새를 통과하던 사제의 몸이 축 늘어진다. 급히 끌어내니 심장 어림이 갈라져 피가 왈칵왈칵 뿜어져 나온다.
“누구냐!”
라이벵이 검을 겨누며 외쳤다.
저 위. 방벽 위에 오만하게 선 사내다.
사내가 대답 대신 검을 내질렀다. 또 한 명의 사제가 맥없이 축 늘어진다. 심장이 갈라진 사제의 환부를 필사적으로 틀어막던 이다.
이제는 시체 두 구가 되어 포개졌다.
“토니 가스타! 어찌하여!”
라이벵이 노성을 질렀다.
공간을 뛰어넘는 고절한 검술. 소드 마스터 중에 토니 가스타라는 이의 것이라 들었다. 수많은 왕국의 제의를 거절하고 용병으로 살아간다 했던가.
사내가 히죽 웃었다. 눈을 지나는 커다란 흉터가 꿈틀거린다.
“용병이 왜 싸우겠어? 다 이거 때문이지.”
토니가 중지와 엄지로 원을 만들어 보였다. 금화를 뜻하는 손짓이다.
“신의 엄벌이 두렵지 않으냐! 감히 금화에 팔려 신의 종을 해하다니!”
“아. 그거.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말야. 똑같다고 생각해. 나는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고, 너희는 돈을 받고 사람을 살리고. 엇차.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말야. 도망이나 치고.”
때를 틈타 방벽을 빠져나가려던 사제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
“네 놈!”
“거기서 소리질러도 하나도 안 무서운데.”
토니가 킬킬거렸다. 전부 돈 때문이라 말하지만, 태도를 보아 그러한 것이 아니다.
경멸의 눈빛. 입에선 조롱. 명백한 악의라.
토니가 검을 내지른다. 라이벵이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 돌연 튀어나오는 검. 라이벵의 검이 그를 쳐내 튕겼다.
“호오. 막았네?”
토니가 연신 검을 내질렀다. 비슷한 위치에 검이 솟는다. 아슬아슬하게 라이벵이 막을 수 있는 위치라, 뛰고 날고 굴러 어떻게든 막아내며 사투를 벌였다.
성기사들이 방진을 짠다. 어깨를 붙이고 고개를 돌리며 사제를 보호하며 제 몸으로 막아서는 꼴이다.
“모두 벽을 허물라! 적은 여럿을 공격할 수 없다! 활로를 뚫어!”
라이벵이 고함을 질렀다.
성기사들이 창을 날리고 검을 들어 뼈 방벽을 두들겼다. 아예 등을 돌려 활로를 뚫는 데에만 열중이니 이미 제 몸은 어찌 되어도 좋다.
토니가 이를 으득 갈았다.
“빌어먹을! 귀한 목숨이 따로 있냐! 빌어처먹을 위선자 새끼들!”
토니가 뛰어내려 라이벵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와중에 검을 뻗는다. 네 번 뻗어 세 번 부딪치니 라이벵의 어깨에서 피가 튄다.
토니가 라이벵을 지나쳐 사제들 사이로 뛰어든다. 사방팔방에 검을 뿌리니 성복을 입은 이가 계속해서 쓰러진다.
“막아! 막아야 한다!”
성기사들이 토니를 향해 달려든다.
그러나 지친 몸에 공격은 무디고 칼끝이 흔들린다. 소드 마스터가 보기에 어린아이와 같아 쉬이 피하고 검을 찔러 빈틈을 베어낸다.
교단의 군대가 점점 줄어든다.
신성이 온전하고 기사들이 지치지 않았다면 모르나, 이미 연속된 사투에 온 힘을 다한 이들이다. 그러니 형세는 토끼 떼에 늑대 한 마리가 뛰어든 꼴이었다.
수히 알렌티가 참극을 꼿꼿이 서서 바라보았다. 아직 몸에 신성이 넘치니 이 와중 유일하게 지치지 않고 온전히 힘이 남았다.
그 힘을 풀어 죽어가는 이를 살릴 수 있으리라. 허나 그녀의 사명은 그것이 아니다.
‘뷔. 빨리 와야 해.’
양손으로 성녀의 팔을 꼭 끌어안은 채 죽어가는 이를 눈에 담는다. 제가 살릴 수 있으나 그러지 않아 죽는 형제요 자매들이다.
수히의 사명은 성녀를 보좌하는 것이다. 이 신성은 온전히 성녀를 위한 것. 뷔아가 돌아와 이 모든 사태를 끝낼 터이니. 그저 믿으며 제가 살리지 않아 끊어진 목숨을 그저 눈에 담을 수밖에.
라이벵이 검을 내질렀다.
마음은 앞서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눈은 침침하여 보이는 것이 없다. 이미 쓰러져야 할 몸을 지탱하는 것이 굳건한 의지다.
이 몸은 이미 죽었으나, 한 명이라도 살아 교단의 적이 있음을 알려야 한다. 그리하여 대비하고 형제자매의 피 한 방울이라도 아낄 수 있다면. 이 목숨이야 그리로 충분한 것.
‘허나 천신이시여. 너무나 가혹합니다.’
제 명줄이야 이미 당신께 바쳤으니 버린들 아까운 것이 아니나, 저들만은 부디 살리옵소서. 이렇게 한뜻으로 당신의 기적을 믿습니다.
기적. 나약한 인간이 최후까지 바라, 버리지 않는 희망의 마지막 형태라.
그리고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우르르! 굉음과 함께 교단을 둘러싼 뼈 방벽이 내려앉았다. 살아남은 사제들이 이를 악물며 일시에 뛰쳐나간다.
그 방향이 제각각이니 검 하나를 쥔 토니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기사들의 표정에 희망이 드리운다.
토니는 분한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해골바가지! 뭐 하는 짓이야!”
대답 대신 부정한 기척만이 가까워진다.
이윽고 수해의 어둠을 헤치고 기괴한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거미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그 크기가 집채만 하고 다리가 무수히 돋아 제멋대로 땅을 디뎠다.
무엇보다 오싹한 것은 저 눈!
몸통의 절반이 거대한 눈이며, 눈동자 안에 무수히 많은 눈동자가, 그 안에 또다시 무수히 많은 눈동자가 있어 저마다 다른 곳을 바라본다.
“악취미야.”
토니가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 보는 것이나 기괴한 것은 전부 리치의 취미라. 뼈 방벽을 풀어놓고 직접 등장하였으니 제 손을 쓰겠다는 뜻이리라.
성기사들의 표정은 다시 결연해졌다. 이미 죽었다 여긴 목숨이니 강대한 적이 더 나타났다 하여 물러날 것은 아니다.
마수, 바르키아올이 다리를 들어 앞으로 내뻗었다. 그 끝이 날카로운 창이라 매서운 일격 되어 뻗어나간다.
깡! 토니가 다리를 쳐냈다.
“젠장! 해골바가지! 뭐 하는 짓이야!”
허나 대답은 없고 그저 마수의 다리가 계속해서 날아들 뿐이다.
다리 하나가 일곱 마디라 움직임이 기괴하기 짝이 없다. 둘과 셋이 앞뒤와 위아래를 노리며 합공을 해 온다.
둘을 쳐내면 세 다리가 달려들었다. 넷을 쳐내면 다섯이 달려든다. 토니가 땅을 구르고 몸을 튕겨 가까스로 피해내기 바빴다.
“빌어먹을! 더는 못 참아!”
토니가 검을 휘둘렀다. 먼 허공에 칼날이 솟아 오러를 두르고 베어낸다. 다리 하나가 걸려 잘리며 걸쭉한 체액이 뚜욱뚜욱 흘렀다.
키에에엑! 바르키아올의 하울링이 장내를 뒤흔든다. 분노한 마수가 모든 다리를 총동원한다. 시엔과 뷔아를 붙들던 세 다리도 공세에 합류했다.
시엔이 뷔아를 짊어진 채 땅으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달려드는 이가 있어 뷔아의 이름을 외쳤다.
“뷔! 뷔! 세상에! 공자님! 감사합니다!”
“치료할 수 있겠어요?”
“네, 네!”
수히가 성마르게 손을 뻗었다. 시엔이 제지했다.
“먼저 여기서 물러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 네! 네!”
수히가 정신을 잃은 성녀를 질질 끌었다. 그 와중에도 떨어진 팔 한 짝을 옆구리에 끼고 있으니 내내 기다렸던 것이리라.
키에엑! 바르키아올의 하울링이 다시 이어졌다. 얼핏 듣기엔 이전과 같은 것이다. 허나 술자에겐 다르다. 고통과 두려움에 찬 비명이니 어느새 다리 대부분이 잘린 채 물러나기 급급한 상황이었다.
‘소드 마스터라.’
중급에 이르는 마수 하나로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아니다. 토니의 몸에 여기저기 피가 흐르니 이 정도면 오히려 바르키아올이 대단하다 할 지경.
충분하니 가서 살거라. 시엔의 손짓에 마수가 펄쩍 뛰어 물러나 숲속으로 도망을 친다.
“이 빌어먹을 해골바가지! 너! 애송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토니는 시엔이 마수를 부릴 것이라 그 가능성조차 떠올리지 못하니 그저 리치의 탓을 한다.
그러니 시엔이 일단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
“널 먼저 죽이겠다던데?”
“말도 안 돼!”
“나야 모르지.”
구태여 거짓말을 덧붙일 필요가 무엇이라.
혼자 결론을 내리게 두는 것이 바로 기만의 상책이라. 놔두면 제 발 저리는 곳이 있으리라.
“가만, 그럼. 너만 산 게 아니라. 성녀!”
토니의 눈에 살기가 어린다. 길길이 날뛸 줄 알았더니 의외로 침착한 면모가 있다.
토니가 움직였다. 공간을 넘어 검이 짓쳐들어온다. 이미 바르키아올과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미리 알면 대비할 수 있다.
흉험한 오러가 실린 토니의 공격을 시엔의 검이 막아섰다. 격돌의 순간.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흐른다.
죽음 앞에 도달한 감각이다.
토니의 검이 자신의 검날을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막기는 커녕, 검과 함께 목이 잘릴 판이다.
‘이런, 젠장!’
소드 마스터와의 대련은 이미 익숙한 일이다. 그게 문제다. 엘딘과의 대련에 익숙하니 저도 모르게 오러를 그저 막고자 하지 않는가.
시엔이 검을 버리고 뒤로 둘렀다. 코 위로 스치는 바람에 모골이 송연하다.
“죽어!”
뒤이어 검격이 계속 공간을 넘었다.
시엔이 그저 물러날 뿐이다. 살기가 공격에 앞서니 토니의 공격이 어디로 향하는지 이미 안다.
토니가 격분해 달려들었다.
시간이 없다. 리치는 배신하고 성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다급하여 빨리 눈에 보이는 것을 치우고자 한다.
그리하여 시엔의 손끝에서 스며나온 검은 그림자. 검은 형체 두 개가 바닥으로 흘러 스미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시엔이 계속해서 검을 피해나갔다. 간혹 스치는 것이 있으나 근육이 상한 것이 아니니 그저 화끈할 뿐이다.
신성이라곤 저 너머 치유의 기색 하나뿐이라 음차원 에너지가 자유로이 움직인다. 세계수의 나뭇가지가 마력을 증폭하니 주변이 온통 싸늘하게 냉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젠장! 미꾸라지같은 놈!”
다급한 토니가 거리를 좁혀온다. 공간을 뛰어넘는 검술을 다루나, 멀리서는 그 궤적이 단순하여 살의를 느끼는 이는 피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진정한 위력은 가까울 때 진가를 발휘한다.
특이나 가까이서 뒤와 앞의 사각을 하나로 찌르는 일격은 그 누구라 해도 막아낼 수 없으리라.
토니가 시엔과의 거리를 훌쩍 좁혔다.
그리고 그 순간, 시엔의 주문이 터져나왔다.
“아크-쉬나! 크사 나르 시엔!”
스으으. 대기가 소용돌이치며 음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토니가 멈칫하며 시엔을 보았다.
“뭐? 너, 그거.”
목소리가 바람 빠지는 소리와 같다. 사특하여 부정하기 짝이 없으니 어디서 많이 들은 것이다.
그제야 토니가 알아차린다.
“너, 너도 해골바가지처럼······!”
그러나 이미 늦었다.
성기사 하나가 토니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설프고 삐걱대며 기괴한 동작이다. 검을 치들고 그저 달려드니 제 몸을 살피지 않는다.
토니의 검이 공간을 가른다. 성기사의 목이 잘려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머리 잃은 몸뚱이는 그대로 달려들 뿐이었다.
“뭐, 뭐야!”
토니가 기겁하여 연신 검을 휘둘렀다.
허공에서 검이 솟으니 성기사의 팔과 다리가 제각각 떨어져 나뒹군다. 남은 몸통이 아직도 꿈틀거리니 계속해서 기어 다가오는 데에 여념이 없다.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장을 쏟는 이다. 심장이 갈라진 이다. 다리가 하나 없는 사제는 두 팔과 한 다리로 짐승처럼 뛴다.
이미 죽은 자들이 한데 몰려들었다.
“저리 가! 저리 가라고!”
토니가 공포에 질려 소리질렀다. 오러가 쉴 틈 없이 번쩍였다. 사람의 내용물이 온 사방에 튀었다. 이미 죽은 자들은 개의치 않는다.
-복수를!
-복수를!
-너와 같이 죽으리라!
시엔의 귓가의 이미 죽어 남은 것들의 처절한 절규가 메아리쳤다.
원한이 한 명에게 쏠려 몰아치니, 애초에 흑마법사가 절대 패배할 수 없는 전장이 아닌가.
죽은 이가 또다시 죽어간다. 아무리 그래도 소드 마스터란 강대하기 짝이 없는 이라.
“망자들로는 역시 무린가.”
시엔이 마력을 더한다. 땅에서 비죽 솟아오른 여인의 대가리가 천진한 미소로 그에 화답한다.
토니는 무아지경에 있었다.
처음엔 공포에 그저 검을 휘둘렀으나, 소드 마스터란 검을 쥐어 영광을 아는 자다. 온 사방이 적이며 또한 살고자 할 따름이니 온갖 임기응변이 치솟아 제 검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토니는 저 자신이 한 단계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느꼈다. 순간 오러가 치솟았다. 인간의 의지 앞에 신체가 스스로 낫고 활력이 치솟아 새로 태어난 것과 같다.
약한 것들은 아무리 모여도 약한 것들. 강자 앞에 스러지리라.
토니는 자신을 가로막던 검술의 화두들이 명쾌하게 풀림을 느꼈다. 이제 한 자루를 뻗어 수백에 이르는 공격을 할 수 있으리라.
소드 마스터를 넘어선 어떤 경지. 그 지고한 곳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때였다.
‘오빠?’
토니가 멈칫하여 검을 거둔다.
삐쩍 마른 아이 하나가 앞에 서서 저를 올려다본다. 더럽고 지저분하여 여아인지 남아인지 알 수 없이 처참한 꼴이나, 토니는 그게 누구인지 안다.
“세라?”
‘오빠. 나 아파. 나 죽어? 죽는 거야? 나 죽기 싫은데.’
“아냐. 아니야. 안 죽어. 안 죽어. 내가, 내, 내가.”
‘아파. 나 죽는 거지? 또 죽는 거지? 오빠는 날 또 죽게 내버려 둘 거지?’
이미 오래전에 죽은 여동생이었다.
신관조차 내쳐 길바닥에서 차갑게 식어간 아이다. 부모 없이 세상에 하나뿐이던 제 가족이다. 가슴에 묻어 지금까지도 꿈에 보아 눈물이 나는 동생.
“아냐. 오빠가 돈 많이 벌었어. 신관, 이번에는 신관도 무시 못 할 테니까!”
‘나 아파. 아프다고.’
“괜찮아! 신관들에게 데려다 줄 테니까!”
‘신관들은 날 내칠 거야. 또 죽게 둘 거야.’
“그렇지 않아! 이번엔 돈이 많으니까!”
‘돈? 돈 때문이 아니잖아. 오빠가 아저씨를 찔렀기 때문이잖아. 그래서 신관이 우릴 내친 거잖아.’
“아냐! 다 돈 때문이야! 우리가 거지라서 내친 거라고!”
문득 죄악이 머리를 스친다. 아저씨라 불리는 신관이었다. 빈민가에 식량과 금전을 베푸는 이다. 어느 날 아저씨의 주머니에서 금화를 보았다. 그 금화가 남매를 일 년을 더 살도록 만들었다.
‘난 죽을 거야. 전부 오빠 때문이야. 또 죽는 거야. 또 오빠 때문이야.’
“아니야! 아니라고!”
‘추워. 오빠가 강 옆에 나를 묻었어. 물이 들어와 얼어붙어 난 지금도 추워. 오빠. 추워.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추워.’
“이리 와. 이리 오렴······”
토니가 무릎을 꿇었다. 허리 위가 없는 하반신 하나를 다칠세라 조심히 끌어안는다.
-꺄하하핫! 꺄하하하하!
그 위에서 반투명한 여인이 미친 자의 웃음소리를 냈다.
눈 감은 자에게 악몽을, 눈 뜬 이에게 환상을 선사하는 악령이다. 해피 드리머가 세상 가장 웃기는 광경을 본 것처럼 광소를 터뜨렸다.
푹. 문득 뱃가죽에 검이 틀어박혀 고개를 든다.
토니가 주변을 본다. 성복을 입은 자들이 검을 뻗어 찌르고 팔을 뻗어 할퀸다.
토니의 눈동자가 떨린다.
“저, 신관님들.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이 아이를. 이 아이를······.”
토니가 상체 없는 하반신을 앞으로 내민다. 사제들은 말이 없다. 죽은 이의 원한은 그저 흑마법사의 귀에만 메아리칠 뿐이다.
문득 불이 치솟아 토니가 붙든 시체를 태운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세라야!”
어떤 환상을 보는지 시엔이 알 도리는 없다. 그저 본인과 해피 드리머만이 알 뿐이겠지.
허나 저리 애틋하게 울부짖는 이름이란 죽은 연인이라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모두 제 업보리라.
제가 떳떳하지 않으며, 그로 인해 그늘이 짙고 어둠이 어둡기 때문이다.
스스로 당당하고 떳떳한 이에겐 해피 드리머의 환상은 그저 헛것이 되어 깨어질 뿐이니.
버닝 신. 산채로 불타 죽은 이라 영원히 고통받는 악령. 버닝 신이 모든 것을 불사르기 시작했다.
토니와 이미 죽어 움직이는 것들이 한데 모여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피와 살과 뼈를 태워 그 불빛이 야영지를 뒤덮었다.
망령들이 흰 형체를 드러내며 그 주변을 맴돌았다. 망령이나 검지 않고 흰 것들이다.
귀하나 아주 쓸모가 없는 것이다.
시엔이 손을 휘젓자, 망령들이 꾸벅 고개를 숙인다. 문득 하늘이 열려 온갖 색의 광채가 새어 나온다. 흰 망령들이 환희에 차 날아올라 그 너머로 향했다.
천신을 믿는 이의 영혼은 생전의 소망대로 낙원을 향한다. 잠시 원한에 얽매여 이용하였으나, 이제 그 목적을 이뤘으니 흑마법사가 상관할 것이 못 된다.
시엔이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살폈다.
이내 파릇한 새순이 온전히 남은 것을 확인한다. 시엔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12. 죽어 죽지 않아 같으나, 또한 다르다 [3] > 끝
ⓒ Lab.No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