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피 흘리는 계절, 봄이 오다 [2] >
카레네는 기사단에 선두에 있었다.
“에스톡!”
“에스톡! 전달! 에스톡!”
에스톡은 원래는 검의 한 종류다. 긴 검신과 극단적으로 짧은 검폭을 가져 찌르기 의외엔 영 쓸모가 없었다.
허나 지금 같은 경우는 기사단의 대형을 말하는 것이었다. 카레네의 외침에 기마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았다. 대형 전환이 빨랐다.
훈련 잘 된 기마대라면 응당 그러할 테지만, 저 모습이 두 개 기사단의 합동 훈련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원래 기사들의 신경전이란 극성이기 그지없다. 소속이 다른 이들이 모이면 삐꺽삐꺽 좀체 말을 안 들어먹는다.
카레네가 두 개 기사단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뜻이다.
하기사. 선두에서 기사단을 직접 지휘하는. 어쩌면 제 주인이 될 수 있는 유력한 후계자라. 기사들이 가장 좋아할 만 하다.
기사단이 크게 선회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기마의 행렬. 이내 그 첨단이 시엔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인마의 쇄기가 시엔을 향해 들이닥쳤다.
이건 또 뭐야. 시엔이 눈썹을 까닥거렸다.
못마땅한 눈길로 제게 다가오는 기마대의 돌격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두두두두. 편자가 대지를 두드리는 거대한 떨림이 온 사위에 맴돌았다.
아무리 담대한 이라도 견디기 힘든 장면이다. 허나 천 년 전의 흑마법사에겐 익숙한 광경이기도 했다.
게다가 적의가 없음을 아는 데에야.
충돌의 순간, 카레네가 고삐를 잡아챈다. 그 뒤로 기마대가 둘로 갈라졌다. 시엔의 좌우로 기마들이 굉음을 울리며 빠져나갔다.
카네네가 투구를 벗었다. 땀이 흥건한 얼굴에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잘 왔어. 시엔.”
“장난치곤 꽤 심한 거 아냐?”
“멋진 환영식이라 해 두자. 시엔.”
피식 웃음을 터뜨린 카레네가 이내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한참 주변을 눈으로 훑던 카레네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검위공께선 안 오셨구나······.”
“당연한 거 아냐? 여길 어떻게 와?”
카레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말따마나 검위공은 왕가의 수호자다. 영지 간의 작은 불화에 끼어들 수 없는 노릇이다.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구경 정도는 하시려나 싶었지. 안 그러시겠어?”
“뭐. 그렇긴 하지.”
엘딘은 강자였고, 충분히 강자다웠다.
강자는 눈치를 보지 않는다. 엘딘이 진정 오고자 했다면 그런 사정 따위야 알 바냐고 냉큼 따라붙지 않았을까.
카레네가 뒤집어 쓴 두건을 벗었다. 긴 머리카락이 왈칵 쏟아져내렸다. 찝찝한 모양인지 몇 번 거칠게 털어낸 카레네가 이내 시엔에게 손짓했다.
“일단 좀 걷자. 상황도 좀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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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클라우드 산맥 초입의 완만한 능선에 천막이 빼곡히 들어섰다. 군데군데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상황.
시엔이 살베지 등의 가문들이 벌이는 연합 훈련 주둔지를 바라보았다.
“2000정도 되겠는데? 살베지가 아주 칼을 갈았나 봐?”
“지난주에 두 배로 늘었거든. 기사단으로는 이제 조금 힘들게 됐어. 그래서 추가 병력을 요청한 거고.”
“병력이라니. 말은 제대로 해야지. 우린 병력이 아니라 조사단이잖아. 병력이라 하면 전쟁이라도 치를 것 같잖아?”
“하아.”
시엔의 말에 카레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말장난은 집어치워.”
“말장난이라.”
“그렇잖아? 우리는 미스릴 도광 사건의 배상을 위한 무력시위에 나선 거고, 저들은 협상을 거부하고 거기 맞서 병력을 소집했어. 이 상황에서 그리 말한다고 뭐가 달라져?”
“흠”
“남은 건 피를 보는 것 뿐. 전쟁이야.”
카레네가 입술을 핥았다. 매서운 눈빛이 저들의 진지를 훑는다. 당장이라도 쳐들어가고 싶다는 듯이.
“전쟁이라니. 그리 무서운 말을.”
“됐어. 추가 병력은 얼마나 되지?”
“일단은 창성 기사단이 같이 왔지.”
카레네가 인상을 찌푸렸다.
“기사단만 셋이라고? 저쪽엔 이미 장창병과 궁사대가 포진했어. 일단은, 이라고 했지? 후속 병력은 어떻게 되지?”
“1대대가 사흘 후에 도착할 거야. 용병 200에 공병단 한 개가 같이 올 거고.”
“그럼 총 천이 좀 넘어가겠네. 흠.”
살베지 연합 훈련단은 2000여명 규모. 이후 잔여 병력이 도착하면 티란디스의 호위대는 1000여명 정도였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네.”
카레네가 결론을 내렸다.
절반의 병력이라고 해도, 그 질이 다르다. 기사단이 셋. 전체 병력 중 순수한 기사의 숫자가 3할이 넘어가는 상황이 아닌가.
기병이 아니라 기사.
기사란 기본적으로 정예 기병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허나 기사들의 진가는 말에서 내렸을 때다.
오러를 내지르는 초인들이란 일개 병사 따위 허수아비처럼 썰어내는 이들이다.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는 카레네에게, 시엔이 뚱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충분해?”
“똑똑한 줄 알았더니. 군략은 좀 모자르니? 병력이 열세라도, 그 질이 다르니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말이란다.”
“흠.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나는 여기 부행정관 자격으로 온 거야. 보충대 대장이 아니라.”
“뭐?”
시엔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서 대규모 공사가 있을 거야. 영지의 큰 공사에 부행정관이 빠지면 안 되지.”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공사라니.”
“탑클라우드 대규모 산림조성사업. 공사 인원은 1대대와 용병들, 그리고 공병단. 사업 책임자는 바로 나고.”
“시엔. 그런 말장난은 더 듣고 싶지 않아.”
“말장난이라니? 이미 후작님께서 결재하신 사항이야.”
카레네가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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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란디스 측 증원입니다!”
“얼마나 되지?”
“보병대대가 한 개 정도 규모, 그리고 용병들로 보입니다.”
“음······.”
살베지 백작이 신음을 삼켰다.
“슬슬 개전을 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대로 놔두면 계속해서 증원이 있을 거요. 더 모이기 전에 쳐야 합니다.”
“티란디스는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겁니다. 계속해서 부대 규모만 늘리고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니오.”
안통 백작가의 장남, 데누바. 콩차드 자작의 친동생인 카세 콩차드. 그리고 렌트텍 자작 본인이 참모 천막에서 한 마디씩 보탰다.
“흠······.”
“무얼 망설이십니까? 백작님. 혹시 병력을 더 끌어모으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그게 아닐세. 그게 아니라.”
살베지 백작이 답답하게 굴었다. 세 동맹 가문의 대표자들이 왜 그러느냐는 듯 살베지 백작을 바라본다.
그 때였다.
참모 천막 안으로 가면을 쓴 이가 들어왔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이 유달리 풍성한 여인이었다. 가면을 썼으나 드러난 입술이 고혹스럽다.
로브자락으로도 채 감추지 못한 풍성한 몸매는 뭇 사내의 상상력을 자극하리라.
“오. 레이디 헤인트. 오셨습니까?”
적발의 여인, 헤인트가 고개를 끄덕하곤 이내 좌중을 한번 슥 훑었다. 눈이 마주친 각 가문의 대표자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내 요요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연다.
“티란디스는 싸움을 피할 생각이 없는 걸로 보이네요. 백작님. 이제 결정하시지요.”
“그, 그래도 되겠소?”
“어떤 결정을 내리시건, 저는 백작님을 돕도록 할 테니까요. 아무쪼록 용단을 내려 주시길.”
살베지 백작이 화색을 띈다.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개전을 할 것이요. 더 이상 저 티란디스의 개들이 내 땅에서 설치는 꼴은 못 보지. 암.”
“허면 어찌할까요?”
“당장 저들을 내쫒아 버려야지. 레이디 헤인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흠. 그건 좀 곤란하네요.”
“어째서! 날 돕는다고 하시지.”
발끈해 버럭 소리를 지르던 살베지 백작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헤인트의 눈빛을 받고는 움찔한 표정으로 말을 돌린다.
“어, 어째서요?”
“선제공격은 곤란해요. 공작님께서 절대 하지 말라 주의를 단단히 주셨답니다. 백작님.”
“크흠. 그럼 저들이 먼저 공격해 오길 기다리잔 거요? 티란디스는 부자요. 이대로 계속 보급을 소모하자고 나서면 저들은 몇 년이고 전혀 문제가 될 게 없단 말이오.”
동맹의 대표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는 기본적으로 돈을 퍼먹는 괴물이다. 주둔만으로도 계속해서 금화를 태운다.
그러니 이대로 서로 소모를 계속하는 것은 명백히 불리한 일이다. 티란디스와 재력을 겨뤄 이길 가문은 왕국에 존재하지 않으니.
“그래서 제가 돕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충직하고 입이 무거운 이를 모아 티란디스의 문장이 새겨진 갑옷을 입히도록 하세요.”
“그 말은······”
“조만간 티란디스의 습격이 예상되네요. 아무 피해가 없을 수는 없으니, 적당히 피를 봐야겠네요. 그렇죠?”
같은 편을 공격하라는 뜻이었다.
살베지 백작이 침을 꿀꺽 삼켰다.
“허나 어찌 감히 그런 잔혹한······”
“잔혹한?”
순간 헤인트의 눈가에 화륵, 불길이 번졌다. 푸르스름한 불꽃. 그녀의 적발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내 말은 말이오.”
“백작님. 전쟁에는 어차피 피가 흐른답니다. 창칼이 날면 살이 벌어지고 땅 위엔 내장이 쏟아지지요. 그건 잔혹하지 않은 일인가요?
“크흠. 그게 아니라 말이오.”
“어차피 전쟁은 잔혹한 일이에요. 백작님께 이런 비열한 군략을 저어하고, 또한 희생될 이들을 가여히 여길 양심을 말씀하시나요? 그렇다면 어째서 티란디스에 배상하고 끝내지 않으시지요?”
천막 안이 열기로 가득 찼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살베지 백작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거푸 손을 내저었다.
“그, 그만. 내 잘못했소. 말이 잘못 나온 것이라오.”
“흠. 소녀가 실례를 범했네요. 부디 무례를 용서하시지요.”
불길이 꺼졌다. 타오르던 불길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가면을 쓴 여인만이 남았다.
“그럼 준비하실 것이 많으실 터이니, 소녀는 이만 물러나겠어요. 이상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아, 아니오. 그만 들어가서 쉬시오. 크흠.”
헤인트가 빙긋 웃고는 몸을 돌렸다.
그런 헤인트의 눈에, 천막의 문을 급히 제치고 들어오는 병사의 모습이 비쳤다.
“티란디스 군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헤인트의 미소가 일그러졌다.
티란디스가 먼저 공격해 올 리는 없다 여겼던 때문이다. 살베지 백작이 병사를 재우쳤다.
“자세히 말해 보거라. 어떤 움직임인가? 공격을 준비하는 중인가?”
“저, 그것이.”
병사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게, 지금 나무를 심고 있습니다만······.”
나무? 그 나무를 말하는 건가? 나무를 갑자기 왜 심는데?
천막 안에서 황당한 눈빛들이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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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대와 용병들, 그리고 공병단이 거대한 행렬을 이끌고 도착했다. 짐수레마다 뿌리를 동여맨 묘목들이 가득하니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목림생산길드의 길드원들이 함께였다. 그들을 조장으로 병사와 공병, 용병이 한 조로 묶였다.
이윽고 대규모 공사가 시작되었다.
열을 맞춰 땅을 파고, 묘목을 들어 심었다. 완만히 비탈진 초원에 나무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한다. 나무들이 비탈에 선다.
언덕 위에서 시엔이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이가 또 한 명.
“살아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참으로 멋진 풍경이네요.”
엘프의 숲지기, 한별이 연신 귀를 파닥거렸다. 시엔이 눈을 빛냈다.
엘프의 감정 상태와 귀의 움직임 사이 어떤 상관관계가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현 관찰 시점에서, 귀의 움직임 몇 가지는 특정한 기분을 나타낸다는 가설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인간은 나무를 베어내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걸 보니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네요.”
“적어도 목림생산길드의 길드원들은 그래. 베어내기만 해선 금방 숲이 사라져버릴 테니까. 베어내는 만큼 다시 심어줘야 하거든.”
“허나 인간의 삶은 짧잖아요? 세계수도 없고. 그렇게 심어서 나무를 언제 키우지요?”
“다음 세대로 넘기는 거지. 애초에 저들이 하는 일이 대체로 그런 식이거든.”
목재란 그저 베어내고 가공한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나무란 시간이 지나 뒤틀리고 썩어가니 오랜 시간 관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목재가 탄생했다.
어떤 목재들은 수십 년 간 흐르는 물에 담궈 숙성하기도 했다. 그런 긴 시간을 한데 모여 일하는 이들이 바로 저들이었다.
“엘프는 숲을 키우고, 숲은 엘프를 키운다. 저희의 오랜 믿음이지요. 이걸 보니 인간도 그러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 정도는 아닌데 말야. 아. 맞다. 하름질이란 게 대체 뭐야? 비설이 그러.”
시엔이 말을 멈추었다. 그리곤 한별과 서로를 마주보았다.
“호오.”
“심화의 구도자. 그 징그러운 족속의 기운이네요. 그것도 제법 수준이 있어요.”
“하긴. 엘프랑은 사이가 안 좋았지.”
아케인 에너지, 그 중에서도 원초적 불꽃이 내는 특유의 파장. 화염 탑의 방화광들, 심화의 구도자라 불리는 화염 마법사의 기척이었다.
< 9. 피 흘리는 계절, 봄이 오다 [2]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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