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9화 (29/268)

< 9. 피 흘리는 계절, 봄이 오다 [1] >

시엔이 진지한 표정으로 글을 작성했다.

깃펜의 끝에서 유려하기 짝이 없는 필기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엘프는 후작성에 묘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사람들이란 대저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갖기 마련이 아닌가.

인간의 성에 돌연히 나타난, 그 직책도 생소한 엘프 대사라는 엘프 여인에게 호기심을 드러내는 일이야 자연스러운 흐름일 터였다.

엘프의 고유한 문화 아래 성장한 이가 인간의 사회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며 그로 인해 어떤 변화를 보이나 서술하고자 한다···

「엘프 생태 관찰기. 그 하나.」

밤나무에 매달려 있는 엘프를 보았다.

양 팔과 양 다리로 나무의 중간 지점 즈음을 끌어안은 꼴이었다.

만약 엘프가 아니었다면, 겁 없이 나무에 오르다 중간쯤에서 무서워 멈춰버린 가엾은 얼간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좀 더 품위 있는 자세가 있지 않을까 하나, 엘프의 기준으로 그 자세가 당연하다거나 혹은 어떤 의식에 준하는 경건함, 혹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허나 엘프의 숲에서 그와 같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엘프로서가 아닌, 비설이라는 한 개인의 이상한 취미라 정의할 수 있을까.

여튼 그 꼴로 매달린 엘프의 표정은 평온하고 안온하기 짝이 없다.

길쭉한 귀는 주기적으로 파닥거리고, 머릿잎이라 부르는 머리카락의 잎사귀는 바람 없이도 저 혼자 살랑살랑 흔들렸다.

지나가던 시종인들이 눈을 떼지 못해 넘어지거나 부딪치는 사고가 잦았으며, 전체적 다수는 킥 웃음을 터뜨리거나 숨죽여 실실거리는 반응을 보였다.

비설에게 직접 문의한 결과는 이러하다.

“하름질.”

“하름질? 그게 뭐지?”

“하름질은 하름질인데.”

“그러니까 그게 정확히 무슨 행위인지 설명해 줄 수 있어? 휴식? 취미? 아니면 나무와 어떤 소통이라도 하는 거야?”

“흠.”

비설은 한동안 생각하다 말했다.

“몰라. 하름질이야”

이하 대화가 진행되지 않았음으로, 추후 엘프의 숲을 방문할 일이 있다면 한별에게 문의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늦겨울 이 계절에 난데없이 밤이 열렸다. 알이 굵고 속이 여실한데 달콤하기 까지 한 휼륭한 과실이었다.

후작저에 한동안 밤 굽는 달달한 냄새가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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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클라우드 드워프 광산 조사를 위해 후작 대리, 카레네가 조사단장을 맡았다. 더불어 후작의 혈육이 직접 움직이니만큼, 두 개 기사단이 그 호위로 결정되었다.

가문의 제 1기사단인 창공 기사단과 제 4기사단 창운 기사단. 기사와 종자, 기사단의 시종들까지 하여 물경 400에 달하는 숫자였다.

출정식은 열리지 않았다.

전쟁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기사단은 카레네의 호위 역할이기 때문이었다.

카레네가 광산을 아주 천천히 조사하는 동안, 기사단은 주변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조사단장의 호위에 전념할 것이다.

임시 거처가 종군 방어 진지와 비슷한 모양을 하겠지만, 이는 기사단이 상시 훈련 태세로 진지 축성 훈련을 겸하는 것 때문이다.

절대로 남의 영지 일부를 무단 점거하려는 그런 불순한 마음은 없는 것이다.

심지어 그 일부 안에 살베지의 주요 돈줄 중 하나인 광산이 포함되어 있는 상황에야, 어찌 그런 무도한 짓을 할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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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 생태 관찰기. 그 둘.」

엘프의 피부는 희다 못해 투명할 지경이며, 아이와 같아 솜털이 보송하고 모공이 작아 보이지 않으며 잡티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게다가 엘프의 얼굴은 작고 코는 오똑한데, 눈만 큼직하니 항상 생기를 띄어 반짝거렸다.

천 년 전에도 엘프와 인간의 사랑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 속 엘프가 외모 말고는 인간과 같은 사고를 한다는 점을 보면, 전부 만들어진 편협한 소문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가 천 년이 지나 아직까지도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매력적인 이종족과의 사랑은 인간이 지니는 어떤 보편적인 환상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관찰된 몇 가지 사례를 적어본다.

로우드는 옹졸하고 편협한 녀석이지만, 그래도 나름 상재가 있다 평가받기도 했다. 가문의 상단을 굴리며 어찌어찌 그 수익을 불려나가고 있으니 근거 없는 평가는 아니리라.

허나 머저리라는 점은 마찬가지다.

시도 첫 번째. 로우드가 비설에게 크리지아 꽃다발을 선물했다.

크리지아 꽃은 늦봄에 핀다. 워낙에 까탈스런 꽃이라 오래도 안 핀다. 고작해야 일주일 정도일까. 따뜻함과 더위 사이 미묘한 온도에서만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실에서 키우기도 쉽지 않으니, 이 겨울엔 그 값이 꽃들 중 제일이었다.

그 값비싼 선물을 받은 비설이 말했다.

“로우드가 내게 잘린 꽃을 줬어.”

금화 한 장은 줘야 할 값비싼 꽃다발이 잘린 꽃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겨울이야. 얘네는 곧 죽어. 잔인해.”

“풉. 음. 네가 키우면 되지 않아?”

“하지만 뿌리가 없어. 죽이려고 한 거야.”

“크흡, 음. 안됐네. 유감이야.”

“나는 살릴 수 있지만. 이런 걸 주다니. 로우드는 나를 엄청 싫어하나 봐.”

“후우우우우. 그래. 그런가 보다. 큭, 크흑.”

그 후 후작성에 묘한 소문이 퍼졌다.

성에 온 엘프 대사가, 로우드 티란디스가 선물한 크리지아 꽃을 애지중지 키우고 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로우드 녀석이 싱글벙글 아주 신이 나 매일같이 기분이 좋아 보인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내가 저녁 만찬에 얼굴을 들이밀자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 올 정도였으니까. 세상에.

심각한 오해가 있는 것 같지만, 다른 문화에 산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대저 배움이란 스스로 깨쳐야 진정 이해하는 것이니, 굳이 설명해 줄 이유도 없고.

흠. 가만히 놔두는 게 재미있으니 놔두는 것은 아니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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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베지 백작령은 넓지 않았다.

왕국 법에 영지의 정규군은 그 인구의 5%를 넘을 수가 없으니, 그 병력이란 티란디스와 비할 데가 아니다.

물론 풍족한 자원으로 쌓아올린 부로 여러 용병대와 정규 계약을 맺고 있는 모양이지만.

허나 살베지 백작이 부자라곤 해도, 대륙의 목재창인 티란디스 영지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니 광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살베지 백작이 적당히 말을 걸어오리라 생각했건만.

겨울이 끝자락에 이르렀고,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살베지 백작은 이웃한 귀족들과 친목 도모 및 영지 교류의 일환으로 연합 훈련을 개시한 것이다.

안통 백작과 콩차드 자작, 렌트택 자작가까지 네 가문의 병력이 한 데 모인 대규모 훈련이었다.

그 훈련을 왜 굳이 탑클라우드 산맥 동부, 그러니까 탑클라우드 광산 주변에서 해야 하는지 그 이유도 기가 막혔다.

요즈음 탑클라우드 산맥의 험세를 이용한 산적 떼가 기승을 부리니, 연합 훈련 겸으로 도적놈들을 퇴치하겠다는 것이다.

“쯧. 얼굴에 철판을 깔겠다는 소리구만.”

“왕실에선 별 말이 없네요?”

“왕가 입장에서야 귀족간의 소모전은 언제나 환영이지 않겠나. 이번엔 2왕비 마마께서 한 발 빠르셨다네.”

“흐레이그 가가 개입했군요.”

“일방적인 잘못이 명백하다보니 대놓고 편을 들 수는 없는 거겠지. 뒤로 지원이 있었을 걸세. 자. 체크일세.”

“아직 아닙니다.”

시엔이 나이트를 움직였다.

허나 시간 벌기에 불과한 판이다.

엘딘은 검술 만큼이나 체스에도 그 조예가 깊었으니. 시엔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했으나 지금은 계속 수세에 몰린 형세였다.

“그나저나, 검위공께선 1왕비 마마를 지지하시는군요?”

“어허. 그럴 리가 있나.”

“그럼 델피르 왕자님을 지지하십니까?”

“그걸 이제 알았나? 내 좀 더 영리한 도련님인가 했더니, 영 맹탕이었어.”

“설마 했죠. 왕실의 수호자는 중립 아닙니까.”

“중립 맞네. 그저 이 늙은이 마음이 그렇다는 이야기지.”

“모든 왕자님들의 대부께서 편애를 하시면 안 되잖습니까?”

“아무래도 아픈 손가락이라 더 정을 주고 만 모양이네. 원래 그러하지 않은가?”

“그런 이야길 제게 하셔도 되는 겁니까?”

시엔의 말대로, 왕가의 수호자는 중립이다.

애초에 왕가의 근접 경호를 맡는 친위대의 수장이 누구 한 명을 지지해서야 되겠는가.

검위공의 발언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야 자네야 이미 한 배를 탄 사이 아닌가. 배에 구멍이 나면 자네라고 살 성 싶은가?”

“사실 살 자신은 있습니다만, 한 배를 탄 건 사실이긴 하네요.”

“그래서, 이번엔 대판 붙게 생겼나? 자. 체크.”

“아직 아닙니다. 그리고 아직 아닙니다.”

시엔이 또 한번 킹을 움직였다.

그러자 캐슬이 득달같이 밀고 들어온다. 그저 한 턴 벌 제물로 비숍이 따이고 말았다.

“흠. 티란디스 공이 피를 두려워할 분은 아니시지 않은가.”

“허나 이제 곧 봄이니까요. 후작님께서도 큰 결단이 되겠지요.”

“같이 큰 피해를 입던가, 여기서 양보하고 물러나던가. 둘 중 하나인가?”

“같은 피해라도 심각한 건 살베지 백작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손해를 보는 쪽은 우리니까요.”

티란디스는 지역을 어우르는 제후급 귀족가가 아닌가.

같은 피해를 입었을 때에 살베지는 큰 타격을 보겠지만 결국 영지 내에서 정리가 될 일이었다.

허나 티란디스는 제후였다.

만약 이번 분쟁이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면, 어떻게든 서부의 영향력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흠. 자. 또다시 체크일세. 이번엔 진짜로 끝이 난 것 같구먼. 내가 이겼네.”

“아니, 검위공은 밥 먹고 체스만 두셨습니까?”

“검 휘두르는 시간 외엔 체스만 두고 살았지. 오래 살았잖나? 내가 남긴 음식이 자네가 평생 먹어온 식사보다 많을 걸세.”

“잘나셨습니다, 아주.”

“자. 그럼 약속은 약속일세. 오늘 하루 종일 대련을 하기로 했으니. 장비 챙겨서 가세나.”

시엔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애초에 엘딘이 도발을 할 때에 걸려드는 게 아니었다. 시엔도 체스라 하면 지는 법이 없는 강자라, 엘딘이 내기하자는 말에 덥썩 물어버리고 말았던 것.

약속은 약속. 약속이란 지켜야 하는 것이니.

시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딘이 징그러운 미소를 보내왔다. 그 꼴을 보아하니 오늘은 무던히도 얻어맞게 생겼다.

“이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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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 생태 관찰기. 그 셋.」

엘프의 모성애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

비설과의 문답에서 그녀는 제 부모에 대해 딱히 큰 애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부모는 부모, 자기는 자기일 뿐이라며.

그 대답은 지극히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모양새라, 비설 개인의 일탈 혹은 부모와의 불화 때문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엘프는 부모자식 간의 연결이 인간에 비해 희미하며, 상당히 독립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그에 비하면 인간은 어떠한가.

비설은 난데없이 나타나 보석을 풀어놓았다. 짙은 푸른빛의 보석, 한 꾸러미의 사파이어 반지들이었다.

색이 고르지 않으니 상등품은 아니고, 더구나 사파이어는 보석 중에서도 꽤 흔한 것이 아니던가.

허나 그래도 한 꾸러미 쯤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대체 이 엘프가 어디서 이런 재화를 얻었을까.

“이거 봐, 예뻐.”

왜 풀어놓나 했더니 자랑이었다.

“너 그거 어디서 났어?”

“후작 부인이 줬어.”

“후작 부인?”

“응. 로우드네 엄마.”

“부인이 왜?”

“몰라. 날 좋아하나봐. 나도 좋아.”

그렇게 말하는 비설의 얼굴이 천진하다.

좀 더 자세한 사정을 물어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이러했다.

후작 부인이 부른다는 말에, 할 일 없던 비설이 쪼르르 쫒아가 같이 차를 마셨다.

‘아이야,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로우드에겐 도움이 될 수 있는 반려가 필요하단다.’

‘그렇구나.’

‘자, 이거면 되겠니?’

‘이게 뭔데?’

‘어머. 모르는 척 하는 것 좀 봐. 맹랑한 아이 같으니. 이거 순 여우였네.’

‘여우? 나 여우 좋아. 부인도 좋아해?’

‘말은 좀 통하는 모양이로구나. 그럼. 여우 같은 아이는 싫지 않지. 이거 받고. 무슨 뜻인지 알지?’

‘그냥 알려 주면 안 돼?’

‘내 직접 말해야겠니? 네 스스로 알고 있는 그대로란다.’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

‘혹시 섭섭하면 말하렴. 더 필요하다면 말야.’

‘아냐. 충분해. 고마워’

이상 후작 부인과 비설의 대화였다.

생각해 보니 인간의 모정이란 결국 이종족이 이해하기 힘든 어떤 인간만의 특성이라 정의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엘프 생태 관찰이니만큼, 이에 대해서는 따로 서술하도록 하자.

“왜 줬는지 내가 안대.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후작 부인이 날 좋아하는거야.”

“그거 잘 됐네. 크흠. 아. 맞다. 로우드가 아직도 귀찮게 굴어?”

“응. 자꾸 내가 가는 데에 있어. 말을 계속 걸어. 친구가 없나봐. 불쌍해서 들어주긴 하는데. 귀찮아.”

“그럼 앞으로는 들어주지 마. 귀찮게 굴면 그냥 다른 데로 가면 될 거야.”

“응.”

“그리고 그 반지는 한동안 끼고 다니는 게 좋겠다.”

“불편한데.”

“엘프는 반지를 안 끼나?”

“불편한걸.”

엘프 생태 관찰 추가.

엘프는 반지를 선호하지 않는다.

허나 엘프의 숲에서 본 엘프들은 다양한 형태의 팔찌를 착용하고 있었음으로, 반지보단 팔찌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볼 수 있겠다.

비설 역시 토시와 팔찌의 중간 쯤 되는 장식을 차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당분간 차고 다니도록 해.”

“얼마나?”

“글세. 한 일주일 쯤?”

“응. 알겠어.”

그리하여 결국, 후작 부인과 로우드의 사이가 눈에 띄게 냉랭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사이 좋던 모자가 저리 냉전 상태에 있으니 괜스레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이는 한 문화가 다른 문화와 충돌하며 생기는 사소한 불협화음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충돌 또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겠지.

새삼 새로운 것을 관찰 탐구하는 일은 즐겁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재미있네.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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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의 호출이 있었다.

“광산 조사에 추가 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적어도 부행정관 급의 고급 인력이 필요한 상황이지.”

“결국 그렇게 되네요.”

부행정관이 홀로 타 영지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당연히 그 위험에 걸맞는 호위 병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언제까지나 광산 분쟁의 실태 조사를 위한 일이었다. 절대로 살베지 영지에서 일어나는 대규모 연합 훈련과는 관련이 없는.

“창성 기사단과 1대대가 널 호위할 예정이다. 질문 있나?”

“이제 봄인데, 괜찮겠어요?”

“재화를 잃으면 다시 벌 수 있고, 병력을 잃으면 보충할 수 있지. 허나 잃어버린 명예는 되찾더라도 그 빛이 바래는 법이다. 네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시엔의 사교계 평가는 상당히 올라간 편이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행적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피를 보지 않으면, 티란디스가가 타협하고 물러나고 말았다는 사실은 영원히 남게 되리라.

후작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후작님. 부행정관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지금 피를 보는 건 사실 적절치 않은 일이에요.”

“피를 볼 때는 피를 봐야 한다. 내 말했던 것 같은데.”

“피를 볼 때는 봐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 피는 안 보는게 제일이죠. 안 그래요?”

“흠.”

후작이 턱을 쓰다듬었다.

시엔이 말을 이었다.

“재물과 명예와 피. 셋 모두를 가질 수는 없게 되었잖아요. 재물은 포기한다면, 명예를 지키는 동시에 적의 피를 보고, 우리는 피를 흘리지 않을 방법도 있는데요.”

“말해 보거라.”

“그러니까 말이죠······”

시엔이 입을 열었다.

< 9. 피 흘리는 계절, 봄이 오다 [1]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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