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 화 닿는 손길 그리고 생각
어둠으로 얼룩진 하늘을 등지고, 강은 도아를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얼굴과 손에 어울리지 않게 묻은 피가 보였다.
스스로도 이해 가지 않은 행동이었다. 왜 그렇게 보냐는 도아의 물음에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얼굴에 피.”
이미 그의 손끝이 도아의 뺨에 닿아 있었다. 핏자국을 닦아 줄 새도 없이 도아는 이내 한 걸음 물러났다.
허공에 멈춰 버린 손이 민망했다. 강은 힘 빠진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거두었다.
‘도무지 빈틈이 없군.’
그의 손길을 거절한 도아의 얼굴이, 어둠에 숨어 붉게 물들었다.
“바쁘시오?”
“예, 아직 나인이 깨어나지 못해서 곁을 지켜야 합니다.”
“어의 말로는 생명에 지장은 없다던데.”
“하늘이 도우셨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무이가 견뎌야 했던 고문은 무자비했다. 어의는 몇 번이나 혀를 차며 조금만 늦었어도 숨이 끊어졌을 거라고 했다.
“그렇군.”
“물론 전하께서 나서 주셨기에 이만한 것입니다.”
뒤늦게 강의 공로를 떠올린 도아가 서둘러 말을 바꿨다. 그 모습에 강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오?”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니 믿는 수밖에.”
“아부를 하는 것이 아니니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후궁에게서 아부란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계속 맥 빠진 웃음이 나왔다. 강은 고개를 가로젓다가 이내 말을 고쳤다.
“바쁜 것 같아 오늘은 이만 가 볼 것이니 내일 대전으로 오시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대전으로 찾아오라는 말에 무언가 찜찜해진 도아가 되물었다.
“물을 것도 있고, 들을 것도 있고.”
“네?…….”
“이만 가 볼 테니 마저 하시오.”
“…….”
“얼굴에 피는 그만 묻히고.”
어느새 강은 가 버리고 없었다. 그럼에도 도아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가 걸어간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눈치를 채신 건 아니겠지?’
문득 강의 손길이 머물렀던 뺨이 생각나 만지작거렸다. 태어나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 머물렀다.
“너무 매몰차게 굴었나.”
다른 뜻 없이 사내의 손길에 익숙지 않아 나온 행동이었다. 도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할 일이 생각나 서둘러 움직였다.
* * *
문안을 다녀온 후로 청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골몰히 무언가를 떠올렸다.
어제 자경전에서 자신을 싸늘하게 쳐다보던 강의 눈빛이 뇌리에 박혀 버렸다. 마치 범인을 안다는 듯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아끼듯 바라보며 총애를 줘도 모자랄 판국에 경멸하고, 하찮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다행히 나은이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지 않아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 상황을 안도하며 안심할 수는 없었다. 모두가 말은 안 해도 범인이 혼자가 아님을 아는 듯했다.
‘전하께서 이미 귀인의 편에 섰으니 그 마음을 돌릴 만한 무언가가 필요해. 이따위 조잡스러운 계략 말고, 정이 떨어질 만한 무언가…….’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청아는 묘안이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쳐들고 연 상궁을 불렀다.
“자네는 궐에 얼마나 있었는가?”
“소인은 생각시 시절부터 대궐에 있었으니 꽤 오래되었사옵니다.”
“그렇다면 한평생을 궐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구나.”
“그렇사옵니다.”
제 주인을 섬기지 않아 일을 망가뜨린 홍 상궁과 다르게 연 상궁은 입도 무겁고, 제법 총기가 있었다.
“앞으로 남은 자네의 궐 생활은, 내 손에 달려 있을 것이네.”
“소인이 모시는 주인이시니 응당 그러하옵니다.”
“자네에게 긴히 맡길 일이 있네.”
“예?”
“내 평생도, 자네에게 달려 있네.”
입궐할 때부터 한 배에 오른 두 사람이었다. 신분은 달랐으나 서로가 하나의 실에 묶여 같은 운명을 가야 했다.
“가까이 들게.”
거리를 두고 있던 연 상궁이 청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 * *
조회를 마치고 대전으로 돌아가는 길이던 강은 연을 돌려 교태전으로 향했다. 한적한 여유를 만끽하던 교태전으로 강이 들었다.
연둣빛이 맴도는 당의를 차려입은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했다. 곧이어 차를 담은 상이 들어왔다.
“근래 비가 오지 않아 어려움이 많다고 들었사옵니다.”
“안 그래도 오늘 조회에서 가뭄이 화두가 되었소. 곡식이 한창 익어야 할 시기에 비가 오지 않아 큰일이오.”
“피해가 심각한 것이옵니까?”
“다행히 아직은 그리 심각한 정도는 아니오. 대비할 수 있는 정도니, 대책을 세워야겠지.”
가뭄은 백성들의 삶을 고단하게 만들었다. 한 해 농사를 비가 좌지우지하니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강은 앞에 놓인 잔을 들어 향을 마시며 입술을 적셨다.
“이제 중전과 과인, 막역한 사이는 아니더라도 서로에게 직언을 해 줄 사이는 되지 않소?”
“그렇사옵니다. 신첩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시옵니까?”
“대비께 휘둘리지 마시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며 강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차분하게 내려놓았다.
“비록 대궐의 웃어른이 대비마마이시기는 하지만 그는 마땅히 공경하고 효를 다하면 될 일이오. 내명부의 주권을 줄 필요까지는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오.”
“…….”
“중전이 대비께 효를 다하여 모시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로 인해 많은 것을 내어 드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소.”
표정의 변화 없이 강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번 일로 은하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신첩의 안일함으로 무고한 목숨을 앗아 갈 뻔했사옵니다. 어쩌면 안일함에 젖어 어마마마의 등 뒤에 숨은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사옵니다. 실수는 처음 저질렀을 때, 그것을 실수라 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두 번은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이었다면 말이 장황하다 여겼을 것이나 중전이니 바로 들을 것이오.”
“예, 전하의 직언을 새겨 두도록 하겠사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잔을 집어 차를 마셨다. 향기는 부드러웠으나 차 맛은 달기보단 쓰단 말이 맞았다.
“전하께서 귀인과 많이 가까워지신 것 같았사옵니다.”
“켁……!”
별말이 아니었는데 강은 그만 마시던 차가 목구멍에 걸리고 말았다. 은하가 놀라 가까이 다가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켁……. 말도 안 되는 소리.”
“신첩이 투기라도 하는 줄 아셨사옵니까?”
사실 그쪽보다는 요즘 도아를 향한 관심을 들킨 것 같아 되레 찔려서 그런 것이었다.
“아니었소?”
“애석하게도, 정반대입니다.”
“정반대라?”
“예, 전하께서 귀인에게 마음을 쓰시는 듯하여 마음이 놓였사옵니다.”
“아무리 지기 사이지만 그건 좀 너무하는구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강을 보며 은하가 은은하게 웃었다. 강은 연신 헛기침을 하며 민망스러워했다.
“신첩이 보기에, 귀인이라면 전하께서 마음을 쓰셔도 될 것 같사옵니다.”
“어째서? 어떤 면이 말이오?”
“꽃 같은 용모에 가려진 강인함과 순수함이 그러하옵니다.”
“글쎄.”
그사이 은하는 조용히 강의 빈 잔을 채워 주었다. 아담한 잔에 차가 알맞게 채워졌다.
“귀히 여겨 주신다면, 외면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중전의 잔에 채워진 것이, 혹 술이었소?”
낮술을 했냐는 말에 은하는 다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신첩도 직언을 드린 것이니 받아들이시옵소서.”
“그런 것이라면, 알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말을 마친 은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은은하기보단 쓴맛이 강한 차였지만 마실수록 손이 가는 오묘한 차였다. 강은 그 차를 마시고서야 처소를 나섰다.
* * *
모든 진실이 밝혀져 나락에 던져진 나은은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다. 한 상궁은 그날로 대궐에서 쫓겨나고 새로 민 상궁이 왔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해서 통통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나은은 꽤 해쓱해진 몰골이었다.
민 상궁을 통해 소식을 전한 부친, 도총관은 지금은 때가 이런 만큼 자숙하는 모습을 보이라는 말을 전했다.
“숙의마마.”
“들어오시게.”
안으로 들어온 민 상궁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 뜻은, 오늘도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알겠네. 차비하고 나가겠네.”
“송구하옵니다.”
나은의 뜻에 민 상궁이 조용히 처소를 비워 주었다. 간소하게 차려입고 있던 나은은 그마저도 모두 벗어 놓았다.
마지막으로 머리에 꽂아 두었던 비녀를 빼고, 첩지를 내려놓았다. 초라하게 머리를 내리자 준비가 되었다는 듯 일어났다.
소복 차림으로 나가자 작은 뜰에 멍석을 깔아 놓은 채 기다리고 있는 민 상궁이 보였다.
이는 대비 조 씨가 벌을 내린 것으로, 나은은 하루도 빼먹지 않고 멍석에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를 올리고 있었다.
‘석고대죄를 올릴 때마다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지네.’
양심의 가책으로 불안함에 떨던 나은은 오히려 진실이 밝혀지고 가벼워졌다.
‘이 일로 가문이 해를 입지 않아야 할 터인데 오직 그것이 걱정이구나.’
하나 걱정이라면, 가문이 해를 입는 것이었다. 강에게 밉보여 부친인 도총관이 사직에서 밀려나는 것이 큰 근심거리였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나은은 머리를 괴롭히던 생각을 지우고, 죄를 빌었다.
* * *
새벽에 의식을 회복한 무이에게 죽과 약을 먹이고, 한참 동안 곁을 지키던 도아는 강이 남기고 간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까맣게 잊고 있었네.”
아직 몸이 성치 않은 무이를 돌보느라 며칠이 지나도록 까맣게 잊고 지냈다.
“무이야, 대전에 좀 다녀올게.”
“네……. 제 걱정은 말고, 다녀오세요. 마마.”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자고 있어.”
엄마 같은 다정한 말에 무이는 보시시 아이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도아는 옷가지를 매만지며 대전으로 향했다. 어쩌면 강의 부름을 잊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대전 앞에 다다르자 그가 물어 올 것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참으로 빨리도 왔소.”
“걸음을 서두르긴 했습니다.”
“그런 말이 아닐 텐데?”
“송구하옵니다.”
아니나 다를까, 도아가 대전에 들자 강은 눈썹을 비뚜름하게 뜨며 시비를 붙였다.
“일부러 안 온 것이오?”
“당치 않으십니다.”
“그 궁녀를 보살피느라 잊고 있었다?”
“예, 헤아려 주십시오. 전하.”
그렇게 말하며 도아가 어색하게 미소를 피어 놓았다. 강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허탈해하다가 기류를 달리했다.
“그렇다니 묻겠소.”
“예, 전하.”
“귀인이 과인에게 귀띔해 준 것들, 어찌 알아낸 것이오?”
“예? 무엇을…….”
예상이 적중하자 도아는 애써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며 모르쇠에 돌입했다.
‘모르는 척을 하시겠다?’
그러나 강은 이미 그것을 간파하며 비웃었다.
“우린 동맹 서약을 한 사이요. 그런 사이에 비밀이 있어선 안 되겠지.”
“…….”
“서로가 필요할 때 이용하기로 한 것 아닌가?”
“굳이 풀이하자면,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귀인이 과인을 이용했으니 궁금증은 풀어 줘야 할 것이오.”
한발 물러날 기세는 아니었다. 도아도 이것을 우려하여 입을 다물었던 것이나 무이의 상황을 보고,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하지? 내가 안 숙의의 기억을 읽었다고 말하면…… 믿으려나?’
눈동자가 굴러갔다. 맞은편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은 좀 더 의심을 품기로 했다.
항상 거침없이 말을 이어 가는 여인이, 입을 다물고 눈을 굴린다면 의심을 해야 했다.
“생각이 길어질 것 같거든.”
“…….”
“자고 가도 좋소.”
그는 강하게 압박을 넣었다. 밤새 고민해도, 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