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27)화 (28/93)

제 27 화 닿는 손길 그리고 생각

방에 틀어박혀 앉아 전전긍긍 고민하던 도총관은 결국 자존심을 내다 버리고, 대제학을 찾아갔다.

문전박대를 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다르게 대제학은 찾아온 이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안 숙의마마가 지혜로운 판단을 내려 모두의 화를 피했네.”

“그리 생각해 준다니 고맙네.”

“물론 마마가 뒤처리를 깔끔하게 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찌하겠나?”

“내 자네를 볼 낯이 없네. 아직 마마가 어리숙하여 아랫것을 온전히 믿은 탓이지.”

눈을 아래로 내리깐 도총관을 바라보는 대제학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이미 한 배를 타기로 했으니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말게.”

“자네가 그리 호탕하니 내 믿고 따르는 것일세.”

“암, 알고말고.”

“그리고 내 한 가지 귀중한 정보를 가져왔네.”

귀한 정보란 말에 대제학은 태연한 척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자 도총관은 한 무릎 더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중전마마께 정혼자가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는가?”

“정혼자?”

“그래, 국혼을 치르시기 전에 이미 혼인을 약조한 사내가 있었다는 소문 말일세.”

“음……. 그러고 보니 지나가는 소리로 들은 것도 같고?”

그러자 도총관은 이가 다 보이도록 환하게 웃으며 야비하게 웃어 댔다.

“아마 들어 본 사람이 꽤 있을 것이네. 허나 당시에 모두 뜬소문이라 지나쳐 제대로 밝히려는 이가 없었지.”

“워낙 국혼에 치중되어 더 그랬을 것이네.”

“그렇지. 그런데 내가 중전마마의 고향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모두 쉬쉬하더군? 그것이 더 의심스러워서 집요하게 파고들어 알아보니 정혼자가 있었다는군!”

이미 지나간 일이라면 과거로 치부될 일이지만 주인공은 한 나라의 국모, 중전의 일이었다. 

게다가 정혼이라면, 사내와 엮인 일이니 예삿일이 아니었다.

“당사자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맺어진 정혼이라더군.”

“오호라…….”

“게다가 정을 통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네.”

“자네 아주 제대로 된 것을 물고 왔군.”

“내 귀한 정보라 하지 않았나.”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하며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견이라도 한 듯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어떠한가? 일이 맺어질 수 있겠는가?”

“잘만 하면 교태전 주인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네.”

대제학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막말을 잘도 지껄였다. 이에 도총관의 눈이 반짝거렸다. 

“전하의 신임이 대단하신데 그렇게까지 되겠는가?”

“믿고 총애했던 부인이, 실은 다른 사내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면 어떠하겠나?”

“배신감에 몸도 마음도 돌아서겠지!”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대비마마께서 뒷목을 잡고 쓰러지실 것이네.”

상상만으로 기분이 하늘을 나는 것만 같았다. 대제학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고고하신 중전마마의 염문설이라.”

* * *

대전에서 때아닌 대치가 벌어졌다. 강은 입을 다문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도아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자고 갈 것이오?”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알려 달라는 것 아니오?”

“…….”

“또 입을 다무네.”

얕은 한숨을 뱉어 낸 강은 미간을 찌푸리며 난처해하는 도아를 쳐다봤다.

“귀인과 내 관계는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과인이 아니었소.”

“예, 소첩이 그리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음……. 때로는 말 못 할 일도 생기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도아가 또 어울리지도 않는 억지스러운 미소를 걸치니 보기에도 좋지 않아 강은 절로 인상이 써졌다.

“말하지 않는다고 신뢰가 깨진 것은 아닙니다.”

“그대가 말하고도 억지스럽지 않소?”

“다음에 전하께서 말 못 할 일이 생기시어 비밀에 부치신다면 소첩이 눈감아 드리겠습니다.”

“솔깃해야 하는 것이오?”

기가 막혔다.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가득 안은 채 강에게 숨기려 드는 도아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가 백날 떠들어 봐야 저 여인에게 먹히지도 않을 터.’

벌써 반 시진이 넘도록 씨름을 했지만 도아는 조금도 넘어오지 않고, 되레 강을 제 쪽으로 끌어가려 했다.

“이번 일은 이렇게 넘어갈 것이오.”

“망극하옵니다.”

“허나, 두 번은 없소.”

“…….”

“우린 서로 주고받기를 명확히 약조한 사이요. 그런 사이에 말 못 할 일은 더 이상 만들지 말아야겠지.”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제야 억지스럽게 걸치던 미소가 떠났다. 무언가를 안심한 듯 고개를 숙인 채 숨을 내쉬는 모습을 강은 놓치지 않았다.

남장을 하고 달빛 아래 만났던 날이 엉뚱하게 떠올랐다. 호색한이라 날카롭게 외치던 목소리가 낭랑했다.

‘어찌하여 귀인을 보고 있으면, 바다가 떠오르는 걸까.’

시원한 냄새가 가득하던 바다가 어스름하게 올라왔다. 강은 족자에 그려 놓은 인어의 얼굴에서 도아를 떠올렸다.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하도 말도 없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니 도아가 민망하여 제 뺨을 만지며 물었다.

“귀인을 보고 있으면 자꾸 다른 생각이 들어서.”

“다른 생각이라면…….”

“나쁜 생각은 아니니 오해 마시오.”

행여나 야한 생각일까 걱정했던 마음이 놓였다.

“소첩을 보면 드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인어, 라고 말했다간 미친놈 취급을 하겠지.’

이번에는 강이 말할 수 없는 질문을 받았다. 도아가 조금 전 지었던 표정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전하께서 때때로 소첩을 보실 때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굳이?”

“나쁜 생각도 아닌데 말해 주시지요.”

막상 둘러말하려니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꺼낸 말이 고작 그거였다.

“묵비권.”

“예?”

“그대의 질문에 말하지 않을 권리를 쓰겠단 거요.”

“겨우, 고작 이런 것에요?”

“계속 궁금해하라는 벌이라 생각하시오.”

허! 도아는 조금 전 일에 대한 복수를 당하는 것 같아 어이가 없었다. 더 묻자니 뱉은 말이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과인이 원래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어련하시겠습니까.”

“귀인은 그러다 반말을 하시겠소.”

“감히 어느 안전에.”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무슨 일이냐.”

“도화군이 오시었습니다, 전하.”

“손님이 오셨으니 소첩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럼 그러시오.”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난 도아가 가볍게 묵례를 하고 가려다가 멈춰 섰다.

“소첩의 말을 믿고, 궁녀를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것은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니 곡해 마시옵소서.”

하도 비뚤게 들으니 하는 말이었다. 이에 강이 대꾸를 하기 전에 도아는 걸음을 떼어 문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자 단정한 차림의 도화군이 서 있었다. 입궐하여 처음 대면하는 자리였다.

‘도화군이라면 전하의 아우가 되시겠구나.’

서로 눈이 마주치자 도화군은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었다. 이에 도아도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아 주었다.

‘인상이 참으로 따듯하시구나.’

사내를 보고 첫인상에 따듯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도화군이 처음이었다. 

* * *

얼마 만의 입궐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도화군이 언제나처럼 환한 얼굴로 대전에 들어서자 강은 눈을 흘겼다.

“자식에게 눈이 멀어 형님을 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소신이 어찌 감히 형님을 저버리겠습니까.”

“그래, 형님이라 부르니 봐주마.”

정겹게 형님이라 칭해 주니 강의 용안에 웃음이 흘러넘쳤다. 

“별건 아니지만 청에서 서양 문물이라 하여 들여온 것이옵니다.”

“서양 문물? 어디 보자.”

도화군이 들고 있던 것을 상선에게 전하자 그것이 강의 손에 들어갔다. 

“『인어공주』?”

“예, 이제는 바다에서 사라지고 없어진 존재를 서양에서 그림 책자로 만든 것이옵니다.”

“그래? 그래서 책이 큰 것이었구나.”

“그렇사옵니다. 안에 글과 함께 그림이 들어가 있는데 꽤 저명한 화가의 솜씨라 하옵니다.”

강이 어려서부터 인어에 관심이 높다는 것을 도화군은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람을 시켜서 일부러 어렵게 구해 온 책자였다.

역시나 강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곧장 책장을 펼쳤다. 그러자 가장 첫 장에 수면 위로 올라가려 서 있는 인어가 그려져 있었다.

너울거리는 머릿결과 가늘고 고운 선을 따라 인어의 꼬리는 생동감 넘치게 그려져 있었다.

“과연 굉장하구나.”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이야기도 함께 들어 있는 것 같은데 화가의 그림 솜씨가 수려하구나.”

“예, 이미 서양에서는 꽤나 저명한 화가라 했나이다.”

“아우가 이것을 구하느라 꽤나 고생했겠구나.”

그 마음을 모를까, 강이 고마움을 치하하자 도화군의 얼굴이 벌게지며 민망함에 물들었다.

“오랜만에 입궐했으니 벌로 노을이 지는 것을 보고 가거라.”

“명 받들겠사옵니다.”

“오냐, 어서 다과를 들도록 해라.”

다과를 권하면서도 강은 힐끔 상에 올려놓은 책자를 쳐다봤다. 

그때, 평화의 균열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전하! 대비마마께서…….”

상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전의 문이 벌컥 열렸다. 

“어마마마.”

대전에 들어 있던 두 사람의 입에서 나란히 나온 말이었다. 허나, 도화군에게는 허울뿐인 명칭일 뿐이었다.

“도화군이 들어 있었군.”

“어마마마께 문후 인사 드리옵니다. 그간 무고하셨사옵니까.”

“내 안녕했겠습니까?”

자리를 비집고 들어앉은 대비 조 씨는 도화군을 잡아먹을 기세로 매섭게 노려봤다. 덕분에 도화군은 사색이 되어 꿇어앉아야 했다. 

“주상께서는 후사를 두지 못하시어 후궁을 들이는 판국에 아우 되는 도화군은 떡하니 아들을 낳았으니 이 사람이 잠인들 편히 잤겠습니까?”

“……송구하옵니다, 어마마마.”

“주상을 천하에 웃음거리로 만들어 놓고, 무슨 낯짝으로 입궐을 했습니까?”

송구함에 바닥에 엎드린 도화군은 마치 어릴 적 모습을 보는 듯했다. 옆에서 그 광경을 보던 강은 눈을 감았다.

“소자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잘못……했사옵니다, 어마마마.”

“진심으로 하는 소립니까?”

“예, 감히 어마마마께 거짓을 고할 수 없사옵니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으니 부디 넓으신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옵소서.”

“흥! 말은 주옥같이 잘도 합니다. 어찌 형님보다!”

잘못했다고 연신 빌고 있는 도화군에게 칼날과도 같은 눈빛만 보내던 대비 조 씨가 열변을 토하려 할 때였다. 

“그만, 그만! 제발 그만하십시오! 어마마마!”

“……주, 주상?”

결국 참다못해 폭발한 강이 고함을 지르자 화들짝 놀란 대비 조 씨가 말을 더듬거렸다.

“지, 지금 이 어미에게 소리를 지르신 겁니까?”

“소자가 어마마마라 부를 분이 또 계십니까?”

“내 믿기지 않아 묻는 겁니다! 어찌 주상께서 이 어미에게 고함을 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 그러지 마시라 몇 번이나 당부의 말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대비 조 씨는 자기에게 고함을 친 강을 용납할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도화군이 놀라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형님, 어찌 그러십니까?”

“어마마마께서는 우리 형제가 피비린내를 풍기면서 난이라도 일으켜야 만족하시겠습니까?”

“형님!”

“대체 언제까지 도화군은 어마마마를 볼 때마다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땅만 봐야 합니까!”

목에 핏대를 세우며 강이 흥분한 모습을 보이자 도화군이 나서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처음 보는 모습에 대비 조 씨는 여전히 어버버버 말문이 막혀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자신의 것에 욕심을 내 본 적 없는 아우입니다. 평생 따듯한 말 한마디, 손길 한번 주신 적 없는 어마마마를 원망해 본 적 없는 모자랄 만큼 착한 사람이 바로 도화군이란 말입니다.”

서러운 말이었다. 후궁의 자식으로 태어나 정궁의 눈칫밥을 먹고, 모친을 여의고는 고아처럼 자랐다.

“오늘 어마마마께 큰 불경을 저질렀으니 날이 밝는 대로 죄를 빌러 가겠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 주십시오, 어마마마.”

자리를 지키고 있어 봤자 엄한 소리만 듣게 될 것이 뻔했다. 대비 조 씨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오늘을 잊지 않을 겁니다, 주상.”

“송구하옵니다.”

본인이 한 짓은 생각도 안 하고, 그저 자식이 부모에게 수모를 줬다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한동안 형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도화군은 눈 끝에 맺혀 있던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냈다.

“죄송합니다, 형님.”

“…….”

“오늘 입궐한 것은 아무래도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아우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도화군을 강이 나지막이 불렀다.

“스스로 네 자신을 낮추지 마라.”

“…….”

“너는 그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마마마의 비위를 맞추자고 그리 죄인이 될 필요 없느니라. 앞으로는 네가 잘못하지 않은 일에 고개 숙이지 말거라.”

평생을 그렇게 살았으니 단번에 고칠 수는 없을 것이다. 

“네 아들 선이를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한다. 네가 고개를 숙이면 네 자식도 고개를 숙이고 살아야 하는 법이다.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가장 아끼는 선이를 들어서 비유했으니 앞으로는 신중할 것이다. 강은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로 네가 대궐에 발길을 끊는다면 형님더러 궐 밖으로 나오란 뜻으로 알 것이니 명심해라.”

“…….”

“약조해라. 그러지 않겠다고, 그럼 보내 주마.”

“늘 형님께 모자란 모습만 보이니 그것이 송구스럽습니다.”

착하고 여린 마음을 지녔다. 열 길 물속처럼 훤히 보일 만큼 맑고 고운 아우였다. 

허나 깊고 진한 눈은 대단한 총명함과 추진력을 지니고 있었다. 대비가 쳐 놓은 울타리를 벗어난다면 장차 큰일을 할 인물이었다. 

“아우가 형님을 뵙지 않고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자주 입궐하여 문안 여쭐 것이옵니다.”

“오냐, 그 약조를 믿고 보내 주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오늘 일을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조심히 가도록 해라.”

자리에서 일어난 도화군이 큰절을 올리고 소리 없이 대전을 나섰다.

“당분간은 또 자취를 감추겠지.”

혼자 남게 되자 강은 속상함에 깊은 한숨을 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상선아.”

“예, 전하.”

“도화군이 무사히 대궐을 나서는지 살피고 오너라.”

이에 명을 받잡은 상선이 도화군의 뒤를 밟기 위해 서둘러 처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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