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화 불화의 씨앗
강의 손에서 나와 허공에 날리는 것은 다름 아닌 ‘환약’이었다. 환약들이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이내 그것을 알아차린 나은과 청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청아는 나은을 쳐다보면서 이게 뭐냐며 눈짓으로 물었다.
“주, 주상! 지금 이게 무슨!”
“아무리 귀인이 안하무인으로 굴어도, 일개 상궁이 손찌검을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소자가 한발 늦어 엄 상궁이 귀인의 얼굴에 손을 댔더라면, 그 손목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것은 뒤로 두더라도 이것은 강의 말이 맞았다. 일개 상궁이, 후궁의 얼굴에 손을 대는 일은 절대 용납되지 않았다.
상궁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잡혀 있던 도아에게 다가간 강이 표정은 차가웠으나 세심한 손길로 바로 앉혀 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고이 마주했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삼킬 듯 바라보던 강이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 바닥에 뿌린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환약입니다, 어마마마.”
“환약이요?”
“예, 이 환약이 어디에 쓰이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안 숙의가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드릴 것입니다.”
차갑게 식다 못해 싸늘해진 눈동자가 나은을 노렸다. 일순간 숨 쉬는 것마저 까먹은 나은이 벌벌 떨었다.
“이 환약을 모른다고 하진 않을 것이오.”
“…….”
“나인을 들여라.”
말이 떨어지자 다시 문이 열리고, 지밀나인과 곶감을 나눠 먹던 나인이 들어왔다.
“이 환약은 안 숙의가, 귀인에게 덫을 놓기 전에 제 목숨을 지키려 먹은 것입니다.”
“그러니 안 숙의가 사과를 먹기 전에 미리 환약을 먹어 큰일을 방비했다는 겁니까?”
“역시 어마마마십니다. 그렇습니다.”
“저 나인은 뭡니까?”
“이 모든 정황을 설명해 줄 증인입니다.”
어금니를 꽉 물고 있던 청아는 눈을 감아 버렸다. 모든 일이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과즙을 내어 차에 넣었으나 이미 그것은 사라지고 없어 구하지 못했습니다.”
“주상께서 참으로 애를 쓰셨습니다.”
“그저 두고 보려 했으나 귀인 처소의 나인도 소자의 백성인지라 무고하게 옥살이하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허……. 말씀은 참 잘하십니다.”
대비 조 씨는 이미 예견했던 일이라 크게 놀라진 않았으나 강이 잿밥을 뿌린 일은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자네 두 사람, 이 일에 대해 어찌 설명할 텐가?”
“예?”
“두 사람이 나서서 귀인을 음해했으니 입 닫고, 앉아만 있을 것이 아니네.”
가만히 앉아 있던 은하가 나서서 청아와 나은을 심문했다. 어느새 모두의 이목이 두 숙의에게 향하였다.
“소…… 소, 소첩이…….”
“뭐라고 했는가?”
“소첩이…… 투기에 눈이 멀어, 그랬사옵니다.”
“투기?”
“예……. 미련하여 제 발등 찍는 일인 줄도 모르고, 감히 귀인마마를 음해하려 들었사옵니다.”
자리를 고쳐 앉아 무릎을 꿇은 나은이 눈물로 호소했다.
“혼자 그랬다고?”
“예? 예! 예……. 그러하옵니다, 전하.”
“안 숙의의 말이 맞소?”
“예?”
이번에는 옆에 앉아 있던 청아에게 물음이 넘어갔다. 어찌할 줄 몰라 버둥거리던 청아도 이내 무릎을 꿇었다.
“그러하옵니다. 소첩은 이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사옵니다! 믿어 주시옵소서.”
“대궐에서 맺어진 인연은 이토록 하잘것없소.”
“저, 전하…….”
“이렇다 합니다, 어마마마.”
마지막 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대비였다. 강이 말을 마치고, 보료에 앉아 있던 대비 조 씨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모두들 차분해질 즘 대비 조 씨가 입을 열었다.
“왕실이 후궁을 들인 것은 후사를 위해서지 이따위 소란을 보고자 함이 아니었네. 후사를 위해 입궁한 자네들이 이런 식의 분란을 만든다면 더 이상의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네.”
“분란을 만든 안 숙의를 폐출하여 사가로 쫓아내십쇼.”
강의 입에서 나온 폐출 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은이 퉁퉁 부은 눈으로 살려 달라 모두를 향해 도움을 구했다.
“그는 과한 처사십니다, 주상.”
“스스로 목숨을 두고, 도박을 한 무서운 여인입니다.”
말을 하면서 강의 시선은 나은이 아닌 청아를 향해 있었다. 마치 진실을 알기라도 하듯 매서운 눈빛이었다.
“내 이미 귀인으로 오해하였을 때 한 번은 자비를 베풀기로 했으니 안 숙의에게도 똑같이 그럴 작정입니다.”
대비는 앞서 도아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려고 했던 것을 말했다. 그러자 강도 더는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안 숙의는 보름 동안 처소에 유폐시키도록 할 것이다. 또한, 매일 두 시진씩 멍석을 깔고 무릎을 꿇고 죄를 반성토록 하라. 만일 차후에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 그때는 자비 없이 궐 밖으로 내칠 것이니 명심하도록 해라.”
가만히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도아가 메말라 있던 입술을 벌렸다.
“이 일을 행한 궁녀는 어찌하실 것이옵니까?”
“그것은…….”
“소첩의 궁녀에게 명하셨던 대로 곤장 50대를 쳐서 궐 밖으로 내치심이 옳으시옵니다.”
“…….”
“무고하게 옥살이를 한 소첩의 궁녀를 위해서라도, 꼭 그리해 주십시오.”
이에 저만치 구석에 앉아서 떨고 있던 홍 상궁의 얼굴이 파리하게 굳어 갔다. 또한 끌려온 나인은 눈물을 떨구었다.
“그리하라.”
명이 떨어지자 그제야 도아는 입을 다물었다.
* * *
그 소식을 들은 후부터 시현은 머리가 하얘져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하루를 멍청하게 털어 버린 것이다.
“안에 있느냐.”
밖에서 영의정이 찾아와 불렀으나 그 소리마저 듣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기척이 없자 영의정이 이상하게 생각해 안으로 들어왔다.
“있었구나.”
“아, 예……. 오셨습니까.”
“집중을 해서 듣지 못한 것이냐. 다른 생각을 하느라 못 들은 것이냐.”
“…….”
“요즘 너를 본다면 전자가 맞겠지.”
시현의 주변으로 쌓여 있는 서책을 보며 영의정이 흐뭇하게 웃은 채 자리에 앉았다.
“밤을 새워 책을 본 것이냐?”
“…….”
“눈 밑이 거뭇하구나. 너무 무리해서 몸이 상하면 큰일이니 잠은 자면서 하도록 해라.”
“예, 아버지.”
오해가 있었지만, 시현은 굳이 바로잡으려 하진 않았다.
“아버지, 저…….”
“무엇이냐?”
“도진이의 누이 말입니다.”
“누구?”
그러다 누이가 누구를 일컫는지 알아차린 영의정이 얼굴을 굳혔다.
“이젠 귀인마마시다. 누이라 그리 가볍게 칭해선 안 된다.”
“송구합니다. 귀인마마가 궐에서 곤란한 처지라 들었습니다.”
“도진이가 걱정을 해서 한 소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얘기는 가볍게 듣고 흘려야 한다.”
“아버지가 나서서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나서 주실 수 없으십니까?”
이에 영의정은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신경질을 억누르는 모습을 보였다.
“내명부 일이다. 내가 감히 나설 명분이 없는 자리다.”
“…….”
“네가 그 댁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알겠다만 귀인마마는 전하의 여인이다. 네가 이처럼 쉬이 입에 올릴 수 있는 분이 아니지.”
“송구합니다. 소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래,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을 입에 담지 마라. 큰 화를 부를 수도 있음이다.”
입에 담지 말란 소리에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미 마음에 담고, 몸에 담았는데 그럴 수가 있을까.
“이번 소란이 일단락되면 전하께 네 얘기를 꺼낼 것이니 그때까지 마음을 잘 잡고, 지금처럼 학문에 정진하도록 해라.”
그러다 문득 영의정은 망나니처럼 노는 것밖에 모르던 자식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궁금증이 치밀었다.
“무엇이 너를 변하게 했느냐?”
방을 나가려다가 멈춰서 물었다.
“계기가 있었을 것 아니냐.”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정신을 차렸을 뿐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진작 때릴 것을 그랬구나.”
“앞으로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오냐, 내 기대해 보마.”
만족스러운 대답에 영의정이 시현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고도 한참을 시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현은 부친의 질문에 온몸이 뜨거워지도록 오직 하나만 생각했다. 대궐에 가야 볼 수 있는 사람.
‘홍도아.’
밖으로 내뱉지 못한 이름이 불씨가 되어 타올랐다.
* * *
마른하늘이 빛줄기를 뿜었다. 처소 후원에 나와서 서성인 지 어느덧 한 시진이 지났다.
후원을 돌 때마다 치맛자락이 힘없이 흩날렸다. 자경전을 나설 때 무이가 곧 풀려날 테니 가서 기다리란 강의 말에 내내 이러고 있었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갈 즘 밖에서 무언가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나가자 군사가 낡은 수레를 끌고 오고 있었다.
한달음에 달려가 수레를 살피니 그 안에 마치 짐짝처럼 만신창이가 된 무이가 누워 있었다.
“하…….”
숨이 토해졌다. 덜덜 떠는 손을 조심스레 무이의 코 아래로 가져갔다. 마치 죽은 듯 미동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약했으나 숨은 쉬고 있었다. 수레에 실려 온 무이를 처소 곁방에 눕히고, 은하가 보내 준 어의와 의녀가 살폈다.
이때까지도 무이는 숨만 토할 뿐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어의가 맥을 살피고, 몸 곳곳을 살펴 주었다.
“왜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것인가?”
“하늘이 도우시어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옵니다. 허나…….”
“무엇인가?”
“송구하오나 중요한 건 나인이 깨어나 걸어 봐야겠지만 우선 소신의 견해로는 부러진 발목이 오랫동안 방치되어 절름발이로 살아야 할 수도 있사옵니다.”
꼭 잡고 있던 무이의 손을 힘없이 놔 버리고 말았다. 절름발이라니, 꽃다운 나이의 여인에게 가혹한 꼬리표가 될 것이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부러진 채로 고문을 계속 받은 탓에 발목에 있는 살점은 남아나질 않았사옵니다. 우선은 지켜봐야겠지만 알고 계시는 것이 좋을 듯하여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도아는 다시 무이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돌려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는 무이를 바라봤다.
“무이야.”
손을 뻗어서 얼룩덜룩 피가 묻은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미안해.”
차마 흐르지 못한 눈물이, 눈가에 맴돌다 사라졌다.
* * *
연에 오른 강은 상선에게 도아의 일을 전해 듣고 있었다. 무이가 무사히 돌아왔으나 평생 절름발이 신세를 지게 된다는 소식이었다.
“의금부에 끌려가 살아 돌아온 궁녀가 몇이나 되겠느냐.”
“그렇기는 하옵니다.”
“비록 절름발이가 될지언정 죽는 것보단 낫겠지.”
“옳으신 말씀이시옵니다.”
어느새 강이 탄 연이 도아의 처소에 당도해 있었다. 분명 대전으로 가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 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연이 바닥에 내려지자 강이 어찌 된 영문이냐는 얼굴로 상선을 쳐다봤다.
“미천한 소인이 감히 전하의 명을 어겼사옵니다.”
누구보다 오래 강의 곁에 있었던 상선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여기 있어라.”
“예, 전하.”
연에서 내린 강은 느린 걸음으로 처소를 막아선 문을 넘었다. 그러자 의녀들이 물동이를 들고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막상 만나려니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만나서 할 얘기도 생각나지 않아 어색하기만 할 것 같았다.
‘괜히 왔나.’
돌아가려 등을 지려는데 삐걱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의녀들처럼 물동이에 피 묻은 천을 들고나오는 도아가 보였다.
“전하?”
신을 신고 내려오던 도아는 꽤나 놀란 눈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강을 바라봤다.
“의녀가 있는데 귀인이 나설 필요 있소?”
“제 사람이니 거드는 것이 당연합니다. 안 그래도 찾아뵈려 했는데…….”
“백 년 후에?”
그저 말뿐이 아니냐는 식이었다. 비꼬는 말을 거둔 강이 도아를 이곳저곳 살폈다. 얼굴, 대야를 들고 있는 손.
“어찌 그리 보십니까?”
그러자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강이 도아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얼굴에 피.”
뭐라 말할 틈도 없이 그렇게 다가온 강의 손이, 도아의 뺨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