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화 불화의 씨앗
모래알이 밟혀 부서지는 소리만이 이따금 들려왔다. 일정하게 울리는 심장 소리, 따듯한 체온, 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닿았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정신이 돌아온 도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힘없이 늘어진 몸은 강에게 의지한 채 허공에 떠 있었다.
그는 혼절한 도아를 품에 안은 채 무심한 얼굴로 대궐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내려…… 주세요…….”
금방이라도 끊길 듯 자그마한 목소리가 울렸다.
“전하…….”
“무거워서 손이 저리니 조용히 갑시다.”
그는 그리 말하며 도아를 내려 주지 않고, 안아 든 채 처소까지 걸어갔다.
그늘진 처소에 들어와 보료 위에 도아를 내려 주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너무 가까워서 입이 닿을 지경이었다.
“다시 그대를 의금부에서 보는 날에는 그 안을 지키던 군사들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
“대전 나인을 두고 갈 것이니 어의가 필요하면 부르시오.”
사색이 된 도아를 가만히 쳐다보던 강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속으로 집어삼켰다.
강이 몸을 일으켜 가려는데 덩그러니 앉아만 있던 도아가 두 손을 뻗어 붙들었다. 그리고 강아지 같은 눈으로 강을 올려다보았다.
“또 왜.”
그는 저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전하만이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 얘기라면…….”
“안 귀인이 사과를 먹기 전에 미리 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해 환약을 먹었습니다.”
“환약?”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도아에게서 나오자 강은 자리에 다시 앉았다.
“자세히 말해 보시오.”
“또한 그들이 사과의 즙을 내어 무이의 시선을 돌린 뒤 상에 올릴 차에 넣었습니다.”
자세한 정황마저 알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도아의 절박한 얼굴에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이미 증거를 인멸했을 수도 있지만……. 전하께서 나서 주신다면 일의 진척이 수월할 것입니다.”
“우선은 알겠소.”
“도와주실 것입니까?”
“생각해 보겠소.”
그렇게 말하니 도아는 꽉 잡은 강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힘주어 잡았다.
미세하게 떨고 있는 손을 쳐다보던 강은 낮은 숨을 뱉었다.
“알겠으니 그만 놓으시오.”
“……약조하셨습니다.”
“또 계약서에 도장이라도 찍어야 믿겠소?”
그 말을 듣고서야 도아는 강의 팔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뺐다. 그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아끼던 벗이 피로 물든 모습은 아무리 당찬 여인이라 할지라도 제정신으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무너질 듯 위태로운 모습의 도아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쉬시오.”
그는 짧은 말을 남겨 놓고 무수한 궁금증을 내려놓은 채 처소를 나섰다.
처소를 빠져나가는 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혼자가 된 도아는 고개를 숙인 채 나인 복장으로 의금부에 가려던 날을 떠올렸다.
‘냉혈한이라 한 건 물리겠습니다. 당신이 말은 그리해도 나를 신경 쓰고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도아는 의금부에서 제 눈을 가리고, 혼절한 자신을 품에 안아 처소에 데려다준 강의 마음을 무시하지 않았다.
한동안은 강의 품에 안겨 있던 순간이 떠올라 무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다.
* * *
명령에 따라 지밀나인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명석한 두뇌와 친밀감으로 대전의 측근 자리를 꾀어 찬 나인이었다.
사근사근한 성품으로 어느 처소의 나인과도 친분이 있었다. 안 귀인, 나은의 처소도 예외는 아니었다.
천운으로 나은의 처소를 맡은 나인과는 함께 방을 썼던 동기간이었다. 두 사람은 쉬는 날을 맞이해 간식을 펼쳐 놓고, 휴식을 맛보고 있었다.
“절간처럼 조용하더니 후궁 마마들이 오시니 시끄러워지는구나.”
“이번 일로 내가 모시는 숙의마마 처소가 살얼음판이야.”
“네가 제일 고생이겠다. 마마님들보다 우리가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잖아.”
“그래도 너는 대전에서 전하를 측근에서 모시잖아.”
나인이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자 지밀나인은 무슨 소리냐는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오죽 좋게? 허울만 지밀나인이지. 겉만 배회하고 있을 뿐이야.”
“그래? 의외네. 너는 사근사근해서 마마님들한테 곧잘 귀염도 받아왔잖아. 제조상궁 마마님이 잘 안 해 주셔?”
“말도 마. 시어머니 시집살이가 이보단 낫겠어.”
지밀나인은 나은의 나인과 같은 처지에 놓였음을 보여 주려 일부러 제조상궁을 욕했다.
“가엾어라.”
“다들 여기가 끝이란 생각으로 버티는 거잖아.”
“그렇지. 나도 그랬어.”
“지금은 아니란 것처럼 들리네?”
잘 익은 곶감을 집어서 나인에게 내밀었다. 히죽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곶감을 받아 든 나인이 웃었다.
“이번에 잘하면 더는 이런 고생 안 해도 될 것 같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단번에 눈치챈 지밀나인의 눈이 반짝였다.
“내가 모시는 상궁마마님이 자기 주인을 신임하지 않으시거든.”
“음, 안 숙의마마를 믿지 못하신다는 거야?”
“그렇다기보단 숙의마마가 워낙 드시는 것만 좋아하시고, 전하의 총애는 관심이 없으셔서 가볍다고 해야 할까? 그런 분이시거든. 그러니까 마마님도 존경하지 않고, 은근 무시하는 거지.”
균열이 생겼다는 건 빈틈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곶감을 맛있게 씹고 있는 나인이 파고든 것 같았다.
그렇게 본론으로 접어들었다. 말하면 안 되는데, 라면서 망설이던 나인의 입을 연 것은 지밀나인의 우상을 보듯 치켜세워 주는 언변이었다.
* * *
별채 밖으로 나가지 않고, 학문을 닦는 일에 여념이 없던 시현은 도아의 별당 호수에서 주웠던 비늘을 꺼내 보고 있었다.
그를 이끌어 주는 건 도아가 있었던 자리에 남아 있던 비늘이었다. 이 존재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시현에겐 그녀의 흔적으로 남았다.
대궐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당장 입궐해서 보고 싶었지만, 궐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기다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갈증으로 생각이 덮여 버린 시현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도아를 향한 갈망을 멈추지 못했다.
입궐하던 날 훔쳐봤던 고귀한 모습의 도아를 끝끝내 손아귀에서 놓질 못했다.
“대감마님께서 퇴궐하셨습니다.”
깊어만 가는 그리움을 갈무리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당으로 나가려는데 영의정이 손님과 함께 돌아와 긴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오늘 좌상대감의 안색을 보셨습니까?”
“모두 그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있으니 못 봤을 턱이 없지.”
“아무래도 좌상대감이 대비마마의 눈 밖에 나서 그 불씨가 귀인에게 튄 것 같습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지.”
몇 줄의 대화를 듣고서도 도아에게 위험이 닥쳤음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나서려던 시현의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 * *
이성을 잃은 시현이 뒷문으로 나와서 달려간 곳은 도진의 사저였다. 정신없이 안으로 들어가 그를 찾아 헤맸다.
“어인 바람이 불어 출타를 다 했느냐?”
그때 뒷짐을 진 채 장난스레 웃으며 다가오는 도진이 보였다. 시현은 땀을 뚝뚝 흘리며 달려가 앞에 섰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야?”
“네 누이……. 허헉…….”
“응? 우리 마마가 왜?”
이제는 누이라 이름을 칭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아버지가 다른 분이랑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마마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 같던데 아는 것이 없느냐?”
“그게 무슨 소리야? 마마의 신변에 문제라니!”
“네 아버지에게 들은 것이 없어? 대궐 소식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거야?”
그는 절망했다. 치열의 성품을 알면서도 이성이 마비되어 이리로 곧장 달려오고 말았다. 목을 뚫을 듯 숨이 차고 올라왔다.
“시현이가 오랜만에 왔구나.”
그때였다. 뒤에서 치열이 시현을 알아보고 반가워하며 다가왔다.
“아버지, 마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대궐에서 변고가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쯧쯧…….”
듣고 있던 치열은 혀를 끌끌 차며 지기 간의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누가 감히 대궐의 일을 입으로 전한 것이냐!”
“…….”
“내 그리 자중하라 일렀거늘! 어찌 그리 조심성이 없는 것이야!”
“송구합니다, 아버지.”
무섭게 다그치는 치열의 말에 도진은 흥분했던 마음을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시현아.”
“예.”
“네 부친께서는 막중한 자리에 앉아 계신 분이다. 그런 분의 입에서 나온 말을, 네가 함부로 옮겨서야 쓰겠느냐?”
“……경거망동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어디서든 듣고 본 것을 함부로 옮기지 말거라. 그 화가, 너와 네 가문에 닿을까 심히 저어되는구나.”
되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시현도 차마 더 물을 수가 없었다. 치열은 시현을 돌려보낸 뒤 도진을 데리고 사랑채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치열은 손바닥으로 상을 내려쳤다.
“어찌 이리 어리석으냐!”
“마마가 입궐하시고 한 줄기 소식도 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 중에 안 좋은 소식을 들으니 자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누이를 생각하는 네 마음을 내 모르는 바가 아니다.”
“허면 아버지.”
“그 마음이, 때로는 귀인마마에게 독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라.”
마지막 말에 도진은 나오려던 말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은 사태가 심각하지 않아 아비도 나서지 않고 지켜보는 중이다. 마마의 안위에 문제가 생긴다면 지켜만 보진 않을 것이니 걱정 말고, 지금처럼 자중하며 지내도록 해라.”
“평생…… 이렇게 지내야 하는 것입니까?”
“무엇을 말이냐.”
“마마의 안위에 무슨 일이 생겨도 모르는 척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겁니까?”
어찌 그 답답함과 속상함이 도진에게만 한하겠는가.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고도 쉬이 손을 쓸 수 없는 치열의 속도 타들어 가긴 마찬가지였다.
“야속하게 들릴지라도 어쩔 수 없다.”
“아버지.”
“모두 마마가 감내해야 할 일들이다.”
후궁의 일로 가문이 나섰다가 되려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조심스럽기만 한 상황이었다.
“네 어머니가 알면 몸져누울 것이니 처신을 잘하도록 해라.”
“예…….”
“마마는 명석한 분이시다. 걱정 말아라.”
말을 마친 치열은 들리지 않게 낮은 숨을 뱉었다. 매일같이 도아를 보러 처소 앞까지 갔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따라나서면 어쩌나 걱정이 들다가도 도아의 손을 잡고 당장 집으로 가자고 끌고 나오면 어쩌나 걱정이 교차했다.
그래서 오늘도 결국, 도아를 보지 못하고 돌아섰다.
* * *
날이 밝자 대비 조 씨는 은하와 후궁들을 모두 자경전으로 불러들였다. 큰일을 치르고 나은에게는 첫 외출이었다.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고, 도아와 나은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날 모든 것을 앗아 갔다며 냉소적인 미소를 짓던 도아를 떠올리던 나은은 시선을 피했다.
“오늘은 모두 알겠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 마무리를 지으려 불렀습니다.”
마무리라니,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의금부에 끌려간 나인은 귀인이 친정에 있을 때부터 오랫동안 곁에 둔 아이라 들었네. 그래서인지 충정심이 남다르더군.”
“비단 충정심뿐이 아닐 것이옵니다. 처음부터 고해야 할 진실은 아무것도 없었사옵니다.”
“귀인은 여전히 억울하다는 얼굴이로군.”
“백 번 물으셔도 답은 같사옵니다.”
도아의 굳은 얼굴과 다르게 대비 조 씨는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허나 모두들 알겠지만 이미 그 죄가, 명확하게 귀인을 가리키고 있네. 아니라고 발버둥 친다면 꼴이 우스워질 뿐일세.”
“두 숙의가 모두 진실을 말했다고 볼 수는 없사옵니다.”
“대궐에서 당장 내쳐지고 싶지 않다면, 그 입 다무는 게 좋을걸세. 귀인.”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가 지긋이 도아를 내려다보았다.
“비록 귀인이 지은 죄가 극악무도하긴 하나 처음 있는 일이었고, 불행 중 다행으로 안 숙의가 크게 해를 입지 않았으니 궐에서 내쫓지는 않을 것이네.”
마치 큰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말했다. 죄를 지었으나 용서해 주겠다는,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의를 제기하려던 도아는 일이 이렇게 일단락되면 무이가 의금부에서 나올 수 있다는 생각에 입이 다물어지고 말았다.
“귀인은 보름 동안 처소 뜰에 멍석을 깔고, 두 시진씩 무릎을 꿇고 죄를 반성토록 하라.”
“…….”
“또한 자네의 아랫사람인 안 숙의의 처소에 보름 동안 찾아가 안부 인사를 하도록 하게.”
모두 이를 악물고 참으면 참아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무이만 살릴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마지막으로 다른 것은 다 관용을 베풀어도 그럴 수 없는 하나가 있지.”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자네의 나인은 내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네.”
“대, 대비마마!”
“곤장 50대를 쳐서 궐 밖으로 내치도록 할 것이네.”
사내의 몸도 이겨 낼 수 없는 숫자였다. 아마 대비 조 씨는 무이가 곤장을 맞다가 죽으리란 것을 알고 내린 처벌일 것이다.
“아니 되옵니다. 필시 곤장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달리할 것이옵니다.”
“자네도 죄인임을 잊지 말게.”
“소첩을 의금부에 하옥하시어 죄상을 밝히시옵소서. 차라리 소첩이 가겠사옵니다.”
“어허!”
그러나 도아는 더는 무이를 지키게 될 수 없는 상황에 침묵할 수는 없었다.
“내 더는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라 했네.”
“납득할 수 없사옵니다. 부디…… 소첩을 하옥하시옵소서!”
“엄 상궁!”
도아가 자신의 뜻을 거스르려 하자 대비 조 씨는 엄 상궁을 불렀다. 그리고 턱 끝을 들어 올리며 신호를 보냈다.
“귀인을 바로 잡아 기강을 잡도록 하라!”
그러자 자경전 상궁들이 들어와서 도아의 양팔을 붙들어 잡았다. 준비가 되자 엄 상궁이 앞으로 나가 손을 치켜올렸다.
감히 상궁이 귀인의 얼굴에 손을 대는 하극상이었다. 이것은 모두의 앞에서 도아의 기를 꺾기 위해 대비가 짜 놓은 연극일 것이 분명했다.
엄 상궁이 대비 조 씨의 기세를 믿고 손을 위로 올려 허공을 휘저었다. 온 힘을 실었음이 얼굴에 드러났다.
억척스러운 손이 도아의 가녀린 뺨에 닿을 즘이었다.
“감히!”
오늘도 어김없이 잔뜩 화가 나 보이는 강이, 엄 상궁을 당장 죽일 기세로 노려보며 손아귀를 움켜잡고 있었다.
“뉘에게 손을 대느냐?”
이내 무자비한 손길로 손에 움켜쥐고 있던 것을 처소 바닥에 흩뿌렸다. 허공에 날리는 것은 환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