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2장. 선빵 좋아하나?
“뇌가 치즈 같은 놈ⵈⵈ. 지금쯤이면 끝났겠네.”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검은 마수 가죽옷을 착용한 레이나.
작은 칼로 손톱을 다듬으며 혼잣말을 내깔렸다.
자신이 흘린 정보에 홀려 암살에 나간 길드장 폴.
비싼 값에 정보와 스크롤을 묶어 한꺼번에 팔아치웠다.
암살에 성공할 거라고 듬뿍 격려해 줬다.
하지만 그가 실패하리라는 것쯤은 레이나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청부 길드가 나서서 암살에 성공할 정도였으면 베커 장 공작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7서클 마법 스크롤로도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절대반지는 그냥 반지가 아니야. 호호호.”
정황을 알고 있는 레이나는 교활한 웃음을 터트렸다.
폴이 알아서 사라져 주면 그가 소유했던 청부 길드를 자연스럽게 흡수할 생각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력에 특화된 전문 암살자들만 대동하고 나갔다.
마법사와 일반 암살 전문가들은 그대로 남았다.
그들을 수하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정보 길드의 힘은 지금보다 배나 강해질 것이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레이나는 모든 정보를 다 풀지 않았다.
“베커 장 공작. 난 당신에게 투자했어요. 확실하게 처리 부탁해요.”
허공을 향해 레이나가 요염한 눈빛으로 웃음을 날렸다.
‘도대체 뭐라는 거야!’
청부 길드장 폴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대륙에서 제법 잘나가는 청부 길드 수장이 된 이후 이런 두려움을 느낀 적은 처음이다.
독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 미인계, 또 직접 전투까지.
다방면으로 암살을 감행해 오면서 수백 년 세월을 거쳐 장장한 선배들이 길드를 키워왔다.
방금 전 눈앞에서 허망하게 사라진 길드원들은 하나같이 다 아끼는 자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마력을 다룰 줄 알았다.
어느 왕국 기사급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실력도 출중했다.
청부 길드에서는 보기 힘든 진짜 실력자들을 거침없이 투입했다.
특히 레이나를 통해 구입한 마법 스크롤은 진품이었다.
7서클 마법사라 알려진 베커 장 공작.
생각지 못한 단 하나의 변수로 인해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황실수호공작의 상징품인 절대반지.
저런 효용이 있을 거라 전혀 생각 못 했다.
레이나도 언급한 바가 없었다.
‘당했다!’
폴은 그제야 레이나의 계획적인 음모를 알아챘다.
정보 길드 수장이라면 결코 절대반지에 대해서 모를 리 없었다.
유구한 세월 동안 수집되어 보관된 정보 길드의 정보력은 그 양이 엄청났다.
무력은 부족하지만 그들이 보유한 정보의 힘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했다.
“으드득.”
현실을 인지한 폴이 이를 갈았다.
레이나는 청부 의뢰를 알고 먼저 접근한 게 분명했다.
겉으로만 보자면, 고급 정보부터 마법진 이용까지 분명 자신에게 도움을 준 게 맞다.
그 덕에 그녀와 뜨거운 시간도 보냈다.
오늘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인심을 쓴 마지막 선물 같은 것이었다.
“경고는 한 번이면 족합니다.”
베커 장 공작이 허공을 보며 다시 한 번 경고를 날렸다.
웃고 있지만 살짝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누가 있다는 거야?’
폴은 주변에 다른 누군가의 인기척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오늘 이곳에서 감행한 암습은 극비였다.
끄나풀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클클. 눈이 밝구만.”
어디에선가 노쇠한 음성이 들려왔다.
스르르르릇.
동시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허공 한쪽에서 사람의 모습이 천천히 나타났다.
“!!!”
폴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랐다.
자신의 눈을 속이고 지척에서 투명 마법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을 수 있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모습을 보인 자는 폴도 익히 아는 이였다.
“자르반ⵈⵈ.”
결코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이름.
“이곳은 시끄러우니 우리 다른 곳에 가서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
파앗!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순간 세 사람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으아아아아! 사, 사람이 죽었다!”
“어서 신고해!”
숨을 죽이고 있던 마을 사람들 중, 몇몇 용기를 낸 자들이 밖을 살피다 소리쳤다.
주점 바로 앞에 팔다리가 잘린 채 처참하게 죽어 있던 낯선 이들의 모습.
조용했던 마을에 닥친 재앙과 같았다.
***
자르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처음에는 암살자 무리와 함께 온 또 다른 암살자라 생각했다.
방심한 틈을 노린 이중 암살자.
그러나 뭔가 좀 이상했다.
암살자들이 공격을 개시했을 때 함께 공격했다면 분명 암살에 성공할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척을 감춘 자는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정체가 궁금했다.
그를 공격한다고 해도 이길 수 있을 거라는 감이 오지 않았다.
기감을 통해 느껴지는 상대의 강력함.
아니나 다를까 암살자 우두머리 입에서 자르반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경치가 마음에 드는가?”
이계에서는 처음 보는 선풍도골 도인 같은 존재.
내가 저항할 겨를도 없이 이동 마법진을 펼쳤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말로만 듣던 8서클 마법사의 맛배기 마법이었다.
꼼짝 할 수가 없었다.
“좋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산 정상이었다.
마을에서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야속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무척 시원했다.
산이 꽤 높다 보니 어느새 단풍이 물들어 발아래까지 치달리고 있었다.
“타, 탑주님.”
암살자가 자르반을 보며 불렀다.
나도 명성을 들어 기억하고 있는 자르반 라든 마탑주.
대륙에 알려진 인간 마법사들 중 8서클에 이른 대마법사이자 라든 마탑의 당대 주인이었다.
다른 마탑과 달리 중립을 표방했다.
그 자르반 탑주가 암살 장소에 홀연히 나타나 이동 마법을 펼쳤다.
“쯧쯧. 능력도 안 되는 주제에 누구를 암살하겠다고ⵈⵈ.”
“살려주십시오! 도움을 주신다면 어떤 대가라도 지불하겠습니다!”
암살자가 마탑주 앞에 고개 숙이며 간청했다.
“대가라ⵈⵈ.”
자르반 탑주가 말끝을 흐렸다.
뭔가 기회를 주려는 듯한 표정이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몸을 옥죄었다.
만약 마탑주가 나를 해치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이 순간은 나에게 무척이나 위험하다.
그는 나의 허락 따위는 필요 없을 만큼 이동 마법을 펼칠 수 있는 수준이다.
단 1서클의 격차지만 이용할 수 있는 마력의 차이가 엄청났다.
마탑 장로들 정도는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길드의 전 재산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라든 마탑이 원한다면 100년간 무료로 봉사하겠습니다!”
암살자가 과하다 못해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뱉었다.
살려만 준다면 모든 걸 바치겠다는 말이었다.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이긴 했다.
“그렇다는데 공작은 뭐 없나?”
반쯤 장난이 섞인 듯한 눈빛으로 물어오는 라든 탑주.
적의가 보이지는 않았다.
무언가 나를 떠보는 것 같은 분위기다.
“아시다시피 가진 게 없는 빈털터리 공작입니다.”
“진짜?”
“원하신다면 제국 황실 이름으로 고용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고용? 날?”
“네.”
아무렇지 않게 고용 의사를 밝힌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탑주.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잠시 뒤 갑자기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소문대로 겁이 없군.”
“배짱이라고 해주십시오.”
“배짱이라ⵈⵈ. 마족인가?”
“그렇게 보이십니까?”
“아니.”
“그럼 아닙니다.”
“마, 맞습니다! 저자는 마족이 확실합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암살자가 애처로웠다.
“제 포로를 심문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게.”
“타, 탑주님! 살려주십시오!”
“날 아나?”
“ⵈⵈ.”
태연하게 묻는 자르반 탑주의 물음에 암살자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뱉지 못했다.
“의뢰자가 누구더냐.”
암살자를 보며 물었다.
“모른다!”
처음부터 수월하게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곳에서나 지구에서나 주변에 적은 널리고 널렸다.
“그럼 죽어줘야지.”
“!!!”
짧은 한마디로 죽음을 선언하자 암살자 눈이 두려움으로 커졌다.
“내가 도와줄까?”
“그러시겠습니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선물로 하지.”
“이 찢어 죽일 놈들!!! 너희들을 죽어서도 저주할 것이다!”
암살자가 본성을 감추지 못하고 악독한 눈빛을 드러내며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자신의 어금니를 꽉 깨물려는 순간.
그대로 놈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하아. 이 자식 봐라? 지금 내가 X만 한 마법사로 보여?”
“!!!”
귓가에 들려오는 구성진 욕 한 마디.
하얀 수염을 늘어뜨리고 지혜가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겉모습만 보자면 누가 봐도 훌륭한 대마법사의 풍모였지만 그 모든 환상을 시원하게 깨트렸다.
스윽.
탑주가 손을 들었다.
“불어!”
파아앗.
간단한 시동어와 함께 파란빛이 암살자 머리 위를 감쌌다.
“으어어어어어어ⵈⵈ.”
갑자기 바보가 된 듯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암살자.
눈동자도 어느새 풀려 있었다.
“공작. 물어보게.”
“네?”
“어차피 살려둘 놈은 아니기에 좀 강하게 정신계 마법을 걸었네.”
“ⵈⵈ.”
나에게 손짓으로 암살자를 가리키며 인자하게 웃는 마탑주.
강적을 만난 것 같다.
“누가 너에게 청부했느냐.”
“ⵈⵈ하데인 공작이 너를 죽이라 했다.”
손도 안 대고 쉽게 청부 의뢰자에 대한 신상 정보를 받았다.
팰트론 왕국과 인접한 두 공작령 중 한 곳.
왕국연합이 결성된 뒤에 침공 루트로 사용될 만한 곳들이었다.
“하데인ⵈⵈ.”
퍼억!
정보 확인이 끝나자마자 암살자의 머리통이 수박 깨지듯 터져버렸다.
참 짧은 정신계 마법 지속 시간.
“큼큼. 정신계 마법이 내 주전공이 아니라서 말이야.”
마탑주가 헛기침을 뱉었다.
“아닙니다. 충분히 감사합니다.”
예의를 표했지만 경계심은 거두지 않았다.
나를 죽이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날 선 눈빛으로 안 봐도 되네. 공작을 보고 싶어 찾아온 손님으로 여기게.”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제국 황실수호공작 베커 장이라고 합니다.”
“라든 마탑의 당대 탑주인 자르반이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절도 있고 깔끔하게 예를 표했다.
마탑주는 작위를 받지 않아도 보통 공왕이나 공작급으로 대우를 받았다.
“나도 반갑네. 대륙에 시퍼런 기세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공작을 직접 만나게 돼서 말이야.”
오고 가는 대화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직접 나를 찾아온 용건이 궁금했다.
“외람되지만 이 먼 곳까지 찾아오신 이유가ⵈⵈ.”
“만나서 결정하려고 했네.”
“뭘 말입니까?”
“뭐긴 뭐야. 공작을 죽일까 말까 고민했다는 말이지.”
“ⵈⵈ.”
이 이계 마법사 할배 참으로 직설적이다.
당사자 면전에서 생사를 놓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결정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어떤 결정을ⵈⵈ.”
물으면서 온몸에 내공을 돌렸다.
여차하면 8서클 대마법사와 드잡이질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도와주지.”
“네?”
“공작이 마음에 들었네.”
날 보며 만족한 눈빛을 보이는 마탑주.
“탑주님의 결정으로 라든 마탑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어차피 위험해진 몸이야. 다른 두 마탑이 동맹을 맺었네. 과거에는 제국 눈치를 보느라 끽소리도 못 내는 것들이 간이 부었지 말이야.”
“아!”
“그래서 난 제국이 부활하기를 원하네. 공작도 알다시피 우리 애들이 좀 순해. 사람 팰 줄도 모르고 돈도 그렇게 많이 안 밝혀. 그저 죽을 때까지 마나의 길을 걷는 순수 마법학도라고나 할까.”
정신계 마법으로 머리통을 터트려 죽이고, 욕도 찰지게 하는 양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다.
49%쯤은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증명하면 믿어주겠나?”
“그게 무슨ⵈⵈ.”
“공작, 혹시 선빵 좋아하나?”
“서, 선빵요?”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