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5장. 사냥개 공격하다(2).
“됐습니다. 승민이 때문이라면 더 이상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병원에서 봉사하는 게 건강에도 좋아요. 진짜 제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아니 그래도ⵈⵈ.”
“정말이에요. 과장님과 사모님, 그리고 승민이에게 미안해요. 진실한 사과 한마디만 제대로 했다면 가족분들이 상처를 덜 받았을 텐데.”
“ⵈⵈ.”
황승재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사과하는 조 여사를 보며 마음이 풀렸다.
처음 찾아왔을 때만 해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문전박대했다.
아이를 차로 박고도 뻔뻔하게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던 가해자.
장주희의 오빠 쪽 로펌에 사건을 의뢰했다.
사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주변 인맥을 통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사과받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들 했다.
제아무리 억울해도 민사적 책임을 지우는 것을 빼면 형사는 벌금형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기대 이상의 이변이 발생했다.
어느 날 쭈뼛쭈뼛 모습을 보인 가해자 조 여사.
커다란 과일 바구니를 들고 사과를 하겠다며 찾아왔다.
당시에는 진심이 느껴지지 않고 위기를 모면하려는 몸짓으로 보여 받아주지 않았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 조 여사는 병원 자원봉사자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
처음에는 그녀의 얼굴에서 내키지 않는 일을 하는 듯한 불만스러운 표정이 짙었다.
당연히 얼마 못 버티고 곧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아픈 환자들을 돌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꽤 오래 버텼다.
그즈음 병동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조 여사는 돈이 없어 간병인을 구할 수 없는 환자들을 주로 돌봤는데 그에 관한 좋은 이야기가 들렸다.
그들에게 진심을 다해 지극정성을 다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 병원을 찾아왔을 때와 달리 그녀의 얼굴도 많이 맑아졌다.
뭔가를 깨달은 선각자처럼.
“정말로 고마워요. 과거처럼 살았다면 인생이 무의미했을 것 같아요.”
힘들었던 만큼 살도 빠지고, 그러면서 얼굴이 맑아진 조 여사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할 일 없이 부녀회원들과 쓸데없는 수다나 떨며 살았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아픈 환자들을 보며 제가 얼마나 많은 복을 누리고 살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어요. 감사해요. 그것만으로도 전 충분합니다.”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존경스럽습니다.”
“과장님, 무슨 말씀이세요. 전 외과 선생님들이 수술을 마치고 나올 때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 나오는 걸 보면서 깜짝 놀랐답니다. 아픈 이들을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해 주시는구나. 세상에 이런 고마운 분들로 인해 돌아간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정말 선생님들을 존경합니다.”
조 여사가 고개를 몇 번씩이나 조아리며 고마움을 표했다.
“아닙니다. 제가 더 고맙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고마우시면 앞으로 봉사 문제는 더 거론하지 않는 걸로 해주세요.”
“물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조 여사 덕분에 환자들의 심리적 안정에 도움이 됐다.
간호사나 의사 간병인들과는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호호호. 오늘은 과장님께 인사도 받아보네요.”
조 여사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 독기를 뿜어내던 못된 아줌마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장주희 오빠라는 사람을 한번 보고 싶군. 어떻게 했기에 조 여사를 저렇게까지 바꿔놓을 수 있지?’
개과천선을 눈으로 목격하자 의문에 빠진 황승재 교수.
그는 꿈에도 몰랐다.
장태산이 자신의 곁에 잠시 머물다 바람처럼 사라졌다는걸.
***
“피고는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까?”
“네ⵈⵈ. 인정합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 합의부 1심 사건이 열린 502호 재판정.
사형 무기 또는 단기 1년 이상의 징역과 금고에 해당할 죄인을 심판하는 합의부 재판정은 공기가 무거웠다.
다들 지은 죄가 가볍지 않았다.
살인과 강도 사건이 태반이었다.
재판정에는 판사와 검사를 빼고도 빽빽하게 방청객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한때 국민적 관심이 넘쳤던 사건 공판 기일이 오늘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왜 이래? 뭘 뜯어먹을 게 있다고 이렇게 모인 거야?’
황동창 공판검사는 기분이 찝찝했다.
지금은 묻혔지만 워낙 이슈가 강했던 사건을 재판하는 자리였다.
언론을 한 차례 타면 검사들이나 판사들도 사건을 다루는 데 있어 긴장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번처럼 권력 실세들과 엮여 있는 금융 사건에는 더 그랬다.
얽혀 있는 권력자들의 면면이 참 대단했다.
이런 사건일수록 입 한번 잘못 놀리면 먼 시골로 좌천되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대검에서 특별 지시가 내려왔다.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라는 내용이었다.
베테랑 검찰 선수들이 투입됐다.
공판검사로 신중하면서도 일 처리가 깔끔하다는 평을 받던 황동창이 뽑혔다.
부부장검사에서 곧 승진할 타이밍이었다.
수사 자료는 완벽했다.
기소검사가 빈틈을 두지 않고 꼼꼼하게 눈앞에 앉아 있는 신태주를 엮었다.
이미 입을 맞춰 놓은 재판.
판사들과도 형량에 대해서 얘기가 끝났다.
판사나 검사들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윗선의 손끝에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미 끝난 재판이나 진배없는 사건에 방청객들이 예상외로 많이 몰렸다.
대부분이 기자들이었다.
카메라나 노트북 반입이 불가해 수첩을 들고 메모 중이다.
이번 재판은 짜고 치는 고스톱판이었다.
주심과 배석판사도 이상함을 느낀 표정이다.
지난 재판 때까지는 별 관심이 없던 사건인데 오늘은 사람이 너무 몰렸다.
방청석 의자가 모자랄 정도다.
특히나 오늘 재판은 특별할 것도 없다.
검사들의 제출 증거와 조서는 완벽했고 피고도 죄를 인정했다.
이제 남아 있는 일은 마무리 형식 절차.
피고가 죄를 인정하면 선고기일을 잡고 판결문을 작성하면 재판은 끝이 난다.
“피고는 증거자료 일체에 대해 인정합니까?”
“네. 인정합니다.”
신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결심한 눈빛이 강렬했다.
‘이 자식 엉뚱한 짓 하려는 거 아니겠지?’
가끔 재판정에서 검찰조서를 부정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있다.
중요한 사건일수록 검사들은 회유와 협박을 거쳐 제대로 검찰조서를 작성한다.
선진국 법률 체계와 달리 대한민국 법원은 검사가 적법하게 작성한 조서를 증거로 채택한다.
재판정에서 부인한다 하더라도 부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판사들도 사람이었다.
일거리가 널려 있는 와중에 피고인의 심적 변화에 따른 증거 부정을 제한했다.
그래서 검찰의 힘이 막강한 이유가 됐다.
경찰조서와 달리 유죄 증거자료가 될 수 있는 검찰조서.
신태주는 변호사 입회하에 서명 날인을 마쳤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는 자신의 죄를 모두 인정했습니다. 본 검사는 이에 피고인 심문을 종료하겠습니다.”
검사가 피고인 신문을 마쳤다.
“변호인은 할 말 없습니까?”
“의뢰인인 피고가 모든 죄를 자백했습니다. 뉘우치는 모습을 참작하여 넓은 아량을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리앤장의 담당 변호사도 담담하게 마무리 답변을 했다.
평범하다 못해 무의미하다시피 한 변론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피고인께 묻겠습니다. 본 사건에 대해 모두 다 죄를 자백한 상태입니다. 이에 심문기일을 종료하고 선고기일을 잡을까 합니다. 이의 있습니까?”
주심 재판관이 신태주에게 물었다.
더 이상 기일은 무의미했다.
자백은 최고의 증거였다.
검사가 10년 구형을 때리면 5년형을 선고하기로 되어 있다.
형사수석판사를 통해 대놓고 지시를 받았다.
이제 형식적인 절차만 마무리하면 되는 차례.
“재판장님ⵈⵈ.”
그때 신태주가 입술을 깨물며 떨리는 목소리로 재판장을 불렀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해보세요.”
주심 재판관이 여유를 부렸다.
재판은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되어 갔다.
빨리 오전 재판을 끝내고 점심을 먹으러 갈 생각을 했다.
요즘 들어 입맛이 없어 일부러 삼계탕집을 예약해 놓은 상태다.
파르르.
주먹을 움켜쥐고 이를 악문 신태주.
‘뭐야? 쟤 왜 이래?’
재판관들이 신태주의 행동을 살피다 이상함을 감지했다.
자해라도 하려는 듯 몸에 힘을 주는 신태주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재판장님! 전 억울합니다!!! 이 모든 건 제가 주도한 게 아닙니다!!!”
고요하던 재판정에 우렁차게 터지는 신태주의 외침.
“!!!”
모두가 깜짝 놀랐다.
“검찰조서도 협박과 회유에 의해 작성됐습니다!”
“헛!”
공판검사 황동창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긴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런 식으로 진행돼서는 안 됐다.
신태주의 입술을 통해 권력형 비리가 세상 밖으로 터질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 헬게이트 급의 폭풍이 불어 닥치리란 건 불을 보듯 빤했다.
“즈, 증인, 지금 재판정에서 검찰에서 작성한 증거조서를 부정하겠다는 말입니까?”
주심판사가 놀라 입술을 떨며 물었다.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삼계탕은 멀리 날아가 버렸다.
형사수석부장판사뿐만 아니라 지법원장까지 관심을 보였던 사건이다.
차자자자작.
방청석에 앉아 있던 기자들이 눈빛을 빛내며 빠르게 수첩에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일부는 스마트폰을 꺼내며 밖으로 나갔다.
속보를 전하기 위한 기자의 행동.
“이건 음모입니다! 전 희생자에 불과합니다!”
이미 뚫려버린 입이었다.
신태주는 각본대로 사냥개 노릇에 충실했다.
딸은 지금쯤 아내와 함께 출국하고 있을 것이다.
재산은 최대한 현금화시켜 비밀 계좌에 넣어뒀다.
어차피 형량은 정해져 있다.
‘장태산! 너만 믿는다!’
장태산이 약속했다.
착실하게 형을 살고 있으면 몇 년 뒤에 빼주겠다고.
장태산은 적이 분명했지만 왠지 믿음이 갔다.
다들 등을 돌렸을 때 자신을 파멸시킨 장본인인 장태산이 도리어 위로가 됐다.
“아ⵈⵈ닙니다! 지금 피고인은 극심한 충격에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에 잠시 휴정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리앤장 소속 변호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휴정을 요청했다.
각본에 없는 시나리오가 진행됐다.
손대균이 이 사실을 알면 당장 불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이 자식 미친 거 아냐? 갑자기 왜 지랄이야!’
변호사가 신태주를 매섭게 노려봤다.
“제 정신은 온전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변호사를 해임하겠습니다. 저를 위한 적극적 변론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신태주 씨!”
변호사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피고 지금 장난해요? 신성한 재판장에서 이게 뭡니까!”
검사 황동창이 판사처럼 훈계했다.
“장난이라니요? 검사님! 전 지금 제 목숨을 담보로 판사님께 진실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신태주가 발끈했다.
‘이 새끼 돈 거 아냐?’
황동창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신태주를 바라봤다.
민주주의 투사라도 되는 양 신태주의 목소리는 힘이 짱짱하게 들어가 있었다.
“큼큼. 검사 자중하세요.”
기자들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심판사가 마음을 안정시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짜고 치는 고스톱도 절차라는 게 있었다.
양 배석 판사들도 심하게 동요하는 게 보였다.
“피고 억울하다면 누가 지시를 했다는 겁니까? 그리고 그 증거는 제출할 수 있습니까?”
검사가 증거를 탈탈 털었다는 걸 주심판사는 알고 있었다.
웬만한 증거는 채택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판을 뒤집을 수 있는 핵심 증거가 없다는 소리였다.
“확실한 물증 있습니다!”
“물증요?”
“지시한 상대방과 통화한 내역과 비밀 양해각서, 투자 내용까지 모두 다 가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사용하던 스마트폰은 처음부터 압수했다.
권력에 불리한 증거들은 미리 모조리 삭제했다.
집과 사무실도 모두 털었다.
그 틈에서 다른 증거를 보관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신태주.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방금 위촉이 해임된 변호사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었다.
변호사 해임은 구두로도 가능하지만 재판하는 도중에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 일이었다.
‘막아야 해!’
위기의 순간이었다.
재판정에서만 물러나면 신태주를 회유하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터지면 모든 게 끝나게 된다.
“재판장님! 피고는 방금 변호사를 해임했습니다. 본 재판은 필요적 변론 사건으로 새로운 변호사를 선임할 때까지 기일을 연기해주실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황동창이 직접 개입했다.
그때.
“이 모든 사건은 서양유업의 안동근 회장이 지시했습니다! 사돈 기업은 오양식품을 삼키기 위해 절 끌어들인 것입니다!”
순식간에 펑 하고 터져 버린 폭탄!
“서양유업!”
“대박!”
“빨리 속보로 송부해!”
조용하던 재판정이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사냥개 역할을 다한 신태주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