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4장. 사냥개 공격하다.
“주희야. 저, 정말 미안해. 내가 질투에 눈이 멀어 너를 왕따 시켰어. 진심으로 사과할게.”
한국대 병원 외과 의국.
자신을 찾아온 신연주를 장주희는 말 없이 바라봤다.
자존심 높기로 따라갈 사람이 없었던 신연주였다.
그동안 사과라는 걸 해본 적이 없는 애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하아.”
장주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용서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동기들의 사과처럼 쿨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눈앞의 신연주로 인해 받았던 그동안의 스트레스는 상상을 불허했다.
학교를 때려치우는 것뿐만 아니라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진심이라고 믿고 싶어. 그런데 쉽지가 않네.”
마음에 남은 상처의 흔적이 이래서 무서운 거다.
장주희는 건조한 시선으로 신연주를 보며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부르르.
마음은 무심하려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털썩.
그때 신연주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우어어어어엉 엉엉.”
그리고 말릴 사이도 없이 애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여, 연주야!”
“나 무섭단 말이야! 아빠하고 작은아빠는 감옥에 갔지. 기자들은 집 밖에서 계속 진을 치고 있어. 그리고 검찰과 경찰에서도 수시로 연락이 오고ⵈⵈ. 친척들도 모두 외면하고 전화도 안 받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주희야 살려줘! 내가 모두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용서해줘! 어어어어엉.”
다다다 말을 쏟아낸 뒤 대성통곡 하는 신연주를 장주희는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멘탈이 터진 것처럼 보였다.
약간의 정신불안증세도 함께 보였다.
이대로 두었다가 계속 진행되면 정신병으로까지 발전할지 모른다.
아무리 미워도 신연주가 그렇게까지 되는 건 바라지 않았다.
자신을 괴롭힌 애는 맞지만 처량해진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아려왔다.
장주희는 그 정도로 독하지 않았다.
얼어붙은 마음이 눈물로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신연주 집안도 쫄딱 망했다.
더 이상 신연주가 기세를 펼 수 없는 세상이 됐다.
“일어나ⵈⵈ 용서해 줄게.”
뚝!
장주희의 말이 끝나자 거짓말처럼 신연주가 울음을 멈췄다.
장주희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신연주의 눈에 눈물이 담뿍 담겼다.
“아빠가 그러는데ⵈⵈ.”
신연주 목소리가 모기 윙윙 대는 소리만큼 작아졌다.
“아빠가 뭐라고?”
“너희 오빠에게ⵈⵈ. 반드시 말해 달라고 하시더라.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고.”
“!!!”
‘역시 오빠였어!’
신연주가 이렇게까지 사과를 해오는 이유가 다 오빠 때문이었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그래. 오빠에게 말해 줄게.”
“고마워! 연주아! 나 앞으로 착하게 살게!”
와락.
벌떡 일어나 장주희를 격하게 껴안는 신연주.
토닥토닥.
장주희는 그런 신연주의 등을 토닥여줬다.
그리고 확실하게 진리 하나를 얻었다.
오빠가 자주 말하던, 살아가다 보면 깨닫게 된다고 했던 삶의 진정한 의미들 중 하나.
그건 바로 용서의 힘이었다.
***
- 형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갑자기 귀신이 화를 버럭 냈다.
왜?
- 세상에 미녀는 왜 다 형님과 안면이 있는 겁니까?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십니다! 문어발도 형님 앞에서는 무릎 꿇고 울어야 합니다!
귀신의 질투 어린 말에 뼈가 있었다.
그러나 어떡하랴.
내가 잘난 것을.
“허보영 씨. 장 변이란 말은 좀 그렇지 않나요?”
“으흐흐. 같은 변호사끼리 그렇게 부른다고 하던데 아니야?”
“격이 다르지. 난 사법시험 패스한 성골. 당신은 로스쿨 진골이지.”
“와아아! 장 변까지 그런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지 몰랐네. 우리 로스쿨 생도 머리털 빠지도록 공부해서 라이선스 취득한 거야!”
허보영이 발끈했다.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연수원생의 고충은 알기나 해? 사법시험 준비는 아무것도 아냐.”
“로스쿨도 마냥 편하지는 않아!”
은근히 자극받은 허보영의 새하얀 얼굴에 핏줄이 보였다.
놀리는 맛이 제법 쏠쏠했다.
- 형님. 이 누님은 누구십니까? 왜 이렇게 성격이 쎕니까?
장립이 침을 튀기며 흥분하는 허보영을 보다 놀라 물었다.
피는 못 속이는 법이다.
귀신아, 저분이 대한민국의 어둠의 사채왕 외동딸이시다.
- 사채라면ⵈⵈ.
갱이 돈 빌려줬다고 생각하면 돼.
대답은 간단명료해야 이해하기 쉽다.
- 헙!
장립이 의미를 파악하고 기겁했다.
갱이라고 하면 죽어서도 치가 떨릴 것이다.
- 그런데 어떻게 변호사가 됩니까? 차라리 사채왕의 후계자가 되는 게ⵈⵈ.
지금 되고 있잖아.
보면 느낌 안 와?
- 네? 변호사가 후계자요? 대가 쫌 세 보이지만 전혀 사채와 갱 쪽으로는 어울리지 않은 것 같은데.
이런 면에서는 귀신에게 가르칠 게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사업은 잘돼?”
“나 사업하는 거 알고 있었어?”
허보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 대부께서 파이낸스 넘겨줬잖아.”
“무슨 소리야. 난 그저 고문변호사 자격을 얻었을 뿐이야.”
“지분 100%인 고문도 있나?”
“알면서 왜 물어.”
허보영은 허 대부와 달랐다.
어둠 속 사채왕은 딸을 합법의 세계로 인도했다.
변호사라는 라이선스가 어울렸다.
파이낸스를 통해 기업 어음 할인 시장과 합법적 대형 금융 사업을 경영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현금이 빵빵한 파이낸스 업체.
지금 허보영은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양지를 지향하는 음지 식물 같았다.
“학교는 무슨 일이야?”
허보영은 3학년을 모두 마치고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연수원에서 2년을 보내는 사법시험 패스자들과 입장이 좀 달랐다.
어차피 허보영이 판사나 검사가 될 까닭이 없었다.
대단한 경력을 가진 전관예우 출신들을 돈으로 부리면 그만이었다.
“교수님들도 찾아뵙고 부탁도 드릴 게 있어서.”
“부탁?”
“ⵈⵈ시간 강사 자리 알아봐 주셨어.”
“명함이 필요하면 말하지. 내가 소개시켜 줄 수 있는데.”
“됐어. 한국대 강사 자리는 쉽지 않아.”
허보영의 야심이 엿보였다.
로스쿨 생은 모두 다 석사학위 소지자였다.
그것으로 강의 자격은 충분했다.
문제는 허보영이 명함으로 사용할 한국대 교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
미래를 위해 허보영은 착실히 한 걸음 한 걸음 정식루트를 밟고 있었다.
한국대 법대생이 아니지만 로스쿨로서는 최고 스펙이다.
“그래서 잘됐어?”
“뭐ⵈⵈ 다음 학기부터 법학 쪽 교양 과목 하나 맡기로 했어.”
“그럼 내년부터 교수님이네? 축하해.”
“소문내지 마. 내가 너니까 얘기하는 거야.”
나이와 경험이라는 무기가 장착되자 허보영도 많이 달라졌다.
더 이상 2년 전 수줍음 가득했던 그 소녀가 아니었다.
이제는 미래를 위해 야합도 할 줄 알았다.
“맛있는 거 사 주면.”
“돈도 많으면서.”
“아껴야 잘 산다고 허 대부께서 말씀하셨다.”
“밥 먹으려면 집으로 가자. 애월 엄마가 너 보고 싶어 상사병 걸렸어.”
“어르신이 노하시겠네.”
“아빠는 널 더 보고 싶어 하던데?”
“왜?”
“젖소 농사는 왜 지으려고 하는지 궁금해하셔.”
- 젖소요? 형님 소 키우시게요?
행간에 함축된 의미를 귀신은 이해하지 못했다.
“왜긴 왜야. 다들 싫어하니 나라도 소를 키워야지.”
“같이 키울까?”
허보영이 눈동자를 반짝였다.
- 이 누님도 형님 팬이네요. 쯧쯧. 번호표 받으려면 한참 줄 서야 하는데.
허보영의 말은 이중적이었다.
“이미 같이 키우고 있는 거 아냐?”
“알고 있었어?”
허보영이 생긋 웃는다.
“허 대부께서 냄새를 진작 맡으셨던데 그냥 계시지 않았을 거 아냐.”
“따라오라고 뿌린 거라 하시던데. 아냐?”
“맞아.”
“이제 우유 공짜로 실컷 먹겠네.”
“적당히 먹어. 뭐든지 과하면 체해.”
“네가 그런 말 할 자격 있어? 혼자서 대한민국 기업들을 싹쓸이하고 있잖아.”
“무슨 소리야. 난 그저 평범한 투자자일 뿐이야. 돈 될 만한 사업에 투자하는 건실한 엔젤 투자자야.”
“장태산ⵈⵈ. 너의 그 뻔뻔함을 존경해.”
“많이 배워. 이거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거야.”
“응. 고마워.”
- 두 사람 만담하세요? 도대체 무슨 소리들 하시냐고요!!!
장립이 답답해서 미치려고 했다.
그래도 알려주지 않을 거다.
“그런데 안 회장 만만치 않은 분이야. 회사는 작아도 탄탄해.”
“걱정 마. 지금쯤이면 폭탄이 터졌을 시각이니까.”
손목시계를 봤다.
오늘 터지도록 예약되어 있는 맞춤형 폭탄이 작동할 시간이다.
“뭔데?”
허보영이 관심을 보였다.
“잠시 후면 인터넷에 쫙 깔릴 거야. 그때 봐.”
“궁금해해도 안 알려 줄 거지?”
“어.”
“이렇게 가까운 친구사인데?”
허보영이 다가와 팔짱을 꼈다.
팔에서 느껴지는 뭉클한 느낌.
- 정말 좋은 누님이시네요. 흐흐흐.
귀신의 태세전환은 내가 다 존경스러울 정도다.
팔짱 한 번에 입이 찢어졌다.
“보영이 남자친구였어?”
“에휴. 빨리 돈 벌어서 성형수술부터 해야지. 나 같은 놈은 명함도 못 내밀겠네.”
“키는 어쩔 건데?”
“닥쳐! 루저야!”
주변에 듬성듬성 우리를 지켜보던 남자들의 한숨 소리와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봐도 미모가 빛을 발하는 허보영.
그녀의 시원하고 향긋한 향수향이 코끝을 파고들었다.
“궁금한 건 기다려 봐야 재밌는 거야. 오랜만에 학식이나 먹으러 가자.”
“그래. 밥 먹자. 자신 있어 하는 거 보니까 재밌는 일 같네.”
팔짱을 낀 채 허보영과 나란히 교정을 거닐었다.
솔직히 나도 궁금하기는 했다.
신태주가 얼마나 사납게 사냥감을 물고 늘어질지 사뭇 기대가 컸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