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5장. 날 믿어 봐.
“음…….”
황승재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수술실을 녹화한 동영상을 돌려봤다.
의무는 아니지만 황승재는 자신의 실력 향상을 위해 항상 수술 상황을 동영상으로 촬영한다.
여느 때처럼 수술 상황 동영상을 보며 확인하게 된 장면.
수술은 처음부터 매끄럽게 진행됐다.
머릿속에 그려지던 대로 악장이 시작 됐다.
평소 그리던 완벽한 지휘.
다만 피가 튀면서 당황한 고승윤이 도망치듯 수술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장면에서는 여전히 눈살이 찌푸려졌다.
오점으로 남을 만한 큰 사고가 될 뻔했다.
과거와 달리 관상 동맥 우회 수술은 그렇게 큰 수술이 아니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심근경색 환자가 많아졌고 이제는 일반 대형 병원에서도 수술이 가능한 정도가 됐다.
“이 간호사 말이 맞았어."
황승재 눈길이 화면을 직시했다.
펠로우인 자신이 집도한 수술이었지만 베테랑 간호사가 보조했다.
20년차 외과 간호사는 의사 못지않은 눈썰미와 경험을 가졌다.
직접 집도할 수는 없지만 웬만한 수술 과정은 모두 마스터한 상태다.
일분일초로 생명이 결정되는 긴급 수술에서 간호사의 어시스트는 수술 성패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다들 수술이 진행될 때마다 이 간호사를 초이스 했지만 황승재와 죽이 가장 잘 맞았다.
베테랑 수술 간호사의 힘은 일반인들의 생각보다 막강했다.
본인 스스로가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와 수술실을 선택할 수 있었다.
성격이 까칠한 이 간호사는 의사들 중에서도 깔끔한 스타일을 선호했다.
그 점에서 황승재는 합격.
황승재의 수술 성공 확률이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이 간호사가 장주희에 대해 언급한 게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장주희가 수술을 지배했다.
황승재는 이 간호사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모든 수술 과정을 꿰고 있다. 남우보다……. 아니 나보다 먼저 다음 과정을 대비했어.”
장주희가 견인기를 잡는 순간부터 수술 속도가 빨라졌다.
집도의와 세컨이 잘 보일 수 있도록 손이 움직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 미처 살피지 못했지만 수술에 소요된 시간은 평소보다 짧았다.
모든 게 장주희의 손에 의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다음 과정이 유도됐다.
편안한 분위기와 과정 속에서 장주희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폴리클이 절대 아니야. 이 정도라면…… 전문의 수준을 넘는다.”
황승재의 평가는 객관적이고 냉정했다.
우남우 레지던트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다.
아니 정작 우남우는 장주희가 뭘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우남우는 황승재의 술기도 따라오기 바쁜 모습이었다.
수술 전 과정을 전제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능력으로 보건대 장주희와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의문이 계속 이어졌다.
장주희는 아직 본과 3학년생이다.
실습 중이라지만 시간이 빠듯했다.
실습 기록뿐만 아니라 교수나 레지던트들이 내준 과제만 해도 소화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주마다 케이스 발표도 한 건씩 돌아갔다.
그때 깨지면서 성장하는 게 보통의 폴리클 과정이다.
하지만 동영상으로 확인한 장주희는 분명 뭔가 달랐다.
직접 달려가 묻고 싶은 마음이 불끈 치솟았다.
무인공 관상동맥우회술은 동영상으로 배워서 시현할 수 있는 술기가 아니다.
수백 번을 봐도 한 번의 실습만 못했다.
직접 메스로 째고 피를 처리해 가며 직접 꿰매야 그 맛을 알게 된다.
그런데 장주희의 태도는 그 맛을 이미 아는 노련한 의사처럼 상황을 이끌었다.
“의술의 신이라도 붙었나?”
가끔 의사들은 수술이 잘된 날을 두고 그렇게 말했다.
‘의술의 신이 메스에 임했다.’
장주희의 모습은 마치 그렇게 보였다.
펠로우급인 자신보다 먼저 다음을 생각하는 병아리는 의술의 신을 떠올리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일단 지켜보면 알겠지. 내일도 수술이 있으니까.”
쉬는 날을 빼고 대부분 하루같이 수술이 잡혔다.
따로 만나야 하는 여자친구가 없는 황승재는 집과 병원을 오가는 일이 일상이었다.
황승재는 따로 욕심이 있었다.
조교수급인 펠로우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
정식으로 한국대 병원 외과 과장이 되고 싶었다.
알게 모르게 부조리가 넘치는 한국대 병원을 개혁하고 싶은 욕망도 컸다.
황승재는 동영상을 마저 봤다.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뭔지 모르지만…….”
장주희가 그런 자신의 계획에 도움이 될 것 같은 강한 느낌이 들었다.
황승재는 화면에 잡힌 장주희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
쫘아아아악! 쫘악!
손에서 불이 났다.
“크읍.”
이를 악물고 참는 놈.
이놈, 좀 질기다.
죽음을 각오한 놈답게 독하다.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런 고집스런 모습은 다른 놈들한테나 통하지 나한테는 안 통했다.
힐!
가볍게 마법 주문을 속으로 외쳤다.
파아앗.
빛과 함께 고승윤의 뺨의 상처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 199대…….
귀신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어느새 숫자가 200대에 가까워졌다.
지치지도 않고 계속 손바닥 세례를 날렸다.
- 진선님……. 대단하십니다.
저승사자가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보통 사람 같았다면 이 정도 때리면 제 손바닥에 불이 나 그만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난 아니다.
일체의 동요 없이 꾸준한 힘으로 팼다.
마음은 약해지지 않았다.
비바람 몇 번 불었다고 밖이 두려워 나가지 않는다면 생존 이유에 대해 깊이 고민해 봐야 한다.
가시밭길을 걸어 본 자만이 평탄한 길이 주는 행복감을 아는 이치와 같다.
고승윤의 트라우마가 뭔지 정확히 모르지만 따끔한 치료가 필요해 보였다.
옆에 붙어 있는 고승윤의 모친 영혼이 두 손을 꽉 부여잡고 상황을 지켜만 봤다.
결코 나를 원망 섞인 시선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도 고승윤에게 지금 매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스윽,
다시 손이 올라갔다.
“그, 그만…….”
고승윤이 이제야 본격적으로 공포심을 드러냈다.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릴 것 같은데…… 아닌가요?”
친절한 주희 씨의 상큼한 목소리다.
참 듣기 좋다.
누가 들으면 소개팅 장소에서 예뻐 보이기 위해 포장한 목소리로 오해할 정도다.
“됐어……. 그만해도…….”
쫘아악!
아직도 정신을 차리려면 멀었다.
단박에 뼘에 새겨지는 빨간 손자국.
짜와아아아앗!
누가 보면 조직 폭력배가 이자 받아내려고 패는 줄 알 정도다.
“아프다고! 아프단 말이야! 으아아아아아아!”
고승윤이 마음에 있던 소리를 힘껏 내뱉었다.
스윽.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크으으으.”
짐승처럼 신음을 흘리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고승윤.
이제 정신이 돌아왔다.
고승윤의 마음속에 묵혀 있던 울화가 터져 나왔다.
막혔던 혈관이 뚫린 것처럼 자기감정이 되살아나며 표현된 것이다.
고통은 생존 욕구와 직결됐다.
넋이 나간 자는 아무리 패도 별 반응이 없게 마련.
하지만 고승윤의 입에서 아프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
- 형님……. 제가 많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거 아시죠?
귀신이 목소리를 쫙 깔며 자기 말이 진심임을 전달하고자 했다.
분위기 파악 잘한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장립 귀신은 최대한 자신을 낮춰 말하고 있었다.
싸다귀가 귀신도 쫄게 만든 모양이다.
됐다. 장립.
평소 너 하던 대로 해라.
- 이게 제 본모습입니다! 항상 형님에게 충성하고, 충성하고…….
많이 충격을 받은 듯하다.
안타깝지만 고승윤은 제대로 얻어 터졌다.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게 확실한 상판이다.
평생 매 한 대 안 맞고 큰 놈이라 가벼운 폭력이 제대로 먹혔다.
뺨을 인정사정 보지 않고 사정없이 후려쳤다.
코피가 하얀 가운 곳곳에 묻었다.
자살하려는 놈답게 깡이 제법이었다.
하지만 매에는 장사가 없는 법.
때린 데 또 때렸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멱살을 잡은 채 양쪽 뺨을 가열 차게 번갈아 후려쳤다.
200대를 다 채우고서야 고승윤은 항복했다.
“이제 정신이 든 것 같아 다행이에요.”
생긋 예쁘게 웃었다.
누가 봐도 미친년이었다.
사람을 패고 웃을 수 있는 건 특정 구역 담당 또라이들이나 가능한 짓이다.
파르르르.
날 보는 고승윤의 눈동자에 공포가 넘실댔다.
- 살려는 의욕이 넘치는군요.
- 맞아 죽기 싫어하는 게 의욕이야?
- 니가 인생에 대해서 뭘 알긴 아니?
- 왜 이래! 나도 한때 사랑에 목숨 걸었다고!
- 퍽이나.
- 야! 오 차사!
- 야? 오 차사? 너 진짜 까불면 다친다. 한번 막장으로 가봐?
- 누나, 가만히 보니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하하하. 처음 볼 때부터 내 이상형이었습니다.
- 흥!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생각보다 싸늘한 저승사자의 경고에 장립 귀신이 꼬리를 말았다.
귀신 주제에 저승사자한테 함부로 개기면 안 된다.
나 때문에 많이 봐주고 있지만 세상에는 지켜야 할 법도가 있는 법이다.
“선배만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세요?”
이제는 이 판도 정리할 때였다.
정신 교육에 집중했다.
“지금 선배 발아래 공간에 얼마나 많은 환자가 존재하는지 아시죠?”
목소리를 차분하게 깔았다.
삐뽀 삐뽀.
그 와중에도 급하게 응급실로 향하는 119 구급차.
“방금 선배가 떨어졌다면 동료들에게 얼마나 큰 민폐가 되었겠어요? 꼴에 동료라고 지금 들어가는 환자보다 더 신경이 쓰이고 손길이 가겠죠? 그럼 저 환자는 죽을 수도 있겠죠. 멍청한 누구 때문에.”
인정 없는 팩트 추궁은 계속 됐다.
“죽더라도 산 속에 들어가 혼자 죽어요. 여기서 추락사하면 괜히 선배 살린다고 다른 사람들 귀한 시간과 피와 땀을 소모해야 하잖아요. 그러다 혹시 살아나기라도 한다면 멀쩡할 것 같아요? 평생 누워서 먹고 싸게 될지도 몰라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잘 생각해요. 아직도 그렇게 죽고 싶다면 주사 한 방이면 간단해요. 깊은 산 속에 들어가 구덩이 파고 주사 한 방 꾹! 얼마나 심플하고 좋아요.”
너무나도 친절한 자살 방법 안내.
부르르르르.
고승윤은 내 말을 들리는 대로 상상하는지 몸을 떨었다.
- 진짜 형님……. 멋지십니다! 이렇게 친절한 자살 제안이라니.
- 약으로 죽으면 영가가 멍청해져요. 차라리 오지 절벽 위에서 떨어져 죽는 게 다음 생을 위해서는 더 깔끔해요.
- 절벽이 더 아프고 나쁜 거 아냐?
- 아무도 없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으면 의외로 인생무상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어. 운이 좋아 그렇게라도 되면 죗값이 감해지기도 하지.
- 나는 내가 셀프로 모래 파서 묻혔는데 그건 업이 아니지? 보너스 없나?
- 바보야. 그건 멍청한 거고! 차라리 총을 맞고 한 방에 죽었어야지. 그래야 대왕님들이 참작 해줄 거 아냐!
- 그런가?
바보들의 아주 비현실적 대화가 이어졌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고승윤을 바라봤다.
“오늘 수술은 잘 끝났어요. 멍청한 선배를 부를 것 같지 않으니 퇴근해요. 그리고 깨끗이 씻고 자요. 그럼 기분이 한결 좀 나아질 거예요.”
병 주고 처방 약도 줬다.
“……나한테 왜 그래?”
고승윤이 이제야 이유를 물어 왔다.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웃픈 상황인지 알 것이다.
“안 보여요?”
“???”
“우리 집안에 대단한 당골네 피가 흘러요. 그래서 내 눈에는 보여요. 지금 선배 옆에…… 선배 엄마가 슬픈 모습으로 서 있잖아요.”
“!!!”
고승윤의 눈동자가 황소 눈알만큼 커졌다.
“엄마가 걱정 많이 하네. 자살하려는 자식도 자식이라고……. 쯧.”
영험한 무당 행세를 했다.
“거, 거짓말! 엄마는 죽었어! 죽었다고!”
고승윤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그래서? 죽었는데 어쩌라고?”
“…….”
“같이 숨 쉬고 살던 사람 숨이 끊어지면 육신이 썩듯 그 영혼도 금방 그렇게 죽은 게 되나? 껍질이 깨졌다고 알맹이가 사라져?”
어이가 없어 툭 내뱉은 반말.
“사람들 참 웃겨. 자기 앞에서 방금까지 깔깔대고 웃고 숨 쉬던 사람이 죽으면 잡았던 손도 놓고 화들짝 놀라며 귀신 보듯 무서워하더라? 그게 난센스 아니고 뭐야? 지도 언젠가 죽을 거면서 지금 살아 있다고 생색내기는……. 다들 1차원적으로 세상을 산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승윤은 이제 더 이상 자살은 꿈도 못 꿀 것이다.
죽은 엄마 귀신이 옆에 있다고 주문을 걸었다.
뭐, 사실이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영혼이 옆에 있다는 걸 의식하는 순간 숨 쉴 구멍이 생기게 마련이다.
특히 고승윤은 ‘엄마’라는 말에 유난히 약했다.
“내일 봐요.”
고승윤을 두고 돌아섰다.
뒤에 이어질 질문은 뻔했다.
“엄마가 어딨어! 죽은 엄마가 어딨냐고!!!”
고승윤이 발악하듯 악을 쓰며 엄마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다.
무심히 그를 돌아봤다.
“선배 엄마, 입술 옆에 점이 제법 크네. 얼굴도 대단히 미인이시고.”
“네가 그걸 어떻게…….”
대부분 사람들은 한 번 말해주면 사람 말을 믿지 않는 이상한 습성이 있다.
분명 본인 옆에 엄마의 영혼이 있다고 말했는데도 또 묻는다.
“믿어 봐……. 나 귀신 보는 여자야.”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