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장. 수술실에서.
“하아아…….”
창밖을 보며 장주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만의 꿀맛 같은 휴식인지 몰랐다.
오빠가 지내고 있는 서울집.
누가 봐도 최고 명당이었다.
도도하게 흐르는 한강이 한눈에 훤히 보였다.
며칠 전 내린 늦은 장대비로 한강은 만수위다.
황토빛의 강물은 거침없이 한강 하류를 향해 흘렀다.
보고만 있어도 막혔던 숨이 뚫리는 것 같았다.
손에 들린 따뜻한 원두커피가 천천히 식어가는 걸 온전히 느꼈다.
이런 사소한 감각도 몇 달 만에 느꼈다.
본과 3학년 임상실습이 시작된 이후로 계속 느껴왔던 심리적 압박감이 사라졌다.
그동안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다.
어느 날 거짓말처럼 다른 사람처럼 변한 오빠를 보면서 주희는 놓으려던 꿈을 붙잡았다.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았던 가난한 집안 사정.
큰 회사에서 명퇴를 당한 아빠는 시골로 낙향했다.
농사는 평생 경험도 못해 본 엄마도 농부가 됐다.
시골은 서울보다 좋은 게 많았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학원을 안 다녀도 됐다.
들로 산으로 오빠와 언니와 내달렸다.
배가 고프면 엄마가 맛있는 화전과 각종 나물로 먹을 것을 만들어 주셨다.
처음의 농촌 생활은 그렇게 천국 같았다.
하지만 집안 사정을 알 만한 나이가 됐을 때부터 주희는 점점 행복감을 잃어버렸다.
거의 모든 날에 아버지 얼굴이 좋지 않았다.
특히 작은집이나 고모들이 다녀가는 명절 때는 엄마의 한숨도 깊어졌다.
어느 날 우편함에 꽂혀 있던 독촉장을 보고 주희는 마음이 아팠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직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는 나이였다.
틈나는 대로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도 집안 살림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의사나 수의사가 되고 싶었던 꿈을 포기했다.
차라리 빨리 취직해 집안을 돕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오빠도 무슨 일이 있는지 어느 순간부터 부쩍 고민이 많아 보였다.
점점 더 어두워지는 집안 분위기.
중학교 때 사춘기에 접어든 주희는 온통 삶이 괴로웠다.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것 같던 그때 오빠가 기적처럼 변했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하룻밤 사이에 오빠가 엄청나게 달라졌다.
우중충하고 고민 많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감돌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부모님께 툴툴 대던 반항아의 모습도 사라졌다.
말도 잘 섞지 않던 오빠가 먼저 다정한 태도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정신이 어떻게 됐거나 미쳤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동안 계속 지켜본 뒤에야 주희는 오빠가 진짜 변했다는 걸 알았다.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뒷산을 오르며 운동을 하고 시키지 않아도 아빠 일을 도왔다.
밥상 앞에서 음식 투정도 부리지 않았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웃는 얼굴로 생글거리며 가족들을 대했다.
방에 들어가면 낡은 컴퓨터로 매일 무언가를 작업했다.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에서는 꿈꿀 수 없는 엄청난 거금을 만들어 낸 오빠.
듣고도 믿을 수 없었지만, 작가가 됐다고 했다.
우리 집안의 말도 안 되는 대사건이었다.
오빠가 벌어들인 돈으로 우리집은 마법이 펼쳐졌다.
부모님의 어깨를 짓누르던 집안 빚을 갚고 아빠의 차도 생겼다.
그리고 변변한 것 하나 갖고 있지 않던 자신과 주아에게는 핸드폰과 옷가지를 사줬다.
미처 몰랐는데 알고 보니 오빠는 엄청나게 멋있는 사람이었다.
이후부터 친구들이 오빠를 소개시켜 달라고 난리를 쳤다.
게다가 공부도 단박에 1등을 찍었다.
갑자기 엄친아로 등극해 버린 오빠.
뿐만 아니라 요리도 전문가 수준으로 잘했다.
그리고 그 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오빠는 갑부가 되었다.
소설 속 주인공도 못 할 일을 현실에서 해냈다.
집안에는 웃음꽃이 끊이지 않고 피어났고 모두들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장주희도 잃어버린 꿈을 되찾았다.
한국대 법대에 들어간 오빠에게 부끄럽지 않은 동생이 되기 위해 잠을 설쳐가며 학문에 매진했다.
운 좋게 언니와 함께 한국대에 입학했다.
집안에 경사가 겹쳤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오빠가 운영하는 투자 회사는 장주희의 상상을 초월한 실적을 냈다.
엄마를 무시하고 괴롭히던 외가 쪽 식구들에게 본때를 보여줬다.
그 시기 대기업들이 오빠 손에 무너져 내렸다는 소문이 속속 들었다.
피도 없는 인간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이 소문으로 들렸지만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오빠 장태산은 가족들에게 한없이 따뜻했다.
“오빠…….”
주희가 오빠 장태산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얼마 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이 무슨 일인지 몰랐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 뱀이 자신을 칭칭 감았다.
처음엔 악몽을 꾸고 있는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이었다.
믿지 못할 괴사.
할 수 있는 게 비명을 지르는 일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그때 외국에 출장 갔던 오빠가 나타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장주희는 많은 게 궁금했다.
오빠의 정체와 능력은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는 부분이 많았다.
수수께끼 같은 오빠가 장주희의 왕따 생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이를 갈았다.
어디 나가거나 일체의 연락도 취하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
아예 집밖에 나가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경비가 삼엄해졌다.
“쉽지 않은 일인데…….”
마음을 단단하게 먹은 장주희도 버티지 못했던 상황이다.
기우일지 모르지만 신씨와 악연이 많았다.
예과 시절 자신에게 시비를 걸던 찬병원 동기도 신씨였다.
오빠를 엮으려다 무참히 깨지고 자퇴 뒤 미국으로 도망친 신지은.
한동안 조용했는데 새로운 강적이 등장했다.
수법이 그때보다 더 교묘했다.
매일같이 마주하는 조원들 모두가 자신과 악연이 있었다.
볼 때마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뒷말을 해 그 소리가 비수가 되어 꽂혔다.
처음에는 버틸 만했지만 날이 갈수록 장주희는 스트레스로 약해져 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서 조원들을 달래보기도 했지만 돌아온 건 더 차가운 냉소.
말이 아예 통하지 않았다.
어디다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큰일 하는 오빠에게 다시 짐이 되기는 싫었다.
경호하던 이들도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철두철미했다.
왕따를 시키던 무리의 리더인 신연주는 나이에 비해 무척 교활했다.
친한 동기들도 겨우 이상하다 정도로 눈치 채는 수준이었다.
이를 악물고 버텨보려고 했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장주희.
“넌 천벌을 받을 거야.”
장주희는 신연주를 떠올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인간으로 태어나 사람이기를 포기한 악독한 인간의 전형 같았다.
수석을 차지하기 위해 동기들을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짓밟았던 신연주.
“오빠, 용서하지 마. 신연주는…… 결코 의사가 되면 안 되는 악마야.”
누구를 이렇게까지 미워해 본 적 없는 장주희는 신연주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동안 강한 트라우마가 돼 버려 심장을 압박했다.
이 증상을 해결하기 위해서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치료법은 트라우마를 남긴 원인을 제거하는 것.
장주희는 그 점에서 오빠를 믿었다.
장태산이 신연주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놓으리란 걸 의심하지 않았다.
장태산은 세상에서 누구보다 듬직한 진짜 오빠였다.
***
좀 닥쳐! 이 음란마귀 잡귀야!
충격이 쓰나미로 밀려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학교에서 몇 번 마주쳤던 기억이 있다.
스스로들 호박꽃 클럽이라 부르던 주희의 의대 동기생들 중 하나.
그사이 성숙한 여성이 되더니 분위기가 달라졌다.
하얀 가운이 한 몫 하자 매력이 더 업그레이드가 됐다.
은근히 풍겨오는 향수 냄새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결정적 한마디, 사우나.
“사, 사우나?”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왜? 그 날이야? 아직 아니잖아?
훅 치고 들어오는 그 날의 진짜 의미.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날 아니야!”
“엄마가 피부 건조해졌다고 코스로 끊어줬어. 영란이도 올 거야. 우리 셋이서 오랜만에 마사지도 받고 얼굴 팩도 받고 사우나에서 예전처럼 물장난도 치면서 개운하게 놀다오자.”
- 오! 마사지! 물장난! 무조건 콜!!!
장립 귀신은 무조건 신났다.
드라마에서나 봤던 강남 아줌마들의 마사지 받던 장면.
여자들끼리 들어가 받는 걸로 거의 반나체 상태로 누워 있을 게 확실했다.
머릿속에 각종 장면이 제멋대로 떠올랐다.
이러면 안 되는데 호기심이 일어나는 건…….
- 남자의 본능이죠! 남자들의 영원한 로망이 여탕 구경 아닙니까!
“…….”
그런 변태는 아닌데 계속 마음이 끌렸다.
아직 살아서 꿈틀대는 길들여지지 않는 못된 망상.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주희 친구 수지가 재차 물어왔다.
그것도 가슴을 더 강하게 밀착해 오며 말이다.
- 형! 아니 누나! 여기서 거절하면……. 저 단식투쟁 들어갈 겁니다!
제삿밥도 못 먹는 귀신 주제에 시답잖은 걸로 협박한다.
“주희야. 내가 미안해서 그래.”
“뭐가?”
“다들 대충 알아. 신연주 그 여우가 너 찍었다는 걸.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누가 조를 짰는지 우리 클럽 애들이 어떻게 너와 따로 편성된 거야. 조교 오빠가 우리 같이 붙여준다고 약속했는데.”
수지는 부류가 다른 친구였다.
언제 만나서 밥 한 번 먹어야 할 것 같다.
“고마…….”
“오빠는 아직도 바빠?”
“???”
“오늘 때 빼고 광내고 나면 시간 많잖아. 술 사달라고 하면 안 돼?”
이놈의 인기는 아직도 식지 않은 모양이다.
갑자기 사우나에서 급전환된 주제.
“일이 많아.”
“너희 오빠는 왜 그렇게 비싸?”
“돈 많이 벌어야 나 병원 사주지.”
“흐흐. 그건 그래. 네가 내 시누이 되면 미모의 한국대 의대 출신들끼리 강남 돈 다 벌 수 있는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수지의 얕은 흑심이 엿보였다.
하는 짓이 귀여웠다.
그러나.
“꿈 깨.”
“왜? 나 정도면 얼굴 되지 가슴도 크지. 머리도 똑똑하지 장래도 촉망하잖아. 부족한 게 있어?”
주희의 친구가 꿈도 야무지게 꾸고 있었다.
지금도 주변에 넘치는 미인들 때문에 골치 아프다.
“아빠가 오정이나 엘자 회장이면 생각해 볼게. 미모는 말 안 해도 알지? 우리 오빠 성형의 성자도 싫어해. 그런데 너 쌍수했잖아.”
“……못됐어. 너, 사람 돈으로 차별하는 거 아니다.”
“우리 오빠는 차별해. 엄청 눈이 높다고 했잖아.”
“하아……. 이번 생에 우리 사랑은 여기까지인가. 슬프다. 왜 다이아몬드 수저로 태어나지 못해 사랑을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수지가 장난스럽게 고개를 내저으며 슬퍼했다.
“다음에 오빠보고 밥 사라고 할게.”
“정말?”
“그럼. 오빠는 내 부탁은 무조건 오케이야.”
“흐흐. 콜!”
- 누나! 사우나 갈 거죠? 빨리 확답을 하시라고요!
야! 미친놈의 귀신아.
나 아직 소중이는 그대로라고!
이건 감출 수 없었다.
- 그깟 것 떼버리세요. 보아하니 사용 빈도도 거의 없던데 굳이 달아놓을 필요가 있을까요?
떼, 떼버려?
이 귀신 새끼 위험하다.
장씨 집안 씨를 말릴 사악한 종자다.
그깟 것?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
- 뭐……. 솔직히 부럽긴 해요. 하지만 있으면 뭐 합니까. 장식용인데!
장식용?
하도 어이가 없어 고개를 들어 허공을 째려봤다.
“왜 그래? 뭐 있어?”
수지도 따라서 고개를 들고 허공을 바라봤다.
- 이 친구 참 좋네……. 흠.
나쁜 놈이 그사이 위에서 아래를 훔쳐봤다.
더 이상 같이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저기 수지야…….”
사우나 행을 거절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
“장주희!”
누군가 나를 불렀다.
1년차 레지던트 남자 선배였다.
“넵! 선배님.”
빠르게 다가오는 남자 선배.
“안녕하세요. 선배님.”
“수지도 있었네? 잘 지내지?”
“선배님 덕분에 무사태평입니다.”
“그래. 넌 주희처럼 사고치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
“당연히 그래야죠. 전 잘난 오빠도 없는데.”
“선배님 무슨 일 있으세요?”
“너 찾으셔.”
“누가요?”
“황 교수님이 수술실로 오란다.”
“네? 수술실요???”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