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6
회귀의 전설
486장. 어느 여름의 방문자 (1)
화르르르르르르르르.
치이이이잇 치이이이이이잇.
오늘도 여전히 영주가 직접 요리를 했다.
초대받은 아린과 성의 기사들은 부엌에서 들려오는 불과 기름 튀는 소리에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냄새가 아주 기가 막혔다.
영주가 갑자기 영지의 중요 인물들을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분노한 듯 요리에 화풀이를 하고 있는 영주의 기운이 식당 공기를 긴장시켰다.
“주군께서 무슨 일로 저러십니까?”
탈만이 조심스럽게 마법사 아린에게 물었다.
“그건 저도 잘…….”
아린도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초대한 영주의 얼굴에 다른 때와 달리 불만이 가득 들어차 있는 것만 보였다.
뭔지 몰라도 기분이 엄청 언짢은 게 확실했다.
영주는 인상을 팍팍 쓰며 요리 하는 데 전투적으로 임했다.
저벅저벅.
마침 영주가 양쪽 손에 넓은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턱. 턱.
탁자 위에 올려놓는 두 가지 요리.
꿀꺽.
“으음…….”
난생 처음 보는 요리가 분명했지만 오늘도 역시 실망시키지 않았다.
고소하고 매콤한 향신료가 풍기는 닭고기 요리와 다져진 두툼한 돼지고기.
거기에 다양한 색감의 야채 육즙이 자르르 흐르는 다른 요리가 식탁을 차지했다.
양도 푸짐했다.
먼저 화려하게 눈에 들어오고 코를 파고드는 입맛 돋는 냄새에 다들 침을 흘릴 지경이 됐다.
“탈만 경, 한 잔 부탁하네.”
영주는 자리에 앉으며 잔을 내밀었다.
그것도 큰 잔.
“넵! 주군!”
용병으로 눈치 빠른 탈만이 벌떡 일어나 영주의 잔에 와인을 가득 채웠다.
유베스 상단의 칼몬 상단주가 직접 선물로 보내온 고급 와인.
또로로로로로록.
“가득.”
“넵!!!”
귀족가의 식사 예법이 아니지만 그런 걸 따지는 영주가 아니었다.
탈만이 용병들 주법대로 와인 잔을 가득 채웠다.
“모두 한 잔들 하지.”
요상한 분위기에 기사들과 마법사 아린도 잔에 와인을 채웠다.
“날도 더운데 다들 고생이 많았다.”
“주군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합니다. 영주님.”
영주가 벌컥벌컥 와인을 한 방에 털어 넣었다.
“흠.”
그 많은 와인을 털어 넣고도 입맛을 다시는 영주.
“소신이 한 잔 더 따르겠습니다.”
기사 카르스가 와인을 다시 채웠다.
탈만만큼 그도 잔이 넘치기 직전까지 와인을 부었다.
“신들이 축복하는 베커 영지의 발전을 위해.”
영주는 두 번째 축언을 날리며 잔을 비웠다.
이번에도 단숨에 포도주를 다 비워냈다.
“다들 요리도 먹어 보게.”
영주는 와인 두 잔을 비우고 난 뒤에야 평소와 다르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
“오! 영주님, 이 요리는 뭡니까? 매콤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가기 막힙니다!”
탈만이 호들갑을 떨며 듣기 좋은 칭찬을 아까지 않았다.
커다란 스푼으로 자기 접시에 요리를 덜어 맛있게 먹었다.
“와인하고 환상적인 조합입니다.”
제대로 교육 받은 기사 중의 기사 카르스도 진심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맛있어요~.”
아린도 활짝 웃으며 요리를 맛보고 한마디 했다.
분노를 불사른 만큼 요리도 기가 막혔다.
어느새 영주도 빙긋 웃으며 직접 차려낸 요리를 먹는 데 몰두했다.
잠시 식사하는 데 집중하느라 대화가 멈췄다.
워낙 요리가 끝내주다 보니 다들 만족스럽게 음식을 비워갔다.
“카르스 경.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식량 사정은 어떤가?”
포도주로 입가심을 마치고 영주가 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주군의 보살핌으로 정규 병사들에게는 상등품의 밀과 고기, 제철 과일과 포도주가 배급 되고 있습니다.”
“농민병들에게도 제대로 식사를 지급하나?”
“물론입니다. 정규 훈련에 참가하는 농민병들에게도 정규 병사들과 똑같이 식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병사들과 영지민들은 영지의 수호자이자 자산이다. 그들에게 소홀함이 있다면 결코 본 영주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주군의 명성에 절대 누를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카르스가 힘을 실어 답했다.
세상에 이런 영주 없었다.
기사들 말고 정규 병사들에게도 상등품의 식량이 제공됐다.
농민병들에게는 보통 딱딱한 호밀빵이 지급되지만 베커 영지만은 그렇지 않았다.
훈련 시에도 식사 질이 좋다 보니 훈련 일수가 적다고 투덜거리는 농민병들이 생겨날 지경이었다.
1년에 두 번 휴경기 때 한 달씩 정규 훈련이 이루어졌다.
동시에 틈틈이 궁병이나 창병, 보병의 특화 훈련도 실시됐다.
그때마다 영주는 병사들을 아낌없이 챙겼다.
가장 이상적인 영지 병사 훈련법이었다.
다른 영지에서는 농민병들은 창 한 자루 쥐어주는 게 다반사였다.
전쟁이 나면 그들은 화살받이일 뿐이었다.
기사들에 들어가는 비용이 장난 아니었기에 농민병들에게까지 자금이 지원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베커 영지는 전혀 달랐다.
기사 카르스가 영주를 존경하는 또 다른 이유였다.
“내가 살던 곳에서……. 영주의 명을 어기고 훈련을 담당하는 기사가 병사들의 물품을 착취하고 자기 배만 불린 적이 있다. 병사들은 기사들의 착취로 춥고 배고프고 힘들게 살았다. 기사는 배고파야 기강이 선다고 말했지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착취이자 도둑질이며 임명한 주군에 대한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짓이다. 경들도 그 점 유념하고 내 말을 명심하라.”
“충!”
“추웅!”
두 명의 영지 수석 기사가 큰소리로 답했다.
“그런 놈들은 언젠가 휘하 병사들에게 뒤통수를 맞는 법입니다. 제가 알던 상위 용병들 중에서도 부하들 것을 빼앗아 먹다가 오크 창자로 들어간 놈들이 많습니다. 당장은 달콤하겠지만 위기에 처하면 달콤한 것들은 독이 됩니다.”
탈만이 자신의 경험을 살려 영주 말에 동조했다.
“맞습니다……. 순간의 이익에 눈 멀어 부하들을 배신한 자들에게는 오크 창자 속이 제격이다.”
뭔가 단단하게 결심한 듯한 영주의 표정.
식사에 동석한 베커 영지의 기사와 마법사는 와인을 마시며 영주를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
“무슨 일 있어요?”
“일은 무슨~.”
“머리칼은 언제 자른 거예요?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곳 영주가 아니라 갓 입단한 용병인 줄 알겠어요.”
여인의 눈치와 감은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예민했다.
훈련소 식당에서 이계로 바로 점프했다.
당연히 머리카락이 짧을 수밖에 없다.
아린이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회귀 전 군대에서 지독히도 많이 먹었던 똥국 앞에서 난 무너졌다.
엄마가 끓여주는 된장국과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감자나 양파 같은 기본 야채도 실종 상태였다.
그냥 담갔다 바로 건져낸 수준이었다.
윗선에서 배식비까지 손대는 게 확실했다.
하루에도 만 명이 넘는 인원이 식사를 했다.
대규모로 만드는 재료비는 단가가 낮아지면서 질을 높일 수 있었다.
짬밥 만드는 취사병들 잘못은 아니었다.
재료 수급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었다.
전생이나 지금이나 엉망이었다.
내가 아는 과거 뉴스에 유통 기한 한참 지난 냉동닭 먹고 병원에 실려 간 병사들도 있었다.
돼지고기는 유통되면 안 되는 등외품이 정규 인증으로 납품됐다.
한국 군대에 뿌리내린 만연한 부정부패가 심각했다.
평범한 몇 만 원짜리 USB를 100만 원에 구입하는 놈들이 그들이었다.
훈련소에 있던 수통은 6.25 참전 용사님들 게 상당수였다.
일 년에 인건비 말고 10조 이상 전력비로 투입됐지만 그들끼리 엄청난 액수를 나눠 먹었다.
지금 정부 들어서면서 정도는 더 심해졌다.
깐깐한 지난 정부와 달리 뇌물이 다시 통용되는 시절이 된 것이다.
눈치 보며 굶었던 시절을 보상 받으려는 듯 난리가 아니었다.
최신 군함에 어군 탐지기가 설치되는 당나라 군대가 돼 버렸다.
그야말로 적폐는 음습한 곳에서 소리 없이 번져가는 이끼와 같았다.
어느 순간에는 사라진 것 같지만 다시 음습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번식하는 악마의 씨앗 같았다.
“수련 중이야.”
“수련요?”
“마음가짐을 다시 잡고 있어. 언제 영지에 위기가 닥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잖아. 영주로서 먼저 그때를 대비하는 중이야.”
“……역시 당신은 대단해요.”
아린이 진심어린 존경을 표했다.
아린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지구에서는 군견보다 못한 훈련병 신분이라는 걸 말이다.
아린이 자연스럽게 머리를 기대왔다.
그녀의 향긋한 체취가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영지를 바라봤다.
성에서 가장 높은 영주의 집무실.
한국과 위도가 비슷한 이곳에도 여름이 찾아왔다.
시간과 때를 맞추기 위해 여유가 있을 때마다 이곳에 찾아와 시간을 보냈다.
이곳도 7월의 무더위가 한창 기승이었다.
그러나 더위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7서클 마법사와 마력석이 만나면 마법이 펼쳐진다.
봄날의 어느 날처럼 습기와 온도가 저절로 쾌적해졌다.
돈 많은 영주가 누릴 수 있는 호사는 다 누렸다.
솔직히 지구로 돌아가기 싫었다.
새로운 막사에도 에어컨 같은 건 없었다.
오늘 밤부터 당장 직면해야 하는 낯선 자들과의 잠자리.
천장에 달린 선풍기로는 그 무더위를 식힐 수 없었다.
나야 내공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다른 훈련병들은 날로 견뎌야 한다.
땀 냄새, 숨소리, 코골이에 이가는 소리까지, 그리고 찾아 올 다음 날과 그 다음 날.
상상만 해도 4주는 지옥 같았다.
시간이 독립적으로 흘러간다면 이곳에서 머물며 보내고 싶었다.
“걱정 말아요. 베커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신과 제가 도울 겁니다.”
아린이 속삭이듯 힘을 주는 말을 건네 왔다.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언제나 아린은 마음에 쏙 드는 소리만 했다.
“???”
그때 저 멀리서 먼지구름이 이는 게 보였다.
외성 밖에서 시작된 먼지구름이 점점 가까워졌다.
땡! 땡! 땡!
그리고 울리는 비상 종소리.
경계병이 군사적 위험을 느끼고 종을 울렸다.
“적인가요?”
놀란 아린이 물었다.
“글쎄.”
심각한 기운은 아니었다.
먼지구름은 말을 타고 누군가 오고 있다는 의미.
그래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동안 영지가 너무 평안하게 유지되고 있었기에 신들이 시련을 가져다 줄 수도 있었다.
***
땡! 땡! 땡!
성벽 위에서 울린 급박한 종소리는 여러 번 반복됐다.
처저적.
황급히 병사들이 성벽에 도열하며 전투 자세를 잡았다.
스윽.
선두에서 말을 몰던 기사가 오른손을 들어 정지 명령을 내렸다.
히이이이이이잉.
20여 필의 말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휘이이이이잉.
저녁 바람이 불어오며 먼지와 같이 날렸다.
“제법이군. 흐흐.”
기사는 성벽 위에서 전투 준비를 끝낸 병사들을 올려다보며 비웃음을 날렸다.
보수를 하긴 했지만 이미 많이 낡은 성벽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한때 철저히 버려졌던 백작 영지.
부랑아 같은 놈이 차지하고 들어앉아 영주 노릇을 즐겼다.
“남작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뭘 어떡해. 주군의 뜻을 전한다.”
“명!”
주군의 뜻을 받들고 온 남작 작위를 소유한 기사.
따각 따각.
깃발을 앞세우고 천천히 성벽 가까이 다가갔다.
찌리리릿.
성벽 위에서 궁병들이 화살을 겨누었다.
마력 갑옷을 착용한 기사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수작이지만 기세는 봐줄 만했다.
“멈춰라!”
그때 성벽 위로 베커 영지의 기사 카르스가 모습을 보였다.
적이 나타났다는 보고에 상황을 살피기 위해 달려온 것이다.
마력이 담긴 목소리가 울렸다.
성벽 밑까지 바짝 다가온 침입자들이 멈췄다.
“이곳은 베커 장 백작님이 다스리는 신성한 영지다. 영지의 신실한 기사 카르스의 이름으로 그대들의 정체를 묻는다.”
카르스는 두려움 없이 성으로 다가오는 자들에게 물었다.
“이 깃발을 모르는가!”
선두에 선 남작이 마력을 담아 외치며 깃발을 높이 들었다.
“!!!”
깃발을 확인한 카르스는 깜짝 놀랐다.
그토록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던 영지의 깃발.
기사가 깃발이 쫙 펴지도록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신들의 따뜻한 보살핌과 영광을 허락받은 아라돈 드 주넨 후작 각하의 이름을 받들어 그의 신실한 기사 러셀 드 파드온 남작이 그대의 주인 뵙기를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