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7화 (486/1,284)

 # 487

회귀의 전설

487장. 어느 여름의 방문자 (2)

‘건방진 놈. 저것도 기사라고…….’

이름도 모르는 기사의 등장에 러셀은 투구 안에서 인상을 구겼다.

눈으로 확인한 베커 영지는 만만해 보였다.

오늘 동행한 마력 갑옷으로 무장한 다섯 명이면 이 정도 영지쯤 다 쓸어버릴 수 있었다.

일반 병사들이야 선두에 선 기사들이 죽으면 일제히 항복하는 게 전례였다.

하지만 러셀은 인내심을 키워 쓸어버리고 싶은 욕망을 눌렀다.

주군인 아라돈 후작이 은밀히 말했다.

루벡 남작군이 당했을 정도로 베커 영주는 뛰어난 정령사라고 말이다.

“손님들을 모시라.”

그때 천둥 같은 외침이 울렸다.

귀가 있는 모두에게 분명히 들렸다.

‘마법!!!’

증폭 마법을 사용해 울려 퍼진 목소리의 주인은 젊었다.

러셀은 조금 전보다 신중해졌다.

“성문을 열라!”

기사 카르스가 명령을 내렸다.

그르르르륵.

단단한 성문이 활짝 열렸다.

“가자.”

러셀 남작은 마법에 살짝 놀라기는 했지만 기죽지는 않았다.

백작령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곳은 남작령 수준만도 못한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

성문이 열리면서 드러난 것들을 보며 러셀은 깜짝 놀랐다.

‘마법 성문!’

마법 장치가 확실하게 가동되고 있는 마법 성문의 문양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해들은 보고와 달리 거지 소굴 같은 곳이 아니라 내성의 모습은 생명력이 넘쳤다.

다른 영지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후작 영지에서도 이 같은 광경은 불가능했다.

‘살아 있다……. 표정들이 전부 다.’

도열한 병사들뿐만 아니라 오가는 평민들과 아이들이 모두 신기한 듯 러셀과 그 일행을 바라봤다.

다른 영지에서라면 기사들 그림자만 봐도 평민들은 황급히 몸을 숨기거나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눈에 거슬리는 실수라도 하면 모욕죄로 처단할 수 있는 권리가 기사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 영지에서는 분위기상 그 같은 처단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낯선 기사들을 보고도 그들은 눈곱만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 넘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러셀의 계획은 보기 좋게 틀어졌다.

후작 가문의 깃발과 기사들의 위용으로 기세를 꺾으려 했지만 전세가 뒤집어지고 말았다.

“으음.”

러셀은 소리죽여 신음을 흘렸다.

처음 기세와 달리 남작 일행은 위축이 됐다.

따각 따각 따각.

고요한 침묵 속에 말발굽 소리만 울렸다.

뭔지 모르지만 이상한 분위기가 감도는 백작령이었다.

병사들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기사들의 등장에 전혀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소문으로 떠돌던 것처럼 어중이떠중이 병사들 같지도 않았다.

언제라도 명령이 떨어지는 남작과 일행 기사들을 말에서 끌어내릴 투지가 엿보였다.

말고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만만하게 보고 찾아든 곳이 졸지에 위험한 장소가 됐다.

꿀꺽.

러셀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곳 영주가 마수를 물리치고 성을 차지했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러셀이 심리적으로 긴장하자 그를 따라온 기사들도 덩달아 긴장을 했다.

보이지 않는 기운에 전염이 됐다.

“내리십시오.”

내성에 도착하자 인상이 험악한 용병이나 어울릴 법한 기사가 일행을 맞이했다.

그곳에서도 역시 베커 병사들이 러셀과 그 일행을 두려움 없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여기 뭐야?’

내성은 보기에도 단단했다.

공성전이라도 벌어진다면 고전을 면하기 힘들어 보였다.

“알겠소.”

러셀이 먼저 말에서 내렸다.

영주에 대한 예의였다.

비공식적이지만 이곳은 백작령이었고 영주라는 작자가 백작 신분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기사 세 분만 입장이 가능합니다.”

“쉬도록.”

“명!”

러셀이 휘하 기사들과 기마병들에게 명을 내렸다.

저벅저벅.

러셀은 앞장 선 기사를 따라 내성 문을 통과해 들어섰다.

내성은 레셀의 남작 영주성 크기 정도는 됐다.

규모면에서 괜히 백작령이 아니었다.

드르르륵.

내성의 본관 문이 열렸다.

‘마법?’

동시에 느껴지는 시원한 바람에 러셀은 다시 한 번 놀랐다.

후작가 성에서나 맛볼 수 있는 쾌적함이 몸을 휘감았다.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가 이 성에 머무는 게 확실했다.

“이쪽입니다.”

험상궂은 인상의 기사가 다시 앞장을 섰다.

낯선 기사들이 내성까지 들어왔지만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덤벼볼 테면 덤비라는 기세가 느껴질 정도였다.

과거에는 사자로 파견된 기사들이 성을 점령하기도 했지만 오늘은 그 같은 도발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덜컥.

내성은 오가는 병사와 기사들이 드물었다.

그렇게 도착한 내성의 홀.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이 보였다.

권좌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 옆에 로브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자신들을 바라봤다.

‘고서클 마법사!’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마법사였다.

보이는 신체 조건으로 보아 어린 여자로 짐작됐지만 갖춘 실력은 짐작할 수 없었다.

스태프를 들고 다가서는 자신들을 쳐다보는 기운이 오만하기까지 했다.

최소 6서클 이상이 확실했다.

파바밧.

권좌에 앉아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난 이곳의 영주 베커 장 백작이다.”

러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보통 사자로 오는 자의 신분을 먼저 묻고 경의를 표함이 예의였다.

그런데 보자마자 하대로써 자신의 신분을 먼저 밝혔다.

‘특이한 놈이군.’

용병들처럼 품위 없이 머리칼이 짧았다.

나이는 러셀 자신보다 한참 어려 보였다.

그러나 전해지는 포스가 만만치 않았다.

오만하고 거만했다.

기사 세 명을 앞에 두고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중앙 홀에는 지금 영주와 마법사, 그리고 인상이 더러운 기사 한 명이 전부였다.

흔하게 기립해 있어야 할 병사들도 안 보였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기운이 사방에서 억압해 오는 것만 같았다.

정령사인 영주.

그의 실력을 러셀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신들의 거룩한 사랑을 영원토록 받는 아라돈 드 쥬넨 후작 각하의 신실한 검 러셀 드 파드온 남작이……. 영주님을 뵙습니다.”

러셀은 내키지는 않지만 고개를 조금 숙여 예를 표했다.

“먼 길인데 어떤 연유로 찾아왔는지 궁금하군. 한 끼 식사를 위해 온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보통 이럴 때 후작에 대해 얘기하고 신들께 안녕을 구하는 환담이 오가는 게 순서였다.

하지만 베커 영주는 그런 기본적인 예법을 무시했다.

후작가에 대해 반감이 크다는 걸 의미했다.

“각하께서는 맹약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던 루벡 드 알포네 남작가의 명예를 지켜주고 싶어 하십니다.”

러셀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베커 영주와 이야기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루벡 남작은 아라돈 후작의 보호를 받던 남작가였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은원이었다.

이건 후작가의 의무이기도 했다.

“루벡 남작이 염치도 없이 먼저 본 영주가 다스리는 땅을 침범한 건 모르는 것 같소?”

영주가 어이없는 듯 물어왔다.

“그 점에 대해서는 각하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루벡 남작가 성을 침공한 것은 엄연한 후작가에 대한 도전입니다. 관례에 따라…….”

“도전? 그래서 개값이라도 달라는 건가?”

“개, 개값?”

러셀 남작은 황당한 그의 발언에 전혀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식한 영주를 빤히 쳐다봤다.

후작에 대한 명예에 흠집이 나면 바로 전쟁이 선포될 것이다.

그런데 겁도 없이 ‘개값’이라는 망언까지 뱉으며 망자를 욕보이는 베커 영주.

간이 큰 놈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뭐로 보상하라는 말이지? 이곳이 탐나나? 경이 보기에도 이 영지가 먹을 게 있어 보이나?”

의중을 알 수 없는 웃음을 띠며 묻는 영주.

저 태도는 후작뿐만 아니나 면전에 있는 자신까지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으드드득.

턱 관절이 움직이는 게 눈에 띌 만큼 이를 바득바득 갈며 러셀 남작은 결론을 내렸다.

저자는 분명 귀족이 아니었다.

멋대로 굴러먹던 근본 없는 용병이 분명했다.

***

러셀이라는 남작 놈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대충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누가 봐도 호의적인 목적을 갖고 온 놈이 아니었다.

내가 힘들게 키워 놓은 영지의 피를 빨아 먹으려는 수작이었다.

좋은 말로 접대하면 빙다리 핫바지 인증하는 꼴이 되는 자리였다.

뼈를 찌르는 말로 놈을 자극했다.

결과는…….

“각하께서는…… 자비의 신께 해마다 정갈한 공물을 바치는 신의 자식입니다. 이에 자비를 베푸시어 베커 영주님이…… 휘하로 들어온다면 열 번째 검으로 받아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셨습니다. 운명의 손짓에 따르시겠습니까?”

뭔 개소리를 저렇게 장황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항복하고 바짝 엎드려 종이 되라는 소리를 참 듣기 싫게도 한다.

“싫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나?”

“……전쟁의 신께서 이 땅에 임하시어 정의로운 자를 가리실 겁니다.”

“협박인가?”

“제안입니다.”

“그럼 답은 정해졌군.”

한마디로 썩은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싫다. 그것도 죽기보다 더~. 수프 끓여 개주는 꼴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못 봐.”

“!!!”

생각도 없이 그 자리에서 거절하자 러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러셀이 모시는 주군을 개로 표현했다.

“지금……. 영주님뿐만 아니라 이 영지의 모든 사람들의 목숨들이 걸려 있습니다. 마지막 기회를 잡지 않으면…….”

“러셀 경, 내 밑에 들어올래? 두둑하게 용돈도 챙겨 줄게.”

“신실한 본 남작에 대한 망발을 삼가라!!!”

차장!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찬 러셀이 급기야 검을 뽑아 들었다.

그렇지!

차자장.

뒤에 있던 기사 둘도 덩달아 검을 뽑았다.

이 정도면 완벽하게 의도한 판이 깔렸다.

“도전인가?”

“베커 영주에게 정식으로 심판을 주관하는 모든 신들의 이름으로 결투를 신청하는 바이다!”

새끼! 용기는 가상해서 칭찬해 주마.

콜!

“받아주지. 내가 패하면…… 이 영지 너 가져.”

“!!!”

물고기가 작은 새우 미끼를 물고 파닥거렸다.

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뜰채로 잡아채는 게 프로 낚시꾼의 자세.

“단 네가 패배하면…….”

뒷말은 줄이고 검을 들고 폼을 잡은 러셀과 기사들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고 그들의 갑옷과 무구를 유심히 살폈다.

저거 돈 된다.

“더러운!”

스릉!

“그런데 이것들이 미쳤나? 지금 여기가 누구의 영역인지 몰라?”

기사들이 검을 빼들어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탈만 경이 폭발했다.

저 기사들은 쉽게 날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파아아아앗.

그리고 내 곁에서 7서클 마법사 아린이 마나 시동어를 준비 중이었다.

저들도 기사 자격을 길에서 주운 것이 아니니 마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잘 알 것이다.

“탈만 경! 신전 사제님들을 불러 이 결투의 증인으로 세워라.”

“넵! 주군!”

사신으로 온 자를 그냥 잡아 족치면 뒤에 탈이 난다.

후에 영지의 규모가 커진다 해도 두고두고 불명예스러울 것이다.

한마디로 미래가 안 좋다.

철저하게 이곳의 법을 존중해 진행하면 된다.

이곳에서는 나를 아는 자가 없어 잘 모르겠지만…….

나 이래 봬도 한국대 법대 다니는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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