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6화 (415/1,284)

 # 416

회귀의 전설

416장. 준비 (1)

“이번 처사는…….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제가 그동안 회를 위해 몸과 마음, 재산을 바쳐 충성했건만…….”

“천 회장님. 이번 사건은 어쩔 수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천해운 부회장이 개를 잘 못 키워 벌어진 일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 부덕의 소치로 발생한 일임은 통감하지만 서운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회에서 방어를 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론은 때려대고, 주식은 폭락하고, 아들과 손자는 감옥에 가 있습니다. 해외에서 무차별적으로 자금이 들어와 계열사 주식 상당수를 가져갔습니다. 주총을 열어달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이러다…… 선친께서 일궈놓은 모든 걸 빼앗길 것 같아 잠도 제대로 못 잡니다.”

얼굴에 검버섯이 퍼진 천일 그룹 회장 천준용이 한 남자와 현재 상황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상대방은 한국자유당 원내대표 전운택.

부친 되는 이가 대표적 지역 친일파였다.

이승만 정권 때 사면 받고 지역에 자리 잡으면서 대대로 국회의원이 됐다.

군사정권 시절에도 누구보다 앞장서 충실한 개 역할을 맡았다.

친일로 쌓은 부의 규모가 장난 아니었다.

전운택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역 국회의원이 됐다.

여당세가 강한 곳인 만큼 눈에 띄는 실수만 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보장된 자리였다.

그런 전운택이 개운하지 않은 듯 입맛을 다셨다.

이번 사태로 일송회 회원이 타격을 받았다.

박살난 안아 그룹과 달리 천일 그룹은 일송회의 충신 중의 충신이었다.

전운택도 힘을 써서 살리고 싶었지만 워낙 여론이 좋지 않았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만큼 민심을 달래야만 하는 시점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천일 그룹을 손 놓고 놔둘 수도 없었다.

다른 일송회 회원들이 이번 일 처리를 놓고 동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간 회가 보호막 역할을 해 왔기에 지금껏 그들이 암암리에 충성해왔던 것이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천일 그룹은 천 씨 집안 거라는 사실은 대한민국 사람들 다 압니다.”

전운택 선친과 천준용은 의형제 비슷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다.

일송회는 지난 세월 동안 혼맥을 비롯해 여러 인연으로 촘촘하게 엮였다.

그들만의 아성에 뭣 모르고 침범한 자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사법권의 그물망으로 분위기 파악 못하는 자들을 매장시켰다.

“문제가 있습니다. 천일을 노리는 자가 내국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

전운택도 모르고 있던 내용이었다.

가깝게 지내던 정치인들 중에 요즘 천일 그룹 사람들을 만나는 자가 없었다.

그러니 정보가 늦었다.

“외국계 자본이 본격적으로 투입됐습니다. 허어……. 이 나라가 어찌되려고 IMF도 모자라 이런 위기에 기업들을 노리니…….”

“어떤 자들입니까?”

“사모펀드라는 탈을 쓴 월가의 탐욕스런 승냥이들입니다.”

“흐음…….”

미국 사모펀드라면 전운택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투자자유협정이 맺어져 불법을 증명하기 전까지는 제약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알고 있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맞았다.

“문제는 그놈들이 원내대표님도 이미 알고 있는 자라는 겁니다.”

“누굽니까?”

“안아 그룹.”

“아!”

“내가 조용히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때 안아를 삼킨 놈들이 다시 움직였다 합니다. 그리고…… 뒤에 그놈이 있습니다.”

“그놈은 또 누굽니까?”

“장태산.”

“장태산!!!”

“원내대표님도 아시는 놈이죠?”

“네……. 여러 번 이름이 회자된 젊은이입니다. 그런데 장태산이 뒤에 있는 게 맞습니까?”

“확증은 아직 없지만 수법이 똑같습니다.”

천준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장태산이라면…….’

전운택의 인상이 자신도 모르게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장태산은 특별한 재능으로 측정할 수 없는 부를 쌓았다.

모친 앞으로 대학교 재단을 사들였을 만큼 쟁쟁한 부를 이뤘다. 한국대에서 인정받는 인재로 재학 중이며 또 한쪽으로는 유망한 사업가였다.

기획재정부 장관인 장만수가 뭣 모르고 밟으려다가 똥 됐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사실 확인은 안 됐지만 미국 대통령과도 연관되어 있어 VIP도 조심하는 인물이라고 했다.

게다가 일송회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자와 어떤 인연입니까?”

“그게…….”

말을 꺼내다 말고 인상을 찌푸리는 천준용.

늘그막에 아들과 손자 잘못 둬 망신살을 당했다.

심지어 선친이 일궈놓은 천일 그룹이 패륜 집단 취급을 받고 있었다.

“혈기 넘치는 손자 녀석과 태릉선수촌에서 다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분풀이로 놈이 그런 짓을 하는 것 같습니다.”

“네? 선수촌요? 장태산이 그곳에 왜 갔습니까?”

“스키 국가대표입니다.”

“뭐, 뭐라고요! 한국대생이 스키 대표요?”

전운택은 진심으로 놀랐다.

그가 알고 있는 장태산은 머리가 뛰어난 천재였다.

그런 녀석이 스포츠 재능까지 갖고 있을 줄 몰랐다.

“특별한 능력을 소유한 놈입니다. 뭔지 몰라도……. 위험합니다.”

“흐음……. 아무리 그래도 개인 다툼 때문에 기업을 노린다는 건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장태산에게는 지금 자금 여유가 없습니다.”

“로버트라는 자가 뒤에 있습니다.”

“친분이 있는 건 알지만 투자 조언자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월가의 거물이 일개 어린 투자자의 말에 목숨을 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해할 만한 친분이 있는 건 맞습니다.”

“허어어…….”

천준용이 답답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수없는 위기를 헤쳐와 현재의 천일 그룹을 완성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불길함의 원인을 대충이나마 짐작했다.

하지만 전운택에게 짐작을 확신으로 심어줄 수는 없었다.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경영권은 연금으로 방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시고 사업에 집중하십시오.”

“알겠습니다. 회를…… 믿겠습니다.”

“회주님께도 보고 올리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는 마무리 됐다.

‘장태산. 장태산.’

전운택은 찝찝한 기분으로 장태산이라는 이름만 곱씹었다.

***

“너냐?”

“뭐가 말입니까?”

“천일.”

“에이~ 저 돈 없습니다. 천일이 구멍가게도 아니고.”

“원래 부자들은 뒷주머니에서 나오는 거다. 꿍친 돈 있지?”

“금융실명제 이후로 비자금 꽁치는 거 쉽지 않습니다. 계좌 까줘요?”

“됐다. 엄마에게 몇 조 투자해서 대학교에 종합병원까지 구입한 놈을 어떻게 믿어.”

“결백합니다. 지금 전 거지랍니다~.”

“예전에 샀다던 와이너리나 팔아.”

“그거 퇴직용입니다. 늙어서 와이너리에서 포도나 따렵니다.”

“벌써 은퇴 준비냐?”

“선배님도 슬슬 준비할 때 아닙니까? 연세도 있으신데…….”

“아오……. 너랑 술 마시는 내가 미친놈이지.”

손대균은 말과 달리 기분이 좋았다.

장태산과 자리를 함께하다 보면 웬만한 스트레스가 다 풀렸다.

“……넌 언제나 수상해 인마. 한국대생이 뭐 하러 스키 대표가 됐어? 알고 봤더니 노르딕 쪽은 동양인들이 메달 따는 게 불가능하다던데.”

“그런 상식을 깨는 게 세상사는 맛 아니겠습니까?”

“세상사는 맛? 니 나이에?”

“예전 같았으면 장가갈 나이입니다. 이제 선배님과 술 마셔도 되는 완벽한 성인이고 말입니다.”

“말이나 못하면…….”

“한 잔하시죠. 오늘 와인이 괜찮네요.”

티이이잉.

강남의 회원제 와인바에서 리앤장 이사 손대균은 간만에 장태산을 만났다.

회에서 지령이 떨어졌다.

장태산 현재 상태를 점검하라는 메시지였다.

‘어린 녀석이 속을 알 수가 없어.’

와인을 마시며 손대균은 넉살을 떠는 장태산을 지켜봤다.

같은 대학, 같은 과 후배지만 이런 녀석은 지금껏 없었다.

괴물들이 살아가는 한국대 법학과에서 특별나도 너무 특별났다.

어제까지 파악한 녀석의 주식 투자 실력은 아직 죽지 않았다.

바닥을 쳤던 주식들이 서서히 오르면서 투자 원금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자신에게 꼬박꼬박 투자금이 지불됐다.

TS 그룹은 여전히 장태산의 지배하에 있었다.

하관우 회장이 수시로 장태산과 독대하고 사업 전반에 관한 지시를 받고 있었다.

장태산은 일반인의 시선으로 판단할 수준을 넘었다.

변호사로 수많은 인간군상을 겪어본 손대균도 장태산에 관해선 아는 게 별로 없었다.

한국대생들 중에 스포츠 국가대표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체육 특기생을 뽑지 않았다.

태릉에서 녀석을 변호할 때 진심으로 놀랐다.

‘만날 때마다 변하는군.’

이제 겨우 스물둘이다.

사법고시에 2차에 합격하고도 3차 면접을 보지 않았을 정도로 괴짜였다.

자산도 얼마나 축적했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

이번 천일 사건만 해도 회에서 확실히 의심하고 있지만 물증이 없었다.

다만…….

“적당히 해. 티내지 말고.”

충고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어린 후배지만 손대균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물어 볼 만큼 당돌했다.

그날 이후 말은 안 했지만 손대균은 깊이 자신을 점검하고 냉철하게 바라봤다.

행동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과거 성공을 위해 짓밟았던 이들을 향해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그 변화의 중심에 장태산이 있었다.

“제가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볍게 빙긋 웃는 장태산.

어느 정도 관여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였다.

“어릴 때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고 애꿎은 녀석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잡냐?”

“기업은 개인 자산이 아닙니다. 믿고 투자한 투자자들과 그 안에서 치열하게 일하는 직장인과 그들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는 가족들 모두의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안 통해.”

“그래서 바꾸려고요.”

“너 혼자?”

“네~.”

‘도대체 이 녀석 꿍꿍이가 뭐야?’

손대균은 붉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장태산을 다시 봤다.

장태산이 꿈꾸는 미래 같은 건 짐작할 수도 없었다.

지금 발언은 국내에서 그룹을 소유한 가문들에 대한 선전포고나 진배없었다.

상류층을 차지하고 내려오지 않는 그들은 장태산의 말을 귓등으로도 들을 리 없었다.

교묘하게 주식을 이용해 계열사를 거느렸다.

수십조가 아니라 수백조의 자금이 손안에 있어도 개조가 쉽지 않았다.

권력과 유착된 경제인 가문은 그 자체가 현대판 귀족이었다.

“선배님도 도와주시겠습니까?”

“응?”

“이 개판인 세상 사람이 살 만한 세상으로 바꿔보고 싶은 생각 없으시냐고요?”

“!!!”

***

손대균 이사 눈알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놀란 것 같다.

대표적 친일파 일족에게 친일파를 제거하자고 손을 내밀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싫습니까?”

잔인한 질문이지만 다시 물었다.

또로로록.

대답 없이 빈 잔에 와인을 채웠다.

피보다 더 붉은 와인이 조명을 받아 차라리 검게 보였다.

승부수가 될 만한 질문은 아니지만 그를 흔들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 후배 그거 농담으로라도 위험한 발언이야.”

손대균 이사는 금세 안정을 찾고 와인을 비워냈다.

하지만 살짝 떨리는 손.

갈등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농담입니다~ 하하하.”

이럴 때는 어물쩍 넘어가야 하는 법.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하지만 손대균 이사가 첫 느낌처럼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다.

선친이 친일파만 아니었다면 진짜 우리나라에 정말 필요한 좋은 법관이 됐을 것이다.

풍기는 인품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농담 같지 않으니까 문제지.”

“언젠가 때가 오지 않겠습니까? 자신들 스스로 해결 못한 것들을……. 대한민국을 위해 피를 흘린 호국영령들이 깨어나 후려칠 때가 올 겁니다.”

“전설의 고향 찍어?”

“전 믿습니다.”

가슴이 말해 오고 있었다.

2016년 들불처럼 번졌던 촛불의 촛농은 호국영령들의 피눈물이었다.

이제 그 날이 멀지 않았다.

준비가 빨라져야 하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동시에 적과 아군의 구분도 필요했다.

진심으로 손대균 이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 필요한 건 강한 자극.

“……잘 지내고 있죠?”

“누, 누구?”

“유리 선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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