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5화 (414/1,284)

 # 415

회귀의 전설

415장. 확실한 한 방 (3)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대표님.”

“사업하는 데 바빠야죠. 우리도 예산 끝내고 한숨 돌리고 이제 좀 쉬고 있습니다.”

극한 대치를 보이던 2010년 예산안은 처리시한을 넘기고 얼마 전에 의장직권 상정으로 끝났다.

최병박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부자 감세를 비롯한 각종 재벌정책이 야당의 극렬한 반대 속에서 통과됐다.

“화끈하게 밀어 붙였더군요. 감축드립니다.”

“국회는 머릿수 싸움입니다. 아무리 땡깡 부려봐야 패배한 자는 사탕이나 빨며 구경하는 게 도리죠. 그게 민주주의 묘미가 아니겠습니까~ 흐흐흐.”

“맞습니다. 요즘은 세상 이치와 도리를 모르는 것들이 천지입죠. 제 술 한 잔 받으십시오. 대표님 뵙고자 내일까지 모든 스케줄 빼놨습니다.”

천일 그룹 부회장 천해운이 사람 좋은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도자기 술병을 들었다.

아랫사람들을 대할 때와는 천지차이가 나는 태도였다.

“그래요? 그럼 오늘은 코가 삐뚤어지게 밤새 한 번 마십시다!”

한국자유당 당대표 정상준이 천해운이 내민 잔을 받았다.

대통령을 배출한 여당 당대표의 권력은 막강했다.

그것도 원내의원 과반수를 넘는 국회의원과 의장을 선출한 여당의 위세는 무소불위였다.

2010년 지방선거가 얼마 남지 않아 당대표 주가는 하늘을 찔렀다.

굵직한 지방 권력자들은 청와대와 당대표의 낙점을 받아야 했다.

청와대와 당대표는 수시로 딜을 주고받았다.

대통령이 지시한 법률안이나 예산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당대표는 떡고물을 받아먹었다.

특히 이번 해에는 그 어느 때보다 무식하게 밀어붙여 오대강 예산을 따냈다.

무려 수십 조짜리 건설사업이었다.

천일 그룹뿐만 아니라 다른 대기업 건설사들도 수시로 접대하기 바빴다.

어차피 한 개 건설사가 먹을 수 없는 사업이었다.

정권에 충성한 기업들이 짜고 낙찰 받아 정치권에 상납해야 하는 구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게 엄청나게 많았다.

하청업체 좀 후려치고 부실공사로 눈가림 시공하면 최소 반절 이상은 먹을 수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 천해운 부회장은 고위급은 직접 접대를 맡았다.

몇 년 동안 꿀 빠는 사업이 아닐 수 없었다.

방송사 사장들을 대거 교체한 후 언론에 재갈을 단단히 물렸다.

오대강이 부실하다고 떠들던 이들도 알게 모르게 퇴출당했다.

화려하게 탔던 촛불은 더는 타오르지 않았다.

두려움이 없어진 정부와 국회의원, 타락한 사업가들은 더욱더 끈끈하게 유착됐다.

“대표님의 영도 아래 지방선거의 대승을 기원합니다!”

“그래요. 이번에도 승리해야죠.”

티잉.

유기농으로 재배된 찰수수와 매조로 제조된 명인의 손을 거친 최고급 문배주가 담긴 잔이 부딪쳤다.

“크으! 역시 이 집 술맛이 좋아요.”

“다행입니다.”

“4년짜리 비정규직인 우리 같은 가난한 정치인들이 언제 이런 곳에 와보겠습니까. 계속 사업 번창하세요.”

“아이고 4선 의원께서 무슨 말씀입니까. 큰일 도모하셔야죠. 대표님은 충분히 큰 꿈 꾸셔도 됩니다.”

“내 주제에 큰 꿈은 무슨……. 흐흐.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큰 꿈이라는 말에 당대표 정상준의 얼굴이 활짝 폈다.

정치인들에게 마지막 남은 고지가 바로 대권이었다.

‘대권은 무슨……. 크크.’

천해운은 정상준의 그릇 크기를 잘 알고 있었다.

어찌 한 계파의 수장으로 당대표에 올랐지만 어부지리로 된 경향이 컸다.

특히 돈과 세가 약했다.

당장 지방선거에 패배하면 당내에서 크게 말이 나올 것이다.

최병박의 딸랑이 노릇을 하고 있지만 의외로 적이 많았다.

숨죽이고 있는 다음 대선 후보를 미는 비주류 국회의원들의 활동이 요즘 들어 부쩍 활발해졌다.

그들의 힘이 생각 외로 막강했다.

일찍 레임덕에 빠질 뻔했던 최병박 정권의 권력 누수 현상이 예상외로 심했던 것이다.

그러자 다음 유력한 대권주자인 조근영 의원 쪽으로 줄을 대기 시작했다.

소문이 쫙 돈 만큼 천해운도 최근 주순자라는 조근영 의원의 측근에게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주순자는 여간 까탈스러운 여자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사이비 종교 교주였던 터라 사람 간 보는 능력이 탁월했다.

특히 그 피를 이어 받아 사람을 면전에 놓고 홀리는 재주가 넘치는 데다 큰 거래도 할 줄 알았다.

은근히 무당 비슷하게 흉내를 내기도 했지만 정보를 수집해 보니 직접 발로 무당집에 찾아다니는 아이러니를 보였다.

한 편으로 말도 안 되게 어수룩한 여자였지만 조근영은 그녀를 철썩 같이 믿고 신뢰했다.

조근영 의원이 주순자 집안 사람들에게 세뇌되어 산다는 말이 은밀히 퍼져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직접적으로 주순자를 건드리지 못했다.

조정희 전 대통령의 환상에 세뇌된 기성 유권자들이 조근영 의원을 전폭적으로 밀었다.

권력은 지지층으로부터 밀어주는 힘에서 비롯되는 법.

권력 변화에 민감한 천해운은 판을 갈아탈 줄을 준비했다.

하지만 눈앞의 당대표와도 친분을 유지해야 했다.

조근영 의원이 여물지 않는 과일이라면 지금 눈앞의 당대표 라인은 탐스럽게 익어 출하를 앞둔 사과와 같았다.

따는 게 임자였다.

“여러모로 지방선거를 비롯해 당 운영에 힘을 다하시는 모습이 안타까워 조그만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가시는 차편에 실어드리겠습니다.”

“뭐 그런 걸……. 좌우지간 고맙습니다. 번번이 내 천 회장의 신세를 집니다.”

“부회장이라 불러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아직 정정하신데 그 소리 들어가면 저 회초리 맞습니다.”

“효자시라더니 소문이 맞습니다 그려. 하하하.”

구체적 액수는 나오지 않았지만 선물 이야기가 나오자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고민입니다. 아버지 성화가 장난 아닌데 이런 불경기에……. 회사에 일감이 부족하니…….”

술을 마시며 눈치를 주는 천해운.

“그건 걱정 마십시오.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내 안면도 있는데 그냥 말겠습니까? 조만간 좋은 소식 있을 겁니다.”

확답에 가까운 당대표 말에 천해운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계획대로 일이 됐다.

아버지인 천준용 회장에게 조만간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부회장 타이틀이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했다.

“다행입니다! 대표님의 능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흐흐…….뭐 그 정도에 경의를…….”

“애들 들이겠습니다. 명문대 재학 중인 애들로 준비했습니다.”

“오! 그래요?”

여자를 은근히 밝히는 정상준 대표의 입이 찢어졌다.

눈치만 봐도 알 만큼 천일 그룹과 오래된 관계였다.

초선 의원 시절부터 섭섭하지 않게 관리를 받았다.

“대, 대표님!”

그때 밖에서 놀란 당대표 보좌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정상준 대표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오늘은 VIP가 찾지 않는 이상 연락을 거절하라고 미리 말해뒀다.

“급한 일입니다!”

“뭔데 그래?”

드르륵.

한옥 안채 미닫이문이 열렸다.

얼굴이 핼쑥해진 수석 보좌관이 급하게 다가와 정상준의 귓가에 속삭였다.

“뭐, 뭐라고!!!”

예상치 못하게 깜짝 놀라는 정상준.

‘뭐야? 대통령 신변에 무슨 이상이라도?’

술잔을 들다가 말고 천해운은 분위기가 이상해짐을 느꼈다.

여당 당대표가 저렇게 놀랄 만한 일은 드물었다.

“당대표 주재 긴급회의를 준비해!”

“넵!”

정상준의 지시를 받은 보좌관이 다급하게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에 천해운을 매섭게 노려보고 사라지는 보좌관.

‘저 새끼가 미쳤나!’

다음 공천이 확실했기에 평소 용돈을 주고 관리했던 놈이었다.

그런 놈의 눈빛에 천해운의 얼굴이 화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슨 일 있습니까?”

천해운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당 대표를 보고 물었다.

“당신……. 도대체 일은 어떻게 처리하는 거야!!!”

느닷없이 눈을 치켜뜨고 버럭 호통을 치는 정상준 대표.

“!!!”

당신이라는 호칭에 다소 놀란 천해운이 멍하니 그를 봤다.

“앞으로 연락하지 마! 그 따위로 아랫것들 단속도 못하는 게 무슨 사업을 해! 에잉!”

화를 내며 도망치듯 사라지는 정상준의 뒷모습을 천해운은 어이없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저 새끼들이 뭘 잘못 처먹고 미쳤나!”

천해운은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남아 있던 술을 벌컥 마셨다.

당대표가 저렇게까지 화를 냈다는 건 앞으로 볼일 없다는 뜻.

믿기지 않는 상황에 천해운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부, 부회장님!”

그때 밖에서 그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비서실 직원이었다.

“뭐야!”

“속히 회사로 돌아오라는 회장님의 명이십니다!”

“아버지가?”

천해운은 아버지가 찾는다는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뚜루루루루루 뚜루루루루루.

그사이 천해운의 핸드폰이 울렸다.

오른팔인 천일건설사 사장의 전화였다.

- 부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새어나오는 건설사 사장의 벌벌 떨리는 목소리.

“도대체 무슨 일이야? 우리 건물이 무너지기라도 했어?”

- 그게 아니라……. 지금 속보가 떴습니다.

“무슨 속보!”

- 진광형 실장이 경찰서에 가서 자수를 했답니다.

“진 실장? 자수? 무슨……. 헉!”

말을 곱씹다 천해운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을 받았다.

- 요즘 돌렸던 떡값 자료를 들고 경찰서에 갔답니다. 손 쓸 틈도 없이 기자가 달라붙어 지금 난리도 아닙니다!

툭. 퍼걱.

천해운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 부회장님! 부회장님!!!

건설사 사장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는 천해운.

머리를 강타한 충격에 눈이 풀려버린 상태였다.

***

[속보입니다. 천일 그룹 로비사건의 여파가 생각보다 심각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느껴 자수했다는 비서실장 진 모 씨가 뿌린 명단이 인터넷에 유포되었습니다. 이 자료에 의하면 현직 국회의원 10여 명과 국토부 차관과 국장급 인사, 세무서장과 같은 고위 공무원들이 떡값 명목으로 수억에서 수천만 원의 수뢰를 받은 것으로 나왔습니다. 이에 청와대 사정관실과 감사원에서는 대대적인…….]

“웃기고 있네~ 새끼들.”

경찰서에 자료를 가지고 갔고 뒤에 기자가 붙어 기사가 났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에 입각한 기사였음에도 며칠 만에 뉴스가 묻힐 뻔했다.

그러나 권력과 언론의 힘에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서로 주고받으며 보호하는 정교한 카르텔.

톱스타 연예인 불륜 자료가 뿌려지며 천일 그룹 비자금 사건이 뉴스 란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계획적으로 똥물을 확실하게 뿌렸다.

해외 서버를 통해 자료를 각 뉴스 사에 넘겼다.

단박에 다시 검색 상위권을 차지했다.

이번에는 빼박 증거였다.

돈을 받아가는 사진까지 첨부가 됐다.

여당 의원 다수와 야당 상임위원장이 걸렸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정치인들은 돈이라면 인생을 전부 걸 만큼 집착했다.

댓글 란을 클릭했다.

- X발……. 난 떡값 대신 이번에 권고사직 당했는데…….

- 천일 그룹 부회장 인성 개떡이라 1년에 운전기사가 30명 이상 바뀌었답니다.

⌞진짜요?

⌞사촌 형님 천일그룹 본사에서 근무하는데 부회장 X새끼래요.

- 천민재 아빠가 그 새끼죠?

- 천일 그룹 친일파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 와아……. 저런 게 대한민국 재벌 그룹이라니…….

- 여러분! 눈 똑바로 뜨고 지켜봅시다!

- 구케의원 X시키들!

- 이번 지방선거에서 단단히 보여줍시다!

- 속보 떴네요! 부회장 방금 구속영장 발부됐답니다!

- 그거 집행유예 각입니다. 지켜보십시오.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나올 겁니다!

네티즌들의 분노가 온라인 세상에서 끓어올랐다.

당장은 어떻게 되지 않지만 쌓이고 쌓여 언젠가는 폭발하게 되는 게 민심이었다.

최병박 정권도 여론을 지켜보며 어느 정도 시늉은 보이겠지만 어차피 집행유예다.

수천억을 횡령해도 재벌들은 벌을 받지 않았다.

대다수 사업가들이 세금 문제에서는 떳떳하지 않았지만 대놓고 하는 재벌들과는 스케일이 달랐다.

나 역시 해외자산은 온전히 내 것이다.

양심에 찔리지 않았다.

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내 해외자산은 대한민국을 위해 사용될 군자금이었다.

띠이이.

핸드폰 단축번호를 길게 눌렀다.

- 보스.

“준비 됐습니까?”

- 명하신 대로 해외 계좌 추적해 놨습니다.

“그럼 바로 고발하고 뉴스에 터트리십시오.

-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공매도로 후려치고 폭락하면…… 싹 주워 담으십시오.”

개미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전쟁에서 작은 희생은 어쩔 수 없는 법이다.

- 알겠습니다.

“다음 주중에 미국에 갈 예정입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통화는 할 말만 하고 짧게 끝났다.

국내를 비롯해 외국에서 동시에 흔들었다.

안아에 사용했던 방법이 가장 확실했다.

“뭔가 더 있는데…….”

다 끝나간다고 생각했지만 뭔가 찝찝한 느낌 하나가 뒷목을 자극했다.

천일이……. 생각보다 좀 더 버틸 것 같다는 생각.

그게 뭔지 감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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