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3
회귀의 전설
323장. 식사를 합시다
‘도대체 정체가 뭘까?’
이제는 정식으로 베커 백작령으로 불리는 성.
상인 사비나는 의혹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다.
영주 베커 장 백작은 정식 귀족이 아님을 알았다.
알고 있는 지식이나 대화의 품격에서는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귀족가의 기본 예법이나 대륙의 긴 역사에 있어서는 문외한이었다.
한 달간 꼼꼼히 살펴본 뒤 내린 결론이었다.
영주 베커 백작은 그 누구보다 강했다.
매일매일 눈에 띌 만큼 무섭도록 성장했다.
쉽게 4대 정령 모두를 소환하는 정령 마스터였다.
대륙에 몇 없던 정령계의 이단아였다.
무기도 웬만한 건 거침없이 다 다뤘다.
검, 도끼, 창, 궁술까지 훈련받은 어지간한 기사 수준을 넘었다.
귀족이라면 응당 평민에게 품고 있는 천성적 거만함이 없었다.
절대 무시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
영지민들에게는 왕과 다를 바 없음에도 그 위에 군림하지 않았다.
영지민들 모두 베커 영주를 존경하고 공경했다.
대륙에 지금껏 없던 영주와 영지민의 관계가 아닐 수 없었다.
‘황금을 좋아하는데…… 그렇다고 천박하지도 않아.’
베커 영주는 황금을 그 무엇보다 사랑했다.
사비나가 가져왔던 황금을 모조리 쓸어갔다.
공짜는 아니었다.
드워프와 엘프 물건이 교환 대상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사비나가 상단을 이끌고 출발했어야 했다.
그러나 상단의 명령으로 성을 비울 수 없었다.
외성 안에 과거 대형 상단 자리를 임대했다.
영주에게 물건을 모두 넘긴 탓에 팔 물건은 없었지만 대신 상인들과 매일 회의를 열었다.
며칠 후면 1급 상인이 도착할 예정이었다.
고서클 마법사와 기사급 용병들이 포함된 대규모 상단이다.
‘드래곤은 아니겠지?’
사비나는 전설로만 듣던 유희 중인 드래곤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했다.
하지만 베커 영주 눈빛 속에서 엿보이는 번뜩이는 욕망은 보통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웃고 울고 즐길 줄도 알았다.
강했지만 다른 사람이 입는 상처도 입었다.
고통을 싫어하는 드래곤은 유희 중에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모두 다 영주를 좋아해. 묘하게 사람을 끌어들여…….’
성격 더러운 것의 대명사인 용병들이 영주에게 반해 스스로 병사가 됐다.
달린 마을 사람들도 영주에게 하루 만에 반했다고 한다.
사비나도 영주가 마음에 들었다.
영주가 자신을 전혀 여자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문제지 사비나는 호감이 갔다.
“오늘은 우리 주군께서 뭘 준비하셨을까~.”
기사 탈만이 침을 꿀꺽 삼키며 입맛을 다셨다.
“영주님의 요리 솜씨는 마력과 비견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영광일 뿐입니다.”
영지의 기사다운 기사 카르스는 영주에 대한 존경심을 한껏 드러냈다.
“베커 백작님의 넉넉함에 항상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롬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살고 싶다…….’
사비나는 따뜻한 저녁 풍경이 있는 이곳이 좋았다.
베커 영지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각박해져 가는 대륙과는 전혀 다른 훈풍이 베커 성에는 매일 불었다.
“다들 오래 기다리셨소~.”
영주가 부엌문을 열고 나타났다.
양손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요리 접시를 들었다.
꿀꺽.
사비나는 침을 삼켰다.
돈을 피와 같이 여기는 상인이지만 사비나는 맛있는 걸 사랑하는 여자였다.
코끝을 확 자극하는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는 침샘을 무한 자극했다.
“주군! 오늘 메뉴는 무엇입니까!”
탈만이 큰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소금 장어구이와 돼지 갈비찜이오.”
“오오오! 소금 장어구이! 돼지 갈비찌이임!”
탈만이 탄성을 터트렸다.
어른 팔뚝만 한 크기의 두툼한 소금 장어구이는 이곳의 별미였다.
민물 장어가 성 앞 강가에 널렸다.
강 주변에 물고기들이 많았다.
‘귀한 드워프 접시를 아무렇게 사용하다니……. 역시 영주다!’
사비나는 함부로 고급 식기를 사용하는 영주가 멋있어 보였다.
귀족들 사이에서 자랑용 장식품으로 사용될 고급 식기였다.
“환상입니다!”
“주군……. 존경합니다!”
식사에 초대된 모두가 영주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요리하는 백작 영주.
대륙에서 오직 이곳 베커 성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
“오오오오!”
“역시!”
사방에서 감탄이 터졌다.
식기가 열리고 갓 구워진 요리가 나타났다.
장어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졌다.
아직도 뜨거운 김이 피어나는 장어의 향취는 사람들이 입맛을 다시게 만들었다.
마늘과 생강즙, 어머니 표 매실로 목욕한 장어를 굵은 소금 팍팍 뿌려 구웠다.
죽음이었다.
장어를 섭취할 때마다 요즘 아침 기상이 곤욕이었다.
왜 어른들이 민물 장어 노래를 부르는지 확실히 알아버렸다.
그러나 혼자 먹으면 맛이 없었다.
영주 회의를 빙자해 일주일에 몇 번씩 초대했다.
기사들과 우애도 돈독하게 만들고 저녁도 심심치 않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었다.
“보관 창고에서 오늘은 괜찮은 와인을 발견했습니다.”
“그런가?”
“전 영주님이 애지중지하던 와인들입니다.”
노선을 확실하게 정한 카르스는 한때 모셨던 영주를 ‘전 영주’라 칭했다.
장어에는 레드 와인이 제격이었다.
성 지하에 있는 비밀 와인 창고를 카르스가 알려줬다.
요즘 들어 자주 와인을 즐겼다.
토질이 달라서인지 지구 와인과 맛이 차별됐다.
레몬, 라임, 구즈베리와 시트러스 향이 진했다.
포도주였지만 각종 과일향이 싱그럽게 풍겼다.
루비 빛의 영롱한 와인 빛깔은 맛을 한층 더 배가시켰다.
“식기 전에 먹도록 합시다.”
먹기 좋게 잘라진 장어구이.
엄마 표 간장, 유기농 설탕과 과일에 숙성된 돼지 갈비구이가 식탁을 풍성하게 차지했다.
애피타이저 겸 입가심용으로 라코다 치즈 샐러드가 제공됐다.
이곳 사람들은 치즈를 즐겨 먹었다.
“주군. 소신이 한 잔 따르겠습니다.”
카르스가 와인을 따랐다.
코르크 마개를 열고 카르스는 피보다 붉은 포도주를 잔에 채웠다.
쪼로로로로록.
나를 필두로 해서 모든 잔에 포도주가 채워졌다.
“베커 영지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내가 선창했다.
“위하여!”
이곳의 건배사도 지구와 비슷했다.
꿀꺽!
포도주를 한 모금 머금자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풍미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지구에서도 이 정도 포도주는 구하기 힘들었다.
더욱이 모조리 유기농 재배였다.
농약으로 재배된 포도와 방부재가 가미된 포도주가 아니었다.
“크으으! 죽입니다!”
탈만은 전직 용병답게 포도주를 원샷했다.
기사가 됐지만 성품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저녁 식사가 시작됐다.
“아!”
도톰한 장어구이를 베어 먹으며 곳곳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뜯어 먹고 싶은 인간 본연의 식욕을 자극하는 돼지갈비가 빠르게 사라졌다.
장어와 돼지갈비찜.
좋은 재료에 요리 스킬까지 더해지자 더할 나위 없이 맛이 끝내줬다.
저녁 만찬은 와인과 맛있는 요리로 정점을 찍었다.
분위기는 한껏 고조됐다.
“사비나 양.”
“네. 영주님.”
“상단은 오고 있는 겁니까?”
“며칠 내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요구하신 물건들 양이 많기도 하고 고서클 마법사를 비롯해 1급 용병단과 동행중입니다.”
고서클 마법사라는 말에서 자극을 받았다.
사비나도 마법사였지만 4서클에 그쳤다.
배울 게 별로 없었다.
상인이 주업이었기 때문에 마법실력은 뛰어나지 않았다.
고서클 마법사가 보고 싶었다.
아직 영지에 마법사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방어 마법진이 가동되는 성문을 수리하기 위해서는 실력 있는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했다.
지구에 돌아가 접목할 마법기술이 고팠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영주님을 흡족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사비나가 다소곳하게 답했다.
이곳 성에 거주하는 여인들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그러나 진도를 따로 빼지는 않았다.
지구에도 미인들은 넘치고 많았다.
괜히 이곳에서까지 사고치고 싶지 않았다.
“병사들 훈련 상태는 어떤가?”
기사들에게는 자연스럽게 하대로 대화를 유도했다.
“노병들이 나서서 신병들을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몇 달 정도면 정예병들이 될 것 같습니다!”
카르스가 힘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달린 성의 병사들과 용병들, 그리고 새로 충원된 신병들까지 1000명의 병사가 정규로 편제됐다.
인구에 비해서 병력이 많았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제 성벽 위가 과거처럼 허술하지 않았다.
“탈만 경은 어떤가?”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적의 뒤통수는 확실하게 박살내겠습니다!”
용병답게 투지에 불타는 탈만이었다.
용병들로 구성된 특수전투단은 기대가 컸다.
앞으로 정규 병사들보다 쓰임새가 많을 것이었다.
“경들을 믿겠다.”
“감사합니다! 주군!”
기사들을 믿고 요즘 방임을 제대로 누리고 있다.
알아서 체계적으로 영지가 굴러갔다.
그렇다고 먹고 놀지 않았다.
무기를 제작하고 개인 훈련 시간을 늘렸다.
점점 내가 강해지고 있음을 스스로 잘 알았다.
타다다다다닥.
그때 문밖에 급박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졌다.
“???”
모두의 시선이 문 쪽을 향했다.
“영주님! 급히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밖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
허락하자 발칵 문이 열렸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흥분한 기마병이 한쪽 무릎을 꿇고 급하게 예를 올렸다.
“무슨 일인가?”
“주군! 루벡 남작군으로 보이는 적들 수천이……. 영지 경계선을 넘었다고 하옵니다!”
“!!!”
함께 식사를 하던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러나 나는 긴장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던 제1차 베커 영지전쟁.
그 짭짤한 도박판의 서막이 식사 자리에 전해졌을 뿐이었다.
***
인생 두 번 살고 볼 일이었다.
지금 순간을 경건하게 받아들였다.
다른 세상에 올 때마다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에는 두려웠던 낯선 세상.
얼마나 쫄았는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심장이 쫄깃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황금 노다지의 본고장 수준으로 나에게 인식됐다.
본격적으로 장사가 시작되었다.
이곳에 와서 황금 맛을 제대로 알아버렸다.
이계의 마법과 새로운 물질은 지구에 새로운 혁명을 제시할 것이다.
위기와 축복이 공존하는 이 세계.
죽음을 맛볼 수 있는 전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처음 도착할 때처럼 겁먹고 쫄리지 않았다.
모든 걸 자연스럽게 순순히 받아들였다.
게임 속 같은 세상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이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맞으면 아프고 찔리면 피가 났다.
아공간을 통해 쏠쏠하게 물질을 교환할 수 있었다.
어느 누구도 쉽게 소유할 수 없는 보물창고였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지구와 이계 아르펜.
이제는 두 곳 다 각각 의미가 있고 소중했다.
둥! 둥! 둥!
성 밖에 진을 치기 시작하는 남작의 군대가 북소리를 울렸다.
영화에서 보던 엄청난 스케일의 중세 영화 장면과는 사뭇 달랐다.
웅장함이나 스케일이 한참 모자랐다.
수천 명의 병사들이라고 해봐야 눈으로 보니 생각보다 수가 적었다.
B급 수준 중세 시대 전쟁 영화 장면 정도였다.
휘리리리리리링.
차가운 바람이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매섭게 불어왔다.
지구와 똑같은 계절 변화와 시간의 흐름이었다.
“…….”
성벽 위에 긴장감이 돌았다.
모두 입을 다물고 진을 치는 적들을 노려봤다.
“카르스 경. 오늘 밤 공격해 올 것 같은가?”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마법사나 정령사의 도움이 없다면 아침 일찍 공성전이 시작될 것입니다. 자칫 어둠으로 인해 피아를 혼동할 수 있습니다.”
인간과의 전투는 처음이었다.
얼핏 내가 짐작했던 바를 기사 카르스가 명쾌하게 답했다.
뛰어난 기사였다.
남작군은 상당한 거리의 길을 걸어온 탓에 휴식을 취하고 아침에 공격해 올 것이다.
그들은 나름 압도적 전력을 구축한 상태이니 두려움 또한 없어 보였다.
숲이나 늪 같은 지형지물의 제약도 없었다.
대신 남작군은 기습에 대한 대비가 허술하기만 했다.
진을 친 장소는 뻥 뚫린 성 앞의 평원이었다.
보름달과 화톳불 정도면 충분히 방어가 가능할 것이라 판단한 것 같았다.
기회를 엿봤다.
넓고 한산하게, 그리고 맛나게 포진하는 적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병사들에게 저녁 식사는 넉넉하게 공급하라.”
“알겠습니다. 주군!”
남작군의 포진을 보며 공격 계획을 세웠다.
게임 시뮬레이션이 넘치는 지구였다.
날 만만하게 알고 고개 쳐들고 밀어닥친 남작군은 오늘 신세계를 경험할 것이다.
정령과 완벽하고 소통이 됐다.
마력무구도 완성된 상태.
남작 기사에게 빼앗은 마력갑옷도 착용했다.
무기가 풀세트로 완비됐다.
수천의 병사들쯤은 두렵지 않았다.
레벨이 20을 넘었다.
레벨 효과 덕분인지 몸이 더 강해지고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마력도 차오르는 속도가 전과 달랐다.
정확하게 레벨의 효과를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몸에 좋은 건 확실했다.
상태창을 살펴 볼 때마다 마음이 뿌듯했다.
첫 소환 시 상태창과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달라졌다.
모든 면에서 강해지자 자신감이 빵빵해졌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그사이 남작 병사들이 막사를 완성하고 저녁과 유흥을 즐기며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의 마지막 만찬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성벽 위 병사들은 긴장의 끊을 놓지 않고 지켜봤다.
나는 루벡 남작의 진영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오늘 밤 맞보게 될 인생 역주행.
루벡 남작 멘탈이 오늘 연두부처럼 으깨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될 것을 결코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