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4
회귀의 전설
324장. 그럼 꿇어!
“흐흐흐. 성이 아주 커~. 파티를 해도 이제 부끄럽지 않겠어~.”
느긋하게 포도주를 마시며 루벡 남작은 내일 아침이면 자신의 것이 될 백작성을 바라봤다.
과거에는 언감생심 탐낼 생각도 못 했던 백작성.
달콤한 포도주 덕에 기분이 더 좋았다.
환하게 뜬 보름달빛과 루벡의 부푼 욕망이 만나 성을 더욱 매혹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밤이 깊었지만 루벡은 잠들지 못했다.
코딱지만 한 남작령을 유지하기 위해 긴 세월 선조들은 간, 쓸개 다 빼고 살았다.
루벡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근 영주들이 대놓고 무시하여 연회에 초대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모른 척하고 참석할 때면 개무시를 당했다.
영주의 위엄은 영지의 크기와 생산력에 의해 절대적으로 좌우된다.
절치부심 노력하고 온갖 눈치 본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비어 버린 백작성만 차지하면 자작의 위는 받을 수 있었다.
베르샤 성에 대한 가치는 이웃한 루벡 남작만이 잘 알았다.
과거 제국의 힘이 강성할 때에는 백작성 뒤편 거대한 산맥으로도 제국의 대로가 연결되었다.
제국의 길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북부대륙에 열흘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산맥을 돌고 돌아 몇 달이나 걸리는 길을 단축할 수 있는 것이다.
엄청난 이득이었다.
산맥에 드워프와 엘프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제는 인간과 거래하지 않는 이종족.
그들과 거래를 틀 수만 있다면 자작뿐만 아니라 후작, 공작을 넘어 왕국 건립도 가능했다.
“주군. 이제 취침하십시오. 아침 일찍 공격 명령만 내리신다면 성문을 박살내 버리겠습니다!”
루벡의 오른팔 기사단장 알버트가 취침을 권했다.
“알버트……. 성만 함락하면 내 성을 기사령으로 하사하겠다.”
“주군의 크신 은혜 피로써 갚겠습니다!”
동상이몽에 빠진 두 사람은 이 순간 더없이 행복했다.
서로가 바랐던 최상의 결과를 상상했다.
파라라라라라랏.
그때 거친 바람이 불었다.
순식간에 불어 닥친 매서운 바람.
쩌어억! 콰다다당.
강풍에 루벡 남작가의 커다란 영지기가 사정없이 부러지며 바닥을 굴렀다.
“!!!”
바닥에 나뒹구는 영지깃발을 보며 루벡은 당황했다.
“마, 막사가 날아간다!”
“잡아! 붙잡아!”
진영 곳곳에서 난리가 났다.
와드드드드드드득.
사방에서 깃발을 비롯해 막사와 군용품들이 나뒹굴었다.
“뭐, 뭐야!”
차갑고 스산한 바람이 루벡의 뺨을 때렸다.
수천 병력과 강한 기사들이 주변에 포진하고 있지만 갑작스럽게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일었다.
루벡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마른 풀들이 주변 사방에서 바람을 타고 미친 듯이 흔들렸다.
바람의 방향이 성 쪽에서 평원 쪽으로 바뀌었다.
‘설마?’
루벡의 머리에 스치는 불길한 상상 하나.
바쁘게 공격하다 보니 주변 지형을 살피지 못했다.
아니 살필 필요도 없었다.
허허벌판에서 기껏 공격해 봐야 화공 따위…….
“헛!”
갑자기 루벡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붉은 불덩이 하나가 정면에서 번쩍하고 떠올랐다.
“알버트!!!”
당황한 루벡은 기사를 불렀다.
펑! 퍼버버버벙!
그리고 시작되었다.
불덩이가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튀어 오르더니 남작 진영을 포위하며 빠르게 폭발했다.
발화점을 시작으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를 내며 불길이 거대한 원을 그렸다.
“부, 불이다!!!”
“으아아아아아! 사방에 불이 붙었어!”
“화공이다! 화공!”
초병들이 혼비백산하며 비명을 질렀다.
“불이다! 불!”
잠에 취해 있던 병사들이 깨어나며 불에 놀란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모두 멘붕에 빠졌다.
화르르 화르르 화르르르르르르르.
거대한 불길들이 하늘로 솟구치며 맹렬한 불길을 토했다.
“!!!”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병사들은 얼이 빠졌다.
상상을 불허하는 불길이 거대한 불의 입을 벌리고 사방에서 포위해 왔다.
매캐한 연기와 하늘 높이 치솟는 불길.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때 갑자기 뒤편에서 엄청난 함성이 들렸다.
루벡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크하하하하하하하! 너희들은 포위 됐다!”
마력이 담긴 목소리와 함께 후방의 다리 쪽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세워두었던 수비병들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다리 위에 도깨비불처럼 타오르고 있는 수백 개의 횃불.
횃불 사이로 중무장한 병사들의 방패와 창이 루벡 남작군을 향해 있었다.
그 앞에 기사갑옷을 착용한 자가 검을 땅에 박고 우뚝 서 있었다.
“주, 주군! 적들이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 같습니다!”
알버트도 당황했다.
지금까지 배웠던 전투 상식과 궤를 달리했다.
대응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마법사와 정령사의 부재가 오늘따라 뼈아팠다.
“저, 정령이다! 알버트. 정령이라고!!!”
루벡이 홀린 듯 손가락으로 불덩어리를 가리켰다.
붉은 도마뱀 한 마리가 사방을 날아다니며 휘젓고 있었다.
보통의 불의 정령이라면 낼 수 없는 엄청난 속도.
바람의 정령이 불의 정령을 태우고 날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 보는 불과 바람의 정령 합동 공격에 루벡은 감히 움직일 수도 없었다.
“으아아아! 사, 살려줘!”
“불이다! 불!”
“불의 정령이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이 미친 듯 활로를 찾으며 뛰어다녔다.
순식간에 대열과 진형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병사들을 통제하라!!!”
알버트가 휘하 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모두 멈춰라! 대열을 정비하라!!!”
루벡을 호위하고 있던 기사들이 사방으로 내달렸다.
히이이이잉! 히이이이잉!
불길과 타는 냄새에 놀란 말들이 날뛰었다.
기사들의 외침은 말들과 인간들의 비명에 묻혔다.
“어…… 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참사에 루벡은 멍하니 두 눈만 껌뻑거렸다.
그렇게 든든하던 기사와 병사들이 모조리 허수아비가 된 듯 서 있었다.
화르르르르르르.
불길이 영주 막사까지 미쳤다.
대비할 시간을 두지 않는 미친 불길은 영혼을 탈탈 털었다.
“주군. 피하십시오!”
알버트가 루벡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앞을 막아섰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도망갈 곳을 찾았다.
하지만 어느새 불길은 거대한 원형을 이루며 코앞까지 조여 왔다.
마른 풀에 불의 정령의 축복까지 더해지면서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뜨거운 열기가 확확 밀어 닥쳤다.
쇄애애애애앳!
불길을 뚫고 날아오는 날카로운 창 하나.
“감히!”
알버트가 들고 있던 방패로 창을 후려쳤다.
영지에서 가장 강한 기사의 전투 반응력이었다.
콰아아아앙!
“크으윽…….”
창과 방패가 강하게 부딪치며 불똥이 튀었다.
창에 담긴 엄청난 힘에 의해 방패가 튕겨나가며 파르르 진동했다.
알버트의 입에서 고통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팔을 타고 전해지는 멈추지 않는 진동에 골이 흔들렸다.
“루벡~.”
그때 들려오는 감정이라곤 없는 듯한 인간의 목소리.
“흐헉!”
루벡 남작은 자신을 부르는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공포와 함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그림자.
불길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기사가 루벡의 눈에 잡혔다.
악마의 화신처럼 불길에서 걸어 나왔다.
손에 들인 황금 방패와 활활 타오르는 불의 검.
그자는 뜨거운 불길 속을 뚫고 유유히 다가왔다.
마치 루벡을 향해 저승문을 열고 나온 저승사자처럼 웃고 있었다.
***
“누, 누구냐!”
알버트가 이를 악물고 모습을 드러낸 자에게 정체를 물었다.
“땅 주인.”
‘땅 주인? 그럼 저자가!’
기사단장 알버트는 이곳의 새로운 영주를 노려봤다.
투구까지 착용하고 있어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불길 속에서 나타난 자의 기세는 장난 아니었다.
정령을 부리는 자답게 정령의 불길 속에서도 전혀 해를 입지 않았다.
“어이~ 루벡~.”
영주라는 자가 알버트를 무시하고 얼이 빠져 있는 루벡 남작의 이름을 불렀다.
“가, 감히 나의 이름을!”
“난 백작인데. 반말이 기분 나쁜가?”
영주라는 자는 기사도나 귀족 예법을 차릴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영지 전쟁을 치르는 상대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는 법이다.
“알버트 뭐하는가. 당장 저놈의 입을 찢어 버리라!”
루벡이 추상같은 명을 내렸다.
“…….”
‘젠장. 저놈에 대한 정보가 틀렸다!’
알버트의 입에서 곧장 충성스러운 종의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두 정령을 이용한 합동 공격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최소 중급 정령사였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5서클 마법사와 맞먹는 경지였다.
기사의 기준으로 치면 중급 마력 전투사급이었다.
알버트는 눈을 굴렸다.
보름달은 어느새 회색 연기에 가려진 지 오래.
“으아아아아아아아!”
“어, 어디로 도망쳐야 돼!”
아직도 혼란은 멈추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오합지졸 병사들은 갈 길을 잃은 망아지 꼴이었다.
화염은 쉽게 식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제대로 가꾸지 않은 성 앞은 모두 마른풀 천지였다.
다른 기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주군이 위험하다! 기사들은 속히 돌아오라!!!”
마력을 있는 힘껏 담아 알버트가 소리쳤다.
영악한 알버트는 적을 혼자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셋만 되면……. 놈을 죽일 수 있다!’
영주를 보며 알바트는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기사도 따위는 이런 난장판에서 쓸모가 없었다.
어차피 주군인 루벡도 승리만을 원했다.
하지만…….
“흙저씨~ 여기 좀 막아줘.”
영주가 갑자기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콰드드드드드드드.
그 순간 땅이 쩌억 갈라지며 흙기둥이 올라오더니 사방이 흙벽으로 순식간에 막혔다.
“허억!”
“으어어어!”
알버트와 루벡의 얼굴 표정은 썩을 대로 썩어 들어갔다.
불과 바람의 정령에 이어 중급 대지의 정령의 등장이었다.
한눈에 봐도 돌덩이 같은 단단한 훍벽이 둥글게 원을 이루며 사방을 에워쌌다.
어지간한 성벽 높이였다.
도망갈 곳이 보이지 않았다.
오줌을 지리고도 남을 것처럼 당황한 알버트와 루벡 남작.
“쫄았나?”
영주라는 자가 비꼬는 말투로 비아냥거렸다.
그 말에도 루벡 남작은 전혀 대꾸를 하지 못했다.
***
강도질이 쉬운 게 아니다.
루벡 남작을 지켜보는 내 기분은 한마디로 째졌다.
저절로 굴러 들어온 먹잇감.
벌벌 떠는 루벡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윗대가리만 잡으면 원래 그 판은 끝나는 법이다.
오늘을 위해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대가리 때려잡기였다.
불질로 적들의 시선을 빼앗은 뒤 홀로 공격해 들어가는 것을 계획했다.
복잡하게 피 보고 싶지 않았다.
이 넓고 때 묻지 않은 땅에 저들의 시체를 묻는 건 꺼림칙했다.
지금도 보기에만 매서운 불길은 적 병사들을 포위만 했다.
낯선 세계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리고 계획했던 것처럼 전투는 이겼다.
입맛을 다셨다.
실하게 살찐 멧돼지와 동급으로 보이는 루벡 남작.
영지민들의 피를 빨아서 성장한 악덕 영주였다.
전혀 불쌍한 생각은 들지 않는 비주얼이었다.
쇄애애앳!
남작의 기사라는 작자가 기습적으로 공격을 날렸다.
검에 서린 마력이 제법 됐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모든 걸 파악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 소설로 단련된 나였다.
드라마 상상력을 뛰어넘을 만한 꼼수가 아니라면 이런 허접 수법이 통할 리 없었다.
기사는 불시 공격에 성공을 확신하는 눈치였다.
나름 방심을 노린 최고의 타이밍이었다.
어지간한 강철 방패는 단숨에 꿰뚫어 버릴 수 있는 마력이었다.
기사가 아니라 암살자로 컸어도 성공했을 것 같다.
하지만…….
들고 있는 방패로 재빠르게 기사의 검을 후려쳤다.
콰아아아앙!
“크아아아악!”
방패에 부딪치는 순간 기사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검이 튕겨져 나가 흙벽에 박혔다.
검을 잡고 있던 기사의 건틀렛에서 핏물이 묻어났다.
예상치 못한 방어에 당한 것이다.
“쯧쯧.”
혀를 찼다.
마력양과 장비빨에서 내가 훨씬 위라는 걸 아직 모르는 눈치였다.
휘이익.
몸을 날렸다.
그리고…….
뻐어엉!
“쿠에에엑!”
가볍게 기사 몸뚱이를 걷어찼다.
콰다당 흙바닥을 몇 바퀴 구른 기사는 결국 기절해 버렸다.
비겁하게 암습이 전문인 놈에게 자비는 사치였다.
“네, 네놈이…….”
다리를 덜덜 떨며 분노에 찬 루벡 남작은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흔들리는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놈의 충실한 기사가 눈앞에서 한 방에 쓰러졌다.
“네놈?”
말이 짧은 루벡을 똑바로 쳐다봤다.
“흐꾹 흐꾹…….”
루벡은 당황한 듯 딸국질을 시작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이 순간처럼 치욕적이고 앞이 캄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루벡 남작~.”
그의 이름을 친절하게(?) 불렀다.
“살려주시오! 베커 백작! 여, 영지를 침범한 대가는 내 후히 치르겠소!”
루벡 남작이 또 이럴 때 보니 멍청하지는 않았다.
“대가?”
관심이 있는 척 되물었다.
“그렇소! 나와 기사들의 몸값을 드리겠소이다.”
“돈은 충분히 있고?”
“영주성에 가면 충분히…….”
“그 건 내 돈이고~.”
“???”
“루벡! 잊었나? 당신은 이제 영주가 아니지~.”
“그게 무슨…….”
말 대신 루벡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포스에 눌려 루벡은 본인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으으으으.”
나의 싸늘하게 웃는 모습에 루벡은 깊은 신음을 흘렸다.
마치 미친놈을 마주하고 있는 듯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루벡은 이제야 제대로 나의 진면목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스윽.
검을 들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안 듯 루벡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래서 아까부터 물었잖아. 쫄리냐고?”
서늘한 웃음이 나의 입가를 스쳤다.
고개를 맹렬하게 주억거리는 루벡.
루벡의 영혼은 이미 육신을 버리고 튄 것 같았다.
“그럼 꿇어!!”
길게 말하지 않고 딱 한마디만 뱉었다.
대신 포스는 최고조로 유지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벡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