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8화 (317/1,284)

 # 318

회귀의 전설

318장. 첫눈이 주는 선물

“대충 사고 처리가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조 변호사님~.”

“장 대표는 사고만 치면 꼭 병원에 눕더라. 취미 생활이냐?”

“제가 보기보다 몸이 약해서 말입니다.”

“나한테는 구라 안 쳐도 된다.”

“구라라니요. 담당 주치의께서 절대안정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아주 멀쩡한 것 같다.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흐흐흐.”

조 변호사님이 음흉하게 웃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의 파트너인 조 변호사님은 역시 눈치를 대충 까고 있었다.

“그때 다쳤던 후유증입니다. 전치 16주는 거저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의사들이 돌팔이도 아니고 말입니다.”

“장 대표가 받았던 그 녀석도 같은 16주가 나왔어. 완전 중상자야. 갈비뼈 몇 개가 골절됐고 전신 타박상, 뇌출혈 초기 증상까지~”

“음주운전에 역주행은 중범죄입니다. 살아 있는 게 다행이죠.”

장광훈은 눈에 띄지도 않게 깔끔하게 손봐줬다.

미래의 해악을 미리 제거한 셈이다.

황연태 대표를 비롯해 씨큐릿 정보팀을 가동해 얻어 낸 정보에 의하면 놈은 악질이었다.

놈은 세컨드는 기본에 미성년자뿐만 아니라 유부녀, 연예인 킬러였다.

변태 기질도 다분했고 뇌물도 수시로 받았다.

사는 동안 사방에 민폐만 끼쳤다.

인생 막 살기로 작정한 놈을 그냥 놔둘 수 없었다.

반종오는 당분간 알아서 조심할 것이다.

미리 터진 스캔들에 대처하느라 놈들은 정신없이 분주했다.

반 씨 일가는 웬만해서는 이런 일에 타격받지 않았다.

2020년까지 살아남는 대단한 저력을 가진 일가였다.

정권과 찰떡 관계였기에 맛만 보였다.

눈치 빠른 놈들답게 신호를 알아챌 것이다.

손대균 이사를 통해 경고를 줄 생각이다.

괴롭혀 줄 방법은 널리고 널렸다.

매크로를 돌렸다.

2018년에나 떠들썩하게 소문이 나게 되는 불법 댓글 프로그램.

만드는 방법도 쉬웠고 슈퍼컴퓨터를 동원해 돌리자 여론 조장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블라드미르의 스파이 기술까지 합쳐지면서 잡을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악은 악으로 상대해야 결과가 확실한 법이었다.

악당들은 이미 감정이 죽은 자들이다.

사람이 아닌 짐승들에게 참회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놈들이 사용하는 방법과 같은 방법으로 돌려주는 게 맞았다.

로버트가 오프로드용으로 사용하라고 보내 준 F150이라는 미국 상남자 형님들이 이용하는 대형차로 들이 받았다.

놈의 퇴근길을 파악했다.

퇴근 후 집에 갈 때 역주행하는 습관까지 미리 알아뒀다.

정보원을 동원해 위치를 파악해 기다리고 있다가 그대로 밀었다.

F150은 국산 준대형차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 제한 속도로 받았지만 두 바퀴나 굴렀다.

통프레임 바디의 F150은 범퍼만 살짝 망가졌다.

놈은 고맙게도 음주운전 중이었다.

대한민국 법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따끔한 맛을 보여줬다.

동시에 놈의 생식기능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손봤다.

화타의 한의학 지식과 내공으로 못할 게 없었다.

몽둥이 함부로 휘두르고 사는 놈에게는 최고의 고통이 확실했다.

강제 내시가 됐지만 아직은 피부로 느끼지 못할 것이다.

교통사고 후유증이 풀릴 때쯤 절망할 장광훈을 생각하면 실소가 터졌다.

쌤통이었다.

“그러게 말이다. 장광훈이라는 피디 100프로 과실 나왔다. 빽이 좋았다만 장 대표도 무시 못 하잖아~”

“형사사건은 불처벌 탄원서 제출해 주시고 합의금 최대한 받아 내십시오.”

내시만으로도 충분한 복수가 됐다.

“있는 사람이 더한다더니…….”

“변호사님 겨울 휴가비로 쓰세요.”

“최선을 다하마!”

대형 로펌 이사님이 교통사고 처리를 맡았다.

상대도 뒷배경이 좋은 것을 감안해 로펌을 이용했다.

“법대로 사는 게 참 좋습니다~”

장광훈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보다 법대로 처리하는 이 방식이 짜릿하고 속시원했다.

피 질질 흘리며 살려달라고 구걸하던 놈.

이번 사건으로 카르마 포인트를 듬뿍 챙겼다.

내시를 만들었음에도 어둠의 카르마 포인트는 쌓이지 않았다.

“나도 밥 벌어먹고 사는 법이 좋다. 흐흐흐.”

“악플러들 본보기로 확실히 민사소송까지 진행해 주십시오. 판사들 구워삶아도 괜찮습니다. 최고의 고통을 선물 해 주십시오.”

“오케이~.”

FOB를 못살게 굴었던 찌질이들에게 복수를 멈추지 않았다.

앞으로 다시는 도발하지 못하도록 세상의 무서움을 각인시켜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병실 참 좋다~”

“어머니가 재단 이사장이시지 않습니까. 조 변호사님도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VIP병실은 가격 때문에 상당기간 비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중용대학교 대학병원 VIP병실에 입원해 있었다.

재단 이사장 아들에 대한 대우는 각별했다.

자격이 됨에도 누리지 못하면 바보다.

하지만 정당하게 내 돈으로 병실 사용료를 지불했다.

“그래 장 대표 덕분에 나도 VIP실 좀 써보자.”

30평이 넘는 병원 내 개인 공간은 널찍하고 쾌적했다.

샤워실에 간병인 침실까지 따로 구비돼 있었다.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인수, 합병팀을 가동할 생각입니다. 국내 법률 파트너로서 준비 철저히 해주십시오.”

“네네 고객님~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특허법원 판사부터 인수합병 전문가들 완벽하게 육성 대기 중입니다. 하명만 하시면 부족함 없이 서비스 해드리겠습니다. 왕 고객님~.”

조 변호사님 농담이 늘었다.

“어~ 눈이 오네?”

“그러네요…….”

창밖으로 올해 첫눈이 내렸다.

며칠 입원한 사이 12월이 되었고 그새 첫눈이 흩날렸다.

“장 대표는 이런 날 누구 만날 사람도 없어? 젊은 청춘이 그러면 못써~.”

“제 걱정 마시고 조 변호사님이나 일찍 들어가십시오. 사모님 요즘 갱년기라고 하셨잖습니까. 집에 가서 제가 선물한 와인이라도 마시고 설거지도 하십시오.”

“흐흐. 그리 안 해도 저녁 약속 잡아 놨다. 나 먼저 간다~.”

“들어가십시오.”

조 변호사님이 나가고 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교통사고 건수는 마무리 됐다.

며칠 동안 병원에서 쉬면서 일은 깔끔하게 처리했다.

그리고 첫눈 내리는 오늘 나도 만날 사람이 있었다.

전에 약속했던 그 날이 바로 오늘이다.

***

“눈이네…….”

공대 교양강좌 기말고사 시험을 끝내고 나오며 이예린은 첫눈을 봤다.

첫눈 치고는 눈발이 굵었다.

시험 시작 전에는 내리지 않았는데 그 사이 쌓일 만큼 내렸다.

바람이 차가웠다.

기말시험 기간에 들면서 학교는 올해의 마지막 활기를 띠었다.

한국대도 다른 학교와 다르지 않았다.

학기를 마무리하는 실망과 만족, 방학을 맞이하는 설렘이 바이러스처럼 퍼졌다.

“하아.”

이예린은 짧은 한숨을 토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쉼 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어릴 적 마음에 두었던 한국대 법학과에 입학했고 사랑도 했고 찌질한 이별도 경험했다.

어른이 되는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뼈저리게 맛봤다.

여자로서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다.

“꺄아~ 너 거기서 죽었어!”

“나 잡으면 저녁 쏜다!”

“으아아앙! 나쁜 놈아!”

한 커플이 어느새 쌓인 눈을 모아 눈싸움을 벌였다.

이예린은 전혀 경험하지 못한 풋풋한 대학생활이었다.

이예린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과거에도 앞으로도 경험하지 못할 청춘들의 모습이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나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판사의 길을 걷게 될 게 뻔했다.

적당히 선을 보고 괜찮은 집안과 결혼할 인생 스케줄이 정해졌다.

“부럽습니까?”

그때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

이예린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원망도 하고 미워도 했고 질투에 잠을 못 이루게 만들었던 그 소년.

아니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한때는 자신이 첫사랑이라 수줍게 고백해 왔던 남자.

하지만 지금은 세상에서 누구보다 먼 사이인 남자였다.

“부러울 것 하나 없습니다. 누구나 평범하게 사랑하고 또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 살아갑니다.”

남자가 옆에 섰다.

“태, 태산아.”

예린의 입에서 어렵게 한 이름이 뱉어졌다.

“한때 선배와 함께 저렇게 캠퍼스를 누비고 싶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선배는 제 첫사랑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첫사랑이었다고 말했지만 목소리는 전혀 떨리지 않고 담담했다.

“…….”

이예린은 감히 옆을 돌아보지 못했다.

첫눈이 내려서인지 오늘따라 감성이 예민해졌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울컥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남자.

이유가…….

“아!”

그때 이예린은 갑자기 과거의 약속 하나를 떠올렸다.

2년 전 수능이 끝나고 소년과 했던 맹세 같던 약속.

지구가 망하지 않는다면 소년이 대학교에 입학한 후 첫눈이 내리면 반드시 만나자고 했었다.

“전 약속 지켰습니다.”

태산이 이예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예린도 끌리듯 태산을 봤다.

남자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처음 버스에서 마주쳤던 그 눈동자 그대로였다.

호기심과 관심, 애틋함, 그리움까지 품고 있던 그 눈빛.

이예린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 당시 예린도 태산의 관심이 좋았다.

잘생긴 건 기본이고 호탕한 데다 불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언제나 주변에 많았고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태산이 웃었다.

“예린 선배…….”

그 날처럼 태산이 예린의 이름을 불러줬다.

따뜻하고 다정했다.

“응…….”

“선배는 아름답고 매력적입니다. 나 장태산의 첫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분입니다.”

“…….”

예린은 말을 더 할 수가 없었다.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다.

지난 1년 동안 학교에서 보였던 장태산의 태도와 달랐다.

꿈에서마저 그리워했던 고등학교 때 그 시절의 모습과 같았다.

“스스로를 사랑하십시오. 욕망이 아닌 인간 이예린을……. 더 불쌍하게 여기고 사랑하십시오. 누군가의 딸, 누구나의 친구나 선배, 후배가 아닌 인간 이예린을 들여다보십시오. 그럼 잊었던 보물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이예린을 걱정하는 태산의 마음이 올올히 전달됐다.

그를 미워했던 원망과 미움이 사르르 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그리고 찾아온 한없는 부끄러움.

태산이 차갑게 대할수록 독하게 마음먹었던 자신의 얼마 전까지의 짙은 그림자가 떠올랐다.

오늘 약속 또한 잊고 있었다.

이예린 기준에 헤어지고 난 뒤라면 뱉었던 과거 약속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장태산은 달랐다.

잊지 않고 그녀를 찾아왔다.

각자가 생각하던 약속의 무게가 달랐다.

“미안해……. 정말.”

이예린은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최소한 태산과의 사이에 오가던 감정을 정리하고 오동성을 만나야 했었다.

졸업식 날 아는 체라도 했다면 이렇게까지 가슴 아픈 상황은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무시하면 떨어져 나갈 줄 알았다.

오동성을 사귀면 세상 모든 걸 얻을 것 같은 착각도 있었다.

순진하고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머리가 맑아졌다.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행위가 이럴 것 같았다.

지금껏 묵직하게 가슴 한쪽을 차지했던 집착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통증이 사라졌다.

또로로록.

이예린의 눈동자에게 눈물이 흘렀다.

바라보는 태산의 눈에 아픔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아프지 마십시오. 살다보면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저도 똑같습니다. 이제……. 앞만 보고 나아가십시오. 다음 학기에는 만나서 커피 한잔할 수 있는 선후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응…… 그럴게…….”

스윽.

태산이 예린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제 우리 진짜 헤어진 겁니다.”

“그래……. 진짜 헤어진 거야.”

잊혀진 약속을 되찾아 지키고 헤어짐마저도 배려하는 따뜻한 남자.

“공부 열심히 하시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아픈 사람들 말에 귀 기울여주는 좋은 판사님 되십시오. 선배는 똑똑하고 마음이 따뜻해 훌륭한 법관이 될 겁니다.”

“응…….”

주문처럼 박히는 태산의 말에 이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헤어짐이 이렇게 가볍고 후련할지 몰랐다.

첫 만남처럼 헤어짐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가슴이 뛰고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는 말, 다 거짓말이었다.

마음이 비온 뒤 하늘처럼 맑게 개이며 후련해졌다.

“태산 씨~”

그리고 그 순간 명랑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하나.

“시은 선배.”

태산은 이예린을 뒤로 하고 돌아섰다.

첫눈과 함께 온 축복.

예린은 돌아서는 태산의 모습을 보며 외로울 때마다 읊던 좋아했던 시 구절 하나를 떠올렸다.

- 병든 사람은 베개를 놓아주는 손이 청결한 손인지 묻지 않고, 죽어가는 사람은 이마에 입맞춤하는 입술이 죄인의 것이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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