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
회귀의 전설
319장. 땅뺏기 (1)
“확실한 건가?”
나른한 목소리가 공간에 울렸다.
“병사들 말처럼 베르샤 백작성에서 마물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정보원으로 보냈던 놈이 직접 확인했습니다. 성은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합니다.”
“흐흐흐. 그래? 그렇단 말이지~”
부하 기사 알버트의 보고에 루벡 남작이 음흉한 웃음을 터트렸다.
올해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선 루벡 남작은 작은 키에 머리칼이 반쯤 벗겨진 대머리였다.
커다란 기름 덩어리 배가 덩실덩실 출렁거렸다.
그저 그런 남작이었지만 루벡은 보기보다 욕심이 많았다.
제국이 사라진 뒤 줄을 잘 잡았다.
험난한 시절에 영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 결과 금방 대영주인 아라돈 드 쥬넨 후작의 신임을 얻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강한 무력집단인 기사를 육성하기에는 영지가 너무 작았다.
작은 성 하나에 얼마 전 합병한 베르샤 백작령의 요새 하나가 전부였다.
걸어서 하루도 안 걸리는 크기였다.
영지에 특산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기사들 10여 명 유지하기도 벅찼다.
병사들 1000명보다 기사 하나 키우는 게 힘들었다.
기사는 거저 육성되지 않았다.
마력호흡법에 재능이 있어야 했으며 검술도 뛰어나야 했다.
뿐만 아니라 비싼 마력무구까지 필요했다.
“영주라는 놈만 실력자라고 합니다. 하급 정령 검사 같습니다. 나머지 부하들은 쓰레기 용병들만 모아 놨습니다. 전투 중에 게라드가 빼앗긴 물건도……. 바로 회수 가능합니다!”
영지 기사단장 알버트가 쉼 없이 보고했다.
치욕스럽게도 기사들이 포함된 기마병들이 알거지로 쫓겨 왔다.
영지 중요 전력의 3분의 1에 해당됐다.
성질 더러운 루벡 남작이 빡 돌았다.
거지꼴로 걸어온 병사들을 후려쳤다.
나머지 기마병들도 채찍형을 가했다.
그 와중에 낭보도 알려졌다.
마물에 의하여 점령되었던 베르샤 백작성에 인간들이 다시 거주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급하게 난민을 가장한 정보원들을 투입했다.
그리고 오늘 최종 정보가 전해졌다.
“가져와야지! 그리고 그 거짓 귀족 새끼를 갈가리 찢어 죽여야겠지~. 크크크.”
“주군. 그 가짜 영주놈이 드워프 물품을 취급하는 것 같습니다. 잘만 하면 엄청난 이득이 될 것입니다.”
벌써 소문은 서서히 멀리까지 퍼지고 있었다.
“그래서 칼몬 상단이 움직였던 거야?”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상인들과 모종의 계약을 체결한 것 같습니다.”
“좋아! 아주 좋아! 크하하하하하!”
그간의 시름을 털어내듯 만족한 웃음을 터트리는 루벡 남작.
“정벌군을 바로 편성해 놓겠습니다. 주군께서 명하시면 바로 정벌하겠습니다!”
“명한다. 건방진 그 가짜 영주놈을 정벌할 병사들을 준비하라!”
“명을 따르옵니다!”
루벡 남작의 명령에 알버트는 힘차게 답했다.
마물이 떠난 베르샤 백작령은 구미가 당기는 먹잇감이었다.
***
두두두 두두두두.
한 마리 말을 타고 평원을 빠르게 달렸다.
“이럇! 이럇!”
겨울에 접어든 계절의 하늘에는 새하얀 구름 몇 점이 떠갔다.
파라랏 거친 가죽 망토가 휘날렸다.
기분이 정말 죽였다.
폐부 깊숙이 맑은 공기를 담았다.
잔인할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어느새 늦가을과 겨울 초입 언저리를 지나는 마른 초원은 또 다른 매력으로 가득했다.
가까운 산과 구릉들은 잎을 떨군 마른 나무만 서 있어도 멋졌다.
미세먼지가 0.1퍼센트도 안 되는 공기는 청량함의 끝판왕이었다.
인공적인 조형물이 하나도 없는 평원은 그 자체가 힐링의 장소였다.
요즘 일이 잘 풀렸다.
최근 벌어졌던 상황은 웃다가 입이 돌아갈 지경이다.
지구에서도 묵은 체증을 날렸다.
첫눈의 약속은 잊지 않고 지켰다.
서로에게 마음이 좋지 않았던 예린 선배와의 묵은 감정을 털어냈다.
완벽한 이별을 맛봤다.
만남처럼 헤어짐에도 예의가 필요했다.
예린 선배와 헤어지고 시은 선배에게 취직자리를 던졌다.
4학년 졸업반인 시은 선배를 미국 슈퍼컴퓨터 본사에 배치했다.
나를 떠나기 싫어했지만 슈퍼컴퓨터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곧장 시은 선배는 떠났다.
FOB 사건도 사람들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대한민국 국민들 망각의 능력 하나는 끝내줬다.
차곡차곡 싸놓은 포인트를 이용해 가뿐하게 이계에 방문했다.
물론 나의 기말고사 시험도 무사 통과였다.
바쁘고 짜릿했던 2008년 한해가 저물어 갔다.
오는 김에 그릇과 시계를 더 챙겨 왔다.
오자마자 정령 무기들을 제작했다.
대한민국에는 내가 마음 놓고 사용할 대장간이 없었다.
정령들 모두 다 중급으로 진화했다.
애들이 쑥쑥 크는 보람은 사이다 맛이었다.
난 확실히 특혜를 받았다.
정령들이 알아서 무기를 선택했다.
바람돌이는 활에다 자신의 능력을 불어 넣었다.
정령들 모두 원하는 무기가 제 각각이었다.
바람의 정령왕 라딘의 축복을 받은 바람의 정령 마력 활.
화살을 날릴 때마다 추가 공격력이 붙었다.
축복 때문에 관통력이 대폭 상승 됐다.
이제 오크들 따위는 두려워할 존재가 못됐다.
물의 정령 인어도 중급 정령으로 성장했고, 창을 선물했다.
물의 정령왕 아이디네의 축복이 허락된 물의 정령 마력 창.
공격력 확장과 동시에 공격할 때 빙계 마법이 발현됐다.
이게 죽여주는 옵션이었다.
흙아저씨도 가만있지 않았다.
대지 정령왕의 능력이 가미된 마력 방패!
따로 도색하지 않아도 방패는 황금빛으로 은은히 빛났다.
뽀대가 끝장났다.
강철로 제작되었지만 대지의 정령왕 그라샤 축복으로 가죽 방패처럼 가벼웠다.
동시에 마력이 상승할 시 마법 방어력이 자동 상향되었다.
말도 안 되는 엄청난 무구들이 내 손에서 탄생했다.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무구들을 완성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정령 무구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다른 이들은 아무도 몰랐다.
철저하게 보완을 위해 내성 대장간을 폐쇄했다.
아공간에 착실히 무구들을 챙겨 넣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랑질 좀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탈만이 영지에 합류하는 난민들을 통해 정보를 전해왔다.
루벡 남작놈이 영지를 노리고 정벌군을 조직했다고 했다.
“개새끼!”
이를 갈았다.
아무리 내가 강해도 단체전에는 힘이 달렸다.
그래서 고심 끝에 선택했고 행동했다.
놀고 있는 영지의 잉여인력이 넘쳐나는 곳을 찾았다.
“!!!”
히이이이잉.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 말을 멈췄다.
저 멀리 보이는 작지만 단단한 요새가 보였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제법 큰 마을은 유럽의 여느 시골 마을 같았다.
그 너머로 펼쳐져 있는 드넓은 호수.
버려진 베르샤 백작가의 기사가 다스리고 있는 난민들의 요새가 한눈에 들어왔다.
***
“멈춰라!!!”
병사들 목청이 좋았다.
말을 멈췄다.
“누구냐?”
“지나가는 용병입니다~.”
“용병?”
가죽 갑옷에 간단한 무기만 말에 실었다.
“날도 저물어 가고 배도 고파 찾아왔습니다.”
말에서 내리며 정중하게 적의가 없음을 표했다.
병사들은 군기가 제대로였다.
호수가 구릉 위에 자리잡은 요새는 내성 정도 수준으로 작았다.
성벽은 높았지만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만히 볼 대상이 아니었다.
성벽은 이끼가 낄 정도로 낡아 보인 반면 성문은 튼튼했다.
성벽 위에 보이는 병사들도 눈에 힘이 빡 들어가 있었다.
갑옷은 낡았지만 손질이 잘 돼 있었다.
손에 든 병장기도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다.
터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넓었다.
한눈에 봐도 상당히 규모가 있는 마을이었다.
갑작스럽게 규모를 키운 듯 군데군데 어설픈 모양의 집들도 보였다.
돌과 나무로 얼기설기 얽은 5미터 높이의 외성방책으로 보호가 됐다.
그 방책 앞에서 용병 행세를 했다.
오크와 달리 머리를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남작가의 진짜 영지전이었다.
기사가 지휘하고 있다는 바닷가 마을이 꼭 필요했다.
부동산 많아서 실패한 부자는 없었다.
별장으로 사용하기에도 완벽했다.
마을 오른편에 바다 같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꿈에서나 그리던 이국적 풍경이었다.
태양빛에 일렁이는 맑은 호수는 보는 것만으로 개안이 됐다.
공기 중에 섞여 있는 싱싱한 물 냄새가 몸을 정화시켰다.
사진기만 있었다면 바로 작품 사진이 나올 풍경이었다.
“이곳에 뭘 먹을 게 있다고 찾아왔어?”
문 앞에서 털북숭이 아저씨가 쉽게 받아주지 않고 물고 늘어졌다.
병사들 수십 명이 성벽 주변과 방책 위에 몰려 있다 나를 바라봤다.
홀로 찾아온 용병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세상 공부하러 홀로 여행 중입니다.”
행색은 그저 그런 용병처럼 보였다.
말을 타고 있지만 어깨에는 활을 메고 허리에는 검, 말 등에는 창과 방패가 걸렸다.
“요즘 같은 세상에 겁이 없는 거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실력은 있고?”
털보 경비병이 내적으로 갈등하며 질문을 던졌다.
마을에 위험한 인물인지 파악하는 것 같았다.
“칼스. 그냥 들여보내. 시끄럽게 굴면 쫓아내면 되잖아~.”
“그래. 오랜만에 찾아 온 손님인데 저녁에 술 한잔하면서 세상 사는 이야기라도 듣자고.”
옆에 있던 경비병들이 털보 병사를 설득했다.
다들 인상이 좋아보였다.
“그렇다면야……. 어이. 용병.”
“네~”
“들어가. 저기 마을 중앙에 여관이 있으니까 거기서 묵어. 시끄럽게 하면 알지?”
말과 함께 칼스는 손에 든 창을 움켜잡았다.
“걱정도 팔잡니다. 조용히 밥 먹고 자고 갈 테니 신경 끄십시오.”
능청맞은 용병 말투를 남기고 방책 안으로 들어갔다.
멍! 멍머멍!
꼬끼오~ 꼬고고고고!
사방에서 개도 짖고 닭도 울었다.
바닥은 단단하게 굳은 진흙 바닥이었다.
집 곳곳마다 마른 생선들이 사이좋게 널려 있었다.
시골 어판장에서 자주 맡았던 비린내가 공기와 뒤섞였다.
입가에 푸근한 미소가 절로 맴돌았다.
이곳 마을에 정감이 옴팡 갔다.
나무판자와 흙, 구은 벽돌을 이용한 집들이 길 양쪽으로 옹기종기 모였다.
“우와와와와! 용병이다!”
“용병? 진짜???”
“용병 아저씨!!! 멋있어요!”
맨발의 아이들이 사방에서 메뚜기처럼 몰려왔다.
코 찔찔에 머리가 산발된 아이들은 전형적인 시골 아이들 모습이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얼굴에서는 호기심이 반짝였다.
구김살이 없는 표정은 동심 그대로였다.
“아저씨 어디서 왔어요?”
“정말 용병 맞아요? 엄마가 그러는데 용병들은 얼굴이 흉측하고 몸에 흉터도 많다는데 아저씨는 왜 없어요?”
꼬맹이들의 호기심은 지구나 여기나 다 똑같았다.
날 보고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는 아이들.
나는 말안장에서 스테인리스 찬합 하나를 꺼냈다.
“자~ 귀여운 꼬맹이들! 줄들 서라. 아저씨가 사탕 하나씩 주마.”
“사탕? 그게 뭐예요?”
“사탕이 뭐지?”
변방 시골 애들은 사탕 맛을 몰랐다.
귀한 설탕을 주재료로 하는 사탕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지구에서 심심풀이로 유기농 사탕을 담아왔다.
“하나씩 입에 이렇게 물어봐.”
사탕 하나를 입에 넣으며 시범을 보였다.
그리고 애들에게 하나씩 손에 쥐어줬다.
“엉!”
“와아!”
사탕을 입에 넣는 순간 아이들의 표정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강한 단맛을 모르는 아이들에게는 신이 주신 천상의 맛처럼 느껴질 것이다.
“마, 맛있다!”
“달아! 우아아아아아아!”
얼굴 가득 행복함을 담는 아이들의 모습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일 단계 작전이 성공했다.
애들부터 포섭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동네에 나에 대한 좋은 소문이 쫙 퍼질 것이다.
성공적으로 마을에 입성했다.
- 사탕 맛에 중독된 영지 꼬맹이들의 충성도가……. 100이 되었습니다.
- 마나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귓가에 울리는 달달한 알림음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