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하여간 귀엽기는 (93/148)


#93화 하여간 귀엽기는
2023.07.02.


르네브는 간단히 저녁을 먹은 뒤 앰버, 키어넨과 담소를 나눴다.

“갑자기 후작님께서 세이렌 후작 저의 독주를 전부 가져와라! 하시지 않겠어요?”

앰버가 과장을 섞어 세이렌 후작령에서의 일을 이야기했고, 키어넨은 적절한 호응을 하며 경청했다.

“어머나, 세상에……!”

“패트릭 도련님은 또 어땠는데요. 동생과 혼인을 하고 싶거든 나와 검을 맞대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앰버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 위협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키어넨이 숨을 헉, 들이켰다.

“정말요?”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 보니 어느새 창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이제 씻고 잠자리에 들어야겠네요.”

르네브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앰버도 벌떡 일어났다.

“오늘은 제가 아가씨의 시중을 들게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난 키어넨이 테이블 위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러시겠어요? 그럼 저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레이디의 목욕 준비를 해 둘게요.”

역할 분담의 합의점을 찾은 앰버와 키어넨이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언제부터 둘 사이가 이렇게 돈독해졌지?’

르네브는 고개를 갸웃하며 트왈렛 룸으로 향했다. 앰버가 곧장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트왈렛 룸에 도착한 르네브는 콘솔 앞에 앉아 차고 있던 장신구들을 풀어 앰버에게 건넸다.

앰버가 오늘 르네브가 사용한 목걸이와 귀걸이, 팔찌를 야무지게 장신구 함에 넣었다.

르네브는 옷을 갈아입으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복도 쪽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울렸다. 자연히 르네브와 앰버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밖에 무슨 일 있는 걸까요?”

앰버의 물음에 잠시 눈을 깜빡이던 르네브가 문 쪽으로 몸을 틀었을 때, 키어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디! 황제 폐하께서 찾아오셨어요!”

“곧 갈 테니, 응접실로 안내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레이디.”

문 너머에서 쿵쿵거리는 힘찬 발소리가 멀어졌다.

“황제 폐하께서는 정말이지 타이밍을 잘 맞추시네요.”

앰버의 말에 르네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늦게 방문했다면 르네브는 이미 욕조 안에 있었을 테니.

“제가 정리해 둘게요. 다녀오세요.”

장신구 함을 차곡차곡 쌓아 품에 안은 앰버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부탁할게.”

“네, 아가씨.”

르네브는 곧장 이카르가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거란 르네브의 예상과 달리 이카르는 응접실과 트왈렛 룸이 이어지는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래서 하마터면 이카르의 넓은 등에 코를 부딪칠 뻔했다.

“폐하…….”

왜 서서 기다리고 있는 거냐고 물으려던 차에 이카르가 몸을 빙글 돌렸다.

“왔군.”

성큼 르네브 쪽으로 다가온 이카르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이 서로의 몸이 꽉 맞물렸다.

“……!”

격한 이카르의 반응에 르네브는 잠시 눈만 깜빡이다, 상체를 살짝 뒤로 물렸다.

르네브는 슬쩍 시선을 들어 이카르와 눈을 맞췄다.

그녀의 얼굴로 진득하게 달라붙는 이카르의 시선이 뜨거웠다. 금세 르네브의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르네브는 복도 쪽을 힐끔거렸다.

앰버나 키어넨이 차를 가져오다 이 모습을 보게 된다면 민망할 것 같았다.

“영애, 어딜 보는 거지? 나에게 집중하지 않고.”

르네브가 잠시나마 다른 곳에 정신을 판 것이 대단히 못마땅했는지 이카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런 표정과 목소리와 달리 그의 붉은 눈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케 했다.

르네브는 할 수 없이 딴생각을 그만두고 이카르에게 얌전히 입술을 내어 줘야만 했다.

“저기 폐, 폐하…….”

거친 입맞춤에 숨이 가빠 왔다. 르네브는 이카르의 단단한 가슴팍을 탁탁 두드렸다.

“코로, 숨, 내쉬어.”

잠깐이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쉼표마다 이카르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

그렇게 한참이나 욕심껏 취한 뒤에야 이카르는 르네브를 놓아주었다.

물론 놓아주었다는 표현은 맞지 않았다. 지금도 르네브는 이카르에게 반쯤 끌어안긴 자세였으니까.

혹여나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대비해 응접실 문을 닫아 두기는 했지만, 불안했다.

르네브는 간간이 문 쪽을 힐끔거렸다.

키어넨과 앰버, 두 사람 다 르네브의 허락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리가 없다.

그 사실을 잘 아는데도 자꾸만 문 쪽으로 시선이 갔다.

“흠…… 영애는 나와 함께 있는 게 지루한 모양이군.”

르네브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장난을 치던 이카르가 돌연 동작을 멈추고 낮게 읊조렸다.

“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이카르의 말에 르네브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카르와 함께 있는데 지루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늘 바쁜 이카르 때문에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서 아쉬워했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와 함께 있는 게 지루하다니요. 전혀 아니에요!”

르네브는 고개를 저으며 격하게 부정했다. 그런데도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이카르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폐하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정말 좋아요.”

“그게, 정말인가?”

“그럼요! 물론이죠.”

르네브는 조금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제야 고집스럽게 꽉 다물려 있던 이카르의 잇새로 푸스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지……?’

웃음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르네브는 미간을 모았다.

조금 전까지는 제 사랑을 의심하는 것 같더니만, 지금은 기분 좋은 듯이 웃는 이카르의 심리를 통 알 수가 없었다.

“자꾸만 문 쪽을 힐끔거리기에 나와 함께 있는 게 싫은 줄 알았거든.”

“아…….”

르네브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었구나.’

안심이 되는 동시에 약간의 화가 올라왔다.

“저, 폐하. 그러잖아도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 이카르가 르네브의 은발 몇 올을 손가락에 돌돌 휘감았다.

“음…….”

그 모습을 힐끗 내려다보며 르네브는 말을 골랐다. 조금 전처럼 괜히 이카르에게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도 폐하와 닿는 건 좋아요…….”

이카르의 붉은 눈이 맛 좋은 생고기를 찾은 육식 동물처럼 르네브의 입술을 좇았다.

“지금 나를 유혹하는 건가?”

이카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간 순간 르네브는 불안감을 느끼고 흠칫 어깨를 떨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대성공이야.”

이카르의 얼굴이 사선으로 기울었다.

다시 입을 맞추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르네브는 빠르게 두 손으로 이카르의 입술을 막았다.

방해받은 게 여간 불쾌했는지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비죽 솟았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어서 손 치워.’

이카르가 눈짓을 해 보였다. 그의 눈빛이 위험해 보였기에 조금 두려웠지만, 르네브는 굴하지 않고 말했다.

“앰버와 키어넨이 차를 가지고 올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때였다.

“……!”

르네브의 손가락에 축축하고 말캉한 것이 닿았다. 르네브는 흠칫 놀라며 이카르의 입에서 손을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이카르가 좀 더 빠르게 르네브의 손목을 붙잡았다.

“두 사람이 응접실로 들어올까 봐 불안했다, 이런 뜻이로군?”

르네브는 붙잡힌 손목을 빼내려 했지만, 이카르는 놓아주지 않고 낮게 쿡쿡 웃으며 말했다.

뜨거운 숨결이 여린 손바닥을 간질이는 느낌이 이상했다.

“그, 그래요.”

“괜한 걱정은 그만둬. 차는 됐으니, 응접실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말라고 미리 말해 두었거든.”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마음을 졸였다니…….

허망하게 뻐끔거리는 르네브의 입술에 이카르가 자잘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하여간 귀엽기는.”

“폐하, 아, 아파요.”

르네브는 어깨를 움츠리며 호소했다. 줄곧 문지르고 비벼진 입술이 쓰렸다.

그제야 이카르가 입술을 떨어뜨리고는 르네브를 빤히 바라봤다.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보는 듯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눈빛은 르네브의 명치를 간질거리게 했다.

‘언젠가는 익숙해지겠지?’

차고 넘칠 만큼의 사랑을 받는 이런 감정이 르네브에겐 너무 낯설었다.

그래서 르네브는 조금 뚝딱거리다가 물었다.

“그, 그런데 폐하, 요즘 많이 바쁘신가요?”

세이렌 후작령에 다녀오는 동안 일이 많이 쌓여서 그런가?

며칠 보지 못한 사이 이카르의 얼굴이 조금 야윈 것 같았다.

잘생긴 얼굴에 피폐미까지 더해진 그의 모습에 심장이 쿵쾅거리면서도 안쓰러웠다.

르네브는 이카르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이카르의 붉은 눈이 르네브의 손을 향해 살짝 내려가는가 싶더니, 또다시 손바닥에 말캉거리는 감촉이 닿았다.

간질거리면서도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르네브는 이카르의 뺨에서 얼른 손을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이카르는 여전히 르네브의 손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조금. 며칠 안으로 그간 쌓여 있던 업무도 마무리 짓게 될 거야.”

이카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세이렌 부자의 완고한 고집으로 예정보다 바슈케르 복귀에 시일이 걸린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르네브는 그게 미안했다. 제 가족들로 인해 이카르의 업무가 밀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내가 도울 만한 일이 있는지 한번 물어볼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 르네브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회귀 전의 루시우스와 이카르는 달랐다. 그는 르네브를 쓸모 있다는 이유로 곁에 두는 게 아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이카르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되물었다.

“우리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얼굴을 볼 수 있는 그런, 사이였던가?”

“그건…… 아니죠.”

르네브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의논하고 싶은 문제가 있기는 했지. 우리 결혼 말이야, 결혼식은 영애가 파라디움으로 돌아가기로 한 날짜 이후가 좋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는 듯 이카르가 물었다.

제국 황제의 혼사이니만큼, 결혼 전까지 준비해야 할 것들이 아주 많았다.

‘조금 촉박할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무리는 아니었다.

르네브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이카르가 빠르게 덧붙였다.

“당장 내일이라도 혼인을 서두르고 싶지만,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해 꾹 참았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르네브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할 것 같아요.”

“결혼 준비는 벤터펠트 공작 부인의 도움을 받도록 해. 필요하다면 영애가 원하는 인력으로 충원을 해도 되고.”

이 부분은 르네브와 이카르의 의견이 일치했다.

르네브에겐 결혼식 준비를 도울 어머니가 없었고, 그 역할을 대신할 인물로 벤더펠트 공작 부인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폐하, 가능한 결혼식 전까지 저희의 결혼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함구했으면 해요.”

르네브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잘생긴 이카르의 미간이 대번에 구겨졌다.

‘……기분 나쁜가?’

르네브는 슬쩍 이카르의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달싹이다 이유를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이해한다는 듯 이카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이렌 부자의 입장 때문인가 보군.”

16882969719395.jpg

 


1